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참선법회 큰스님법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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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5-01 17:02 조회4,071회 댓글0건본문
글쓴이 : 서암
무여큰스님 4월법문(서장 해설)
오늘도 멀리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완연한 봄기운이지요. 기후가 완연하게 봄기운을 느끼듯이 여러분의 화두도 잘 되어서 안락을 느껴서 진정한 삶의 보람과 행복을 꼭 느끼시길 바랍니다. 이 봄기운이 오면 신이 나고 기분이 좋고 장난이라도 치고 싶듯이 수행도 잘 되면 온 전신에서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흔히 희열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런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것을 흔히 안락(安樂)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앉거나 서거나 그 무엇을 하거나, 마음에 늘 괴로움을 느끼는 분들조차도 아주 마음이 편안하고 묘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 안락을 느끼는 분하고 그저 평범하게 사시는 분과는 사는 모양이 천양지차입니다. 좀 어렵고 좀 힘드시더라도 여러분이 하는 공부가 그런 안락한 경지, 안락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공부입니다. 이 안락의 극치를 극락이라고 하는데. 극락까지는 못가더라도 안락한 경지를 좀 느껴가면서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느껴가면서 사시는 분이 잘 사시는 분이다, 그런 분을 최상의 길을 걷는 분이다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께서도 그런 좋은 경계를 늘 느껴가면서 살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저번에 했던 것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서장 (대혜보각선사 저 69쪽)
“당신이 이미 깨끗하게 살아서 도를 향하는 한 조각의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만 옛사람의 언구(言句) 위에 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여 한 층을 통달하고 또 한 층을 통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니 공부를 잘못하면 통달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큰스님 해설>
“당신이 이미 깨끗하게 살아서 도를 향하는 한 조각의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당신이란 증시랑을 말합니다.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보통 물질적 또는 금전적인 관계로, 아니면 남녀 관계에서 깨끗하게 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道에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깨끗하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서 그야말로 일체 번뇌 망상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가 되어야 ‘깨끗하게 산다’ ‘잘 산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살면 마음도 아주 맑아집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안락함을 느끼고 , 또 아주 묘한 기분 즉 법열(法悅)을 느끼게 됩니다.
도(道)를 닦는데 가장 중요한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그 마음은 아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때 묻지 말았어야 됩니다. 거짓이 조금도 없어야 합니다. 아주 진실하게 되면 진정한 발심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발심이란 참으로 ‘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 ‘오직 이것 뿐이다’, ‘최상의 길이다’ 하는 그런 마음을 내어서, 진정한 마음이 되면 화두 자체가 의외로 쉽게 들리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속에 사시는 동안에도 아주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특히 수행에 있어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아주 진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진실치 못하면 마음이 항시 괴롭게 되고. 괴로운 사람은 어둡고 탁해보입니다. 살아도 사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답답하고, 못나게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은 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진실한 마음과 더불어 그 마음 자체도 아주 견고해야 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됩니다. 줏대가 아주 꼿꼿해야 돼요. ‘이 공부를 하고야 말겠다’, ‘오직 이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그 생각을 시종일관 지키셔야 합니다. 조금도 변치 않을 정도로 그렇게 한길로 가야하고 외길로 가야해요. 한 우물을 파듯이 파야합니다. 그러면 참으로 대어를 낚은 듯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대혜스님은 (증시랑이)그러한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고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순(純)자는 잡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잡것이란 번뇌망상을 말합니다. 일(一)이란 여여하게 조금도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견고하고 순일한 마음이란 번뇌망상이 없이 아주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공부가 잘되고 안되고를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순일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순일하게 되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말하거나 말이 없거나 언제나 화두가 여여하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화두를 놓으래야 놓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어, 항시 아주 변함없이 여여하게 들리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아주 자부심을 느끼게 되요. 이 공부 이상이 없구나!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참선을 아주 잘하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최상의 길을 걷고 있다’ 하는 생각까지도 당연히 들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공부를 하면서 당당하게, 의젓하게, 보란 듯이 사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좋은 길이 바로 이 길이다’ 하는 생각을 늘 하시면서 이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화두선은 이런 말을 예사롭게 쓸 정도로 여러분이 ‘최상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이상의 길이 없다’ 하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공부입니다. 여러분도 화두선을 하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화두선이 되도록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보통 예사롭게 사는 정도로 살지 마십시오. 한두 단계 업그레이드 되게 해서 사십시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개 보살님, 아무개 거사님은 ‘정말 잘 산다’ ‘아 고개가 숙여질 만한 사람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사실 수 있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입니다.
교재 :
다만 옛사람의 언구(言句) 위에 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여 한층을 통달하고 또 한 층을 통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니
해설:
옛사람의 언구란 화두(話頭)를 뜻합니다. 화두를 한 분 중에서는 한 화두를 깨치고는 다음 화두, 다음 화두하면서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화두를 한 층, 한 층 그렇게 깨치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깨쳤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깨침은 오직 한번 뿐입니다. 경계는 변할 수 있으나 그러나 깨침은 오직 한번뿐입니다. 이렇게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이 참선하고서는 ‘내가 무슨 화두를 깨치고, 무슨 화두를 깨쳤다’는 분이 계시거든 그런 분들은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겠습니다.
교재:
공부를 잘못하면 통달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해설:
통달 이라는 말은 깨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재
“다만 마음을 한 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계합하여 문득 살펴가게 될 것입니다.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수미산이다.” 했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이르기를 “내려놓으라”했습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지지 않거든 다만 이 속에서 참구할지언정 다시 스스로 지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강북과 강남의 왕노(王老)에게 물어서 한번 여우의심을 하고 나서, 또 한 번 여우 의심을 하는 것에 맡깁니다.”
교재:
다만 마음을 한 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해설:
한 곳에 둔다는 말은 즉 ‘의정을 일으켜서, 삼매에 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삼매에 든다’ ‘선정에 든다’는 말은 화두에 푹 빠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화두에 미치듯이 아니면 아주 화두가 잘 되어서 화두뿐인 상태를 말해요. 이렇게 화두가 잘 되면 점심 먹고, 막 앉은 것 같은데 몇 시간이 후딱 지나서 저녁 할 때가 되었다던가, 아니면 막 저녁 공양을 하고 앉은 것 같은데 새벽이고 그 다음날 낮이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참선하는 곳이 절인지 집인지 모를 정도 즉 시공을 초월한 상태, 바로 이것을 흔히 삼매 경지라 합니다.
완전히 화두 뿐인 상태, 다른 것이 일체 생각이 안나고 화두에 완전히 푹 빠진 상태를 삼매다 합니다. 이러면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락한 경지, 신통한 경지, 아주 묘한 경지에 들면 생사까지도 초탈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지는 즉 선정에서 체험이 됩니다. 요즘 스님들은 잠깐 화두가 좀 돼서 깊이를 나름대로 얻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깨쳤다고 하는 분들도 있으나 상당수의 요즘 스님들이 선정을 익히지 않아요. 그래서 안락을 느껴도 아주 깊은 안락을 느끼지 못해요. 신통을 느껴도 그저 피상적인 신통만 느끼고 맙니다. 생사까지도 초탈한다 하는 분이 극히 드문 이유가 바로 이 선정 즉 삼매를 채 닦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삼매를 제대로 닦으면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전부를 다 얻습니다. 참선을 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선정에서 닦을 수 있습니다. 선정을 떠나서는 그 어떤 체험도 못하는 것입니다.
교재: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계합하여 문득 살펴가게 될 것입니다.
해설:
축대를 쌓으려면 돌과 돌이 잘 맞게 쌓아야합니다. 맷돌도 아래 위가 잘 맞아야 잘 갈립니다. 문득 살펴가게 될 것이라는 말은 깨친다는 말입니다. 보통 동중일여(動中一如) 즉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화두가 늘 여여한 상태,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부터를 삼매경지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삼매를 꼭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안락, 진정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런가 하면 걸림이 없이 통하게 되요. 그래서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을 읽는다든가 저 멀리 일주문 밖에 사람만 봐도 그 사람이 가는 곳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이 느껴질 수도 있는가 하면 체력이 좀 약해서 비실비실 하는 사람도 화두를 제대로 들어서 신통한 경지에 들게 되면 하루 종일 다녀도 지치지 않습니다. 다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하는 것들을 조금도 못느끼게 되요. 즉 그럴 정도로 보통 평범한 일상의 체력에서 느끼는 그런 것이 훨씬 초월되어서 아주 신통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깨쳐서 생사까지도 초탈하게 되어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말은 보통 사람들은 하기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수많은 조사님들은 이미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앉아서 가시기도 하고, 서서 가시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걷다 가기도 하고, 가는 날 딱 정해서 언제 내가 가겠노라, 미리 예언하고는 그렇게 가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조사 열반은 그렇게 가는 날을 정해 놓고 갔어요.
부처님오신날이 앞으로 채 한 달이 못남았는데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도 내가 아무데 누구의 아들로 태어나겠다고 해서 맞춤형 출생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불교인이 아니면 이해가 안됩니다. 태어나는 것도 맞추어서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납니다. 부처님은 가장 좋은 환경인 인도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 원력을 세우고 탄생의 수순을 밟아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시는 것도 다 선정의 힘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선정의 체험을 꼭 해보십시오. 또 체험을 하더라도 선정의 상태에서 푹 하십시오. 그래서 참으로 수행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경전은 선정으로 가는 안내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전을 다 합쳐서 한마디로 함축하라고 하면 “마음 깨쳐 부처되라”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화두를 하더라도 진정한 선정을 늘 느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좀 잘 사시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재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수미산이다.” 했습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지지 않거든 다만 이 속에서 참구할지언정 다시 스스로 지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해설:
이것은 화두입니다.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수미산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수미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법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입니다. 즉 수미산 만큼의 허물이 있다는 거래요. 한 생각도 안났는데 어떻게 수미산 만큼의 허물이 있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아주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고 조주스님께 이르니 조주스님은 “내려놓으라”했습니다. 즉 방하착해라 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져 깨치지 못하거든 지엽적인 생각을 하지말고 오직 화두만 참구하라고 하십니다.
교재: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강북과 강남의 왕노(王老)에게 물어서 한번 여우의심을 하고 나서, 또 한 번 여우 의심을 하는 것에 맡깁니다.”
해설:
왕노란 성이 왕씨인 ‘남전 보은’ 스님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지식을 말합니다. 강남과 강북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즉 강남 강북의 왕노란 이 세상의 모든 선지식을 말합니다. 여우의심이란 ‘사량분별을 붙이는 의심’을 말합니다. 즉 조작의심을 말합니다. 안되는 의정을 억지로 억지로 일으키는 의정이 바로 조작의심이며 여우의심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화두만을 참구하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선지식에게 사량분별로 가득한 여우의심을 하게 될 뿐이라고 합니다.
요지
교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고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을 가르쳤다. 머리 깎은 외도가 오직 마음을 적적하게 쉬기만을 가르치는 것이 잘못 되었음을 먼저 지적했다. 황벽스님께서 알음알이를 떠나 ‘도’ 배우기를 말씀하셨으나, 대혜 스님은 ‘도’라는 것도 방편으로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분별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설:
화두 이외의 모든 방법을 다 삿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사견이란 특히 묵조선을 지칭합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된 분들이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가 되어서 마음을 쉬기만을 가르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스님들 가운데도 묵조선을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잘한다하는 평을 합니다. 만약 대혜스님이 요즘 스님들이 하는 참선을 보면 뒤로 나자빠질 거예요.
저도 간혹 ‘마음을 쉬시라’ ‘마음을 비우시라’ 하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쉬면 곧 깨닫는다’ 했습니다. 유명한 임제스님은 ‘쉬면 곧 청정법신이다’하셨습니다. ‘쉬면, 참으로 쉬면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쉬고 쉬고, 또 쉬고 또 쉬라’하는 말씀을 저도 드렸습니다만 요즘 그런 사람은 사실은 거의 찾을 수 없을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렇게 쉬기는 어려울테니까 번뇌망상이래도 좀 적게 하시라는 겁니다. 그말 가운데는 사는 것이라도 좀 편하고, 괴롭지 않고, 쉬는 상태에서 화두만 분명하게, 아주 여법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렇게 들고 사시라 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황벽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음알이를 떠나 도를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혜스님은 도라는 것도 방편으로 부르는 이름이기에 여기에 다시 분별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도라는 것도 이미 도라 하면 도가 아니래요. 그래서 아주 오묘한 것이 도입니다.
말을 붙이면 말하고는 거리가 십만팔천리이래요. 입만 열면 바로 그르친다는거래요. 그래서 도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가 없고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도고 이 공부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쨌든 분별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별심을 조금도 조금도 내시지 말아야 합됩니다.
교재:
눈먼 종사의 그릇된 가르침의 종류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고 분별심을 내는 사람, 공적함을 지켜 분별심을 내는 사람, 방편으로 풀이해주는 말을 잘못 알아 분별심을 내는 사람, 촉루(觸髏 해골루)의 정식을 알아서 분별심을 짓는 사람, 자연의 체를 구경법으로 알아 분별심을 내는 유형을 그 예로 들어 경계했다.
해설:
공부하다가 보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 있어요. 이런 저런 견처가 있어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양 뭔가 보이면 대단히 좋아하고 신을 내고 어떤 분은 깨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요.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어요. 마음이 맑고 또 맑아서 일체 거리낌이 없어요. 그래야 공부가 되는 것인데 어떤 견처라도 있으면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인양 아주 잘 되는 것인양 내가 봤다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별심 저런 분별심 다 있어요. 마음이 텅 비고 아주 고요해지면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별 생각 다나요. 그 때는 사실 생각 안하기도 어려워지기도 해요. 도는 깨달음입니다. 근본입니다. 누가 풀이해주고 방편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어요.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촉루의 정식을 알아서’란 말은 알음알이란 말입니다. 자상하게 읽어보시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그렇게 공부를 잘못되게 해서 결국 스스로에 빠져서 못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재:
옛사람의 언구를 하나씩 분별심으로 풀어서 알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화두에 두라고 가르쳤다. “한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입니까? 이르되, 수미산이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이르러 내려놓아라” 라는 화두를 오로지 참구하도록 권했다.
해설:
절대로 화두를 알음알이로, 분별심으로, 사량으로, 알았다하지 말고, 화두를 풀이하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도 분별심으로는 깨칠 수가 없는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오직 오직 타파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오로지 화두만을 참구하도록 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드린 유인물을 보십시오. 증시랑의 편지에 답하는 네 번째입니다.
5 증시랑에게 답함(4)
교재: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고서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간단(間斷)함이 없어서 번거로운 공무에 뺏기지 않고, 급한 흐름 가운데 항상 맹렬히 살피고 다만 게으르지 아니하여, 도심(道心)이 더욱 오래고 더욱 견고함을 알았습니다. 제 마음에 심히 맞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번뇌는 불 같이 치성(熾盛 성할치 담을성)하니 어느 때에 통달하겠습니까?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서 공부하던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평상시에 마음을 고요한 데에 두는 것은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서 쓰기 위함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도리어 같게 될 것입니다.
해설:
사위의란 행주좌와란 뜻입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체의 행동거지를 말합니다. 간단함이란 화두가 간격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가 연결이 잘 되지않고 순일하지 않고 화두가 끊기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행동하는데 있어서 간단함이 없다는 말은 화두가 잘 되는 것을 뜻합니다. 화두가 잘 되어서 번거로운 용무를 함에도 화두가 여여한 것을 말합니다. (증시랑이) 용무를 봄에도 화두를 잘 하여 게으르지 않고 단단하고 견고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니 이 부분은 대혜스님께서 마음에 아주 흡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는 막 이글이글 타듯이 치열하게 성하니 어느 때 깨치겠느냐 했습니다. 그러니 시끄러울 때에도 언제나 조용하게 좌선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평상시 마음을 고요하게 두는 것은 시끄러운데서 쓰기 위함이다 했습니다. ‘좌선(坐禪)에서 화두가 참으로 되게 하여 힘을 얻어, 행선(行禪)에서 즉 일하면서 용무를 보면서 써먹기 위함’이다 했습니다. 좌선에서 힘을 얻어야 행선에서도 즉 일하면서도, 이런 저런 용무를 보면서도, 화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끄럽고 일이 번잡하고 복잡하고 다단한 곳에서 화두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즉 한결같이, 여여하게, 조금도, 변함없이 화두를 들지 못한다면 안됩다고 합니다. 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가 고요한 곳만 찾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여러분이 세속에서 이런 일, 저런일, 또 생활 속에서 어렵고 시끄럽고 번잡하고 하기 힘 드는 그런 분위기와 환경에서 하는 공부가 선방 같은데서 조용하게 앉아서 오직 참선만 하는 공부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얻어야 참으로 제대로 여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시랑에게 네 번째로 보내는 대혜스님의 답이 세속에서 사는 여러분에게 꼭 맞는 질문의 답입니다. 흔히 일하면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회사에 근무하면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시장 바닥같이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런 질문에 딱 맞는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네 번째 이 시간입니다. 즉 어떤 곳에서도(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공부는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끄러운 곳 일수록, 어렵고 힘이 드는 곳 일수록 그런 곳에서 힘을 얻으면 공부가 더 힘차서 참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교재:
받아보니 과거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 과보(果報)를 받는다고 탄식하시니, 유독 이 말만은 듣기가 불편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도에 장애가 됩니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흐름을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명(靜名)이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낮고 젖은 진흙에 이 꽃이 핀다.”라고 했습니다. 노호(老胡)께서 이르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感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해설:
흔히 우리는 인연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의 인연이 어떠해서 내가 지금 공부가 잘 안된다느니 하는 말도 합니다. 이런 인연, 저런 인연, 또는 이런 저런 사정과 어려운 환경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 환경은 좀 어쩌기가 어렵습니다만 인연에 대해서는 조금도 절대 걱정하지 마시기 마랍니다. 혹 ‘내가 인연이 없다’ ‘인연과 거리가 멀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런 생각 절대 하지 마십시오. 오직 화두만 참구하십시오. 그러면 인연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화두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증시랑 이 분도 과거의 인연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탄식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면 도에 장애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번뇌망상은 조금도 피우지 마십시오.
고덕(마라나 존자)이 학륵나존자(마라나존자의 제자)에게 “흐름을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라고 일러줍니다. ‘흐름을 따라’라는 말은 ‘인연을 따라’라는 말입니다. ‘성품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성품을 깨친다’는 말입니다. 즉 인연을 따라 깨쳐서 자기의 본성을 알면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연따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유마거사가 말씀하셨습니다. 유마거사는 유마힐경에 나오는 바로 장본인입니다. 그 분이 이를테면 “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낮고 젖은 진흙에 이 꽃이 핀다.”라고 했습니다. 연꽃은 높은 지대나 물이 맑고 좋은 곳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물이 더럽고 탁한 시궁창에서 꽃이 핍니다. 냄새가 나고 온갖 잡것이 섞인 그런 곳에서 피는 연꽃이지만 연꽃은 그렇게 곱고 아름다우며, 티끌하나 없습니다.
노호(老胡)께서 이르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노호란 늙은 호인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중국은 요즘도 티벳을 점령하고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큰소리 떵떵 쳐요.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기들이 세계의 중앙에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오랑캐라고 부릅니다. 주변국 사람들을 한마디로 형편없는 존재처럼 보는 것이 중국사람들의 역사관이고 민족관이래요. 그래서 부처님마저도 늙은 오랑캐라는 거예요. 불자라는 분들조차 부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 민족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여나 자성은 같은 말입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여여하여 조금도 어떤 순간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고 부릅니다. 또 이르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感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참선은 직심(直心)을 요구합니다. 선(禪)이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보고 바로 느끼는 것입니다. 선은 바로 보고 바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바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합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직관을 요구합니다. 선에서는 어떤 개념이나 관념상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면 바로 어긋납니다. 말 조차 붙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나간 일도 생각하지 말래는 거래요. 지나간 일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서도 초연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화두에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써야 진정한 참선이 됩니다. 여러분이 생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과거를 들추지 않고 사는 것이 세속사람들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소설 몇권을 써도 현재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이며, 미래는 미래일 뿐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말래는 거래요.
수처작주(隨處作主) 내가 선 곳에서 바로 주인이 되라는 거래요. 선자리가 바로 부처자리라는 거래요. 과거나 미래를 따지거나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또 과거와 미래에 빠지지 말고 현재를 가장 중시하라는 거래요. 오직 현재, 현재, 현재 라는 거래요. 모든 것을 바치라는 거래요. 그것이 선(禪)적인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뭐가 안된다, 뭐가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수록 생각은 가급적이면 하지 마시고 오직 오직 선 자리에서 바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빠져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쓰면, 그 자리가 진정한 사물의 자리이고 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멀리 오셨으니까 어쨌든 하루 저녁을 예사롭게 하지 마시고 막 화두에 참으로 미치듯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막 매달리듯이 그렇게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좀 물렁한 사람이나 이런저런 부족한 점이나 좀 못난 점이 있는 사람들이나 괴롭고 어렵고 힘든 사람도 좀 되게 빠져서 평상시에 부족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점을 고쳐서 내일 가실 때는 참으로 당당하게 신나게 기분좋게 되셔서 내려가십시오.
또 돌아가셔서 한달동안 열심히 하셔서 배터리가 떨어질 만하면 얼른 오십시오. 그래서 다시 충전을 제대로 하셔서 또 한달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오늘 밤 불과 몇 시간 안되는 시간뿐이지만 자기를 온전히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애써 보세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변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정리: 서암 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무여큰스님 4월법문(서장 해설)
오늘도 멀리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완연한 봄기운이지요. 기후가 완연하게 봄기운을 느끼듯이 여러분의 화두도 잘 되어서 안락을 느껴서 진정한 삶의 보람과 행복을 꼭 느끼시길 바랍니다. 이 봄기운이 오면 신이 나고 기분이 좋고 장난이라도 치고 싶듯이 수행도 잘 되면 온 전신에서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흔히 희열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런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것을 흔히 안락(安樂)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앉거나 서거나 그 무엇을 하거나, 마음에 늘 괴로움을 느끼는 분들조차도 아주 마음이 편안하고 묘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 안락을 느끼는 분하고 그저 평범하게 사시는 분과는 사는 모양이 천양지차입니다. 좀 어렵고 좀 힘드시더라도 여러분이 하는 공부가 그런 안락한 경지, 안락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공부입니다. 이 안락의 극치를 극락이라고 하는데. 극락까지는 못가더라도 안락한 경지를 좀 느껴가면서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느껴가면서 사시는 분이 잘 사시는 분이다, 그런 분을 최상의 길을 걷는 분이다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께서도 그런 좋은 경계를 늘 느껴가면서 살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저번에 했던 것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서장 (대혜보각선사 저 69쪽)
“당신이 이미 깨끗하게 살아서 도를 향하는 한 조각의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만 옛사람의 언구(言句) 위에 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여 한 층을 통달하고 또 한 층을 통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니 공부를 잘못하면 통달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큰스님 해설>
“당신이 이미 깨끗하게 살아서 도를 향하는 한 조각의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당신이란 증시랑을 말합니다.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보통 물질적 또는 금전적인 관계로, 아니면 남녀 관계에서 깨끗하게 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道에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깨끗하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서 그야말로 일체 번뇌 망상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가 되어야 ‘깨끗하게 산다’ ‘잘 산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살면 마음도 아주 맑아집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안락함을 느끼고 , 또 아주 묘한 기분 즉 법열(法悅)을 느끼게 됩니다.
도(道)를 닦는데 가장 중요한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그 마음은 아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때 묻지 말았어야 됩니다. 거짓이 조금도 없어야 합니다. 아주 진실하게 되면 진정한 발심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발심이란 참으로 ‘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 ‘오직 이것 뿐이다’, ‘최상의 길이다’ 하는 그런 마음을 내어서, 진정한 마음이 되면 화두 자체가 의외로 쉽게 들리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속에 사시는 동안에도 아주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특히 수행에 있어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아주 진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진실치 못하면 마음이 항시 괴롭게 되고. 괴로운 사람은 어둡고 탁해보입니다. 살아도 사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답답하고, 못나게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은 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진실한 마음과 더불어 그 마음 자체도 아주 견고해야 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됩니다. 줏대가 아주 꼿꼿해야 돼요. ‘이 공부를 하고야 말겠다’, ‘오직 이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그 생각을 시종일관 지키셔야 합니다. 조금도 변치 않을 정도로 그렇게 한길로 가야하고 외길로 가야해요. 한 우물을 파듯이 파야합니다. 그러면 참으로 대어를 낚은 듯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대혜스님은 (증시랑이)그러한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고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순(純)자는 잡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잡것이란 번뇌망상을 말합니다. 일(一)이란 여여하게 조금도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견고하고 순일한 마음이란 번뇌망상이 없이 아주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공부가 잘되고 안되고를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순일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순일하게 되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말하거나 말이 없거나 언제나 화두가 여여하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화두를 놓으래야 놓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어, 항시 아주 변함없이 여여하게 들리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아주 자부심을 느끼게 되요. 이 공부 이상이 없구나!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참선을 아주 잘하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최상의 길을 걷고 있다’ 하는 생각까지도 당연히 들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공부를 하면서 당당하게, 의젓하게, 보란 듯이 사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좋은 길이 바로 이 길이다’ 하는 생각을 늘 하시면서 이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화두선은 이런 말을 예사롭게 쓸 정도로 여러분이 ‘최상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이상의 길이 없다’ 하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공부입니다. 여러분도 화두선을 하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화두선이 되도록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보통 예사롭게 사는 정도로 살지 마십시오. 한두 단계 업그레이드 되게 해서 사십시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개 보살님, 아무개 거사님은 ‘정말 잘 산다’ ‘아 고개가 숙여질 만한 사람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사실 수 있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입니다.
교재 :
다만 옛사람의 언구(言句) 위에 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여 한층을 통달하고 또 한 층을 통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니
해설:
옛사람의 언구란 화두(話頭)를 뜻합니다. 화두를 한 분 중에서는 한 화두를 깨치고는 다음 화두, 다음 화두하면서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화두를 한 층, 한 층 그렇게 깨치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깨쳤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깨침은 오직 한번 뿐입니다. 경계는 변할 수 있으나 그러나 깨침은 오직 한번뿐입니다. 이렇게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이 참선하고서는 ‘내가 무슨 화두를 깨치고, 무슨 화두를 깨쳤다’는 분이 계시거든 그런 분들은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겠습니다.
교재:
공부를 잘못하면 통달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해설:
통달 이라는 말은 깨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재
“다만 마음을 한 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계합하여 문득 살펴가게 될 것입니다.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수미산이다.” 했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이르기를 “내려놓으라”했습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지지 않거든 다만 이 속에서 참구할지언정 다시 스스로 지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강북과 강남의 왕노(王老)에게 물어서 한번 여우의심을 하고 나서, 또 한 번 여우 의심을 하는 것에 맡깁니다.”
교재:
다만 마음을 한 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해설:
한 곳에 둔다는 말은 즉 ‘의정을 일으켜서, 삼매에 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삼매에 든다’ ‘선정에 든다’는 말은 화두에 푹 빠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화두에 미치듯이 아니면 아주 화두가 잘 되어서 화두뿐인 상태를 말해요. 이렇게 화두가 잘 되면 점심 먹고, 막 앉은 것 같은데 몇 시간이 후딱 지나서 저녁 할 때가 되었다던가, 아니면 막 저녁 공양을 하고 앉은 것 같은데 새벽이고 그 다음날 낮이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참선하는 곳이 절인지 집인지 모를 정도 즉 시공을 초월한 상태, 바로 이것을 흔히 삼매 경지라 합니다.
완전히 화두 뿐인 상태, 다른 것이 일체 생각이 안나고 화두에 완전히 푹 빠진 상태를 삼매다 합니다. 이러면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락한 경지, 신통한 경지, 아주 묘한 경지에 들면 생사까지도 초탈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지는 즉 선정에서 체험이 됩니다. 요즘 스님들은 잠깐 화두가 좀 돼서 깊이를 나름대로 얻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깨쳤다고 하는 분들도 있으나 상당수의 요즘 스님들이 선정을 익히지 않아요. 그래서 안락을 느껴도 아주 깊은 안락을 느끼지 못해요. 신통을 느껴도 그저 피상적인 신통만 느끼고 맙니다. 생사까지도 초탈한다 하는 분이 극히 드문 이유가 바로 이 선정 즉 삼매를 채 닦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삼매를 제대로 닦으면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전부를 다 얻습니다. 참선을 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선정에서 닦을 수 있습니다. 선정을 떠나서는 그 어떤 체험도 못하는 것입니다.
교재: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계합하여 문득 살펴가게 될 것입니다.
해설:
축대를 쌓으려면 돌과 돌이 잘 맞게 쌓아야합니다. 맷돌도 아래 위가 잘 맞아야 잘 갈립니다. 문득 살펴가게 될 것이라는 말은 깨친다는 말입니다. 보통 동중일여(動中一如) 즉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화두가 늘 여여한 상태,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부터를 삼매경지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삼매를 꼭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안락, 진정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런가 하면 걸림이 없이 통하게 되요. 그래서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을 읽는다든가 저 멀리 일주문 밖에 사람만 봐도 그 사람이 가는 곳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이 느껴질 수도 있는가 하면 체력이 좀 약해서 비실비실 하는 사람도 화두를 제대로 들어서 신통한 경지에 들게 되면 하루 종일 다녀도 지치지 않습니다. 다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하는 것들을 조금도 못느끼게 되요. 즉 그럴 정도로 보통 평범한 일상의 체력에서 느끼는 그런 것이 훨씬 초월되어서 아주 신통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깨쳐서 생사까지도 초탈하게 되어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말은 보통 사람들은 하기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수많은 조사님들은 이미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앉아서 가시기도 하고, 서서 가시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걷다 가기도 하고, 가는 날 딱 정해서 언제 내가 가겠노라, 미리 예언하고는 그렇게 가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조사 열반은 그렇게 가는 날을 정해 놓고 갔어요.
부처님오신날이 앞으로 채 한 달이 못남았는데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도 내가 아무데 누구의 아들로 태어나겠다고 해서 맞춤형 출생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불교인이 아니면 이해가 안됩니다. 태어나는 것도 맞추어서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납니다. 부처님은 가장 좋은 환경인 인도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 원력을 세우고 탄생의 수순을 밟아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시는 것도 다 선정의 힘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선정의 체험을 꼭 해보십시오. 또 체험을 하더라도 선정의 상태에서 푹 하십시오. 그래서 참으로 수행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경전은 선정으로 가는 안내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전을 다 합쳐서 한마디로 함축하라고 하면 “마음 깨쳐 부처되라”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화두를 하더라도 진정한 선정을 늘 느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좀 잘 사시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재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수미산이다.” 했습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지지 않거든 다만 이 속에서 참구할지언정 다시 스스로 지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해설:
이것은 화두입니다.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수미산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수미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법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입니다. 즉 수미산 만큼의 허물이 있다는 거래요. 한 생각도 안났는데 어떻게 수미산 만큼의 허물이 있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아주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고 조주스님께 이르니 조주스님은 “내려놓으라”했습니다. 즉 방하착해라 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져 깨치지 못하거든 지엽적인 생각을 하지말고 오직 화두만 참구하라고 하십니다.
교재: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강북과 강남의 왕노(王老)에게 물어서 한번 여우의심을 하고 나서, 또 한 번 여우 의심을 하는 것에 맡깁니다.”
해설:
왕노란 성이 왕씨인 ‘남전 보은’ 스님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지식을 말합니다. 강남과 강북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즉 강남 강북의 왕노란 이 세상의 모든 선지식을 말합니다. 여우의심이란 ‘사량분별을 붙이는 의심’을 말합니다. 즉 조작의심을 말합니다. 안되는 의정을 억지로 억지로 일으키는 의정이 바로 조작의심이며 여우의심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화두만을 참구하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선지식에게 사량분별로 가득한 여우의심을 하게 될 뿐이라고 합니다.
요지
교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고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을 가르쳤다. 머리 깎은 외도가 오직 마음을 적적하게 쉬기만을 가르치는 것이 잘못 되었음을 먼저 지적했다. 황벽스님께서 알음알이를 떠나 ‘도’ 배우기를 말씀하셨으나, 대혜 스님은 ‘도’라는 것도 방편으로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분별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설:
화두 이외의 모든 방법을 다 삿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사견이란 특히 묵조선을 지칭합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된 분들이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가 되어서 마음을 쉬기만을 가르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스님들 가운데도 묵조선을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잘한다하는 평을 합니다. 만약 대혜스님이 요즘 스님들이 하는 참선을 보면 뒤로 나자빠질 거예요.
저도 간혹 ‘마음을 쉬시라’ ‘마음을 비우시라’ 하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쉬면 곧 깨닫는다’ 했습니다. 유명한 임제스님은 ‘쉬면 곧 청정법신이다’하셨습니다. ‘쉬면, 참으로 쉬면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쉬고 쉬고, 또 쉬고 또 쉬라’하는 말씀을 저도 드렸습니다만 요즘 그런 사람은 사실은 거의 찾을 수 없을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렇게 쉬기는 어려울테니까 번뇌망상이래도 좀 적게 하시라는 겁니다. 그말 가운데는 사는 것이라도 좀 편하고, 괴롭지 않고, 쉬는 상태에서 화두만 분명하게, 아주 여법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렇게 들고 사시라 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황벽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음알이를 떠나 도를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혜스님은 도라는 것도 방편으로 부르는 이름이기에 여기에 다시 분별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도라는 것도 이미 도라 하면 도가 아니래요. 그래서 아주 오묘한 것이 도입니다.
말을 붙이면 말하고는 거리가 십만팔천리이래요. 입만 열면 바로 그르친다는거래요. 그래서 도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가 없고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도고 이 공부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쨌든 분별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별심을 조금도 조금도 내시지 말아야 합됩니다.
교재:
눈먼 종사의 그릇된 가르침의 종류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고 분별심을 내는 사람, 공적함을 지켜 분별심을 내는 사람, 방편으로 풀이해주는 말을 잘못 알아 분별심을 내는 사람, 촉루(觸髏 해골루)의 정식을 알아서 분별심을 짓는 사람, 자연의 체를 구경법으로 알아 분별심을 내는 유형을 그 예로 들어 경계했다.
해설:
공부하다가 보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 있어요. 이런 저런 견처가 있어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양 뭔가 보이면 대단히 좋아하고 신을 내고 어떤 분은 깨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요.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어요. 마음이 맑고 또 맑아서 일체 거리낌이 없어요. 그래야 공부가 되는 것인데 어떤 견처라도 있으면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인양 아주 잘 되는 것인양 내가 봤다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별심 저런 분별심 다 있어요. 마음이 텅 비고 아주 고요해지면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별 생각 다나요. 그 때는 사실 생각 안하기도 어려워지기도 해요. 도는 깨달음입니다. 근본입니다. 누가 풀이해주고 방편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어요.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촉루의 정식을 알아서’란 말은 알음알이란 말입니다. 자상하게 읽어보시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그렇게 공부를 잘못되게 해서 결국 스스로에 빠져서 못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재:
옛사람의 언구를 하나씩 분별심으로 풀어서 알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화두에 두라고 가르쳤다. “한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입니까? 이르되, 수미산이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이르러 내려놓아라” 라는 화두를 오로지 참구하도록 권했다.
해설:
절대로 화두를 알음알이로, 분별심으로, 사량으로, 알았다하지 말고, 화두를 풀이하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도 분별심으로는 깨칠 수가 없는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오직 오직 타파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오로지 화두만을 참구하도록 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드린 유인물을 보십시오. 증시랑의 편지에 답하는 네 번째입니다.
5 증시랑에게 답함(4)
교재: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고서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간단(間斷)함이 없어서 번거로운 공무에 뺏기지 않고, 급한 흐름 가운데 항상 맹렬히 살피고 다만 게으르지 아니하여, 도심(道心)이 더욱 오래고 더욱 견고함을 알았습니다. 제 마음에 심히 맞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번뇌는 불 같이 치성(熾盛 성할치 담을성)하니 어느 때에 통달하겠습니까?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서 공부하던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평상시에 마음을 고요한 데에 두는 것은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서 쓰기 위함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도리어 같게 될 것입니다.
해설:
사위의란 행주좌와란 뜻입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체의 행동거지를 말합니다. 간단함이란 화두가 간격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가 연결이 잘 되지않고 순일하지 않고 화두가 끊기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행동하는데 있어서 간단함이 없다는 말은 화두가 잘 되는 것을 뜻합니다. 화두가 잘 되어서 번거로운 용무를 함에도 화두가 여여한 것을 말합니다. (증시랑이) 용무를 봄에도 화두를 잘 하여 게으르지 않고 단단하고 견고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니 이 부분은 대혜스님께서 마음에 아주 흡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는 막 이글이글 타듯이 치열하게 성하니 어느 때 깨치겠느냐 했습니다. 그러니 시끄러울 때에도 언제나 조용하게 좌선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평상시 마음을 고요하게 두는 것은 시끄러운데서 쓰기 위함이다 했습니다. ‘좌선(坐禪)에서 화두가 참으로 되게 하여 힘을 얻어, 행선(行禪)에서 즉 일하면서 용무를 보면서 써먹기 위함’이다 했습니다. 좌선에서 힘을 얻어야 행선에서도 즉 일하면서도, 이런 저런 용무를 보면서도, 화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끄럽고 일이 번잡하고 복잡하고 다단한 곳에서 화두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즉 한결같이, 여여하게, 조금도, 변함없이 화두를 들지 못한다면 안됩다고 합니다. 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가 고요한 곳만 찾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여러분이 세속에서 이런 일, 저런일, 또 생활 속에서 어렵고 시끄럽고 번잡하고 하기 힘 드는 그런 분위기와 환경에서 하는 공부가 선방 같은데서 조용하게 앉아서 오직 참선만 하는 공부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얻어야 참으로 제대로 여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시랑에게 네 번째로 보내는 대혜스님의 답이 세속에서 사는 여러분에게 꼭 맞는 질문의 답입니다. 흔히 일하면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회사에 근무하면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시장 바닥같이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런 질문에 딱 맞는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네 번째 이 시간입니다. 즉 어떤 곳에서도(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공부는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끄러운 곳 일수록, 어렵고 힘이 드는 곳 일수록 그런 곳에서 힘을 얻으면 공부가 더 힘차서 참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교재:
받아보니 과거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 과보(果報)를 받는다고 탄식하시니, 유독 이 말만은 듣기가 불편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도에 장애가 됩니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흐름을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명(靜名)이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낮고 젖은 진흙에 이 꽃이 핀다.”라고 했습니다. 노호(老胡)께서 이르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感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해설:
흔히 우리는 인연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의 인연이 어떠해서 내가 지금 공부가 잘 안된다느니 하는 말도 합니다. 이런 인연, 저런 인연, 또는 이런 저런 사정과 어려운 환경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 환경은 좀 어쩌기가 어렵습니다만 인연에 대해서는 조금도 절대 걱정하지 마시기 마랍니다. 혹 ‘내가 인연이 없다’ ‘인연과 거리가 멀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런 생각 절대 하지 마십시오. 오직 화두만 참구하십시오. 그러면 인연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화두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증시랑 이 분도 과거의 인연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탄식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면 도에 장애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번뇌망상은 조금도 피우지 마십시오.
고덕(마라나 존자)이 학륵나존자(마라나존자의 제자)에게 “흐름을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라고 일러줍니다. ‘흐름을 따라’라는 말은 ‘인연을 따라’라는 말입니다. ‘성품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성품을 깨친다’는 말입니다. 즉 인연을 따라 깨쳐서 자기의 본성을 알면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연따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유마거사가 말씀하셨습니다. 유마거사는 유마힐경에 나오는 바로 장본인입니다. 그 분이 이를테면 “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낮고 젖은 진흙에 이 꽃이 핀다.”라고 했습니다. 연꽃은 높은 지대나 물이 맑고 좋은 곳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물이 더럽고 탁한 시궁창에서 꽃이 핍니다. 냄새가 나고 온갖 잡것이 섞인 그런 곳에서 피는 연꽃이지만 연꽃은 그렇게 곱고 아름다우며, 티끌하나 없습니다.
노호(老胡)께서 이르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노호란 늙은 호인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중국은 요즘도 티벳을 점령하고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큰소리 떵떵 쳐요.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기들이 세계의 중앙에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오랑캐라고 부릅니다. 주변국 사람들을 한마디로 형편없는 존재처럼 보는 것이 중국사람들의 역사관이고 민족관이래요. 그래서 부처님마저도 늙은 오랑캐라는 거예요. 불자라는 분들조차 부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 민족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여나 자성은 같은 말입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여여하여 조금도 어떤 순간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고 부릅니다. 또 이르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感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참선은 직심(直心)을 요구합니다. 선(禪)이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보고 바로 느끼는 것입니다. 선은 바로 보고 바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바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합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직관을 요구합니다. 선에서는 어떤 개념이나 관념상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면 바로 어긋납니다. 말 조차 붙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나간 일도 생각하지 말래는 거래요. 지나간 일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서도 초연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화두에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써야 진정한 참선이 됩니다. 여러분이 생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과거를 들추지 않고 사는 것이 세속사람들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소설 몇권을 써도 현재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이며, 미래는 미래일 뿐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말래는 거래요.
수처작주(隨處作主) 내가 선 곳에서 바로 주인이 되라는 거래요. 선자리가 바로 부처자리라는 거래요. 과거나 미래를 따지거나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또 과거와 미래에 빠지지 말고 현재를 가장 중시하라는 거래요. 오직 현재, 현재, 현재 라는 거래요. 모든 것을 바치라는 거래요. 그것이 선(禪)적인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뭐가 안된다, 뭐가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수록 생각은 가급적이면 하지 마시고 오직 오직 선 자리에서 바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빠져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애쓰면, 그 자리가 진정한 사물의 자리이고 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멀리 오셨으니까 어쨌든 하루 저녁을 예사롭게 하지 마시고 막 화두에 참으로 미치듯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막 매달리듯이 그렇게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좀 물렁한 사람이나 이런저런 부족한 점이나 좀 못난 점이 있는 사람들이나 괴롭고 어렵고 힘든 사람도 좀 되게 빠져서 평상시에 부족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점을 고쳐서 내일 가실 때는 참으로 당당하게 신나게 기분좋게 되셔서 내려가십시오.
또 돌아가셔서 한달동안 열심히 하셔서 배터리가 떨어질 만하면 얼른 오십시오. 그래서 다시 충전을 제대로 하셔서 또 한달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오늘 밤 불과 몇 시간 안되는 시간뿐이지만 자기를 온전히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애써 보세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변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정리: 서암 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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