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참구법 제 1강 - 간절히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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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12 조회5,448회 댓글0건본문
저를 따라해주십시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흔히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우리들의‘주인공“이다 합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해요. 그러나 마음이라는 말도 맞지가 않아요.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도 합니다.
그 유명한 육조혜능(六祖 慧能 638~713)대사께서는 남악 회양(南嶽 懷讓, 677∼744)선사가 오니까 “무슨 물건이 왔는고?” 하셨다는 거예요. 회양선사께서는 이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8년간이나 쩔쩔 매시다가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해서 육조스님의 적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또 그것을 흔히 부처라 하기도 합니다. 이름이 부처일 따름 이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소위‘이뭣고’라는 화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뭣고를 드시는 분은 이뭣고를, 마삼근을 드시는 분은 마삼근을, 아니면 또 다른 화두를 드시는 분은 다른 화두를 꼬옥 타파하시기 바랍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시는 분은 삼천대천세계를 희롱하듯이 마음대로 유영하실 수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분은 생사윤회의 초탈을 넘지 못하고 늘 괴롭고 괴롭게, 어렵게, 힘드시게 사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여섯 번,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참선은 어떻게 하는가? 화두 참선법에 비교적 자상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이 시간에 좀 발심을 하고 아주 신심을 내셔서 여러분의 일생에 아주 좋은 그런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항간에 선(禪)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해요. 제방의 선원이나 수행처에는 ‘참선하러 오는 분들로 상당히 붐빈다’그런 이야기가 들려요. 우리 조계종에서도 정통 간화선을 보급하려고 대단히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비슷한 그런 경향들이 많다는 거에요.
유럽이나 미주에서는 선에 대한 붐 비슷하게 선에 대한 고조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동남아에 다녀오신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떤 수행처에 가니 서양에서 온 각 수행자들로서 북새통을 이루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있습니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으로 선에 대한 더 고조가 되는 듯하다 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중근동이나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거의 각국에서 선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일종에 붐 비슷하게 선에 대한 고조가 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으로 선에 대해서 더욱 고조가 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다는거예요.
다른 종교 이야기를 해서 좀 뭣합니다만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까지도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거래요, 그래서 몇 년전에는 로마 교황께서 동양의 사제들이 동양적인 수행을 한다 해서 대노하셨다는 그런 기사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왜 그러면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고조가 되고 있느냐? 한마디로 선을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있다는 거래요. 인류가 그간 산업화와 공업화로 물질적으로 상당히 성공해서 아파트도 좋은 아파트 짓고, 상당히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가난했을 때는 돈만 벌어서 그렇게만 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돈을 많이 벌고 물질의 풍요 속에 ‘소비가 미덕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되니까 가난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괴롭고, 마음이 더 어두워지고, 불만스럽고, 그래서 사는 재미를 훨씬 더 못 느낀다는 거래요, 선진국에서는 자살자가 많이 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주 문제가 되고 있답니다.
왜냐? 그간 물질만 좀 많이 갖추면 그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았는데 즉 물질 자체가 행복 자체였는데 물질을 갖추고 보니까 그것은 살아가는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된다,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닦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바로 선(禪)인거래요. 한 십여전에 돌아가신 인도의 유명한 수행자인 라즈니쉬는 “미래의 세계는 선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다고 그래요. 최근에 첨단을 걷는 미래학자들 가운데는 이 지구가 앞으로 좀 평화스럽고 좀 잘 살고, 좀 인간다운 그런 삶을 영위하려면 선이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요즈음은 많답니다.
어쨌든 선에 대한 관심도 많고 미래지향적인 그런 인사들이 긍정적인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하루에 십 분이나 삼십 분씩만이라도 자기 수행을 한다면 아마 우리 지구촌이 살만한 좋은 곳이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이것을 갈파했어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수행을 해야 하고, 수행하더라도 자기 불성을 깨쳐야 됩니다. 즉 영원한 생명과 무한 능력을 계발해서 거기에서 진정으로 느끼고 살아가지 않으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오직 이 길 뿐이다’ 하셨어요.
삼대 성인 중에 한 분인 공자님께서는 도에 대해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조문도(朝聞道)이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아침에 도(道)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 이예요. 그 죽음도 아침에 도만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도는 그런 것입니다. 성인의 그런 말씀에 따라서 그 이후에 무수한 사람들이 출가를 하고 도를 닦고 수행에 전념을 했어요.
우리 불교 선사들이나 조사들 중에서는 대단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 선을 위해서 수행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던졌어요. 그야말로 청춘을 불사르고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쳤어요. 그 유명한 분 중에 한분이 이조(二祖) 혜가(慧可, 487~593)스님의 단비(斷臂)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셨어요. 그 당시는 양나라 시대였어요. 무제하고 이런 저런 불교에 대해서 좀 나누어 보니까 아직도 법을 펼만한 그런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양자강을 건너서 숭산 소림굴로 잠적을 합니다. 그 소림굴에 들어간지 9년만에 어느 날 ‘대사,대사’ 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습니다.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이가 있었어요.
달마대사께서는 소림굴 안에서 한참 면벽을 하고 선정에 들어있는데 한 서너번을 그래도 뭐 꼼짝 않는 거래요. 손님이 오면 얼른 일어나서 ‘어서오십시오’ 하면서 반기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데 달마대사께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꼼짝 않는 거래요.
그분이 누구냐? 그 분은 신광(神光)이라고 아주 똑똑하신 분입니다. 천재 중에 천재래요. 학문적으로는 배울 것 다 배우고 더 이상 더 배울 것이 없어서 달마대사라는 분이 도가 높다고 하니까 내가 도를 닦아야겠다하고 불원천리하고 소림굴에 당도한 거래요. 그런데 조금도 반기지도 않고 뒤도 안돌아보는 거래요.
그분도 프라이버시가 대단한 분이라 그냥 버티고 서 있는 거래요. 마침 함박눈이 그냥 막 쏟아지는거래요. 그 눈을 다 맞고 밤새도록 서 있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날이 뿌옇게 새는데도 그렇게 서있는 거래요. 그래도 달마대사는 꼼짝 않고 면벽 좌선하고 있었어요.
그 때 또 “대사님, 대사님” 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달마대사께서 뒤를 돌아보더니 이 도는 보통도가 아니다 네가 참으로 도를 닦으려면 증표를 대라 뭐 표시가 있어야 ‘네 마음을 알 수 가 있지 말로 닦을 수가 없는 도다’ 하는 거래요.
마침 저만큼에 칼이 있었어요. 그 칼을 가지고 와서는 자기의 팔을 뚝 짜르고 나서는 그 팔을 바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화나 드라마나 무슨 연극이나 아니면 또 소설류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보기도 했을텐데 아마 그런 장면을 본적은 없을 겁니다.
저도 이 절에 와서 한 삼년 째 되는 해에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삼일이나 고민을 했어요. 진짜일까? 침소봉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저런 별생각을 다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 날, “틀림 없을 거야, 그럴 수 있을거야!”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는 좀 어렵지만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만 그렇게 자기의 팔을 잘라서 척 바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몸의 일부를 막 태워서 구도를 할 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던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조금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 법이래요.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잘 이해가 안될 거래요. 화두가 좀 잘 되어서 몽중일여(夢中一如), 꿈 속에서도 아주 여여(如如)한 그런 상태가 되면 ‘그럴 수 있겠다’,‘나도 때로는 그러한 마음을 낼 수 있겠다.’그런 생각까지도 낼 수가 있습니다.
이 공부는 ‘어떤 공부보다도 수승하다’‘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도 좋은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해라 해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안하면 자기 손해라는 거래요. 어쨌든 인생의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도에서만 느낄 수 있다,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 수행에서 인생의 행복을 못 느끼면 반쪽 인생도 못 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제 일성이 뭐냐? 첫마디가 아! ‘기특하구나’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구나’ 했어요. 모든 중생이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저 심지어 땅속의 지렁이 같은 아주 미물까지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어요.
부처님은 아주 천재적인 분이예요. 천재 중에 천재래요. 그 초롱초롱한 지혜, 그 천재적인 지혜를, 부처님 뿐만 아니라 여러분, 여러분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갖추었다는 거래요. 경전에 보면 부처님 대단한 분이구나, 이런 분도 있구나, 이런 양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하시는 것이 대단한 분이였습니다. 또 누가 질문을 하면 기다렸다는듯이 지혜의 말씀을 그대로 설파하시는 거예요.
대단한 지혜를 가진 분이 부처님이래요. 그런 천재적인 지혜를 여러분도 다 가졌다는 거예요. 그 천재적인 지혜만 가진 것이 아니라 복덕도 대단하게 구족한 분이래요.
여기 우리 상단에는 공양물을 안 올렸을 텐데 큰 법회에 가면 꼬옥 공양물을 올립니다. 공양물을 어떤 절이든 어떤 법회든 다 올리는 것을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공양물을 어떤 절에서도 받아드실 정도로 그렇게 복덕을 구족한 분이래요.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그와같이 얻어먹을 수 어려운 것인데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래요.
즉 부처님과 같은 천재성과 그 복덕까지도 다 구족한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어떤 분도 다 갖추었다는거래요.
그래서 수행을 할 분은 기본적으로 나도 부처가 될 수가 될 수 있다.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부처님과 같은 그런 대단한 복덕과 지혜를 갖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열반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다.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 즉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본래는 부처다. 본 바탕은 부처와 똑 같다는 거래요. 그런 생각을 누구나 꼬옥 하시길 바랍니다. 수행은 그러한 바탕에서 그런 출발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구함은 바깥에서 구해요 돈도 밖에서 벌고 명예나 권세나 그 어떤 것도 밖에서 구하고 밖에서 얻습니다. 그런데 수행은 내 자신에게서 얻어요. 내 자신에게서 느끼는 것 내 자신에게서 보는 거래요. 그래서 수행은 내가 얼마나 발심했느냐? 얼마나 마음을 참으로 냈느냐에 따라서 아주 쉬울 수도 있어요. 그런가하면 발심하지 못하면 참으로 큰 마음을 못내면 어렵고 어려운 일이 수행이예요.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이 공부를 참으로 하면 나도 깨칠 수 있다. 그런 그 마음을 확신하면서 그래서 이 공부를 시작하려합니다.
본래는 다 그렇게 다 부처가 되고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부처님처럼 완전한 인격체, 그야말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러면 보통사람들은 못되느냐?
번뇌 망상 때문에 그런거래요. 즉 이런 번뇌 저런 망상 때문에 결국은 부처가 못 된다는 거래요. 사람은 금생뿐만 아니라 전생, 전생, 수십생, 수백생, 수천생 살아왔다는 거래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무려 팔천회 가량 출현했다는 거래요. 팔천가운데 칠천오백번 사람이 아닌 다른 중생으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우리같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 미물로 태어난 회수가 엄청날 거래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겠지요. 아주 오랜 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잘못 저런 잘못 별 잘못을 다 저질러왔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업이 되어가지고 탐진치 삼독심이 꽉 쌓여있는 거래요. 그래서 분수에 넘치는 탐욕심을 내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막 화도 내는가 하면 세상의 이치를, 삼라만상의 이치를 모르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까지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별 별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거래요. 그 번뇌 망상이 마음을 흐리게 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마음을 참으로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중생을 이야기할 때 미망중생이라 미혹 중생이다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즉 어둡고 탁한 중생이라는거래요. 어둡고 탁하기 때문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그래서 뭘 해도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렵고, 괴로워요. 그 어두운 마음, 그 탁한 마음을 없애는 작업이 뭐냐? 그것이 바로 수행이예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을 닦는다, 다 같은 말입니다.
마음을 흔히 ‘허공같다’라고 말합니다. 저 텅텅빈 허공과 같다는 거래요. 그런 허공같은 마음을 어떻게 닦을 수 있겠어요. 그런 마음은 걸레로, 행주로 뭘 닦듯이 닦을 수가 없습니다. 그 흐린 마음을 밝게 하고 맑게 하는 것은 마음을 닦는다 합니다.
마음을 닦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냐? 그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는 거래요. 마음을 놓는 게 그것이고 마음을 쉬게하는 거예요. 마음을 놓는다, 마음을 쉰다, 마음을 비운다, 라는 말은 일체 잡스런 생각을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옛 어른은 천번 쉬고 만번 쉬라 했어요.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거래요. 어떤 선사는 쉬면 곧 깨닫는다 그랬어요. 쉬면 참으로 쉬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거래요, 유명한 인제스님은 쉬기만 하면 그대로 청양법신이다 했어요.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쉬고 쉬어서 그 쉰다는 생각도 아주 쉬어서 그 달마대사는 심여창벽(心如障壁)하면 가이입도(可以入道)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장벽같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장벽처럼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그러면 도에 들어간다, 그런 말씀을 했어요.(주: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 가히 도에 들어간다.-달마대사-) 어쨌든 그렇게 전혀 흔들림이 없는 조금도 번뇌 방상이 크게 무심한 그 자리가 부처의 세계요, 바로 열반의 세계라, 그 세계가 생사까지 초탈하는, 생사까지도 마음대로 하는 그 세계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무업대달(無業 大達)이라는 선사가 계셨어요. 그 스님한테 “스님! 스님! 법문 좀 해주십시오”하고 법문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았던가봐요. 그런데 선사는 “예끼놈아, 법문 법문 하지 말고 망상 피우지 말라!” 하고 호통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본에서 보면 법문도 망상이래요, 법문도 외면해야되요.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치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외면하라는 그런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어쨌든 옛 어른 중에는 완전히 자기를 쉬시는 분이 있어요. 자기를 쉬고 자기를 놓고 자기를 완전히 비우시는 거래요. 그런 분을 왈 대인(大人)이라 하는 겁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 스님도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집이 아주 가난했다고 그래요. 스물네살 때인데 더벅머리 노총각으로 땔감 나무를 팔아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하루는 땔감을 한 짐 지고 시장을 가고 있었어요. 가노라니까 누군가가 금강경을 읽어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는 이 말에 퍼뜩 깨쳤어요.
아주 대단하신 분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 가운데 부처님 말씀 하나를 듣고 바로 깨치는 그러한 대단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쉬어서, 참으로 놓아서 한마디에 바로 깨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비우지 못하는 것이 아주 한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비우지 못하느냐? 하면 중생살이 자체가 번뇌 망상으로 똘똘 뭉쳐있으니까, 그래서 입만 열만 움직이면 번뇌 망상이어서 늘 어둡고 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릴 적부터 너무 지식을 주입시켜요 그래서 책 속에서 얻은 지식가지고, 지식이 판을 치는 이 지식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생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입니다. 이 지식도 참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 바탕에서 보면 그것도 망상이래요, 인간이 지식 덕분에 풍요롭게 살아가지만 지식 때문에 점점 왜소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식 때문에 불행하다 라는 아이러니가 생기고 있습니다.
현대인일수록, 지식인 일수록, 앞서간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더 불행해요.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꼬옥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도 그냥 보통 수행 정도가 아니라 좀 진지하게 참으로 해야 진정한 그런 행복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하더라도 이것저것 너무 복잡하고 다단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좀 단순화시키세요. 중요한 것만 생각을 해요. 행동반경도 너무 넓게 가지지 말고 가급적 좁히고 분명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하시는 일도요, 너무 복잡하고 다단하게 하시지 마시고 한 가지를 하더라도 집중해서 하는 습을 들이면 좋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집중해서, 단순화 시켜서, 화두에 모든 것을 바치듯이 그렇게 해야 출세할 수 있고 이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에서 좀 살맛나게, 좀 행복을 느끼면서, 좀 화평스럽게 그렇게 사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좀 쉬면 얼마나 좋겠어요. 쉬고, 놓고, 비우질 못하니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한탄스럽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못 비우는 것을, 그 못 쉬는 것을, 그 못 놓는 것을 억지로 놓게 하는 방법이 뭐냐? 그것이 선(禪)이래요. 이 선이라는 말을 고대 인도말인 산스크리트 말의 디야나(dhyāna)에서 나온 말입니다.
팔리어로는 자나(jhāna)라고 합니다. 그 말은 사유(思惟)한다는 말입니다. 즉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유수(思惟修), 생각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성품을 단박 깨쳐서 부처가 된다고 했어요.
선의 요지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화두선 같으면 화두에 집중했어요. 선할 때나 염불할 때 앉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그 오만 생각이 가마솥에 물 끓듯이 그렇게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많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도 한 곳에 집중되면 아주 고요해집니다.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안락을 느끼게 되고, 아주 편안하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더 깊어져서 깨쳐서 생사까지도 해탈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선의 요지는 “집중을 해서 깨치는 방법이 바로 선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선 가운데 최상급의 선이 뭐냐? 바로 화두선이다 합니다. 바로 간화선이다 합니다. 그렇다면 왜 화두선이 좋으냐? 왜 화두선이 최상급이냐? 하는 말을 하면 화두선은 집중이 잘 된다는 거래요. 회두에 진의(참 의심)가 나면 집중이 돼도 아주 잘되고, 집중이 잘 되고 깨치면 바로 부처 경계래요. 그래서 회두가 수승하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화두란 말은 뭐냐? 어떤 것이 화두냐?
화두란 참선자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말합니다. 깨쳐야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고칙(古則)이다 합니다. 옛사람들이 만든 법칙이다, 하는 거래요. 공안(公案)이다 이렇게도 이야기도 합니다. 공안이란 공부안독(公府案牘)이란 말의 준말입니다, 엣절에는 관공서를 공부라고 했습니다. 안독(案牘)이란 뭐냐.? 법령이나 예규같은 것입니다. 즉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하고 상벌을 주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 것은 예규에 따랐다고 해요. 그 예규와 같다고 해서 공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두, 고칙, 공안은 옛 조사스님들이 정한 법문이래요. 정한 말씀입니다. 즉 조사스님들이 하신 말씀들 그런가 하면, 종사가 남긴 심지를 깨칠 때의 여러 가지 기연, 학인을 인도하는 행위의 종려를 참선자에게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게 하고, 과제로 준 것이 바로 화두랍니다.
화두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뭣고, 마삼근, 전정백수자등 천칠백 공안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천칠백이란 숫자는 경덕 전등록에 나오는 불조(佛祖)의 숫자가 천칠백 분이다 해서 천칠백 공안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그 화두란 아주 대단한 법문이래요. 법문도 보통 법문이 아니래요. 그런데 화두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요. 동문서답과 같고 기상천외의 말씀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화두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천하의 무수한 선지식의 알맹이나 살림살이가 다 드러난 법문 중의 법문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깨치면 바로 부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부처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화두는 대단한 법문이고 깨치면 바로 부처경계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를 공부한다, 화두한다, 이 뜻은 뭐냐? 바로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라는 뜻이래요. 송화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두를 염불하듯이 외우는 사람이 있어요. 화두는 송화두가 되서는 안됩니다. 화두는 절대로 외워서는 안됩니다. 염화두는 말도 있어요. 화두는 염하는 것이 아니래요, 화두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래요,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이뭣고,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인가? 하고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화두 참구, 화두 공부입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자에게는 화두는 좋은 법문이기도 하지만 참선자에게는 깨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깨치기 위해서는 의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래서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치고 의정이 없으면 깨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화두 참구의 생명은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화두가 없는 분 계시죠? 계십니까?
제가 화두 두 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길 바랍니다. 첫째 염불하는 것이 뭐일까? 여러분들은 염불은 많이 해보셨을텐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셨을텐데 염불하는 것이 뭣고? 염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드시던지 아니면 마삼근을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동산 수초(洞山 守初: 910~990)라는 스님을 찾아뵙고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그 때가 여름이라 수초스님께서는 삼을 만지다 계시다가 삼을 들어보이면서 삼서근이라고 하셨더래요.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마삼근이라고 대답을 한 거래요.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왜 마삼근이라고 했는가?
그렇게 의심을 지어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네)
염불하는 것이 뭣고? 하던지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을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이 화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서 참구하시길 바랍니다.
이 화두는 평생 깨칠 때 까지 오직 한 화두로 참구해야됩니다. 혹시 하다가 보면 처음에는 의심 낼 줄도 모르고 아무 재미도 없는 그런 것을 느끼지도 하지만 하고 하고, 애쓰다 보면 참으로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 화두에 여러분의 지혜를 담아야해요. 그래서 어떻게라도 화두가 되게 하세요.
아까 마음의 평화라고 했는데 마음의 평화를 느낄 정도가 되면 아주 초보단계입니다. 초보단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가 있어요. 마음이 편안하면 사실은 크게 바랄게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삶의 진정한 행복까지는 못 느끼더라도 상당한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쨌든 화두에 인생을, 여러분의 청춘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쓰면 여러분이 바라는 바 전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화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이 있습니다. 포부도 있고 어떤 바람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또 연세가 높으신 분은 잘 살았다라고 하더라도 옛날 생각하면 후회스럽지 않은 분이 드물다고 해요. 혹시 잘 사신 분들이나, 지난 세월 동안 몹시 어려웠던 분들, 아주 괴로웠던 분들, 그렇지 않으면 한탄스러운 분들, 그런 분들일 수록 화두에 자기에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다 바쳐서 참으로 애써보겠다 그런 생각을 좀 가지십시오.
또 연세가 좀 높은 분들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나 장래에 대한 이런 저런 번뇌 망상이 있는 분들이나, 이런 의심 저런 의심이 많은 분은 이런 의심들을 똘똘 뭉쳐서 화두 의심으로 해결해 보세요. 그런 바램이나 한(恨)이나 그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똘똘 뭉쳐서 화두를 의심해서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서 화두를 참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을수록, 바람이 클수록 마음은 더 단단해야되요. 더 안정적이 되어야되요, 그래서 화두를 할 때는 마음을 아주 안정시키세요. 아주 고요한 물결처럼요. 그렇게 안정시켜서 화두만 분명하게,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화두만 지극하게 그렇게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어쨌든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문제 중에 문제다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쯤 여러분이 집에 계시면 한주동안 열심히 일하시고 사실 쉬실 시간입니다. 가족끼리 오순도순하게 먹을 것도 좀 내놓고 재미있게 쉬실 시간입니다. 오늘은 춥지는 않은 날지만 그래도 한겨울입니다. 여기까지 멀리 부산 서울에서 더 가까이는 봉화에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밤시간에 정진법회를 갖는 것은 시간을 아낀다는 뜻도 있지만 이 밤이 다 하면 새벽이 와요. 그렇듯이 여러분의 어두운 좀 탁한 그 마음도 여러분이 수행을 잘 해서 새벽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깨치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그리고 멀리 오셨으니까 어쩌면 특별히 왔으니까 좀 특별한 생각을 수행할 때는 꼬옥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통은 선방에서도 많이 졸아요. 번뇌 망상으로 하루종일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가하면 집에서 사시다 보면 게으름도 좀 피우고 싶고 이런저런 어리석고 못난 짓도 하실 거래요. 그런 분은 오늘 저녁에 용맹 정진할 때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지도록 지독하게 아주 대단한 생각으로 좀 비상한 생각으로 그렇게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도 그런 마음을 늘 가져서 수행할 때는 물론이고 평시 생활할 때도 그런 정신으로 사시라는 것이예요. 즉 비상하고 특별하고 어쩌면 지독하고, 이 추운 겨울날 산중까지 올 때는 보통 마음이 아닐 거래요. 그런 마음이 여기서 한번으로 희석되지 말고 집에 가서 늘 그런 마음으로 사시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법하게 앉듯이 여러분의 앉은 자세나 선 자세나 여러 가지가 집에 가서도 상응하도록 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런가 하면 집에서 보통 게으르게 살고, 좀 어리석게도 살고 좀 못나게도 사는 그런 분들은, 망상이나 피우고 그래저래 세월만 보내는 분들은 여기서 오늘 저녁에 용맹 정진함으로써 그런 마음을, 그런 습까지도 부처님 앞에 참회하시고 가세요. 집에 가서도 그런 모습으로, 그런 정신으로 사실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충전하지 못했던 그런 기분을 충전하듯이 꽉 채우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가셔서 잘 사시다가 밧데리가 떨어지면 또 충전하러 오듯이 정말 새 마음으로, 새 정신으로 바짝 차려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그런 계기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얼마 전에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에 앉으시면서 길상초라는 풀을 깔면서 맹세를 했다는거래요. 어떤 맹세냐 하면 이 자리에서 나의 가죽과 살과 뼈가 없어져도 좋다,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이 이르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하는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고 앉으셔서 드디어 이레만에 그 새벽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보고 깨쳤다고 그래요.
여러분도 오늘 밤에 앉을 때 그런 마음으로 대단한, 참 비상한 마음으로 앉아서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수행은 즉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어떤 마음으로 딲느냐? 얼마나 많이 갖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갖추고 참으로 발심하고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면 이외로 쉽게 바로 되요.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갖추지 못하고 즉 발심하지 못한 분들은 어렵고 어려운 일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참으로 제대로 마음을 내야 마음 닦기가 쉽다, 쉽게 닦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 때 한번 한번을 예사롭게 들지 마세요. 한 번 한 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써보세요. 작가가 작품을 만들듯이 전력을 좀 투구해보세요. 그래서 참으로 그 한번 한번이 여러분의 보람있는 긍지로 참으로 느껴서 정말 오늘 하룻밤을 참으로 잘 보냈다. 그래서 이 하룻밤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노력한 것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禪)에서 노력했던 가치는 어떤 노력의 가치보다 더 대단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파스칼의 말씀에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고 우주의 어용이다.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여러분의 인생이 참선으로써 수행으로써 아주 영광스러워서 화려하고 빛나고 아주 성공되는 그러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화두 입구에 목숨을 놓았더니
밝고 신령하고 안록하도다
한 물건이
사물마다 그대로가 비로자나 법신이요
곳곳마다 금색 색이 아닌 곳이 없네
요다음 시간에는 화두 참구법에 대해서 조금 더 본격적으로 자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웬만하면 법문이나 들으러 오신 분이 계실 줄 모르겠으나 크게 바쁘고 크게 건강이 나쁘지 않으시지면 하룻밤 꼬옥 용맹정진하십시오. 용맹정진하고 나면 한 것만도 아주 다행스럽고 뿌듯하고 자긍심이 생깁니다. 꼭 용맹정진 하셔서 좋은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1강 -화두 이야기(2007년 1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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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흔히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우리들의‘주인공“이다 합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해요. 그러나 마음이라는 말도 맞지가 않아요.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도 합니다.
그 유명한 육조혜능(六祖 慧能 638~713)대사께서는 남악 회양(南嶽 懷讓, 677∼744)선사가 오니까 “무슨 물건이 왔는고?” 하셨다는 거예요. 회양선사께서는 이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8년간이나 쩔쩔 매시다가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해서 육조스님의 적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또 그것을 흔히 부처라 하기도 합니다. 이름이 부처일 따름 이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소위‘이뭣고’라는 화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뭣고를 드시는 분은 이뭣고를, 마삼근을 드시는 분은 마삼근을, 아니면 또 다른 화두를 드시는 분은 다른 화두를 꼬옥 타파하시기 바랍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시는 분은 삼천대천세계를 희롱하듯이 마음대로 유영하실 수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분은 생사윤회의 초탈을 넘지 못하고 늘 괴롭고 괴롭게, 어렵게, 힘드시게 사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여섯 번,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참선은 어떻게 하는가? 화두 참선법에 비교적 자상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이 시간에 좀 발심을 하고 아주 신심을 내셔서 여러분의 일생에 아주 좋은 그런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항간에 선(禪)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해요. 제방의 선원이나 수행처에는 ‘참선하러 오는 분들로 상당히 붐빈다’그런 이야기가 들려요. 우리 조계종에서도 정통 간화선을 보급하려고 대단히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비슷한 그런 경향들이 많다는 거에요.
유럽이나 미주에서는 선에 대한 붐 비슷하게 선에 대한 고조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동남아에 다녀오신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떤 수행처에 가니 서양에서 온 각 수행자들로서 북새통을 이루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있습니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으로 선에 대한 더 고조가 되는 듯하다 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중근동이나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거의 각국에서 선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일종에 붐 비슷하게 선에 대한 고조가 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으로 선에 대해서 더욱 고조가 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다는거예요.
다른 종교 이야기를 해서 좀 뭣합니다만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까지도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거래요, 그래서 몇 년전에는 로마 교황께서 동양의 사제들이 동양적인 수행을 한다 해서 대노하셨다는 그런 기사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왜 그러면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고조가 되고 있느냐? 한마디로 선을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있다는 거래요. 인류가 그간 산업화와 공업화로 물질적으로 상당히 성공해서 아파트도 좋은 아파트 짓고, 상당히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가난했을 때는 돈만 벌어서 그렇게만 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돈을 많이 벌고 물질의 풍요 속에 ‘소비가 미덕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되니까 가난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괴롭고, 마음이 더 어두워지고, 불만스럽고, 그래서 사는 재미를 훨씬 더 못 느낀다는 거래요, 선진국에서는 자살자가 많이 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주 문제가 되고 있답니다.
왜냐? 그간 물질만 좀 많이 갖추면 그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았는데 즉 물질 자체가 행복 자체였는데 물질을 갖추고 보니까 그것은 살아가는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된다,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닦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바로 선(禪)인거래요. 한 십여전에 돌아가신 인도의 유명한 수행자인 라즈니쉬는 “미래의 세계는 선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다고 그래요. 최근에 첨단을 걷는 미래학자들 가운데는 이 지구가 앞으로 좀 평화스럽고 좀 잘 살고, 좀 인간다운 그런 삶을 영위하려면 선이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요즈음은 많답니다.
어쨌든 선에 대한 관심도 많고 미래지향적인 그런 인사들이 긍정적인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하루에 십 분이나 삼십 분씩만이라도 자기 수행을 한다면 아마 우리 지구촌이 살만한 좋은 곳이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이것을 갈파했어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수행을 해야 하고, 수행하더라도 자기 불성을 깨쳐야 됩니다. 즉 영원한 생명과 무한 능력을 계발해서 거기에서 진정으로 느끼고 살아가지 않으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오직 이 길 뿐이다’ 하셨어요.
삼대 성인 중에 한 분인 공자님께서는 도에 대해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조문도(朝聞道)이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아침에 도(道)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 이예요. 그 죽음도 아침에 도만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도는 그런 것입니다. 성인의 그런 말씀에 따라서 그 이후에 무수한 사람들이 출가를 하고 도를 닦고 수행에 전념을 했어요.
우리 불교 선사들이나 조사들 중에서는 대단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 선을 위해서 수행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던졌어요. 그야말로 청춘을 불사르고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쳤어요. 그 유명한 분 중에 한분이 이조(二祖) 혜가(慧可, 487~593)스님의 단비(斷臂)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셨어요. 그 당시는 양나라 시대였어요. 무제하고 이런 저런 불교에 대해서 좀 나누어 보니까 아직도 법을 펼만한 그런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양자강을 건너서 숭산 소림굴로 잠적을 합니다. 그 소림굴에 들어간지 9년만에 어느 날 ‘대사,대사’ 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습니다.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이가 있었어요.
달마대사께서는 소림굴 안에서 한참 면벽을 하고 선정에 들어있는데 한 서너번을 그래도 뭐 꼼짝 않는 거래요. 손님이 오면 얼른 일어나서 ‘어서오십시오’ 하면서 반기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데 달마대사께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꼼짝 않는 거래요.
그분이 누구냐? 그 분은 신광(神光)이라고 아주 똑똑하신 분입니다. 천재 중에 천재래요. 학문적으로는 배울 것 다 배우고 더 이상 더 배울 것이 없어서 달마대사라는 분이 도가 높다고 하니까 내가 도를 닦아야겠다하고 불원천리하고 소림굴에 당도한 거래요. 그런데 조금도 반기지도 않고 뒤도 안돌아보는 거래요.
그분도 프라이버시가 대단한 분이라 그냥 버티고 서 있는 거래요. 마침 함박눈이 그냥 막 쏟아지는거래요. 그 눈을 다 맞고 밤새도록 서 있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날이 뿌옇게 새는데도 그렇게 서있는 거래요. 그래도 달마대사는 꼼짝 않고 면벽 좌선하고 있었어요.
그 때 또 “대사님, 대사님” 하면서 도를 닦으러 왔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달마대사께서 뒤를 돌아보더니 이 도는 보통도가 아니다 네가 참으로 도를 닦으려면 증표를 대라 뭐 표시가 있어야 ‘네 마음을 알 수 가 있지 말로 닦을 수가 없는 도다’ 하는 거래요.
마침 저만큼에 칼이 있었어요. 그 칼을 가지고 와서는 자기의 팔을 뚝 짜르고 나서는 그 팔을 바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화나 드라마나 무슨 연극이나 아니면 또 소설류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보기도 했을텐데 아마 그런 장면을 본적은 없을 겁니다.
저도 이 절에 와서 한 삼년 째 되는 해에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삼일이나 고민을 했어요. 진짜일까? 침소봉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저런 별생각을 다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 날, “틀림 없을 거야, 그럴 수 있을거야!”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는 좀 어렵지만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만 그렇게 자기의 팔을 잘라서 척 바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몸의 일부를 막 태워서 구도를 할 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던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조금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 법이래요.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잘 이해가 안될 거래요. 화두가 좀 잘 되어서 몽중일여(夢中一如), 꿈 속에서도 아주 여여(如如)한 그런 상태가 되면 ‘그럴 수 있겠다’,‘나도 때로는 그러한 마음을 낼 수 있겠다.’그런 생각까지도 낼 수가 있습니다.
이 공부는 ‘어떤 공부보다도 수승하다’‘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도 좋은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해라 해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안하면 자기 손해라는 거래요. 어쨌든 인생의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도에서만 느낄 수 있다,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 수행에서 인생의 행복을 못 느끼면 반쪽 인생도 못 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제 일성이 뭐냐? 첫마디가 아! ‘기특하구나’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구나’ 했어요. 모든 중생이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저 심지어 땅속의 지렁이 같은 아주 미물까지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어요.
부처님은 아주 천재적인 분이예요. 천재 중에 천재래요. 그 초롱초롱한 지혜, 그 천재적인 지혜를, 부처님 뿐만 아니라 여러분, 여러분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갖추었다는 거래요. 경전에 보면 부처님 대단한 분이구나, 이런 분도 있구나, 이런 양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하시는 것이 대단한 분이였습니다. 또 누가 질문을 하면 기다렸다는듯이 지혜의 말씀을 그대로 설파하시는 거예요.
대단한 지혜를 가진 분이 부처님이래요. 그런 천재적인 지혜를 여러분도 다 가졌다는 거예요. 그 천재적인 지혜만 가진 것이 아니라 복덕도 대단하게 구족한 분이래요.
여기 우리 상단에는 공양물을 안 올렸을 텐데 큰 법회에 가면 꼬옥 공양물을 올립니다. 공양물을 어떤 절이든 어떤 법회든 다 올리는 것을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공양물을 어떤 절에서도 받아드실 정도로 그렇게 복덕을 구족한 분이래요.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그와같이 얻어먹을 수 어려운 것인데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래요.
즉 부처님과 같은 천재성과 그 복덕까지도 다 구족한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어떤 분도 다 갖추었다는거래요.
그래서 수행을 할 분은 기본적으로 나도 부처가 될 수가 될 수 있다.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부처님과 같은 그런 대단한 복덕과 지혜를 갖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열반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다.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 즉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본래는 부처다. 본 바탕은 부처와 똑 같다는 거래요. 그런 생각을 누구나 꼬옥 하시길 바랍니다. 수행은 그러한 바탕에서 그런 출발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구함은 바깥에서 구해요 돈도 밖에서 벌고 명예나 권세나 그 어떤 것도 밖에서 구하고 밖에서 얻습니다. 그런데 수행은 내 자신에게서 얻어요. 내 자신에게서 느끼는 것 내 자신에게서 보는 거래요. 그래서 수행은 내가 얼마나 발심했느냐? 얼마나 마음을 참으로 냈느냐에 따라서 아주 쉬울 수도 있어요. 그런가하면 발심하지 못하면 참으로 큰 마음을 못내면 어렵고 어려운 일이 수행이예요.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이 공부를 참으로 하면 나도 깨칠 수 있다. 그런 그 마음을 확신하면서 그래서 이 공부를 시작하려합니다.
본래는 다 그렇게 다 부처가 되고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부처님처럼 완전한 인격체, 그야말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러면 보통사람들은 못되느냐?
번뇌 망상 때문에 그런거래요. 즉 이런 번뇌 저런 망상 때문에 결국은 부처가 못 된다는 거래요. 사람은 금생뿐만 아니라 전생, 전생, 수십생, 수백생, 수천생 살아왔다는 거래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무려 팔천회 가량 출현했다는 거래요. 팔천가운데 칠천오백번 사람이 아닌 다른 중생으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우리같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 미물로 태어난 회수가 엄청날 거래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겠지요. 아주 오랜 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잘못 저런 잘못 별 잘못을 다 저질러왔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업이 되어가지고 탐진치 삼독심이 꽉 쌓여있는 거래요. 그래서 분수에 넘치는 탐욕심을 내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막 화도 내는가 하면 세상의 이치를, 삼라만상의 이치를 모르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까지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별 별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거래요. 그 번뇌 망상이 마음을 흐리게 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마음을 참으로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중생을 이야기할 때 미망중생이라 미혹 중생이다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즉 어둡고 탁한 중생이라는거래요. 어둡고 탁하기 때문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그래서 뭘 해도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렵고, 괴로워요. 그 어두운 마음, 그 탁한 마음을 없애는 작업이 뭐냐? 그것이 바로 수행이예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을 닦는다, 다 같은 말입니다.
마음을 흔히 ‘허공같다’라고 말합니다. 저 텅텅빈 허공과 같다는 거래요. 그런 허공같은 마음을 어떻게 닦을 수 있겠어요. 그런 마음은 걸레로, 행주로 뭘 닦듯이 닦을 수가 없습니다. 그 흐린 마음을 밝게 하고 맑게 하는 것은 마음을 닦는다 합니다.
마음을 닦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냐? 그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는 거래요. 마음을 놓는 게 그것이고 마음을 쉬게하는 거예요. 마음을 놓는다, 마음을 쉰다, 마음을 비운다, 라는 말은 일체 잡스런 생각을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옛 어른은 천번 쉬고 만번 쉬라 했어요.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거래요. 어떤 선사는 쉬면 곧 깨닫는다 그랬어요. 쉬면 참으로 쉬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거래요, 유명한 인제스님은 쉬기만 하면 그대로 청양법신이다 했어요.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쉬고 쉬어서 그 쉰다는 생각도 아주 쉬어서 그 달마대사는 심여창벽(心如障壁)하면 가이입도(可以入道)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장벽같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장벽처럼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그러면 도에 들어간다, 그런 말씀을 했어요.(주: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 가히 도에 들어간다.-달마대사-) 어쨌든 그렇게 전혀 흔들림이 없는 조금도 번뇌 방상이 크게 무심한 그 자리가 부처의 세계요, 바로 열반의 세계라, 그 세계가 생사까지 초탈하는, 생사까지도 마음대로 하는 그 세계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무업대달(無業 大達)이라는 선사가 계셨어요. 그 스님한테 “스님! 스님! 법문 좀 해주십시오”하고 법문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았던가봐요. 그런데 선사는 “예끼놈아, 법문 법문 하지 말고 망상 피우지 말라!” 하고 호통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본에서 보면 법문도 망상이래요, 법문도 외면해야되요.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치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외면하라는 그런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어쨌든 옛 어른 중에는 완전히 자기를 쉬시는 분이 있어요. 자기를 쉬고 자기를 놓고 자기를 완전히 비우시는 거래요. 그런 분을 왈 대인(大人)이라 하는 겁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 스님도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집이 아주 가난했다고 그래요. 스물네살 때인데 더벅머리 노총각으로 땔감 나무를 팔아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하루는 땔감을 한 짐 지고 시장을 가고 있었어요. 가노라니까 누군가가 금강경을 읽어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는 이 말에 퍼뜩 깨쳤어요.
아주 대단하신 분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 가운데 부처님 말씀 하나를 듣고 바로 깨치는 그러한 대단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쉬어서, 참으로 놓아서 한마디에 바로 깨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비우지 못하는 것이 아주 한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비우지 못하느냐? 하면 중생살이 자체가 번뇌 망상으로 똘똘 뭉쳐있으니까, 그래서 입만 열만 움직이면 번뇌 망상이어서 늘 어둡고 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릴 적부터 너무 지식을 주입시켜요 그래서 책 속에서 얻은 지식가지고, 지식이 판을 치는 이 지식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생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입니다. 이 지식도 참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 바탕에서 보면 그것도 망상이래요, 인간이 지식 덕분에 풍요롭게 살아가지만 지식 때문에 점점 왜소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식 때문에 불행하다 라는 아이러니가 생기고 있습니다.
현대인일수록, 지식인 일수록, 앞서간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더 불행해요.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꼬옥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도 그냥 보통 수행 정도가 아니라 좀 진지하게 참으로 해야 진정한 그런 행복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하더라도 이것저것 너무 복잡하고 다단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좀 단순화시키세요. 중요한 것만 생각을 해요. 행동반경도 너무 넓게 가지지 말고 가급적 좁히고 분명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하시는 일도요, 너무 복잡하고 다단하게 하시지 마시고 한 가지를 하더라도 집중해서 하는 습을 들이면 좋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집중해서, 단순화 시켜서, 화두에 모든 것을 바치듯이 그렇게 해야 출세할 수 있고 이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에서 좀 살맛나게, 좀 행복을 느끼면서, 좀 화평스럽게 그렇게 사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좀 쉬면 얼마나 좋겠어요. 쉬고, 놓고, 비우질 못하니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한탄스럽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못 비우는 것을, 그 못 쉬는 것을, 그 못 놓는 것을 억지로 놓게 하는 방법이 뭐냐? 그것이 선(禪)이래요. 이 선이라는 말을 고대 인도말인 산스크리트 말의 디야나(dhyāna)에서 나온 말입니다.
팔리어로는 자나(jhāna)라고 합니다. 그 말은 사유(思惟)한다는 말입니다. 즉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유수(思惟修), 생각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성품을 단박 깨쳐서 부처가 된다고 했어요.
선의 요지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화두선 같으면 화두에 집중했어요. 선할 때나 염불할 때 앉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그 오만 생각이 가마솥에 물 끓듯이 그렇게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많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도 한 곳에 집중되면 아주 고요해집니다.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안락을 느끼게 되고, 아주 편안하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더 깊어져서 깨쳐서 생사까지도 해탈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선의 요지는 “집중을 해서 깨치는 방법이 바로 선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선 가운데 최상급의 선이 뭐냐? 바로 화두선이다 합니다. 바로 간화선이다 합니다. 그렇다면 왜 화두선이 좋으냐? 왜 화두선이 최상급이냐? 하는 말을 하면 화두선은 집중이 잘 된다는 거래요. 회두에 진의(참 의심)가 나면 집중이 돼도 아주 잘되고, 집중이 잘 되고 깨치면 바로 부처 경계래요. 그래서 회두가 수승하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화두란 말은 뭐냐? 어떤 것이 화두냐?
화두란 참선자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말합니다. 깨쳐야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고칙(古則)이다 합니다. 옛사람들이 만든 법칙이다, 하는 거래요. 공안(公案)이다 이렇게도 이야기도 합니다. 공안이란 공부안독(公府案牘)이란 말의 준말입니다, 엣절에는 관공서를 공부라고 했습니다. 안독(案牘)이란 뭐냐.? 법령이나 예규같은 것입니다. 즉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하고 상벌을 주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 것은 예규에 따랐다고 해요. 그 예규와 같다고 해서 공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두, 고칙, 공안은 옛 조사스님들이 정한 법문이래요. 정한 말씀입니다. 즉 조사스님들이 하신 말씀들 그런가 하면, 종사가 남긴 심지를 깨칠 때의 여러 가지 기연, 학인을 인도하는 행위의 종려를 참선자에게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게 하고, 과제로 준 것이 바로 화두랍니다.
화두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뭣고, 마삼근, 전정백수자등 천칠백 공안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천칠백이란 숫자는 경덕 전등록에 나오는 불조(佛祖)의 숫자가 천칠백 분이다 해서 천칠백 공안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그 화두란 아주 대단한 법문이래요. 법문도 보통 법문이 아니래요. 그런데 화두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요. 동문서답과 같고 기상천외의 말씀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화두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천하의 무수한 선지식의 알맹이나 살림살이가 다 드러난 법문 중의 법문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깨치면 바로 부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부처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화두는 대단한 법문이고 깨치면 바로 부처경계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를 공부한다, 화두한다, 이 뜻은 뭐냐? 바로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라는 뜻이래요. 송화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두를 염불하듯이 외우는 사람이 있어요. 화두는 송화두가 되서는 안됩니다. 화두는 절대로 외워서는 안됩니다. 염화두는 말도 있어요. 화두는 염하는 것이 아니래요, 화두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래요,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이뭣고,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인가? 하고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화두 참구, 화두 공부입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자에게는 화두는 좋은 법문이기도 하지만 참선자에게는 깨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깨치기 위해서는 의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래서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치고 의정이 없으면 깨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화두 참구의 생명은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화두가 없는 분 계시죠? 계십니까?
제가 화두 두 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길 바랍니다. 첫째 염불하는 것이 뭐일까? 여러분들은 염불은 많이 해보셨을텐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셨을텐데 염불하는 것이 뭣고? 염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드시던지 아니면 마삼근을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동산 수초(洞山 守初: 910~990)라는 스님을 찾아뵙고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그 때가 여름이라 수초스님께서는 삼을 만지다 계시다가 삼을 들어보이면서 삼서근이라고 하셨더래요.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마삼근이라고 대답을 한 거래요.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왜 마삼근이라고 했는가?
그렇게 의심을 지어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네)
염불하는 것이 뭣고? 하던지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을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이 화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서 참구하시길 바랍니다.
이 화두는 평생 깨칠 때 까지 오직 한 화두로 참구해야됩니다. 혹시 하다가 보면 처음에는 의심 낼 줄도 모르고 아무 재미도 없는 그런 것을 느끼지도 하지만 하고 하고, 애쓰다 보면 참으로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 화두에 여러분의 지혜를 담아야해요. 그래서 어떻게라도 화두가 되게 하세요.
아까 마음의 평화라고 했는데 마음의 평화를 느낄 정도가 되면 아주 초보단계입니다. 초보단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가 있어요. 마음이 편안하면 사실은 크게 바랄게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삶의 진정한 행복까지는 못 느끼더라도 상당한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쨌든 화두에 인생을, 여러분의 청춘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쓰면 여러분이 바라는 바 전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화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이 있습니다. 포부도 있고 어떤 바람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또 연세가 높으신 분은 잘 살았다라고 하더라도 옛날 생각하면 후회스럽지 않은 분이 드물다고 해요. 혹시 잘 사신 분들이나, 지난 세월 동안 몹시 어려웠던 분들, 아주 괴로웠던 분들, 그렇지 않으면 한탄스러운 분들, 그런 분들일 수록 화두에 자기에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다 바쳐서 참으로 애써보겠다 그런 생각을 좀 가지십시오.
또 연세가 좀 높은 분들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나 장래에 대한 이런 저런 번뇌 망상이 있는 분들이나, 이런 의심 저런 의심이 많은 분은 이런 의심들을 똘똘 뭉쳐서 화두 의심으로 해결해 보세요. 그런 바램이나 한(恨)이나 그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똘똘 뭉쳐서 화두를 의심해서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서 화두를 참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을수록, 바람이 클수록 마음은 더 단단해야되요. 더 안정적이 되어야되요, 그래서 화두를 할 때는 마음을 아주 안정시키세요. 아주 고요한 물결처럼요. 그렇게 안정시켜서 화두만 분명하게,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화두만 지극하게 그렇게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어쨌든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문제 중에 문제다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쯤 여러분이 집에 계시면 한주동안 열심히 일하시고 사실 쉬실 시간입니다. 가족끼리 오순도순하게 먹을 것도 좀 내놓고 재미있게 쉬실 시간입니다. 오늘은 춥지는 않은 날지만 그래도 한겨울입니다. 여기까지 멀리 부산 서울에서 더 가까이는 봉화에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밤시간에 정진법회를 갖는 것은 시간을 아낀다는 뜻도 있지만 이 밤이 다 하면 새벽이 와요. 그렇듯이 여러분의 어두운 좀 탁한 그 마음도 여러분이 수행을 잘 해서 새벽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깨치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그리고 멀리 오셨으니까 어쩌면 특별히 왔으니까 좀 특별한 생각을 수행할 때는 꼬옥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통은 선방에서도 많이 졸아요. 번뇌 망상으로 하루종일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가하면 집에서 사시다 보면 게으름도 좀 피우고 싶고 이런저런 어리석고 못난 짓도 하실 거래요. 그런 분은 오늘 저녁에 용맹 정진할 때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지도록 지독하게 아주 대단한 생각으로 좀 비상한 생각으로 그렇게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도 그런 마음을 늘 가져서 수행할 때는 물론이고 평시 생활할 때도 그런 정신으로 사시라는 것이예요. 즉 비상하고 특별하고 어쩌면 지독하고, 이 추운 겨울날 산중까지 올 때는 보통 마음이 아닐 거래요. 그런 마음이 여기서 한번으로 희석되지 말고 집에 가서 늘 그런 마음으로 사시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법하게 앉듯이 여러분의 앉은 자세나 선 자세나 여러 가지가 집에 가서도 상응하도록 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런가 하면 집에서 보통 게으르게 살고, 좀 어리석게도 살고 좀 못나게도 사는 그런 분들은, 망상이나 피우고 그래저래 세월만 보내는 분들은 여기서 오늘 저녁에 용맹 정진함으로써 그런 마음을, 그런 습까지도 부처님 앞에 참회하시고 가세요. 집에 가서도 그런 모습으로, 그런 정신으로 사실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충전하지 못했던 그런 기분을 충전하듯이 꽉 채우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가셔서 잘 사시다가 밧데리가 떨어지면 또 충전하러 오듯이 정말 새 마음으로, 새 정신으로 바짝 차려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그런 계기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얼마 전에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에 앉으시면서 길상초라는 풀을 깔면서 맹세를 했다는거래요. 어떤 맹세냐 하면 이 자리에서 나의 가죽과 살과 뼈가 없어져도 좋다,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이 이르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하는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고 앉으셔서 드디어 이레만에 그 새벽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보고 깨쳤다고 그래요.
여러분도 오늘 밤에 앉을 때 그런 마음으로 대단한, 참 비상한 마음으로 앉아서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수행은 즉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어떤 마음으로 딲느냐? 얼마나 많이 갖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갖추고 참으로 발심하고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면 이외로 쉽게 바로 되요.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갖추지 못하고 즉 발심하지 못한 분들은 어렵고 어려운 일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참으로 제대로 마음을 내야 마음 닦기가 쉽다, 쉽게 닦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 때 한번 한번을 예사롭게 들지 마세요. 한 번 한 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써보세요. 작가가 작품을 만들듯이 전력을 좀 투구해보세요. 그래서 참으로 그 한번 한번이 여러분의 보람있는 긍지로 참으로 느껴서 정말 오늘 하룻밤을 참으로 잘 보냈다. 그래서 이 하룻밤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노력한 것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禪)에서 노력했던 가치는 어떤 노력의 가치보다 더 대단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파스칼의 말씀에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고 우주의 어용이다.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여러분의 인생이 참선으로써 수행으로써 아주 영광스러워서 화려하고 빛나고 아주 성공되는 그러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화두 입구에 목숨을 놓았더니
밝고 신령하고 안록하도다
한 물건이
사물마다 그대로가 비로자나 법신이요
곳곳마다 금색 색이 아닌 곳이 없네
요다음 시간에는 화두 참구법에 대해서 조금 더 본격적으로 자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웬만하면 법문이나 들으러 오신 분이 계실 줄 모르겠으나 크게 바쁘고 크게 건강이 나쁘지 않으시지면 하룻밤 꼬옥 용맹정진하십시오. 용맹정진하고 나면 한 것만도 아주 다행스럽고 뿌듯하고 자긍심이 생깁니다. 꼭 용맹정진 하셔서 좋은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1강 -화두 이야기(2007년 1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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