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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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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06-12-13 19:42 조회4,8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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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


월간 해인 2003년 12월 '나의 행자 시절' 중에서



본디 출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리 절집에 들어와 사십년 가까이 살아온 것을 보면 운명이었는가 보다. 나의 출가는 내가 이 생에 걸어야 할 길에 빨려들어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곱게 자라 직접 체험이 없던 내가 간접체험이라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고교시절이었다. 소설에서부터 성현들의 전기물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삶과 죽음이라는 물음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아졌으니, 이러한 진지한 물음들이 출가에의 끈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가 있으면서도 이러한 물음이 내재해 있다가, 휴가 때 우연히 들른 조계사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들은 것이 불교와 첫 인연이 되었다. 유명한 분들의 강의나 다양한 분야의 독서에서 맛보지 못했던 ‘아, 이것이로구나’ 했던 느낌으로 시작된 <반야심경>에의 감동은 많은 불교책들을 읽게 했고 불교 철학에 심취하게 했다. 진하게 느끼진 못했지만 공(空) 사상에 묘한 여운과 마력을 감지했던 것 같다.

제대를 하고 괜찮은 직장엘 다녔으나 그리 신명이 나질 않았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좋은 직업을 갖는다 해도 제대로 사는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려면 정신적인 수행은 필수다. ‘나’를 찾는 정신적인 수행 없이는 외형적인 성과가 있더라도 결국엔 대단찮고 허망한 일임을 느낄 수밖에 없고, 남의 집 머슴살이 하듯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 아니던가. 직장을 그만두고 한 일주일쯤 수양 차 해인사 암자로 들어갔다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내가 걸어가야 할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송광사와 몇 군데를 거쳐 깊이 들어간 곳이 오대산 상원사였다. 그곳에서 한 해 조금 넘게 행자생활을 하면서 지금 돌아봐도 ‘잘 살지 않았나’하는 시절을 보냈다.
예닐 곱 분의 수좌스님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상원사에서의 생활은 오롯이 공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주변의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누구인가’하는 의심만을 가졌고, 그것이 자연스롭게 ‘이뭣꼬’화두가 도었다. <초발심자경문> 하나만 읽었을 뿐, 출가한 후 한 칠 년은 책을 전혀 보지 않고 참선만 했다. 그래서 나는 출가 후에도 한참 동안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지 못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오대산의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나무를 많이 해야 했고, 또 겨울엔 하루종일 불을 아궁이에 넣어야 했다. 또 공양주와 채공을 맡아 했으니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화두만을 생각하며 ‘아, 이것이로구나.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었구나.’하는 생각에 젖곤 했다.
행자 시절 이후 ‘이 길뿐이다’하여 한 이십 년 정도 선방에만 다녔으니, 깊게 보면 나의 출가에의 인연은 참선과 만나기 위한 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또 말이 많지 않았지만 행자 시절에 참선한다고 애쓰다보니 자연스레 말이 끊겨 거의 묵언하다시피 했다. 눈은 늘 앞 3미터 앞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급적 옆을 쳐다보지 않고 지냈다.
행자 시절 이후로도 그랬다. 선방 이외에 꼭 필요한 일 아닌 경우 말고는 어딜 다니지 않았고 웬만하면 사중 내에서도 다니질 않고 지냈다. 그래서 선방에 한 철 내내 있어도 선방스님들 얼굴이나 알지 후원의 공양주가 누군지 행자님들이 누군지 모르고 산 적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정도로 그렇게 삼십여 년을 살았다.
행자시절, 말없이 화두 하나에 늘 몰입해 있었으나 단 하나 마음에 괴오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고 온 가족에의 미안함이었다.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의무를 버리고 떠나온 일이 지중한 은혜를 입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에게 미안해서 한동안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녔다. 그 미안함에 대한 괴로움이 나를 경책하게 하여 공부에 애쓰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출가 후 언젠가 어머니가 찾아와 얼굴 한 번 뵌 일 말고는 단 한번도 속가의 집엘 가보지 않았으니, 지금도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고향에선 집 떠나면 못 살 것 같던 내가 문득 출가하여 연락 한 번 없이 수십 년 간 집에 들르지 않은 일을 두고 ‘독하다 독하다 그만한 사람 있을까’ 했다고 한다.

행자시절, 나의 은사이신 희섭 스님은 늘 ‘부지런히 공부해라. 승려노릇 깨끗하게 잘 해라. 언제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한암 노스님의 손상좌로 노스님을 깍듯하게 잘 모셨던 우리 노장님에게 언젠가 내가 ‘한암 노스님과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뭡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아주 검소하고 여법하게 사셨다’는 말씀을 했다.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두 법답게 사시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저리 사는 것이 중노릇을 잘하는 것이로구나. 바로 큰스님의 모습이구나.’ 느꼈다고 한다. 그 시절 ‘상원사 김치가 짜냐, 강릉 바닷물이 짜냐’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살림을 알뜰하고 빈틈없이 검박하게 꾸려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행자는 무릇 물질이 풍요하더라도 늘 절약해가면서 검박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적당히 관리해가면서 주변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수행다운 수행을 하기 어렵다. 춥고 배고프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발심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수행자는 그저, 조금 부족한 듯 못난 듯 살아야 바른 생각을 견지하기 쉽다.

어느 덧 예순의 나이를 훨씬 넘어 상좌를 스무 명쯤 둔 세월을 살았다. 얼마 전 누군가 ‘스님은 어떤 스승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느냐?’고 물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무얼 잘못했거나 난관에 봉착했을때 ‘과연 부처님은 이럴 경우 어떤 마음가짐을 하셨을까’ 하고 늘 부처님에게 비유하고 부처님을 생각했다. 내가 한평생 지향한 것은 부처님이었다 . 해서 주변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얼른 덮어버렸다. 내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부처님에게 호소하듯이 그분을 믿고 의지해가면서 하나하나 따져서 고치려고 애썼다. 출가한 지 십 년이 지나면서 조사 어록을 보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행장 중에서 중요한 대목들을 기록해 놓고 수시로 즐겨보고 있다. 그분들의 판단과 말씀, 그리고 삶의 모습에 비추어서 나를 알고 경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스님들이나 나의 상좌들에게 늘,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또 상좌들을 나무랄 때는 옛 스님들은 이렇게 사셨는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사느냐 하면서 내 이야기보다는 옛 위대한 삶을 살았던 스님들을 예로 들곤 한다.“

내가 주변 승려들에게 강조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승려 노릇 깨끗하고 여법하게 하라’는 것이다. 계행이 없으면 정(定)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요즘 출가자들은 계율에 별 관심이 없고 계율 정신이 많이 해이해졌다. 계행이 청정해서 여법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 ‘늘 화두를 놓지 말아라’하는 것이니, 자신이 하는 수행에 푹 빠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늘 자비하라’는 것이다. 수행자가 냉랭하면 안 된다. 자비가 뚝뚝 흘러야 한다.
화두 이외에는 별로 생각하는 것 없이,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출가자가 된 보람으로 환희로웠던 행자시절은 내 출가의 길에서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그때 공부한 것이 큰 이익이 되었고, ‘잘 보냈다’고 회고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월간 해인 1995년 1월호 '호계삼소(虎溪三笑)' 중에서



올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지만 눈이 와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정도로 절은 깊고 외진 곳에 있었다.
경상북도 봉화 읍내에서 절 아래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버스가 하루 네 번 운행되고는 있었지만, 그곳까지도 삼사십 분은 좋이 걸리는 행보를 덧들여야 하는 곳이었다. 눈이라도 쌓일라치면 우리같이 길 걷기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면 낙상이라도 입을까보아 조심하다가 시간이 몇 곱이 더 들지 알 수 없도록 길은 가풀막졌고, 그리고 절은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절의 현현에 잠깐 놀라고, 영주 부석사의 돌축대와 꼭 닮은 큰 돌과 작은 돌이 기막히게 조화롭게 어울린 우람하고도 멋진 축대에 다시 놀라고, 그 축대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일몰의 장관에 또 한 번 놀랐다.

금방 화려하게 빛살이 증폭되는 일출보다는, 순식간에 짙은 어둠을 몰고오는-깊은 산중에서는 더더욱- 일몰을 덮은 곳이 하심 수행에 더 적절한 곳이 아닐지.
축서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일몰은 그런 생각이 들만큼 다른 어떤 곳보다 탈속한 바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양 옆으로 청룡 백호가 뚜렷하고 죽령이 내려다보이는 호쾌한 전망이 뒷산인 문수산의 기운을 허망히 흩어지지 않게 해주며, 그 너머 소백산이 말이 달리는 듯한 지평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이런 범상치 않은 기운은 의상 조사로 하여금 이곳에 절을 짓게 하였으니, 사십리 남짓 떨어진 영주의 부석사보다 창건이 서너 해 앞선다.

문수산이라는 뒷산의 이름도 그러하거니와, 독수리 형국의 산 모양새를 따 ‘독수리가 깃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축서사’라는 이름도 범상치 않다. 부처님의 지혜를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에 비유하기도 하니, 이곳은 이래저래 불기와 무관한 곳이 아니다.
독수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지었다는 법당은 서향의 전망을 비껴 남향으로 앉아 있다.
법당 뒤쪽에 자리잡은 주지 스님의 거처 앞에는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인 삼층 석탑이 있다. 이 축서사에서 무여스님은 일곱해째 계신다.

“내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여러 철을 난 적이 있는데, 거기는 곧잘 비가 여러 날 계속 와요. 그런데도 밖에는 비가 오는데도 안에 들어가면 아주 차분하고 안정이 됐어요. 살아보니까 여기도 그곳의 느낌과 비슷해요. 양양하고 힘찬 곳이래요. 수행하기 좋은 곳이지요.”

집이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집을 만드는가. 아마도 두 가지 다 맞는 말이리라. 이곳의 분위기가 범연치 않음은 세수가 쉰일곱이고 법랍이 서른 해가 넘는 ‘눈 푸른’ 무여 스님이 좌정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서는 입승 소임을 맡기도 하고, 도봉산 망월산 선원이나 칠불사 운상 선원에서 선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축서사에 깃을 내리기 전까지 스무해가 넘는 동안을 해인사, 상원사, 통도사, 송광사, 묘관음사 등의 선방을 전전하며 정진해 온 스님이다.


“개혁회의에 재심 호계위원으로 참여하셨다지요?”

초심 호계위원회를 거쳐 올라온, 징계받을 스님의 잘못과 징계 내용을 검토하는 소임이었다.

“……참 어려운 소임이었어요.”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임을 맡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으나 간곡한 청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회의 전 날 걸려온 확인 전화에는 참석하겠노라 해놓고는 조계사 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두 번이나 발길을 돌렸다. 자기 정화가 수반되지 않은 외부 정화란 결국 ‘실패’가 아닌가 깊은 깊은 염려 때문이었다.
‘순수한 수행승이라면 종법 운운 이전에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가 한 개인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스님의 이런 자성은 ‘죽을 각오’로 진지하고 꾸준하게 정진해야 할 수행자들의 나태하고 안일한 수행 태도에 관한 질책으로 이어졌다.

“교육은 행자 시절에 시켜야 해요. 스님이 되고나면 힘들어지지. 속세에서도 먹고 살려면 대학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승가대학에 들어갔다가 중도에 파기하고 나오는 것을 예사로 생각해요. 스님만 되면 집 걱정, 옷 걱정, 밥 걱정이 없어지니 골치 아프게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행자 교육은 적어도 삼년 이상은 시켜야 해. 양보다 질이지요.”

스님은 그래서 이번에 개혁회의에서 선원법에 관련하여 마련된 ‘기초선원’ 개설 법안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다. 세속의 이른 바 ‘특수 교육’ , ‘천재교육’에 견줄 만한 이 제도는 이미 산문에 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심이 된 사람은 강원을 이수하지 않고도 바로 선원에 들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원교육이 한문 교육에 그치고 만 점이 없지 않은 만큼 기초과정은 승가대학이 중추적으로 맡게 하고, 강원에서는 대학원 수준의 교육이 펼쳐져야 한다고 무여스님은 생각한다.

“승려의 자질은 품성이 좌우하는 면도 있지 않겠습니까?”

“승려는 품성에 힘입기보다는 교육기관에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규격화된 작품이라도 만들어 내야지. 총력을 기울여야 해. 안 그러면 종단의 앞날이 어두워요. 기초선원이 제대로만 된다면 한국 불교가 달라질 기틀이 마련되는 것 아닌가 싶기까지 해요. 수행은 앞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인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제대로 시행하려면 지독하게 해야 해요.”

포교 문제에 있어서도 불교가 이즈음 들어 많이 활성화되기는 했다지만 활성화 이면의 ‘비불교적인 요소’와 바람직하지 않은 제반 현상에 대한 깊은 자경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여라도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말씀만 옮기는’ 행위는 또다른 업을 짓는 일일 따름이다.
행자 둘과 스님 다섯 사람이 있는 이곳에서 중노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시느냐고 물었더니 ‘부처님 말씀대로만 살라고 하지’하셨다. 말씀대로라면 호락호락한 자세로 수행에 임하는 스님에게는 큰 부담이 될 터였다. ‘왔다가 떠나는 사람이 좀 됐어.’하고는 웃으신다.
스스로 율법에 엄정한 삶의 태도를 본보이기만 하시나 했더니 ‘산중에서는 이 옷이 어울리나 시내에서는 시내 풍습에 걸맞도록 승복도 깔끔하고 보기 좋게 디자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유연한 일면도 가지고 계셨다.

“왜 출가하셨습니까?”

살아가면서 삶의 큰 흐름을 거스르게 할 만한 계기가 누구에게나 두어 번 있을 법하다. 그것이 속가를 떠나 수도자의 길로 접어드는 일임에랴. 답변은 뜻밖에 싱거웠다.

“그냥 절이 좋대요.”

경북 금릉군이 속향인 스님은 절에만 들릴라치면 꼭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했다. 병약한 데다 말수도 적고 그저 ‘뽀시락 장난’이나 하며 집을 뱅뱅 돌던 아이 적에 그러나 스님은 절에 가면 밥도 잘 먹히고 마구 뛰놀고 싶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곤 했다.
서울에서 경제학도로서 대학에 적을 두게 된 것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도 인접 학문-정치, 사회, 문학, 철학,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다른 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커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연은 무심하게 왔다.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하여 육군 본부에 군복무를 하던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조계사에 들렀다가 ‘반야심경’ 가운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한 법문을 들었는데, 그것이 스님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때부터 읽은 불교 관련 서적이 발심의 계기가 되었다.
‘먹고 살 만한’ 중농의 장손이었던 스님은 제대 뒤에 잠깐 직장생활도 했다. 그저 고향에서 농사를 짓거나 ‘살살 자전거나 타고 다니면서’ 교사나 면 서기 노릇을 하며 장손의 소임을 해주기 바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집안 가풍도 아니고 하여 엉거주춤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불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의심은 확인해 보아야 후환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행길이 아니라 그저 한 서너 달 지내다 내려갈 요량으로 해인사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그대로 스님의 출가길이 되었다. 지난 해 입적한 희섭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니 무여스님은 보문 스님의 손자가 된다. 방한암 스님의 상좌였던 보문스님은 학승인 탄허스님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가 낳은 빼어난 선승으로서 무여스님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겨주신 분이다.

"청풍납자의 표상이라고 할만한 분이지요. 선승들이 정신 위주로 살기 쉽기 보살행은 어려운데 그분은 그렇지도 않았어. 잘 사신 분이지요."

무여스님은 이곳 축서사에 머무르면서 그분에 관한 일대기를 적어보려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여 이백 자 원고지 일천이백 장 정도의 초고를 마련했으나 선뜻 세상에 펴놓지는 못하고 있다.

“그분에 관한 일화는 많으나 알맹이가 없어요. 오도송이나 법문 따위를 보완하려고 해도 보완할 근거가 없어요.‘

대덕 스님들에 관한 전기물은 거의 전무한 우리 형편이고 보면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어려운 만큼 더욱 뜻있을 작업임에 틀림없다. 무여스님이 축서사에 일곱해 동안에 이룬 일은 이 말고도 선수행에 관한 방법을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있다. 남에게 읽힐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자신에 대한 정리와 결산의 뜻에서 적은 것이다. 아마도 이 내용은 이곳에서 이미 터닦기로 불사를 시작한 선방이 완성되면 수행의 지침서로 먼저 쓰이게 될 듯하다. 걸망을 지고 이곳을 찾곤 하는 스님들이 수행할 곳이 마땅찮아 발길을 돌리고 마는 것이 안돼 보여 선원을 하나 짓기로 한 것이다. 한번 입방하면 여섯 달이나 한 해쯤 정진을 하게 될, 비슷하다면 갑사의 무문관 같은 일당 백의 양질의 선방을 마련하고 싶어하신다.
선객이 열 명쯤 머물 수 있는 큰방과 쉴 때에 필요한 독방을 선객 수만큼 갖추게 될 이 불사는 앞으로 두어 해쯤 더 걸릴 듯하다.
스님은 새벽 두 시면 일어나서 세시에 예불을 드린 뒤에 바로 좌선에 든다. 아침 공양은 들지 않으며 일곱시쯤 되면 가벼운 체조로 몸을 풀고 여덟시쯤부터 볼일을 보되 별일이 없으면 다시 ‘자리에 앉아’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지를 ‘느끼며’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낸다.
점심공양이 끝나면 오후에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외출도 하지만 바깥 출입은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무엇에 아직도 붙들려 계십니까?’
“없을 무자 한 자이네.”

‘무’자는 고불로 일컬어지는 조주스님이 만든 화두이다. 지나던 납자가 강아지 한 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도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거늘, 여타 미물에 비할 바가 아닌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답변 속에는 그러나 깊은 뜻이 있으니 그것은 수많은 수행승들이 즐겨드는 화두가 되었고, 무여스님 또한 행주좌와하고 어묵동정하는 가운에서도 한결같이 붙들고 오심(悟心)에 오심을 키워나가는 명제로 삼고 있다.
새벽녘에 법당을 끼고 도는 계곡 옆에 서니 벗은 나무 사이로 난 개울물은 마르고 얼어 물기가 없었으나, 한동안 서있자니 땅 깊은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 뿐이랴. 그 위로 무여스님이 즐겨 외시는 게송하나 겹쳐진다.


일상사가 다를 것이 없나니
내가 스스로 하나가 될 뿐
무엇이나 취하고 버림 없으매
어디서건 어긋남도 없도다
비단을 누가 귀하다 이르던가
청산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 없는 것을
신통묘용이 무어냐 하면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

-방거사-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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