일 마친 사람의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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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8-22 16:27 조회3,593회 댓글0건본문
참수행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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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마친 사람의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
대저 참선이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집안을 반조(返照)해 보아, 자기 집의 주인공이 바깥 사물에 잡스럽게 썩이지 아니하며, 생사에 오고가지 않으며, 홀로 아득하며, 밝고 명백하며 지극히 평온하며 얽매여 있지도 않으며 벗어날 것도 없으며 번뇌랄 것도 없으며 열반이라고 할 것도 없음을 명백히 아는 것일 뿐이다.
하루 종일 옷을 입고 있어도 일찍이 한 올의 실도 걸친 적이 없으며 하루종일 밥을 먹었어도 한 톨의 쌀도 씹은 적이 없다. 재앙․복, 태어남․죽음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 참 자아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아무 할 일이 없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저 일을 마친 사람은 때로는 부처․중생, 하늘․땅을 하나의 티끌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또한 그 작용을 나툼에 때로는 각기 제자리에 머물게 하며, 때로는 그 자리를 바꾸어 버리기도 하여, 그 작용을 나툼에 있어 모든 것이 자유자재 한다. 이것을 불가사의한 위대한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한, 자유자재한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벗어나야 할 생사도 없으며, 증득해야 할 해탈도 없다. 모든 것을 참 자아에 내맡기고 당당하며 인연을 따름에 막히는 것이 없으니, 이 모든 것이 바로 진실하고 광명한 한 조각 본래면목이로다.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쾌활하며 닥치는 인연을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적절히 나툼이 밝고 신묘하다. 생사를 오고 감이 마치 문을 열고 드나드는 것과 비슷하며, 천당과 부처님 세계를 자기 뜻대로 오고 간다. 다시는 꿈과 같이 헛된 몸과 마음의 괴로움으로 구속당할 일이 없으니 이것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지,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선을 다가서기 힘든 요상한 물건으로 알아서 아주 타고난 특수한 사람들만 닦는 그런 물건으로 안다. 그러나 참선이란 것이 본래 무엇이던가? 참선이란 내 안에 있는 참 자아를 투철히 보기 위한 실천수행일 뿐이다. 하늘을 날고 물위를 건너는 초능력을 부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 위대한 보물은 이미 우리 자신 속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해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않으며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는다. 참선이란 이러한 우리 안의 보물을 되찾는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방법도 아주 쉽다. 우리는 평소에 이 보물을 인식하면서 사는가? 물론 대다수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씀을 평소와 반대로 하면 그 보물을 발견하지 않겠는가? 이제까지 우리가 취하는 방식으로는 이 보물을 찾을 수 없으니, 우리의 인식작용에 변화를 줘 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 의식에 떠오른 대상들만 따라다니면서 산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며, 평생을 이렇게 산다. 다음 생에도 이렇게 살 것이다. 오감에 떠오른 대상, 감정에 떠오른 대상, 생각에 떠오른 대상, 이러한 수많은 대상으로부터 조금도 자유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번뇌 망상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윤회를 돌리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이젠 반대로 해보자.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위안하지 말라. 저들도 모두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또 그 길도 비좁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이다.
남들이 잘 걷지 않는 길, 나 자신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런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보자.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와 반대로 하라! 오감․감정․생각을 무시하라. 그들이 보장하는 쾌락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오직 영원하고 불변한 우리 안의 참자아 자리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여보라.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듣지 마라. 이 놀라운 일이 그대에게 일어날 것이니 말이다.
다른 곳이 아니다. 참자아 즉, 나는 오직 나에게서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오감․감정․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고요하고 또랑또랑한 의식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구가 익어지고 투철해지면 그대는 문득 그대 집안의 참 주인인 참 자아,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대는 비로소 찾는 이가 바로 찾던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것의 뿌리를 확인하고 나면, 그대는 하루종일 지루하지 않게 된다. 괴롭지도 않으며, 태어나고 죽음도 걱정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참 존재는 지루함․지루하지 않음, 태어남․죽음 등의 모든 이원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 줄 투철히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중심이 확실히 잡혀 있는 사람은 그 변화 또한 자유롭다. 맑은 물에는 먼 산도 훤히 비치듯이, 그에게는 오고가는 모든 인연이 밝게 보인다. 인연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자유롭게 대처하여 막히는 법이 없다. 일 마친 사람이 이토록 안락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참자아대로 살기 때문이다.
- (마음챙김의 지혜 100) 가운데, 경허선사 경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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