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참선법회- 서장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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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9-24 07:33 조회4,961회 댓글1건본문
정리 서암
8.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9월법회
본문
제가 근래에 주실(籌室)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해 주심에 힘입어 홀연히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풀렸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께서 자세하게 내려주신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성중에 이른 뒤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릅니다. 그래서 이미 구속되고 막히는 감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습니다. 이별할 때 간절히 일러주시는 말씀은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갔으나,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부딪히는 일마다 막힘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있게 해주신다면, 겨우 스님의 법석(法席)에 허물이 없을까 합니다.
요지
정견(情見)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으나 대혜스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서 일상생활에 구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묵은 습관과 장애도 경미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부딪히는 일마다 여전히 막히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가르침을 더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글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측면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는 오직 확철대오 하나만을 깨달음으로 인정하는데, 이참정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공부하고 닦을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에서 더 이상 닦을 필요 없는 확철대오의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조사선(祖師禪)의 진면목(眞面目)이다.
해설
날씨가 우천이라 오시는게 어려우셨을 텐데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어떤 지방을 행각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인도 같은 곳에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황톳물에다 빗물이 갑자기 불어나게 되면 거의 빠져죽는다는 거래요. 부처님하고 제자 세분이 가다가 그 비를 만난 거예요. 어찌나 많이 오던지 세분 다 물 속에 빠졌는데 마침 판자를 만나 그 판자에 의지해서 떠나려가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물에 빠진 상태에서도 아주 지극한 관을 했습니다. 즉 선정(禪定)에 드셨어요. 선정에 드셔서 떠내려가다가 보니까 어느 사이에 저 만큼 갓으로 밀리듯이 되어서 살아나게 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그럴 때야 말로 용맹정진해야 할 때다. 그러면 기적도 일어날 수도 있고 삶과 죽음도 마음대로 초탈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는 말씀이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후라든지 어떤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할 때는 참으로 애써야 하는 공부가 이 공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좀 어렵더라도, 좀 괴롭더라도 때로는 오늘 같은 굳은 날에도 화두에 모든 것을 바치듯이 참으로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덟번째 시간으로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입니다. 참정이란 당시의 벼슬의 이름입니다. 참정은 요즘으로 말하면 고급 공무원은 못되고 중급 쯤 되는 공무원의 명칭입니다.
강의 원문
“제가 근래에 주실(籌室)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해 주심에 힘입어 홀연히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해설
여기서 주실(籌室)이란 바로 조실스님을 말합니다. 조실스님이란 어떤 회상에서 회상을 지도하는 선지식을 말합니다. 보통 선원에서는 조실이라고 하고 해인사나 통도사, 송광사 같은 총림에서는 방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해인사가 대중이 많다고 하는데 다 합쳐야 5백명이 못될 거에요. 그러나 옛날 중국에서는 오백명이 적은 대중이라고 합니다. 오백명, 천명, 천오백명 정도는 적은 대중에 속했고 보통은 이천명, 삼천명 심지어 사천명까지 육박하는 회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회상은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그러한 회상을 이끌고 지도하는 대표적인 스님을 주실이라고 합니다.
주실(籌室)은 인도의 네 번째 조사(祖師)인 우바국다 존자가 한 사람을 제도할 때마다 한 개의 산가지(算柯枝)를 석실에 두었던 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실이라면 대혜스님을 말합니다.
강의 원문
“주실인 대혜스님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해서”
어리석고 막힌 즉 정진하다가 보면 이렇게 막히고 저렇게 막힌 얽히고, 설킨 그런 마음이 많아요. 그런 마음을 격발해서, 여기서 격발이란 격동해서 발분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경책하는 것을 말해요. 정진하다 보면 본인이 흔히 ‘내가 좀 어리석다, 내가 좀 바보스럽다’ 하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옛날에 어른 스님들을 보면 사흘 만에 깨쳤다는 분들도 있어요. 옛날 스님 말씀에 삼개월에서, 아니면 세 철에서 깨치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는 그런 말을 썼다고 했어요. 그러나 보통은 세 철이나 삼년을 해도 화두가 여여하지 못한 상태가 되면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깊게 느껴서 발심해서 참으로 애를 쓰라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화두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어떤 상태냐?
화두가 여여한 상태 즉 끊이지 않고 항시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를 보통 만족한 상태다 그럽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 만만하고 ‘이 이상이 없다’ ‘오직 이 화두 뿐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보통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한결같이 들리는 그런 상태를 흔히 만족스러운 상태다, 여여(如如)한 상태다, 그렇게 보통은 말합니다.
그런 상태란 흔히 쓰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즉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말이 없고 항시 여여한 상태, 거기에서 한 두가지 더 보태면 사고(思考)를 해도, 깊은 생각을 해도 조금도 변함이 없고, 책을 읽어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를 말해요. 또한 직장인이 근무를 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흔히 만족스럽다, 아주 여여한 상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상태까지는 꼭 되시도록 좀 애를 써보기기 바랍니다.
화두공부를 해서 그런 상태가 되려면 아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화두하는 데는 지혜를 아주 강조합니다. ‘지혜롭게 해라’ ‘지혜롭게 하라’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옛 스님의 말씀에 화두공부는 정미작반(精米作飯)처럼 해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지혜로운 공부래요. 어리석은 공부는 ‘정사작반(精沙作飯)처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정미작반이란 쌀을 잘 씻어서 밥을 앉혀서, 불을 적당하게 때면 아주 고실고실한 먹기 좋은 그런 밥이 되는 것을 말해요. 그런 쌀을 앉혀서 밥을 하듯이 공부를 하는 거래요. 그런데 어떤 분을 모래를 앉혀서 찌듯이 밥을 하려고 해요. 모래를 아무리 앉혀서 불을 때본들 밥이 되겠어요. 그렇게 어리석게 하는 분이 있어요.
이 공부는 참으로 지혜롭게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하는 공부는 보리를 이룹니다. 보리(菩提)란 아뇩다라삼막삼보리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말해요. 위없는 고르고 아주 바른 그러한 깨달음 즉 확철대오를 말합니다. 지혜롭게 하는 공부는 큰 깨침을 얻어서 부처가 되고요, 어리석은 공부는 생사윤회의 고통가운데 가장 큰 고통인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하지 못합니다. 늘 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하고 중생의 신세를 떠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道)의 문을 두드리지만 깨침의 문에 들어서는 분은 그렇게 많질 않아요. ‘생사의 윤회에서 괴로워하는 자가 많은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얼른 가서 흙덩이를 문다는 거래요. 그런데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안물고 사람을 문다는 거래요. 공부는 사자가 흙덩이를 안물고 사람을 물듯이 지혜로운 공부를 하는 거래요.
옛날 당나라 때 그 유명한 현종의 양귀비가 있습니다. 흔히 ‘예쁘다’ 하면 지금도 중국사람들은 “양귀비보다 더 이쁘냐?” 한답니다. 예쁜 여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양귀비는 아주 비천한 신분으로 왕비가 되는 거래요. 그래서 일생을 풍미하다 돌아간 분이 바로 양귀비인데 현종의 아주 극진한 그런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종의 사랑을 배신하고 당시의 젊고 씩씩하고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안록산이라는 장군한테 반하게 됩니다.
그 안록산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안보면 몸이 막 비틀릴 정도래요. 그런데 어쩌다가 한 번씩 안록산이 궁중에 나타나면 자기종인 소옥이를 소옥아! 소옥아! 하고 마구 불렀다는 거래요. 왜 소옥이를 불렀겠어요? 소옥이에게 시킬 일도 없는데 소옥이를 그렇게 불렀다는 거래요. 소옥이를 부른 이유는 자기의 사랑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소옥이를 불렀다는 거래요.
예를 들어 무자 화두를 드는 분들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조주스님은 “무(無)라!” 하셨어요. ‘무(無)’라 즉 ‘없다’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없기 때문이 아니래요. 그 이유, 그 원인을 참구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렇듯이 화두 참구하는 분은 사자가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듯이, 양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 그 이유를 알듯이 참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으로 지혜롭게 참구를 하셔야 합니다.
선종(禪宗)의 조사 중에서 유명한 마조(馬祖)스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은 짐승 비슷한 그 얼굴에 음성도 좀 기성이었다고 해요. 혀를 내밀면 코를 덮힐 정도였어요. 걸음걸이는 소걸음 같았다고 합니다. 좀 특별했던 분이래요. 그런데 선지는 아주 대단해서 조사선을 확립하신 분입니다. 그런 마조스님도 젊을 때 공부할 때는 아주 어리석게 좀 둔하게 공부를 했던가 봐요. 그 전법원에서 공부하시던 때였는데 스승인 남악회양 선사가 보니까 그릇은 법기(法器)감인데 즉 공부하는 그릇은 아주 대단한데 그러나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남악회양선사가 공부하는 마조 앞에 가서 기왓장을 하나 들고 가서 덜덜 갑니다. 얼마를 갈고 있으니까 마조가 묻습니다.
“스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뭐하시려고 합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하니 스승은 “자네처럼 앉아서 공부한다고 공부가 되겠는가?” 그래서는 공부가 안된다 하면서 “수레를 끄는 소가 안갈 때는 소를 때려야하는가? 수레를 때려야하는가?” 하는 그 말에 마조스님이 확철대오 하셨다는 거래요. 수레가 안갈 때는 수레를 아무리 때려도 안갑니다. 소를 때려야 합니다. 그렇듯이 참선자는 아주 지혜롭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옛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씀을 합니다.
몇 년 하시고, 또 오랫동안 참선을 하신 분 가운데 공부가 잘 안되는 분은 “정말 내가 어리석지 않은가? 내가 둔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하시면서, 자기를 훤하게 알아서 어떻게라도 이 공부가 되도록 하셔야합니다. 잘 달리는 말을 준마라고 합니다.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린다는 거래요. 또 어떤 말은 채찍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냥 잘 달린다는 거래요. 이런 말을 중마(中馬)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피가 나도록 맞아야 달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어릭서은 우마(愚馬)라고 합니다.
이 공부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막 달리는 말처럼 그렇게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공부인은 늘 “과연 나는 어리석지 않은가? 정말 지혜롭게 공부하는가?”하는 자기 반성을 하면서 지혜, 지혜, 그리고 또 지혜롭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가 있는 선사들은 길을 가다가 산넘어 연기만 나도 저 연기는 뉘집에서 밥을 짓는 연기인데 지금 밥이 어느 정도 익어가는지 연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는 거래요.
그런 분은 대단하기도 합니다만 화두가 안되는 분일 수록 늘 지혜롭게 하셔야 합니다. 너무 강하게도 말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똑같지도 않고 급히 들어서도 안되고요, 또 느리게 해서도 안됩니다. 적당히 알맞게 해야 합니다. 그 알맞게란 말에, 그 적당히란 말에 모든 지혜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잘하시는 분은 어떤 일을 해도 지혜롭게 잘해서 참으로 세상도 이끌고 우주 만물의 스승까지도 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수목나 존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거부 장자의 아들이었다는 거래요. 어찌나 귀하게 자랐는지 쥐면 불듯 불면 날 듯 아주 애지중지 하게 자란 분이래요. 늘 업혀다니고 안겨 다녔다는 거래요. 하도 다니질 않아서 발에 털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경전에 묘사가 되는 분인데 그 수목나 존자가 철이 날 정도가 되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인생의 말씀을 듣게 해주겠다 해서 부처님 계신 곳까지 운하를 팠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자면 운하를 파가지고 아들을 데리고 부처님한테 가겠어요.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 법문을 듣습니다.
그 법문을 듣자마자 이 수목나 존자는 참 선근이 있는 분이라 바로 출가를 하겠다는 거래요. 아버지가 말려서 몇 년 뒤에야 아버지를 설득해서 출가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출가를 한지라 남들보다 더 애쓰고 더 노력했어요. 피골이 상접하고요, 발바닥이 갈라져서 피가 나고요, 뭐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새카맣게 형편없을 정도로 오직 공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공부가 안되는 거래요. 삼년을 해도 안되는 거래요. 그래서 하루는 나는 돈하고는 인연이 많지만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퇴소할 마음을 먹는 거래요.
부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고 척 나타나서는 “수목나야, 네가 세속에서 뭘 즐겼느냐?”하니 수목나는 “비파를 즐겼습니다.”했습니다. “비파는 어떻게 튕겨야 묘하고 좋은 소리가 나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니 “줄을 적당하게 조정하고 튕겨야 고운 소리가 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다. 공부도 네가 비파 튕기듯이 그렇게 해야 참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다. 너처럼 마음이 급하고 마음은 대단하지만 그렇게 무지하게 지혜롭지 못하게 그렇게 애쓰면 몸은 괴로워지고 공부는 어렵나니라. 늘 비파 치듯이 그렇게 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부는 비파 치듯이 아주 적당하게 아주 알맞게, 자기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자기의 역량에 맞는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공부입니다. 그 지혜롭게란 말, 적당이란 말, 알맞게란 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여 해주시니 했습니다. 즉 대혜스님의 경책을 받아서 홀연히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을 때는 문득 홀연히 깨닫습니다. 참정이란 직위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공무원이래요. 공무원 가운데 중급 공무원이래요. 여기 이 자리에도 공무원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서장에 등장하는 분들을 보면 상당수가 깨친 분들이래요. 그렇지만 그 분들이 특별한 분들이냐? 아닙니다. 중국 당시의 사대부들이 지식층이기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분들이래요. 즉 여기 계시는 여러분도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래요.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다 했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디는 거래요.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과 성품이 있다는 거래요.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아주 못난 땅 속에 있는 지렁이나 개미 새끼같은 미물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는 거래요.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은 가지고 태어났고, 누구나 본래는 부처라는 거래요. 본바탕은 부처랑 똑같다는 거래요. 다만 금생의 업이 좀 두터워서 잘 태어나지 못하고 좀 둔하기는 하지만 근본 바탕은 부처님과 똑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이 공부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얼마나 돈독하고, 얼마나 지극하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갖느냐?가 아주 중요한 거래요. 그래서 진심으로 발심하고 참으로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면 누구나 깨칠 수 있다는 거래요.
부처님 말씀에 의식만 있으면 깨칠 수 있다 했습니다. 의식이란 정상적인 정신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정신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깨칠 수 있다는 거래요, 유명한 만공스님의 말씀에 장맛만 알 수가 있으면 깨칠 수 있다 했습니다. 장맛이란 간장이나 된장이나 고추장을 말합니다. 그 맛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어요.
즉 부처님 말씀처럼 의식만 있으면 깨친다는 거래요. 그래서 여러분께서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본바탕은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타고 났다”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주리반타카라는 그런 그 아주 저능아인 제자가 있었어요. 그 분은 어찌나 저능아인지 부처님이 뭘 시킬 수 가 없었어요. “너 이거 해라!” 하고 시키면 그거 하다가도 우두커니 서있는 분이래요. 잊어버리고요. “너 저거 해라!” 하면 그거 하다가도 우두커니 서있는 거래요. 이렇게 하도 답답한 사람이라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주 동정어린 말씀을 하시는 거래요.
“주리반타카야! 너는 다른 것은 일체 하지 말고 ”쓸고 닦으리! “쓸고 닦으리만 해라!” 하셨습니다. “쓸고 닦으리”란 마음의 때를 쓸고 마음의 때를 닦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리반타카는 어찌나 어리석든지 ‘쓸고’ 하다가는 ‘닦으리’를 잊어버리고 ‘닦으리’ 하다보면 ‘쓸고’를 잊어버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리반타카는 아주 의지가 강했던 분이래요. 부처님이 하라는 그대로 하는 분이래요. 그렇게 어리석고 저능아이고 둔재이지만 하라는 그대로 하고 r그처럼 하고 또 하고 또 하니까 마음이 열리는 거래요.
그래서 남방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분도 깨칠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래요.
아무리 흔히 장애자이다, 둔재다 해도 사실 그 주리반타카 같은 둔재는 드뭅니다. 그러나 주리반타카도 깨칠 수 있었어요. 다만 하지 않아서, 의지가 없어서, 참으로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못해서 깨치지 못하는 것이지 이 공부는 누구나 깨칠 수 있다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강의 원문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정견(情見)은 알음알이를 말합니다. 즉 지해(知解)를 말해요. 양변을 초월하지 못하고 무(無)를 취하면 유(有)를 버리고 유(有)를 취하면 무(無)를 버리는 알음알이에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선에서는 이 알음알이를 아주 경계합니다. 이 알음알이 즉 지해(知解)란 일부의 지식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알음알이를 주의하고 조심해야 하느냐?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입니다.
말길이 귾치고 생각마저도 끊치는 데서 발견아 되는 도리이기 때문에 알음알이로는 아무리 생각을 잘하고 말을 잘해도 불법9佛法)을 볼래야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불법은 사량분별로서는 알지 못한다고 부처님께서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원각경에 보면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의 온갖 경계를 헤아릴 진대, 반딧불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될 수가 없다,” 하는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법은, 즉 화두 참구는 절대 지식으로, 알음알이로 따지고, 사량하고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하면서 오직 오직 오직 단순하게 의정을 일으켜야돼요. 그래야 참으로 타파를 하고 깊은 경계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유명한 정신세계의 거인들이란 분들도 거의 의식세계의 수준을 못 넘어요. 그 유명한 야스퍼스나 프로이드, 융같은 그런 분들도 의식세계를 넘지 못했어요. 그 분들도 무의식 세계를 이야기 하는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이 화두공부에서는 의식세계에서 이러쿵 저러쿵하는 그런 공부는 공부취급을 안해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화두를 하는 자체가 아주 고급스러운 정신세계에서 자기 수행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훗날 공부가 잘된 상태에서 동중(動中)의 일을 지나가서 몽중(夢中)의 일여(一如)한 상태만 되어도, 그 유명한 철학자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들의 저술을 비추어 보듯이 자상하게 읽어보고 나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내가 벌써 이 정도나 되었나 싶을 정도로 깊은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화두자체가 그만큼 깊은 경지를 체험하게 해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화두 참선이다 하는 생각을 늘 하셔도 좋습니다.
선종 사찰의 일주문에 들어가다 보면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 하는 주련이 붙어있는 곳이 많아요. 이 문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막존지해라, 즉 알음알이를 갖지 말아라” 합니다. 즉 참선하는 분은 일체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거래요. 즉 분석하고 사량하고 따지고 요것 조것 지해로서 아는 마음을 일체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이 공부를 진심에서 진정으로 깊이 있는 그런 공부를 하시게 됩니다.
조사가 즉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어요. 서쪽 나라인 인도에서 동쪽 나라인 중국으로 건너와서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바로 알아서 불입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알음알이를 그만큼 두려워했던 거래요. 그런 알음알이를 없애는 작업이 바로 선(禪)이래요. 옛날에 위양종을 창종(創宗)하신 위산 영우선사(僞山 靈祐 서기771~853년, 위양종의 개조)라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대단한 스님이래요. 사제 중에 향암지한 선사(香嚴 智閑 서기 ?~898년)라는 분이 계셨어요. 어느 날 향암한테 물었어요.
“그대가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에 그대의 참모습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까 향암스님이 대답을 못하겠거든요. 우물 쭈물 하다가 스님께서 말씀해주실 수가 있으십니까? 하고 도리어 말씀을 해주기를 바라는 거래요. 그러니까 “이 사람아, 화두를 어떻게 설명해주는가? 자네도 참선하는 참선꾼인가?” 하고 호통을 치시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향암선사는 크게 실망을 해서 그 절을 떠나서 남양 해충국사라고 아주 유명한 선사가 있었는데 그 선사가 계신 암자로 가서요. 그 암자에서 머물면서 어느 날 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제법 큰 돌이 있었다는 거래요. 그 돌을 던졌는 거래요. 돌을 던지니까 저기 있는 대밭이 있는데 대나무 하나에 정통으로 맞은 거래요. 맞으니까 소리가 나는 거래요 그 소리에 깨쳤습니다. 깨치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대 위산 선사님, 대 위산 선사님!” 그 전까지는 그냥 위산 선사님 했는데 깨치고 나니까 이제는 대자를 붙여서 대 위산선사님했다는 거래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소승은 선사에게 도덕을 귀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선사께서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중히 여겼습니다.” 했답니다. 이 공부는 말로 글로 설파해주어서 깨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참으로 참구해야 합니다. 오직 참구, 참구,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셔야 합니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했습니다. 즉 알음알이에 떨어져 있었다는 거래요. 깨치고 보니까 그것을 느끼는 거래요.
강의 원문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엉키고 저렇게 엉키고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얽히고 설킨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즉 유를 집착하면 무를 버리고 무에 집착하면 유를 버려서 분별심으로 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강의 원문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풀렸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한번 웃음이란 한번 깨침입니다. 한번 깨침에 무엇이 풀렸느냐? 바로 의심 덩어리가 풀렸다는 거래요. 의심이 문득 풀려서 그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기쁘고 다행함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선사는 깨치고 나서 어찌나 좋던지 사흘이나 춤을 추셨다는 거래요. 그러면서 왜 그렇게 춤을 추시느냐하고 물으니까 “이 기분, 이 느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리요”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분처럼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어떻게나 좋던지 망아지처럼 하루 종일 잇발에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강의 원문
“큰스님께서 자세하게 내려주신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이런 자비야 말로 “참으로 큰 자비다, 대자대비다”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합니다. 조사스님들의 말씀에 스승 없이 깨치는 경우는 만에 하나도 없다 그런 말씀까지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깨치는 분들은 극히 드물다는 거래요.
강의 원문
“성중에 이른 뒤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릅니다.”
일상의 생활, 즉 밥 먹고 옷 입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것 까지, 일상생활의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즉 본성과 계합한다는 거래요. 본성과 계합한다는 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라는 거래요. 즉 부처의 세계라는 거래요. 평범하게 하는 그런 생활도 바로 부처의 경계라는 거래요.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늘 희희낙락하면서 즉 늘 맑고 아주 밝은 그런 경지에서 안락함을 느껴가면서 그래서 그냥 평범한 어쩌면 못난 아파트 같은 아주 보잘 곳 없는 그런 곳이래도 깨친 분은 그 자리가 바로 불국정토 아닌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강의 원문
“그래서 이미 구속되고 막히는 감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분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구속이 안돼요. 즉 속박이 안되고 막히는 감정도 없고 그래서 흔히 “대자유인, 대 해탈인이 된다” 합니다. 아주 자유스러운,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활달하게 마음대로 천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분이 바로 깨달은 분입니다. 그런 분을 ‘대해탈인’이라고 합니다.
깨치기 전에는 ‘아주 기특할 것이다’ 하는 깨침에 대한 이런 저런 번뇌망상을 했는데 막상 깨치고 나니까 기특할 것도 없는 거래요. 일상생활 그 자체래요. 즉 평상심이래요. 그래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강의원문
“그 나머지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습니다.”
묵은 습관이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즉 깨치기 전에는 조금만 미우면 미워 죽겠는 거래요. 화도 벌컥 벌컥 내고 얼굴도 조금 좋으면 막 펴지고 기분 나쁘면 풀어지고요.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려워요. 즉 감정 처리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깨치고 나니가 아주 무심한 거래요. 전연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무심한 그런 분이 바로 도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래된 장애 즉 속세의 장애 그간 깨치기 전에 오랫동안 장애스러웠던 즉 도를 방해하고 도를 장애했던 오래된 그 장애- 그것을 보통은 오욕이라고 합니다. 오욕, 칠욕이라고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욕망들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욕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재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합니까? 돈, 돈,돈 합니다. 요즈음은 돈 사상이 너무 팽배해서 인사도 “돈 많이 버십시오” 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그간 공부하는데 그렇게 장애가 되는 거래요. 그런 생각 때문에 공부가 안됐어요. 또 색(色 )즉 이성에 대한 감정도 장애가 되지요. 또 그런가 하면 먹는 것, 어떤 분은 먹는 것을 그렇게 따집니다. 어디에서 좋은 음식이 있다 누구집이 잘한다. 뭐 서울에서도 어떤 집이 일류다 하면 메워터진다는 거래요.
또 명예가 있습니다. 세속사람들은 명예를 아주 좋아합니다. 명예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분이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화두가 좋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 사람은 “화두가 뭐꼬?” 할 거래요. 숙(宿)- 잠자는 것도 중요합니다. 잠자려고 하는 그 근본 욕망이 공부를 그렇게도 장애했어요. 그런데 깨치고 보니까 오래된 그런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다 즉 가벼워졌다는 거래요.
그러나 여기의 문장에서 보면 이참정은 확철대오는 못하신 것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경미해졌다는 그런 표현을 쓴 것 같아요. 확철대오하면 조금씩 경미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심할 정도로 아주 경미한 정도가 될 것입니다.
재물로 말하면 방거사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거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가 네명이 다 도인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집안인데 유산이 아주 많았는 거래요. 그 유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나누어 주기 좀 어려운 것은 동정호라고 하는 커다란 호수에 다 처넣는 거래요. 즉 살아가는데,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다는 거래요.
그래서 그 재물을 다 동정호에 쳐 넣고 유유자적하게 사시다 가신 방거사란 분이 계셨는데 그런 분처럼 깨달은 경지에 있어서는 재물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참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번거롭고 괴롭게 하는 물질 정도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뭐 그렇게 까지 안가더라도 화두가 참으로 아주 성성하고 적적한 경지가 되면 본인 스스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재물이다 그렇게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강의원문
“이별할 때 간절히 일러주시는 말씀은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갔으나,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부딪히는 일마다 막힘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있게 해주신다면, 겨우 스님의 법석(法席)에 허물이 없을까 합니다.”
스승인 대혜스님선사께서 간절하게, 고구정녕하게, 노파심절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비로소 문에 들어갔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깨치면 전혀 막힘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지
정견(情見)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으나 대혜 스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서 일상생활에 구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묵은 습관과 장애도 경미해졌다고 했다.
그동안 정견에 걸려서 즉 알음알이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걸리고 저렇게 걸리고 살아가는데 안걸리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부딪히는 일마다 여전히 막히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가르침을 더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글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측면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는 오직 확철대오 하나만을 깨달음으로 인정하는데, 이참정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공부하고 닦을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에서 더 이상 닦을 필요 없는 확철대오의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조사선(祖師禪)의 진면목(眞面目)이다.
선가에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오랜 이야기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이참정은 돈오점수를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9. 이참정에게 답함
그 깨침의 경 즉 불교 공부를 한 효과다 했습니다. 이거야 당연하지요.
만약 한번 웃는 가운데 백가리를 통달하고 천가지를 감당하는 국량(局量)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능히 우리집에 과연 전할 수 없는 미묘함이 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흔히 하나를 통하면 전부를 통한다고 합니다. 하나를 증득하면 백가지 천가지를 증득하고 하나를 깨치면 전부를 깨친다고 합니다. 불법은 아주 미묘해요. 천수경 처음에도 무상심심미묘법이라고 있어요. 아주 위업고 아주 미묘한 법이 불법이래요. 그래서 그 미묘함에 인생과 청춘을 아주 송두리째 던져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종교적이래요. 어떤 철학보다도 아주 심오해요. 어떤 학문보다도 참으로 깊이가 있어요. 어떤 이론보다도 더 장한 것이 바로 불법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교를 만난 것도 다행스럽고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요즈음은 불교가 여러 가지 도전을 받고 시련을 겪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종교 자체는 어떤 종교하고도 비교가 안돼요. 불교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부심과 긍지를 늘 가져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체험을 해보시고 기독교의 성경이나 이슬람의 코란이나 그 밖의 어떤 종교 서적이나 철학적인 서적이나 또는 요즈음의 유명한 첨단을 걷는 서적들과도 비추어보세요. 그러면 불교가 얼마나 대단하다 그 수행이 얼마나 장하냐? 이 수행을 해도 되느냐 안해도 되느냐 바로 느껴져요. 안하면 자기 손해래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불교적인 수행입니다.
여러분께서 이렇게 너무 조그마한 법회이지만 이런 법회에 나온 것 만도 정말 다행스럽고 자랑스럽다 하는 생각을 해도 조금도 과한 표현이 아니래요. 여러분이 동정일여한 상태만 꼭 되어보세요. 그 정도만 되어도 이 정도만 되도 됐지 뭐 이상 할 필요가 있나 할 싶을 정도래요. 그런 상태에서는 화두선보다 묵조선이 더 깊게 느껴져요. 더 마음의 평화와 안락을 느껴요. 화두선은 좀 강해요. 진취성이 있어요. 즉 맹렬성이래요. 고급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막 질주하듯이 그런데에 비유하면 묵조선 같은 것은 좀 쉬어가면서 좀 놀아가면서 하는 공부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럴 정도만 느껴도 수행은 안할 수 없다 오직 이것뿐이다 하는 생각을 하시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이런 좋은 문중에 들어왔으니까 이 공부를 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청춘을 참으로 화려하게 좀 빛나게 해서요, 일생을 좀 멋지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여러분이 바라는 바를 전부를 충족시켜줄 수가 있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바탕이 있는 공부 중에 공부다 이 선이다. 즉 불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늘 자부심과 긍지심을 가지면서 열심히 하고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도 좀 피로하고 좀 괴롭겠지만 멀리 오셨으니까 또 이렇게 사람은 좀 이렇게 애쓸 때도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여러 가지가 풍요롭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럴 때일 수록 자기를 참으로 잘 다스리고 자기 관리가 잘 되고 자기문제를 좀 잘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참으로 더 큰 행복을 느껴요. 그렇게 하려면 수랭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부처님이 깨치기 직전에 네란자라 근처 보리수 밑에 앉으시면서 맹세했듯이 내가 이 자리에서 뼈가 뿌러져도 좋다. 내 몸뚱아리가 없어져도 좋다 오직 오직 타파하고야 말겠다, 깨치고야 말겠다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시고 앉으셨듯이 여러분께서도 잘 앉아서 하룻동안 정말 성성하고 적적한 그런 좋은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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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9월법회
본문
제가 근래에 주실(籌室)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해 주심에 힘입어 홀연히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풀렸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께서 자세하게 내려주신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성중에 이른 뒤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릅니다. 그래서 이미 구속되고 막히는 감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습니다. 이별할 때 간절히 일러주시는 말씀은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갔으나,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부딪히는 일마다 막힘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있게 해주신다면, 겨우 스님의 법석(法席)에 허물이 없을까 합니다.
요지
정견(情見)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으나 대혜스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서 일상생활에 구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묵은 습관과 장애도 경미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부딪히는 일마다 여전히 막히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가르침을 더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글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측면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는 오직 확철대오 하나만을 깨달음으로 인정하는데, 이참정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공부하고 닦을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에서 더 이상 닦을 필요 없는 확철대오의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조사선(祖師禪)의 진면목(眞面目)이다.
해설
날씨가 우천이라 오시는게 어려우셨을 텐데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어떤 지방을 행각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인도 같은 곳에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황톳물에다 빗물이 갑자기 불어나게 되면 거의 빠져죽는다는 거래요. 부처님하고 제자 세분이 가다가 그 비를 만난 거예요. 어찌나 많이 오던지 세분 다 물 속에 빠졌는데 마침 판자를 만나 그 판자에 의지해서 떠나려가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물에 빠진 상태에서도 아주 지극한 관을 했습니다. 즉 선정(禪定)에 드셨어요. 선정에 드셔서 떠내려가다가 보니까 어느 사이에 저 만큼 갓으로 밀리듯이 되어서 살아나게 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그럴 때야 말로 용맹정진해야 할 때다. 그러면 기적도 일어날 수도 있고 삶과 죽음도 마음대로 초탈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는 말씀이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후라든지 어떤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할 때는 참으로 애써야 하는 공부가 이 공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좀 어렵더라도, 좀 괴롭더라도 때로는 오늘 같은 굳은 날에도 화두에 모든 것을 바치듯이 참으로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덟번째 시간으로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입니다. 참정이란 당시의 벼슬의 이름입니다. 참정은 요즘으로 말하면 고급 공무원은 못되고 중급 쯤 되는 공무원의 명칭입니다.
강의 원문
“제가 근래에 주실(籌室)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해 주심에 힘입어 홀연히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해설
여기서 주실(籌室)이란 바로 조실스님을 말합니다. 조실스님이란 어떤 회상에서 회상을 지도하는 선지식을 말합니다. 보통 선원에서는 조실이라고 하고 해인사나 통도사, 송광사 같은 총림에서는 방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해인사가 대중이 많다고 하는데 다 합쳐야 5백명이 못될 거에요. 그러나 옛날 중국에서는 오백명이 적은 대중이라고 합니다. 오백명, 천명, 천오백명 정도는 적은 대중에 속했고 보통은 이천명, 삼천명 심지어 사천명까지 육박하는 회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회상은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그러한 회상을 이끌고 지도하는 대표적인 스님을 주실이라고 합니다.
주실(籌室)은 인도의 네 번째 조사(祖師)인 우바국다 존자가 한 사람을 제도할 때마다 한 개의 산가지(算柯枝)를 석실에 두었던 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실이라면 대혜스님을 말합니다.
강의 원문
“주실인 대혜스님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해서”
어리석고 막힌 즉 정진하다가 보면 이렇게 막히고 저렇게 막힌 얽히고, 설킨 그런 마음이 많아요. 그런 마음을 격발해서, 여기서 격발이란 격동해서 발분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경책하는 것을 말해요. 정진하다 보면 본인이 흔히 ‘내가 좀 어리석다, 내가 좀 바보스럽다’ 하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옛날에 어른 스님들을 보면 사흘 만에 깨쳤다는 분들도 있어요. 옛날 스님 말씀에 삼개월에서, 아니면 세 철에서 깨치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는 그런 말을 썼다고 했어요. 그러나 보통은 세 철이나 삼년을 해도 화두가 여여하지 못한 상태가 되면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깊게 느껴서 발심해서 참으로 애를 쓰라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화두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어떤 상태냐?
화두가 여여한 상태 즉 끊이지 않고 항시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를 보통 만족한 상태다 그럽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 만만하고 ‘이 이상이 없다’ ‘오직 이 화두 뿐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보통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한결같이 들리는 그런 상태를 흔히 만족스러운 상태다, 여여(如如)한 상태다, 그렇게 보통은 말합니다.
그런 상태란 흔히 쓰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즉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말이 없고 항시 여여한 상태, 거기에서 한 두가지 더 보태면 사고(思考)를 해도, 깊은 생각을 해도 조금도 변함이 없고, 책을 읽어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를 말해요. 또한 직장인이 근무를 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흔히 만족스럽다, 아주 여여한 상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상태까지는 꼭 되시도록 좀 애를 써보기기 바랍니다.
화두공부를 해서 그런 상태가 되려면 아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화두하는 데는 지혜를 아주 강조합니다. ‘지혜롭게 해라’ ‘지혜롭게 하라’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옛 스님의 말씀에 화두공부는 정미작반(精米作飯)처럼 해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지혜로운 공부래요. 어리석은 공부는 ‘정사작반(精沙作飯)처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정미작반이란 쌀을 잘 씻어서 밥을 앉혀서, 불을 적당하게 때면 아주 고실고실한 먹기 좋은 그런 밥이 되는 것을 말해요. 그런 쌀을 앉혀서 밥을 하듯이 공부를 하는 거래요. 그런데 어떤 분을 모래를 앉혀서 찌듯이 밥을 하려고 해요. 모래를 아무리 앉혀서 불을 때본들 밥이 되겠어요. 그렇게 어리석게 하는 분이 있어요.
이 공부는 참으로 지혜롭게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하는 공부는 보리를 이룹니다. 보리(菩提)란 아뇩다라삼막삼보리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말해요. 위없는 고르고 아주 바른 그러한 깨달음 즉 확철대오를 말합니다. 지혜롭게 하는 공부는 큰 깨침을 얻어서 부처가 되고요, 어리석은 공부는 생사윤회의 고통가운데 가장 큰 고통인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하지 못합니다. 늘 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하고 중생의 신세를 떠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道)의 문을 두드리지만 깨침의 문에 들어서는 분은 그렇게 많질 않아요. ‘생사의 윤회에서 괴로워하는 자가 많은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얼른 가서 흙덩이를 문다는 거래요. 그런데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안물고 사람을 문다는 거래요. 공부는 사자가 흙덩이를 안물고 사람을 물듯이 지혜로운 공부를 하는 거래요.
옛날 당나라 때 그 유명한 현종의 양귀비가 있습니다. 흔히 ‘예쁘다’ 하면 지금도 중국사람들은 “양귀비보다 더 이쁘냐?” 한답니다. 예쁜 여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양귀비는 아주 비천한 신분으로 왕비가 되는 거래요. 그래서 일생을 풍미하다 돌아간 분이 바로 양귀비인데 현종의 아주 극진한 그런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종의 사랑을 배신하고 당시의 젊고 씩씩하고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안록산이라는 장군한테 반하게 됩니다.
그 안록산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안보면 몸이 막 비틀릴 정도래요. 그런데 어쩌다가 한 번씩 안록산이 궁중에 나타나면 자기종인 소옥이를 소옥아! 소옥아! 하고 마구 불렀다는 거래요. 왜 소옥이를 불렀겠어요? 소옥이에게 시킬 일도 없는데 소옥이를 그렇게 불렀다는 거래요. 소옥이를 부른 이유는 자기의 사랑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소옥이를 불렀다는 거래요.
예를 들어 무자 화두를 드는 분들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조주스님은 “무(無)라!” 하셨어요. ‘무(無)’라 즉 ‘없다’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없기 때문이 아니래요. 그 이유, 그 원인을 참구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렇듯이 화두 참구하는 분은 사자가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듯이, 양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 그 이유를 알듯이 참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으로 지혜롭게 참구를 하셔야 합니다.
선종(禪宗)의 조사 중에서 유명한 마조(馬祖)스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은 짐승 비슷한 그 얼굴에 음성도 좀 기성이었다고 해요. 혀를 내밀면 코를 덮힐 정도였어요. 걸음걸이는 소걸음 같았다고 합니다. 좀 특별했던 분이래요. 그런데 선지는 아주 대단해서 조사선을 확립하신 분입니다. 그런 마조스님도 젊을 때 공부할 때는 아주 어리석게 좀 둔하게 공부를 했던가 봐요. 그 전법원에서 공부하시던 때였는데 스승인 남악회양 선사가 보니까 그릇은 법기(法器)감인데 즉 공부하는 그릇은 아주 대단한데 그러나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남악회양선사가 공부하는 마조 앞에 가서 기왓장을 하나 들고 가서 덜덜 갑니다. 얼마를 갈고 있으니까 마조가 묻습니다.
“스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뭐하시려고 합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하니 스승은 “자네처럼 앉아서 공부한다고 공부가 되겠는가?” 그래서는 공부가 안된다 하면서 “수레를 끄는 소가 안갈 때는 소를 때려야하는가? 수레를 때려야하는가?” 하는 그 말에 마조스님이 확철대오 하셨다는 거래요. 수레가 안갈 때는 수레를 아무리 때려도 안갑니다. 소를 때려야 합니다. 그렇듯이 참선자는 아주 지혜롭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옛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씀을 합니다.
몇 년 하시고, 또 오랫동안 참선을 하신 분 가운데 공부가 잘 안되는 분은 “정말 내가 어리석지 않은가? 내가 둔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하시면서, 자기를 훤하게 알아서 어떻게라도 이 공부가 되도록 하셔야합니다. 잘 달리는 말을 준마라고 합니다.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린다는 거래요. 또 어떤 말은 채찍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냥 잘 달린다는 거래요. 이런 말을 중마(中馬)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피가 나도록 맞아야 달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어릭서은 우마(愚馬)라고 합니다.
이 공부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막 달리는 말처럼 그렇게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공부인은 늘 “과연 나는 어리석지 않은가? 정말 지혜롭게 공부하는가?”하는 자기 반성을 하면서 지혜, 지혜, 그리고 또 지혜롭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가 있는 선사들은 길을 가다가 산넘어 연기만 나도 저 연기는 뉘집에서 밥을 짓는 연기인데 지금 밥이 어느 정도 익어가는지 연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는 거래요.
그런 분은 대단하기도 합니다만 화두가 안되는 분일 수록 늘 지혜롭게 하셔야 합니다. 너무 강하게도 말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똑같지도 않고 급히 들어서도 안되고요, 또 느리게 해서도 안됩니다. 적당히 알맞게 해야 합니다. 그 알맞게란 말에, 그 적당히란 말에 모든 지혜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잘하시는 분은 어떤 일을 해도 지혜롭게 잘해서 참으로 세상도 이끌고 우주 만물의 스승까지도 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수목나 존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거부 장자의 아들이었다는 거래요. 어찌나 귀하게 자랐는지 쥐면 불듯 불면 날 듯 아주 애지중지 하게 자란 분이래요. 늘 업혀다니고 안겨 다녔다는 거래요. 하도 다니질 않아서 발에 털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경전에 묘사가 되는 분인데 그 수목나 존자가 철이 날 정도가 되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인생의 말씀을 듣게 해주겠다 해서 부처님 계신 곳까지 운하를 팠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자면 운하를 파가지고 아들을 데리고 부처님한테 가겠어요.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 법문을 듣습니다.
그 법문을 듣자마자 이 수목나 존자는 참 선근이 있는 분이라 바로 출가를 하겠다는 거래요. 아버지가 말려서 몇 년 뒤에야 아버지를 설득해서 출가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출가를 한지라 남들보다 더 애쓰고 더 노력했어요. 피골이 상접하고요, 발바닥이 갈라져서 피가 나고요, 뭐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새카맣게 형편없을 정도로 오직 공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공부가 안되는 거래요. 삼년을 해도 안되는 거래요. 그래서 하루는 나는 돈하고는 인연이 많지만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퇴소할 마음을 먹는 거래요.
부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고 척 나타나서는 “수목나야, 네가 세속에서 뭘 즐겼느냐?”하니 수목나는 “비파를 즐겼습니다.”했습니다. “비파는 어떻게 튕겨야 묘하고 좋은 소리가 나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니 “줄을 적당하게 조정하고 튕겨야 고운 소리가 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다. 공부도 네가 비파 튕기듯이 그렇게 해야 참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다. 너처럼 마음이 급하고 마음은 대단하지만 그렇게 무지하게 지혜롭지 못하게 그렇게 애쓰면 몸은 괴로워지고 공부는 어렵나니라. 늘 비파 치듯이 그렇게 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부는 비파 치듯이 아주 적당하게 아주 알맞게, 자기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자기의 역량에 맞는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공부입니다. 그 지혜롭게란 말, 적당이란 말, 알맞게란 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어리석고 막힘을 격발하여 해주시니 했습니다. 즉 대혜스님의 경책을 받아서 홀연히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을 때는 문득 홀연히 깨닫습니다. 참정이란 직위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공무원이래요. 공무원 가운데 중급 공무원이래요. 여기 이 자리에도 공무원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서장에 등장하는 분들을 보면 상당수가 깨친 분들이래요. 그렇지만 그 분들이 특별한 분들이냐? 아닙니다. 중국 당시의 사대부들이 지식층이기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분들이래요. 즉 여기 계시는 여러분도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래요.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다 했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디는 거래요.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과 성품이 있다는 거래요.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아주 못난 땅 속에 있는 지렁이나 개미 새끼같은 미물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는 거래요.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은 가지고 태어났고, 누구나 본래는 부처라는 거래요. 본바탕은 부처랑 똑같다는 거래요. 다만 금생의 업이 좀 두터워서 잘 태어나지 못하고 좀 둔하기는 하지만 근본 바탕은 부처님과 똑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이 공부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얼마나 돈독하고, 얼마나 지극하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갖느냐?가 아주 중요한 거래요. 그래서 진심으로 발심하고 참으로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면 누구나 깨칠 수 있다는 거래요.
부처님 말씀에 의식만 있으면 깨칠 수 있다 했습니다. 의식이란 정상적인 정신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정신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깨칠 수 있다는 거래요, 유명한 만공스님의 말씀에 장맛만 알 수가 있으면 깨칠 수 있다 했습니다. 장맛이란 간장이나 된장이나 고추장을 말합니다. 그 맛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어요.
즉 부처님 말씀처럼 의식만 있으면 깨친다는 거래요. 그래서 여러분께서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본바탕은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타고 났다”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주리반타카라는 그런 그 아주 저능아인 제자가 있었어요. 그 분은 어찌나 저능아인지 부처님이 뭘 시킬 수 가 없었어요. “너 이거 해라!” 하고 시키면 그거 하다가도 우두커니 서있는 분이래요. 잊어버리고요. “너 저거 해라!” 하면 그거 하다가도 우두커니 서있는 거래요. 이렇게 하도 답답한 사람이라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주 동정어린 말씀을 하시는 거래요.
“주리반타카야! 너는 다른 것은 일체 하지 말고 ”쓸고 닦으리! “쓸고 닦으리만 해라!” 하셨습니다. “쓸고 닦으리”란 마음의 때를 쓸고 마음의 때를 닦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리반타카는 어찌나 어리석든지 ‘쓸고’ 하다가는 ‘닦으리’를 잊어버리고 ‘닦으리’ 하다보면 ‘쓸고’를 잊어버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리반타카는 아주 의지가 강했던 분이래요. 부처님이 하라는 그대로 하는 분이래요. 그렇게 어리석고 저능아이고 둔재이지만 하라는 그대로 하고 r그처럼 하고 또 하고 또 하니까 마음이 열리는 거래요.
그래서 남방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분도 깨칠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래요.
아무리 흔히 장애자이다, 둔재다 해도 사실 그 주리반타카 같은 둔재는 드뭅니다. 그러나 주리반타카도 깨칠 수 있었어요. 다만 하지 않아서, 의지가 없어서, 참으로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못해서 깨치지 못하는 것이지 이 공부는 누구나 깨칠 수 있다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강의 원문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정견(情見)은 알음알이를 말합니다. 즉 지해(知解)를 말해요. 양변을 초월하지 못하고 무(無)를 취하면 유(有)를 버리고 유(有)를 취하면 무(無)를 버리는 알음알이에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선에서는 이 알음알이를 아주 경계합니다. 이 알음알이 즉 지해(知解)란 일부의 지식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알음알이를 주의하고 조심해야 하느냐?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입니다.
말길이 귾치고 생각마저도 끊치는 데서 발견아 되는 도리이기 때문에 알음알이로는 아무리 생각을 잘하고 말을 잘해도 불법9佛法)을 볼래야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불법은 사량분별로서는 알지 못한다고 부처님께서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원각경에 보면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의 온갖 경계를 헤아릴 진대, 반딧불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될 수가 없다,” 하는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법은, 즉 화두 참구는 절대 지식으로, 알음알이로 따지고, 사량하고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하면서 오직 오직 오직 단순하게 의정을 일으켜야돼요. 그래야 참으로 타파를 하고 깊은 경계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유명한 정신세계의 거인들이란 분들도 거의 의식세계의 수준을 못 넘어요. 그 유명한 야스퍼스나 프로이드, 융같은 그런 분들도 의식세계를 넘지 못했어요. 그 분들도 무의식 세계를 이야기 하는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이 화두공부에서는 의식세계에서 이러쿵 저러쿵하는 그런 공부는 공부취급을 안해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화두를 하는 자체가 아주 고급스러운 정신세계에서 자기 수행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훗날 공부가 잘된 상태에서 동중(動中)의 일을 지나가서 몽중(夢中)의 일여(一如)한 상태만 되어도, 그 유명한 철학자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들의 저술을 비추어 보듯이 자상하게 읽어보고 나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내가 벌써 이 정도나 되었나 싶을 정도로 깊은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화두자체가 그만큼 깊은 경지를 체험하게 해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화두 참선이다 하는 생각을 늘 하셔도 좋습니다.
선종 사찰의 일주문에 들어가다 보면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 하는 주련이 붙어있는 곳이 많아요. 이 문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막존지해라, 즉 알음알이를 갖지 말아라” 합니다. 즉 참선하는 분은 일체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거래요. 즉 분석하고 사량하고 따지고 요것 조것 지해로서 아는 마음을 일체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이 공부를 진심에서 진정으로 깊이 있는 그런 공부를 하시게 됩니다.
조사가 즉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어요. 서쪽 나라인 인도에서 동쪽 나라인 중국으로 건너와서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바로 알아서 불입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알음알이를 그만큼 두려워했던 거래요. 그런 알음알이를 없애는 작업이 바로 선(禪)이래요. 옛날에 위양종을 창종(創宗)하신 위산 영우선사(僞山 靈祐 서기771~853년, 위양종의 개조)라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대단한 스님이래요. 사제 중에 향암지한 선사(香嚴 智閑 서기 ?~898년)라는 분이 계셨어요. 어느 날 향암한테 물었어요.
“그대가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에 그대의 참모습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까 향암스님이 대답을 못하겠거든요. 우물 쭈물 하다가 스님께서 말씀해주실 수가 있으십니까? 하고 도리어 말씀을 해주기를 바라는 거래요. 그러니까 “이 사람아, 화두를 어떻게 설명해주는가? 자네도 참선하는 참선꾼인가?” 하고 호통을 치시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향암선사는 크게 실망을 해서 그 절을 떠나서 남양 해충국사라고 아주 유명한 선사가 있었는데 그 선사가 계신 암자로 가서요. 그 암자에서 머물면서 어느 날 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제법 큰 돌이 있었다는 거래요. 그 돌을 던졌는 거래요. 돌을 던지니까 저기 있는 대밭이 있는데 대나무 하나에 정통으로 맞은 거래요. 맞으니까 소리가 나는 거래요 그 소리에 깨쳤습니다. 깨치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대 위산 선사님, 대 위산 선사님!” 그 전까지는 그냥 위산 선사님 했는데 깨치고 나니까 이제는 대자를 붙여서 대 위산선사님했다는 거래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소승은 선사에게 도덕을 귀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선사께서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중히 여겼습니다.” 했답니다. 이 공부는 말로 글로 설파해주어서 깨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참으로 참구해야 합니다. 오직 참구, 참구,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셔야 합니다.
“정견(情見)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했습니다. 즉 알음알이에 떨어져 있었다는 거래요. 깨치고 보니까 그것을 느끼는 거래요.
강의 원문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 스스로 엉긴 것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엉키고 저렇게 엉키고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얽히고 설킨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즉 유를 집착하면 무를 버리고 무에 집착하면 유를 버려서 분별심으로 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강의 원문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풀렸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한번 웃음이란 한번 깨침입니다. 한번 깨침에 무엇이 풀렸느냐? 바로 의심 덩어리가 풀렸다는 거래요. 의심이 문득 풀려서 그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기쁘고 다행함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선사는 깨치고 나서 어찌나 좋던지 사흘이나 춤을 추셨다는 거래요. 그러면서 왜 그렇게 춤을 추시느냐하고 물으니까 “이 기분, 이 느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리요”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분처럼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어떻게나 좋던지 망아지처럼 하루 종일 잇발에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강의 원문
“큰스님께서 자세하게 내려주신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이런 자비야 말로 “참으로 큰 자비다, 대자대비다”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합니다. 조사스님들의 말씀에 스승 없이 깨치는 경우는 만에 하나도 없다 그런 말씀까지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깨치는 분들은 극히 드물다는 거래요.
강의 원문
“성중에 이른 뒤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릅니다.”
일상의 생활, 즉 밥 먹고 옷 입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것 까지, 일상생활의 가지가지가 옛 본분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즉 본성과 계합한다는 거래요. 본성과 계합한다는 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라는 거래요. 즉 부처의 세계라는 거래요. 평범하게 하는 그런 생활도 바로 부처의 경계라는 거래요.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늘 희희낙락하면서 즉 늘 맑고 아주 밝은 그런 경지에서 안락함을 느껴가면서 그래서 그냥 평범한 어쩌면 못난 아파트 같은 아주 보잘 곳 없는 그런 곳이래도 깨친 분은 그 자리가 바로 불국정토 아닌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강의 원문
“그래서 이미 구속되고 막히는 감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분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구속이 안돼요. 즉 속박이 안되고 막히는 감정도 없고 그래서 흔히 “대자유인, 대 해탈인이 된다” 합니다. 아주 자유스러운,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활달하게 마음대로 천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분이 바로 깨달은 분입니다. 그런 분을 ‘대해탈인’이라고 합니다.
깨치기 전에는 ‘아주 기특할 것이다’ 하는 깨침에 대한 이런 저런 번뇌망상을 했는데 막상 깨치고 나니까 기특할 것도 없는 거래요. 일상생활 그 자체래요. 즉 평상심이래요. 그래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강의원문
“그 나머지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습니다.”
묵은 습관이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즉 깨치기 전에는 조금만 미우면 미워 죽겠는 거래요. 화도 벌컥 벌컥 내고 얼굴도 조금 좋으면 막 펴지고 기분 나쁘면 풀어지고요.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려워요. 즉 감정 처리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깨치고 나니가 아주 무심한 거래요. 전연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무심한 그런 분이 바로 도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래된 장애 즉 속세의 장애 그간 깨치기 전에 오랫동안 장애스러웠던 즉 도를 방해하고 도를 장애했던 오래된 그 장애- 그것을 보통은 오욕이라고 합니다. 오욕, 칠욕이라고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욕망들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욕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재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합니까? 돈, 돈,돈 합니다. 요즈음은 돈 사상이 너무 팽배해서 인사도 “돈 많이 버십시오” 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그간 공부하는데 그렇게 장애가 되는 거래요. 그런 생각 때문에 공부가 안됐어요. 또 색(色 )즉 이성에 대한 감정도 장애가 되지요. 또 그런가 하면 먹는 것, 어떤 분은 먹는 것을 그렇게 따집니다. 어디에서 좋은 음식이 있다 누구집이 잘한다. 뭐 서울에서도 어떤 집이 일류다 하면 메워터진다는 거래요.
또 명예가 있습니다. 세속사람들은 명예를 아주 좋아합니다. 명예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분이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화두가 좋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 사람은 “화두가 뭐꼬?” 할 거래요. 숙(宿)- 잠자는 것도 중요합니다. 잠자려고 하는 그 근본 욕망이 공부를 그렇게도 장애했어요. 그런데 깨치고 보니까 오래된 그런 장애도 조금씩 경미해졌다 즉 가벼워졌다는 거래요.
그러나 여기의 문장에서 보면 이참정은 확철대오는 못하신 것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경미해졌다는 그런 표현을 쓴 것 같아요. 확철대오하면 조금씩 경미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심할 정도로 아주 경미한 정도가 될 것입니다.
재물로 말하면 방거사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거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가 네명이 다 도인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집안인데 유산이 아주 많았는 거래요. 그 유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나누어 주기 좀 어려운 것은 동정호라고 하는 커다란 호수에 다 처넣는 거래요. 즉 살아가는데,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다는 거래요.
그래서 그 재물을 다 동정호에 쳐 넣고 유유자적하게 사시다 가신 방거사란 분이 계셨는데 그런 분처럼 깨달은 경지에 있어서는 재물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참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번거롭고 괴롭게 하는 물질 정도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뭐 그렇게 까지 안가더라도 화두가 참으로 아주 성성하고 적적한 경지가 되면 본인 스스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재물이다 그렇게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강의원문
“이별할 때 간절히 일러주시는 말씀은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갔으나,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부딪히는 일마다 막힘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있게 해주신다면, 겨우 스님의 법석(法席)에 허물이 없을까 합니다.”
스승인 대혜스님선사께서 간절하게, 고구정녕하게, 노파심절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비로소 문에 들어갔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깨치면 전혀 막힘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지
정견(情見)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으나 대혜 스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서 일상생활에 구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묵은 습관과 장애도 경미해졌다고 했다.
그동안 정견에 걸려서 즉 알음알이에 떨어져 걸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걸리고 저렇게 걸리고 살아가는데 안걸리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부딪히는 일마다 여전히 막히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가르침을 더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글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측면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는 오직 확철대오 하나만을 깨달음으로 인정하는데, 이참정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공부하고 닦을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에서 더 이상 닦을 필요 없는 확철대오의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조사선(祖師禪)의 진면목(眞面目)이다.
선가에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오랜 이야기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이참정은 돈오점수를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9. 이참정에게 답함
그 깨침의 경 즉 불교 공부를 한 효과다 했습니다. 이거야 당연하지요.
만약 한번 웃는 가운데 백가리를 통달하고 천가지를 감당하는 국량(局量)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능히 우리집에 과연 전할 수 없는 미묘함이 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흔히 하나를 통하면 전부를 통한다고 합니다. 하나를 증득하면 백가지 천가지를 증득하고 하나를 깨치면 전부를 깨친다고 합니다. 불법은 아주 미묘해요. 천수경 처음에도 무상심심미묘법이라고 있어요. 아주 위업고 아주 미묘한 법이 불법이래요. 그래서 그 미묘함에 인생과 청춘을 아주 송두리째 던져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종교적이래요. 어떤 철학보다도 아주 심오해요. 어떤 학문보다도 참으로 깊이가 있어요. 어떤 이론보다도 더 장한 것이 바로 불법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교를 만난 것도 다행스럽고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요즈음은 불교가 여러 가지 도전을 받고 시련을 겪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종교 자체는 어떤 종교하고도 비교가 안돼요. 불교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부심과 긍지를 늘 가져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체험을 해보시고 기독교의 성경이나 이슬람의 코란이나 그 밖의 어떤 종교 서적이나 철학적인 서적이나 또는 요즈음의 유명한 첨단을 걷는 서적들과도 비추어보세요. 그러면 불교가 얼마나 대단하다 그 수행이 얼마나 장하냐? 이 수행을 해도 되느냐 안해도 되느냐 바로 느껴져요. 안하면 자기 손해래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불교적인 수행입니다.
여러분께서 이렇게 너무 조그마한 법회이지만 이런 법회에 나온 것 만도 정말 다행스럽고 자랑스럽다 하는 생각을 해도 조금도 과한 표현이 아니래요. 여러분이 동정일여한 상태만 꼭 되어보세요. 그 정도만 되어도 이 정도만 되도 됐지 뭐 이상 할 필요가 있나 할 싶을 정도래요. 그런 상태에서는 화두선보다 묵조선이 더 깊게 느껴져요. 더 마음의 평화와 안락을 느껴요. 화두선은 좀 강해요. 진취성이 있어요. 즉 맹렬성이래요. 고급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막 질주하듯이 그런데에 비유하면 묵조선 같은 것은 좀 쉬어가면서 좀 놀아가면서 하는 공부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럴 정도만 느껴도 수행은 안할 수 없다 오직 이것뿐이다 하는 생각을 하시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이런 좋은 문중에 들어왔으니까 이 공부를 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청춘을 참으로 화려하게 좀 빛나게 해서요, 일생을 좀 멋지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여러분이 바라는 바를 전부를 충족시켜줄 수가 있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바탕이 있는 공부 중에 공부다 이 선이다. 즉 불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늘 자부심과 긍지심을 가지면서 열심히 하고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도 좀 피로하고 좀 괴롭겠지만 멀리 오셨으니까 또 이렇게 사람은 좀 이렇게 애쓸 때도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여러 가지가 풍요롭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럴 때일 수록 자기를 참으로 잘 다스리고 자기 관리가 잘 되고 자기문제를 좀 잘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참으로 더 큰 행복을 느껴요. 그렇게 하려면 수랭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부처님이 깨치기 직전에 네란자라 근처 보리수 밑에 앉으시면서 맹세했듯이 내가 이 자리에서 뼈가 뿌러져도 좋다. 내 몸뚱아리가 없어져도 좋다 오직 오직 타파하고야 말겠다, 깨치고야 말겠다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시고 앉으셨듯이 여러분께서도 잘 앉아서 하룻동안 정말 성성하고 적적한 그런 좋은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김동조님의 댓글
김동조 작성일
큰스님 고맙습니다.
서암거사님도 감사드립니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