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 대법회 - 조계사 2004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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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12-28 18:25 조회3,714회 댓글1건본문
화두를 어떻게 참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화두공부가 잘 될 것인가’ 하는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최근에 나라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스러우니까 정신적인 불안과 괴로움을 달래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절이나 수행처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닌 것 같습니다.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마음수행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스님 말씀이 그곳의 절들이 외국에서 온 수행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몇년전에는 ‘아시아의 사제들이 동양적인 수행을 한다고 해서 로마 교황이 대노하셨다’ 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납니다. 최근에도 모 신문에서 ‘수행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적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수행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수행을 한다는 것은 불자든 아니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류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진리의 시대, 정법의 시대, 수행의 시대가 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사회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일 수록 불교에 거는 기대가 크고 그 중심에 바로 선불교가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선(禪)을 한다’, ‘수행을 한다’, ‘마음공부를 한다’ 하는 것들은 바로 ‘마음을 닦는다’는 말입니다. 특히 수행자들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공부중에 으뜸인 공부가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최상의 공부가 마음 수행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는 절대절명의 공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8만4천가지의 아주 심오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깨우쳐 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마음닦아 부처 되라는 것입니다.그래서 옛 조사스님들이나 선지식들이 이 마음공부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지요.
달마 대사의 제자인 혜가 스님께서는 자기의 팔을 뚝 끊어 바치면서 마음공부를 했습니다. 또 어떤 스님께서는 자기의 몸을 불로 태워서 부처님께 소신공양을 올린 이도 있습니다. 목숨을 바친다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는 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오신 여러분들이 제 법문을 듣는 것도 비록 부족한 법문이지만 아주 다행스럽다, 아주 복이 많다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어둡고 캄캄한 무명의 세계를 중생의 세계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세계는 밝고 환한 세계입니다. 중생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세계는 ‘고통의 바다’ 라고 부처님께서는 말했습니다. 중생의 세계가 바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대자대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각 장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도 명예도 아닌 눈뜨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봉사요, 귀머거리요, 말못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었던 미국의 유명한 헬렌켈러 여사가 가장 바랬던 소원은 북극이든 남극이든 어디를 가든 눈을 뜨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각 장애자가 눈을 뜨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듯이 평범한 일반인들도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마음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생들은 틈만 나면 언제 어디서든지 꾸준히 해야 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럼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 이것이 문제지요. 마음은 형상이 없어 물체를 닦듯이 쉽게 닦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어둡고 탁한 마음을 밝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흐리게 하는 주범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요. 바로 번뇌망상입니다. 이 번뇌망상 때문에 중생들은 마음을 못잡고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작업이 바로 수행입니다.
마음을 바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바다가 고요할 때는 잔잔하지요. 하지만 이 바다가 파도가 치고 태풍이 불어올 때는 1미터 앞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일체의 번뇌망상을 걷어내야 마음이 밝고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깨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마음 닦는데 가장 좋은 방법을 ‘마음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쉬어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놓는다’는 말은 일체의 마음작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번 쉬고 만번 쉬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바로 쉬면 깨치는 겁니다. 쉬면 근본 자성이 바로 드러납니다. 임제 스님도 ‘쉬면 바로 그 자리가 청정법신이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면 그 자리가 부처요, 열반입니다. 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망상이 사라진 자리, 생사초탈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쉽게 마음을 비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번뇌망상으로 똘똘 뭉쳐 있어 움직이거나 입을 열면 번뇌망상이 곧바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요즘은 책이나 매스컴을 통해 지식을 많이 습득합니다. 하지만 근본 자성에서 보면 이 지식들도 바로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요인입니다. 그러니 현대인일 수록 지식인일 수록 수행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 최상은 바로 화두참선입니다.
그러면 화두가 무엇이냐? 화두는 참선자가 과제로 체득해서 타파해야할 문제입니다. 확철대오해서 깨치면 바로 그것이 부처입니다. 간화선은 현대인에게 알맞은 세계적인 수행법입니다. 현대인들은 옛 사람들에 비해 근기도 약하고, 발심도 잘 못하며 신심또한 돈독하지 못합니다. 앞 못보는 사람에게는 지팡이가 필요하듯이 그래서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을 쓸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곧 화두입니다. 흔히들 간화선이 어렵다고 하는데 제대로 지도만 받으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화두는 어떻게 드는가?
첫째는 대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입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는 외우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일으키면 크게 깨치고 적게 일으키면 적게 깨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간절하게 해야합니다. 옛 조사들은 화두를 들때 간절 절(切)자 하나면 된다고 했습니다. 간절히 하면 화두가 들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 들 때는 간절 ‘절(切)’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오로지 해야되는 것처럼 성심성의껏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절박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며칠 굶은 사람이 밥생각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며칠 굶어 보세요. 앉으나 서나 밥 생각뿐일 것입니다. 또 사막에서 물이 떨어진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물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절실하게 해야 됩니다. 너무도 절실해 눈물이 날 정도가 돼야 비로소 화두를 제대로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절실한 것이 진리를 깨닫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셋째는 화두는 꾸준하게 쉼없이 들어야 합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쉼없이 꾸준하게 들어야 합니다. 잠시도 중단하면 화두참구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속에 사시는 여러분들은 쉽지 않은줄 압니다. 그래서 화두 들 때만이라도 집중해서 화두에 푹 절여 들듯이 참구 하라고 권합니다. 옛 조사 스님들은 오뉴월에 닭들이 알을 품듯이 하라고 비유를 해줍니다. 닭은 더위에 약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오뉴월의 더위에 알까지 품으면 얼마나 더울까요. 그래도 볕에 나가 햇볕을 쪼입니다. 알이 따뜻한 가운을 유지해야 삼칠일이 지나면 건강한 병아리로 태어나기 때문이지요. 이것처럼 여여하고 꾸준하게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애쓰시면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고집스러워야 합니다. 한번 들어 안풀리면 백번, 천번을 들어야 합니다. 전력을 투구해야 합니다. 책은 책장만 대충 넘겨도 내용을 알 수 있지만 마음공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푹 빠져서 꾸준히 해야 특별한 효과가 납니다. 그렇게 하면 의외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옛 조사어록에 화두참구는 ‘여반장(如反掌)’이다, 즉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세수할 때 코 만지기 보다 쉽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이처럼 지극한 마음 즉 일념(一念)으로 하게 되면 쉽지만 게으름을 피우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간절하게 들다보면 어느날 진짜 의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화두에 진의(眞疑)가 든다고 하는데 이 경지에 오르면 화두를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앉으나 서나 화두가 성성히 맺힙니다. 그렇게 진짜 의심이 나야만 화두를 제대로 든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되다가 말다가 합니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날까요.
첫째는 발심이 안돼서입니다. 둘째는 신심이 돈독하지 않아서입니다. 셋째는 대분심과 용맹심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면 발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절로 공부하고 싶게 스스로 진실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말합니다. 보리심을 내는 것을 말하지요 즉 자기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대단한 마음을 발심이라 합니다. 마음공부는 바로 얼마나 발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필코 이루겠다는 대단한 마음이 바로 발심입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은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라”고 하였습니다. 발심만 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화두를 참구하면 깨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서는 분별하거나 사량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믿음만이 불법의 대해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믿음은 암실에서 사진 현상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암실에 빛이 조금만 들어와도 사진을 뺄 수 없지 않습니까. 참된 수행도 믿음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크면 클 수록 수행의 열매도 큽니다.
셋째는 분심을 내야 합니다. 왜 나는 공부가 안되나, 역대 조사님들도 다 했는데 왜 나만 안되는 것일까. 하는 분한 마음을 내서 애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안되고 수행이 안되는 사람들을 ‘밥값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여기에 의정이 뭔지, 화두가 뭔지 모르시는 분들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해보지 못해서 화두를 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주리반특가’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 저능아에 가까웠어요. 부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고 시킬 수가 없었어요. 무엇을 시키면 하다가도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우두커니 서 있고는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하도 답답해서 “너는 다른 일을 하지 말고 먼지를 털고 때를 씻으라.” 그것만 계속하라고 하니 “먼지를 털고” 하다가는 “때를 씻으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또 “때를 씻으라”를 하다가는 “먼지 털고”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잘 잊어버리는 참 바보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잘 잊어버리더니 계속 열심히 외우고 끈질기게 하니까 일념으로 정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도 깨침을 얻을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왜 안합니까. 지금부터라도 지극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화두참구를 하세요.
넷째는 용맹정진을 해야 합니다. 특히 근기가 약한 사람일 수록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흔히들 잠 안자고 하는 걸 용맹정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잠은 충분히 자고 할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어떠한 사량과 난관에도 용맹스럽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용맹정진입니다.
참선자가 주의할 것은 진의가 나더라도 더욱 힘차게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화두는 성성하면서도 적절하게 고르게 조화를 이뤄야 깨칠 수가 있습니다. 화두가 성성하게 몸이 가볍고 편안해서 깨침에 이르면 평소 이해가 안되던 경전도 술술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가 생길 수록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식(識)이 맑아져 법당에 앉아서도 부산까지 내다볼 수 있는 심안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절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더 정진해서 통달하게 되면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힘이 생깁니다. 자만에 빠지면 또 지혜가 없어지게 되니 꾸준히 참구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더 지극한 경계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속에서, 마음속에서 느끼는 극락 입니다. 여러분들도 꼭 한번 마음공부를 통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 늘 즐겁고 기분이 좋은 상태, 행복한 경지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부는 잘 될 수록 항상 조심하고 주의하면서 겸손하고 낮춰야 합니다. 그러면 일취월장하고 경지가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늘 자기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시정하고 보완할 점은 무엇인가 하는 점검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 보다는 오늘과 내일이 더 좋은 사람일 수 있도록 지혜롭게 점검해 나갑시다.
정리=현대불교신문 김주일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무여 스님은 194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 했다. 이후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관음사, 칠불사, 망월사 등 전국 선원에서 40여 년 동안 수선안거 했다. 1987년 이후 봉화 축서사에서 주석하시며 불자들의 마음문을 열어주고 있다. 칠불사와 망월사 선원 선원장을 역임하셨으며 현재 조계종 기초선원 운영위원장으로서 선의 가풍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큰 스님들께서는 활구를 들라고 했는데 활구 참선이 무엇입니까.
-화두를 들 때는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가 돼야 합니다. 활구참선이란 화두에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에 분별심과 사량심을 내고 화두가 이렇다 저렇다, 지식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사량분별을 떠나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 것을 활구참선이라고 합니다.
▲화두는 수천년 전부터 내려와 현대언어와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들때는 꼭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요. 아니면 현대 선지식들께서 현대인에 맞게 만들어 주시면 안되는지요?
-화두는 오늘날 스님들이 현대적으로 만들어서도 얼마든지 참구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삼라만상 우주만물이 모두 화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 스님들의 화두를 권하는 것은 서울에서 부산가는 길로 말하면 기존에 있던 길을 가는 것이 쉽지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새길을 새로 만들어서 가는 것 보다 기존에 나 있는 길을 가면 편리하고 쉽게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처럼 화두도 옛 스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의지해가면 공부가 빠르고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참선은 꼭 스승을 모시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해야 합니까?
-참선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계사든 처사님의 집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는 꼭 받으세요. 왜냐하면 ‘이뭣고’는 ‘말길이 끊기고 마음작용이 끊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다’라고 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마음과 마음으로서 서로 상속하지 않으면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참선에서는 스승의 존재가 절대적입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 얼마나 지도를 잘 받느냐, 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주 쉽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가하면 일생동안 별 이익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수행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지도받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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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님의 댓글
김종진 작성일감사합니다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