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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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6-06 10:35 조회3,104회 댓글0건본문
나의 행복도
변효근_서울
언제나 어김없이 때가 되면 찾아오는 봄이고, 언제나 보아왔던 풍경인데 올해는 왜 다르게 다가올까요? 여러 해 전에 풍수를 깊이 공부한 절친한 친구가 전국의 각 사찰을 돌아다녔는데, 축서사의 절터가 일찍이 본적이 없는 풍수가 좋은 곳이니 한번 구경을 가자 하여 친구부부와 함께 찾았습니다.
대웅전을 안고 도는 문수산의 힘찬 기운과 싱그러움에 반해버렸습니다. 그 후로 축서사를 자주 찾게 되었고, 무여 큰스님을 뵙고 도반들과 매달 하루 참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과 직장에서도 틈틈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물을 대하게 되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할 때 나는 그냥 빙긋이 웃으며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하면 “행복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또 반문하면 여기서 사람들은 대개 “적당한 부(富)와 사회적인 명예(名譽)와 권력(權力), 그리고 건강(健康)이 갖춰지면 행복하겠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갖춘 사람들이 행복한 웃음 대신 왜 자살을 하고, 이혼을 하고, 그리고 가족 간에 알력이 일어날까?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 가난한 달동네에서는 서로 욕심 없는 웃음과 행복한 대화가 쏟아져 나올까? 하고 또 반문하면 실로 대답이 궁해집니다.
적당한 부와 사회적인 명예, 권력, 그리고 건강이 절대적인 행복의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탐·진·치에 근거한 욕망의 상대적인 산물이고, 또 만족할 수 없는 불꽃 같은, 아지랑이 같은, 구름 같은 허깨비 같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완전한 자유, 즉 해탈(解脫)을 얻었을 때 누릴 수 있다고 많은 선각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절대가치인 행복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해탈을 해야겠는데, 해탈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지 우선 살펴보고 방법을 세워야겠습니다.
욕망, 그리고 분별심, 증오심, 스트레스, 전쟁 등이 우리를 속박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로,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면 이것들은 왜 생기는지 그 원인을 알고, 또 이것들을 어떻게 대하는 게 가장 지혜로울까를 곰곰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이것들은 왜 생길까?
모든 만물은 인연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인데[諸行無常],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고 집착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눈가에 주름살도 생기고 피부도 노화가 되는 게 당연한데도 젊음을 좀더 유지하려고 온갖 좋은 보약과 화장품에 집착을 합니다. 육신의 껍질이 생기면 반드시 육신의 껍질을 벗어야 하고, 우리 주변에 뭇 생명체들의 태어나고 죽어가는 것을 늘 대하면서 진작 우리 사람에게만은 마치 죽음이 피해가는 양 착각하여 육신에 대한 집착으로 번뇌들이 생겨 고통의 속박에 빠집니다.
모든 만물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고 실체성[自我]이 없는데 [諸法無我], 즉 무아(無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아(自我)가 있다고 착각하여 모든 것에 상(相)을 세우므로 분별심, 차별심, 시기심 등의 번뇌들이 생겨 자신을 번뇌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고통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을 이해하여 자신의 미혹함[無明]을 벗어나야겠습니다. 제법무아, 즉 만물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고 실체성[自我]이 없습니다. 즉 만물의 구성은 시절인연에 따라 자아가 없는 여러 요인들이 서로 결합된 조합체(調合體)입니다. 만물은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아, 즉 공입니다. 여기에서 분별심, 차별심 등이 사라지고, 평등심이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 평등심으로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겁고, 또 자유로운 생활 속 불교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대할까?
부처도, 조사들도, 선지식들도, 그리고 우리처럼 미혹한 중생도 똑같이 눈, 코, 귀, 혀, 신을 갖고 색, 소리, 냄새, 맛, 느낌의 경계들을 똑같이 대하는 데, 왜 미혹 중생인 우리들은 탐·진·치로 번뇌망상을 일으켜 고통에 빠지고, 왜 부처는 번뇌망상에 빠지지 않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경계와 같이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비행기가 구름층 위에서 비행할 때 보는 태양은 지상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는 청정함 그 자체로 보였습니다. 구름층 없이 깨끗한 태양을 그대로 보는 것처럼 중생의 업장을 말끔히 소멸한다면 분별, 번뇌망상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지족할 줄 알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자는 대장부 살림살이 같이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서 보살행을 한다면 행복을 어찌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며, 나의 부처를 내보이는 때가 어찌 멀리요.
우리는 이러한 최고의 선(善)이고, 행복의 지름길인 팔정도를 매일 닦아 요익중생(饒益衆生)하는 대승(大乘) 보살이 되어야겠습니다.
중생즉불(衆生卽佛), 또는 번뇌즉불(煩惱卽佛)이 있듯이 내가 부처다 하는 확신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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