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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장엄했던 그 해 초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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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4-28 15:48 조회3,3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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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했던 그 해 초파일

김경일_동국대불교문화대학원 불교상담학과 교수

 

운제산은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명산으로서 불교의 성지이다. 오어사를 비롯하여 신라 때 창건된 많은 사찰들을 품에 안고 있으며, 운제산에서 서쪽으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경주의 보문단지가 나오고 더 내려가면 분황사, 황룡사 옛터로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인 포스코를 산자락에 앉히고 영일만 바다 속으로 깊이 뿌리를 뻗은 산이다.

오어사(吾魚寺)의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이다. 혜공스님이 원효스님과 농담을 하면서 “네 똥이 내 고기로구나.” 라고 한데서 오어사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어사는 혜공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원효스님이 서라벌에서 가끔씩 이곳에 와서 혜공스님에게 불법을 배우고 함께 토론도 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어사 뒤편으로 20여분 정도 산을 오르면 절벽 위에 날아갈 듯이 앉아 있는 자장암이 있다. 이곳은 관음기도처로서 자장율사가 수도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산위에서 내려다 보면 멀리 동해가 보이고 서라벌 구석구석을 보듬고 흘러드는 형산강도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유사 권 4에는 원효의 스승으로 알려진 혜공에 관한 일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날품팔이 집 노파의 아들로 태어난 혜공은 어려서부터 신령스런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자라서 드디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이후 그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술에 취하거나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다녀서 부궤화상(負和尙)으로 불리었다. 가끔은 오어사 절 마당에 있는 우물 속에 들어가서 몇 달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노년에는 원효가 여러 불경의 해설서를 지으면서 자주 혜공을 찾아와 의심나는 것도 묻고 서로 토론하였다. 그는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스스로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僧肇)가 환생한 것으로 자부하였다. 원효 성사가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무애한 삶을 살았던 것은 어쩌면 스승 혜공의 영향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어사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운제산 계곡에는 절골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 있다. 절골은 신라 때 큰 사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이곳에 작은 오두막 한 채를 구했다. 도심과 크게 멀지 않으면서도 깊은 산속의 고요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봄이 시작되면 초저녁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가을에는 불타는 단풍이 눈앞에 이글거린다. 그리고 절골 가장 안쪽 계곡에는 낡았지만 작은 암자가 하나 있어서 더욱 정이 가는 곳이었다. 오두막으로 들어오던 날, 짐을 정리하고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암자이다. 암자 앞으로는 티없이 맑은 물이 흐르고 법당 주변에는 왕대가 촘촘히 자라고 있었는데 마당의 폭은 불과 3미티 정도로 좁았다. 법당과 이어져서 요사채가 하나 있는데 스님의 방과 객실 그리고 공양간이 붙어 있다. 법당은 단청도 없고 문짝은 이가 맞지 않아 약간 틀어져 있어서 문을 열 때마다 삐끄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법당 안은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상단에는 하얀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었다. 신도가 아니면 으스스한 분위기를 느낄 정도였다.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리고 잠시 법당을 둘러본 후에 밖으로 나왔다. 그 때, 허리가 구부정하고 손에는 빗자루를 든 노스님 한 분이 마당 저쪽에서 나를 보고는 다가오셨다. 나는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스님은 인사는 받지 않으시고 다짜고짜로 “돈 났니껴?”(부처님 전에 돈을 놓았습니까?) 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잠시 할 말을 잊고 스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처님께 참배하고 나오는 사람에게 첫 마디가 돈을 놓았느냐고 하시니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는가? 짧은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먹함을 느꼈던지 스님은 “여기는 돈 놓는 곳이 아닙니다.” 하시면서 절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가신다.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입구 쪽에서 스님은 돌아서더니 공양간으로 보이는 방을 가리키며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나는 공양은 먹을 시간이 아니어서 사양하며 걸어 나오는데 또 불러 세우신다. 그리고는 방에서 과자 봉지를 하나 꺼내서 가져가라고 하신다. “여기 오는 사람은 다 가져가야 합니다.” 얼떨결에 아이처럼 과자 봉지를 손에 들고는 암자를 나섰다. ‘돈은 놓지 못한다. 그러나 과자는 무조건 가져가야 한다.’ 참 이상한 절이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도 절에 가면 스님은 법당까지 따라 오셔서 문을 열고는 돈을 놓는지를 지켜보고 서 계신다. 과자 값이라도 놓을 기회를 주지 않으신다. 딸기를 가져가도 법당에서 나오면 손에 들려 돌려보내신다. 어떤 공양물도 부처님 전에 올리고 난 후에는 모두 손에 쥐어 돌려보내신다. 스님이 안 계실 때 올렸던 공양물까지 한 참 뒤에 돌려받은 적도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초파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저녁 무렵 절에 가게 되었다. 그날따라 스님의 표정은 매우 밝았고 여느 때와 다르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도 받으셨다. 물론 말은 없으셨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네 할머니들과 젊은 신도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청소도 하고 공양거리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님은 초파일날 켤 등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무를 연결해서 줄을 매고 작은 전구가 달린 전깃줄을 설치하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평소에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으시고,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으며, 또 차량 두 대가 비키기도 어려운 산속의 작은 암자인데 사람이 오면 얼마나 온다고 준비를 저렇게 많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파일 날 오전은 평소 다니던 절에 가서 법요식에 참석하고 오후 늦게 절골로 향했다. 저녁은 절골 암자에 있다가 오두막에서 지낼 요량이었다. 절골로 접어드는 산 입구에 이르자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고 경찰관이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무전기를 들고 수 십대의 차량을 한꺼번에 들여보내고 한꺼번에 내보내는 것이다. 2킬로미터 정도 되는 산속 길에 차량이 가득차 버린 것이다. 평소에는 한적한 산속 길이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 온 것일까?

절 마당에 들어서니 완전히 잔칫집이다. 평소에는 으스스 할 정도로 한적했던 암자에 사람이 넘쳐난다. 좁은 계곡을 따라 등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등을 접수하는 곳에는 젊은 여신도가 두 사람 앉아 있다. 등은 한 종류로 주름등 밖에 없었고 옆에는 시주함이 놓여 있다. 돈은 자기 마음대로 시주함에 넣고 등표는 등을 다는 사람이 직접 쓰면 된다. 간혹 노보살님이 오시면 대신 써 주신다. 지금까지 시주를 하고 싶어도 스님이 막아서 못한 사람들은 초파일 하루만은 마음대로 한다. 그날은 스님이 막지 않는다. 보는 사람도 확인하는 사람도 없다. 시골 할머니들은 천 원 한 장을 넣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툼한 봉투를 준비해 와서 넣기도 한다. 평소 때는 어떠한 시주물도 사양하시지만 초파일은 무엇을 해도 그냥 두신다.

저녁이 되자 신도들은 대부분 돌아가고 수천 개의 등이 불빛을 낸다. 마치 도인의 몸에서 방광(放光)이 일어나듯 불빛은 작은 암자를 감싸고 하늘높이 솟아오른다. 적막하던 산속 암자가 초파일날은 성스럽고 장엄한 모습으로 변한다.

스님은 초파일이 지나면 또 나누어 주신다. 초파일 하루 시주받은 것으로 일 년 동안의 절 살림을 꾸리시는 것 같다. 예전처럼 오는 사람들을 덤덤하게 바라볼 뿐 반기는 기색은 별로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저 점심을 먹으라하고, 과자 봉지 하나 들려서 보내는 것이 전부이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 허리는 굽고 얼굴도 볼품이 없는 초라한 노스님에게 초파일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30대 초반에 암자를 손수 지으시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면서 남의 수발을 받지 않으셨고, 상좌도 두지 않았으며, 날마다 일하며 지냈다는 것만 기억될 뿐이다. 스님은 작년에 열반에 드셨고, 신도들은 암자 입구에 부도를 하나 세웠다.

「慧禪堂 元亨福 大宗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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