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재, 자기를 바꾸는 조용한 혁명이 되어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8-22 16:32 조회3,546회 댓글0건본문
기획특집․2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예수재, 자기를 바꾸는 조용한 혁명이 되어야
김재일_사단법인 보리방송모니터회 대표. 조계종 환경위원
필자가 불교계에서 방송모니터 운동을 한 지가 어언 20년이나 되었다. 여러 해 전, 한 불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 방송에서 리포터가 예수재(豫修齋)를 극락 가는 티켓을 파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는 전화였다. 같은 날 다른 방송에서도 예수재를 미신이라는 투로 방송했다는 불만전화가 걸려와서 방송사에 항의공문을 보내서 예수재의 참뜻을 알려주고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한 적이 있다.
예수재를 생전(生前) 예수재라고도 하는데, 사전적인 풀이로 말하자면, 내세의 삶을 위해 죽기 전에 미리 공덕을 닦아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재의 사상은 연기론과 윤회설에 있다. 죽으면 거기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생은 전생의 업보이며, 내세는 금생의 업보로 나타나는 것이니, 내세의 행복을 위해 살아있을 때 미리 닦아놓자는 것이다.
재(齋)는 제사를 의미하는 제(祭)와 달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수행(修行)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재는 의례화된 수행 방편을 가리킨다. 사십구재, 천도재, 수륙재 등은 죽은 자가 금생에서 미처 못 다한 수행을 산 자들이 대신해서 극락왕생토록 해주는 재이다. 그에 반해, 예수재는 산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금생에서 지내는 아름다운 수행의례이다.
불교가 세계의 여러 다양한 종교와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타율(他律)이 아니라 자율(自律)의 종교라는 점이다. 즉, 어떤 위대한 타자에 의해서 내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내세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금생에 참회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지계와 보시로써 수행공덕을 쌓아야만 지향하는 내세로 갈 수 있다. 이것이 예수재의 참뜻이다.
그러한 참뜻이 문화양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재이다. 예수재의 기원은 멀리 당나라 때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십이생상속(十二生相屬)에 관한 것을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한다. 고려 때 우리나라로 들어와 꽃을 피웠으나, 이미 명부(冥府)의 시왕사상과 결합하여 중국화 된 예수재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타력신앙으로 변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는 4년 마다 윤달이 돌아오는 윤년이다. 옛 사람들은 윤달을 덤으로 주는 시간으로 여겨서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없는 달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사, 산소 이장, 혼례, 수의(囚衣) 재봉 등을 했다. 사는 일이 버거워서 미처 공덕을 쌓지 못한 이들을 위해 절에서는 윤달에 예수재를 봉행해왔다. 말하자면, 예수재는 4년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자율수행의 기회이다.
문화양식화된 예수재는 고성염불과 나비춤 등의 예기적 요소를 곁들여서 생전에 경전 읽기를 게을리 한 빚과 물질적으로 진 빚을 갚는다는 것이 큰 줄기이다. 그 빚을 갚는 데 필요한 돈을 종이로 만들어 명부전의 10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죄를 미리 사면(赦免)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예수재 보시금이 극락행 티켓정도로 오해되고, 나아가서는 미신으로까지 폄하되기도 한다.
문화는 과학도 종교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문화의 형태나 양식만 보고 미신이니 비과학이니 하고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불자로서 수행과 성찰 없이 관습에만 끄달려서 성찰 없는 기복 행위만 되풀이하는 것도 예수재의 참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음공부와 참회가 바탕이 되지 않은 예수재는 무소용이다. 즉, 체(體)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용(用)은 아무런 공덕이 되지 못한다.
대다수 불자들의 예수재 신앙행태는 절에 가서 불전 놓고 절하고 돌아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 오랜 타성에 젖은 일상의 습으로 빠져들고 만다. 자신의 삶을 개혁하지 않으면 예수가 아니다. 예수재날을 시작으로 참회와 지계와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어떨까. 참회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지계와 보시로써 공덕을 쌓는 데 예수재의 참뜻이 있으므로, 예수재는 윤달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상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 지인이 있는데, 그의 참회 방식은 좀 특이하다. 어느 날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매미 한 마리가 차창에 와 부딪쳐 퍼덕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크게 뉘우쳤다. 그 후, 길을 걸을 때마다 걸음걸음 <반야심경>을 염송한다. 버스를 기다릴 때나 사람을 기다릴 때나 시간만 나면 항상 반야심경을 염송한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자신이 죽인 생명을 천도하고, 살아있는 것들이 교통사고나 비명횡사 등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의미이다.
예전에 백일날에 백설기를 만들어 1백 집에 돌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지난 1백일 동안 갓난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도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즉, 이웃에게 보시함으로써 자신의 앞날을 보장받는 것이다.
보시는 자비심이 구현된 것이다. 보는 자기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며, 시는 자기의 욕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시민단체에 가입하여 후원하거나 북한동포 또는 세계난민을 돕는 것도 내세를 위한 금생의 예수요 적복(積福)이 아니겠는가.
보살(菩薩)의 삶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 있다. 상구보리를 수행이라 하면, 하화중생은 수행에서 얻은 바를 이웃과 사회에 회향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자기의 공덕을 삼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 시대의 최대 화두인 환경문제는 대표적인 공업(共業)이다. 이러한 공업은 함께 실천하지 않으면 예수가 되지 않는다. 화학세제 안 쓰기, 에너지 절약하기, 프레온가스용품 사용 절제하기, 냉난방기구 사용 줄이기, 농약 안 쓰기, 물 절약하기 등등의 생활양식 개선을 통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재, 자기를 바꾸는 조용한 혁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