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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쉬고 쉬고 또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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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11-15 12:41 조회3,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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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쉬고 또 쉬고

 

이미현_출판인

 

 

 봄에는 꽃들이 피고 가을에는 달빛이 밝다. 여름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린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세상의 좋은 시절이라네.春有百花秋有月夏有凉風冬有雪若無閑事掛心頭便是人間好時節- 조주선사 오도송성성적적 惺惺寂寂올 초부터 새로 들인 습관이 있다. 점심식사 후에 한번씩 사무실에서 가까운 동네 야산까지 걷는 일이다. 사무실 후배와 함께 할 때도 있지만 조용히 홀로 걷는 걸 더 즐기는 편이다. 이 산책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홀로, 천천히, 자유롭게’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보석같은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두세 번만 산책을 다녀와도 몸속이 맑은공기로 정화된 듯 개운하고 마음도 한결 맑아진 느낌이다. 며칠전 서울엔 거센 바람과 함께 밤새 겨울비가 내렸다. 다음날 산을 오르면서 보니 쨍한 겨울 하늘이 마치 수행자의 마음자리마냥 투명하다.

약수터에서 산을 내려오는 길모퉁이에 키작은 장미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가늘고 여린 몸피를 지녀 매번 볼 때마다 안쓰러웠는데 신기하게도 이번 비바람을 겪으면서 작고 노란 꽃 한송이를 피워냈다. 얼마나 놀랍고 대견한지……. 다른 아이들이 앞다투어 화려한 꽃을 피워내던 찬란한 가을엔 내내 움츠리고 있더니 이렇게 자기만의 꽃피우는 시간이 따로 있었나보다. 그런 것이다. 아무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아도 모든 생명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 가까운 언니가 암으로 오래 투병중이다. 말기암에 다른 곳으로 전이까지 되어 병원으로부터 길어야 반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오늘까지 하루하루 감사와 기쁨의 날을 살아가고 있는 언니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 숨쉬고 있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것인지 새삼스럽다.

지난 해 봄 언니와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유난히 흙과 나무, 풀꽃을 좋아하는 언니인지라 목적지도 어느 작은 목장이었다. 함께 밭에서 쑥이랑 씀바귀를 캐느라 바삐 손을 움직이던 중 문득 옆을 돌아보니 언니가 큰 돌들 사이에 끼어 줄기가 휘어진 노란 민들레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워낙 천성도 따스하지만 병을 겪고 난 후 더욱 사랑과 자비심이 커져 풀 하나, 벌레 한마리에서도 귀한 생명을 느끼고 보살핀다. 더구나 그 대상이 사람임에랴.

이른 결혼과 함께 평생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바삐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지 마침내 큰병까지 얻게 된 언니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가까운 이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있으니 “열심히 살되, 쉬면서 일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라.”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기계라도 장시간 돌리면 고장이 난다. 기계를 돌리려면 가끔 기름도 쳐주고 쉼을 주어야 오래 사용할 수 있듯 몸도 가끔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몸은 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질병을 막는 면역 세포들은 몸이 가끔 쉬어줘야만 재충전 할 수 있다.쉼 중에서 가장 필요하고 확실한 쉼은 잠을 자는 일이라고 한다. 오랜 습관으로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종종 앉아 있는 편인데 언젠가 밤에 언니에게 짧은 안부메일을 보냈다가 다음날 눈물 쏙 빠지게 걱정을 들었다.

늦은 그 시각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일이든 책읽기든 늦은 밤시간엔 모두 멈추고 꼭 수면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우나 주위 환우들의 경우를 봤을 때 과도한 일에 따른 스트레스와 충분치 않은 수면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인 만큼 절대 무리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쉬어가며 일하라고 누누이 당부한다. 물론 수행자들의 경우엔 폭풍노도와 같은 정진의 시기에 몸을 조복받는 인내심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강한 의지와 인내가 우리의 건강을 좀먹을 수 있다. 의지가 강하면 피로를 느끼지 않지만 피로한 것과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쉼 없는 삶에서 피로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단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은 피로를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적당한 쉼은 필요하다. “극단의 고행은 피하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처럼 공부의 바탕이 되는 몸을 잘 조율하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쉼은 숨돌림이며 회복이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휴식은 낭비가 아니라 재창조의 동력이 된다. 수행자들이 동안거, 하안거 결제를 마치고 맞는 해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단순한 쉼이 아니라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시간이다.

어떤 일이든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쉼’ 즉 휴식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임을 지나고 보면 알 수 있다. 주위를 보면 공부도 잘 노는 사람의 몫이듯 휴식의 시간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 일하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을 잘 관리하기 때문에 성과가 배가 된다.

누구나 인생에 할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데 할일이 있다는 것을 뒤집어서 보면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은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일을 단순 노동으로 삼느냐, 창의적인 일로 만드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에서 도망이라도 치듯이 서둘러서 해치운다.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어야 제대로 그 음식의 참맛을 알 수 있듯이 일도 음미하면서 하면 그 일이 한층 즐겁다.

옛날 어느 지주가 가을 추수를 위해 일꾼 여러 명을 벼베기 작업에 붙였다. 그런데 다른 일꾼들과 달리 한 사람은 시간마다 쉬면서 벼를 베었다. 날이 저물어 작업한 볏단을 보니 쉬지 않고 일한 사람보다 쉬면서 일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양을 했다. 그 비결을 물어 보았더니 답은 이랬다. “저는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쉼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쉼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뿐더러 비정상적이다. 아무리 붙잡고 애를 써도 쉬지 않고 등짐을 진 채로는 살 수 없다. 거문고 줄을 늘 팽팽한 상태로 조여 놓으면 마침내는 늘어져서 제 소리를 잃게 되는 이치와 같다.

늘 우리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 무여 큰스님께서 평소 가장 힘주어 일러주시는 부분도 바로‘쉼’에 대해서이다. 저서 <쉬고, 쉬고 또 쉬고>에서 고구정녕 말씀하신다. “참선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되 철저히 비우고, 쉬어도 무섭게 쉬고, 놓아도 대단하게 놓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쉬고 또 쉬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이제 나의 행복한 산행길에선 겨울산을 만나게 될 터이다. 겨울산이 그냥 찬바람 속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듯, 하얀 눈 위에 고개 내민 초록 대나무도 아름다운 봄을 위해 필요한 쉼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듯 우리도 잠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쉼의 미학을 즐겨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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