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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가르쳐 준 말, 장엄(莊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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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11-15 12:46 조회3,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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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가르쳐 준 말, 장엄(莊嚴)

 

 

김윤희_월간 맑은소리맑은나라 발행인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스승을 찾아갔다. 다양한 직업의 군상들이 소수정예로 모여드는 정갈한 법당에는 ‘믿음’을 일으켜 수지하고자 하는 신심들이 둘러앉아 부처님의 법을 알아가는 재미로 아름다운 학당을 만들곤 했다.

만 2년 반, 햇수로 3년의 시간동안 우리들은 주어진 일상을 마감하는 시간이면 그렇듯 스승의 턱 밑에 앉아 이조(二祖) 혜가스님에게서 삼조(三祖) 승찬스님에 이르기까지의 법을 받아 지니듯 정법을 수지하고자 머리를 맞대었다.

얼마나 감사했던가. 진수만을 뽑아 올리던 스승의 명강의는 지금도 각인되어 여타의 강의로는 성이 차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때를 일러 ‘스승의 회상’이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한다. ‘장엄’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쓰고 다녔던가. 그저 무엇인가의 주변을 곱게 단장하고 꾸민다는 의미로만 알고 있던 장엄이라는 용어를 바르게 이해 한 것도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반드시 어떤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으로만 알았던 장엄은 그렇듯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 부처님을, 그리고사람이 법을 받아 지니는 것으로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심오하게 알아버린 것이다.

언젠가, 먼저 가신 선사의 기일을 맞아 인연 있는 불자들과 동행취재에 나선 적이 있었다. 음력 10월이었음에도 칼바람이 몰아쳐 산사의 부도전에는 마치 선사의 활구가 살아 숨 쉬 듯 했고, 참석한 어른스님들의 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던 승가의 법맥은 부도전을 둘러싼 대숲의 대나무마디마저 갈라놓으려는 듯 선명하기만 하였다. 잘 살다 가신 스님들의 자취는 그렇게 후대에도 남아 그림자처럼 미욱한 우리들을 일깨워 주곤한다.

여법하게 추모제를 모시고 돌아오는 길, 승용차의 좌석이 아니라 버스의 옹색한 좌석을 불편해 하던 내 마음을 깡그리 달아나게 해주는 것은 재가자들을 이끌고 갔던 그 선사를 시봉했던 오랜 보살의 한 마디였다.

“날씨도 춥고 많이 힘드셨지요? 그러나, 돈이 필요한 자리가 있고,‘사람’이 필요한 자리가 있는데 여러분들은 사람이 필요한 자리에 돈 보다 더 귀한 법석을 채우신 분들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셨는지 저는 여러분 모두를 향해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싶습니다.”라는 진심어린 인사말이었다.

그 보살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장엄을 했다는 생각에 가장 뒷좌석에 앉아 관망을 하고 있는 내 온몸에도 믿음 한 자락이 막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 했다. 귀한 자리에 잘 다녀왔다는 생각으로 그 다음날까지 흡족함이 가라앉질 않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찰의 법석에 가보면, 사람이 없어 행사에‘그림’이 살지 못했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단위사찰의 행사라든가, 그런 법석을 찾아가 보면 적잖게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소담한 법석을 다 채우지 못했음에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와 준 마음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나 또한 때로는 일반 재가자의 입장으로도 참석하게 되며, 더러는 취재를 겸해 다소 목적이 다르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게 될 때도 있다.

그런 시간이면 그 사찰의 주지 스님이 되었건, 원근 각지에서 찾아 준 몇 안 되는 불자들이 되었건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주인이 아님에도 그 모두를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벼락같이 들어 배고픔마저 잊기도 한다.

이전, 이 조금의‘공부’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그 마음에 단지 감사한마음만 일었으나 지금은 그 감사의 마음을 다시 그들의 가는 걸음걸음에, 그들의 일상에까지 당도하게 해 무엇이든 순일한 흐름이 함께 하기를 발원하게 된다. 그것이라야‘장엄’의 바른 회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렇듯 온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세상에 이름조차 내놓지 않고 살고자 했던 한 노스님의 다비식에 간 일이 있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한걸음에 달려와 준 스님들로 다비장은 붐볐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스님의 다비식은 생전,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였다. 보는 이들이나, 스님들에게나 마치 살아생전의 삶을 한 두 시간의 다비식에서 모조리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렇게 다비식장을 내려와 어른 스님들과 공양을 나누는 자리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 때, 한 스님이 말했다. “스님, 이제 좀 자주 이런 자리에오세요. 토굴에서의 수행도 실다운 일이지만, 길흉사에 얼굴을 내밀고 숫자를 채워주는 일도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얼굴도 보고 마주 앉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럴 때라야 얼굴이라도 보고 안부라도 물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로 품앗이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의 좁은 식견을 딱 아는 만큼만 편다. 不二(불이), 둘이 아님을 이렇듯 써도 되는지 모를 일이다. 오롯이 수행을 하여, 앉은 자리에서도 일체의 업장을 녹이고자 하는 일도 사실은 천리 밖의 누군가에게 기운이 가닿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굳이 자리를 채우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러나 또, 한 마음 돌려 마음과 몸을 함께 나투는 일은 곱절의 파장을 일으킬 터이니 툭 털고 일어나 양변에 자재로운 것을 오늘은 장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내세우고 싶어진다.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는 마음은 이른바,‘나지사 관법’을 성립하게 해 준다. ‘그렇구나, 그랬겠지, 그것만으로도 감사’라는 인사를 가르쳐 준 대 강백의 말씀은 나이를 보탤수록, 불가에 깊숙이 발을 디딜수록 새록새록 실천덕목으로 와 닿는다. 그러니, 스승이 가르쳐 준 ‘장엄’이란 결국, 마음을 관장하는 일이다. 형상을 떠난 마음속에 절대적 가르침을 대입시키고, 사람을 위한 지극한 발원을 한다면 이 가을 숲길을 걸으면서도,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도 그 자연이 준 장엄의 의미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지금의 이 자리에 있진 않다. 그 이치를 조금씩 찾아들어가다 보면 미움으로 점철된 얼굴도, 매일 줘야만 하는 인연도 그저 감사의 대상이 되고 만다.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해 ‘장엄’을 하고 있는지 깊은 가을에 기대어 더 지극히 물어볼 일이다.

스승이 가르쳐 준 장엄, 나는 언제쯤 가난한 스승을 아름답게 장엄해줄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 스승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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