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참구법 제10강 / 선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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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31 조회6,696회 댓글0건본문
<화두참구법 10> -선(禪)의 효과
날씨가 제법 쌀쌀하지요.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고 변화무쌍하니까 이 날씨마저도 사람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 여름에는 그렇게 비를 뿌리더니 가을인가 했더니 초겨울 기분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의 기후나 변화가 무상하더라도 이 참선하는 사람의 그 마음에는 늘 고요하고 늘 아늑해야 돼요.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뭐 봄철이든, 어딜 가든 어디 오든 늘 고요하고 늘 안정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씨가 좀 추운 날도 이 법당에서 좀 춥다 싶은 이런 법당에서 하룻밤쯤 바짝 좀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오늘은 선(禪)의 효과에 대해서, 이 선을 하면 어떤 효능이 있느냐, 어떤 효과가 있느냐, 어떤 이익이 있기에 세계 사람들이 선을 말하고 선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선(禪)이 상당히 되는 분이 있지요? 아마 계실 겁니다. 흔히 상당히 된다는 것은 진의(진의)가 나는 상태를 보통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정(動靜)에 일여(一如), 즉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한결같이 여여(如如)한 그런 상태를 상당히 된다고 말합니다. 즉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무슨 일을 하거나, 직장 근무를 하거나 늘 변함이 없이 항시 여여한 상태, 그런 상태를 보통 상당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상태는 사고를 해도, 생각을 해도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런가 하면 학생이 책을 읽어도요, 전연 변함이 없고요. 어떤 계획 같은 걸 세워도요 ,전연 변함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결같이 여여하게 되는 것을 상당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상당히 되는 상태, 즉 동정(動靜)에 여여한 그런 상태까지는 꼭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 체험해야 화두(火頭)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요. 그래서 “아! 좋다, 안 할 수 없다, 참으로 이 이상이 없다”, 그런 그 자부심과 아주 긍지를 느낍니다. 그런 정도 되면 인생에 자부심과 긍지도 느껴요. 인생 자체에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고 어디 가도 말은 않지만 내면에서 대단함이 느껴지는 그런 그 긍지를 꼭 느낍니다.
그래서 선(禪)을 하면, 선을 좀 해서 그런 상태에서 사는 것하고 그냥 평범하게 예사롭게 사는 거하고는 훨씬 다르다, 그런 생각을 늘 하시면서 이렇게 참 느껴보셔서 좀 어렵고 힘드시더래도 선에 대해서 꼭 진정한 그런 체험을 반드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속에서 아무리 잘산다고 하더래도요, 선(禪)이 믹스가 돼야 돼요. 돈을 많이 버시고 명예가 대단하시고 아니면 권세가 등등하더라도 또 소중한 가정생활까지도요, 잘사신다, 뭐 행복하다, 외형적으로 그런 말을 하더라도 선이 믹스가 안되면, 즉 마음에 안정이 없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선진국에서 선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선(禪)을 하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어떤 효능이 있을까?
첫째는 안심(安心)을 얻어요. 마음이 편안해져요. 옛 어른 말씀에 마음 편하면 됐지 뭘 더 바랄 것이 있느냐 할 정도도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요. 마음이 편하면 몸까지도 편안해져요. 마음이 편하고 몸도 편하다는 것은 전연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거래요. 그러면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럴 정도로 첫째는 안심을 얻어요.
안심은 모든 행복과 성공과 성불(成佛)까지도요, 그 기초 근본이 돼요. 그래서 여러분께서 늘 평소에 안정을 시키려고 애쓰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흔히 행복, 행복 하는데 행복도 안정이 안되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아무리 여건이 갖추어져도요, 행복을 모릅니다. 자신은 못 느껴요. 남들이 볼 때는 저 양반, 참 어지간히 갖추고 이것저것 다 없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정작 자기 내면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 안정이 안되면 행복을 못 느낍니다.
성공도 그래요 안정의 바탕에서 아주 애쓰고 노력하셔야 돼요. 그래야 드디어 남다른 성공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이 성불(成佛)도 그래요. 안정의 바탕에서 “이뭐꼬” 해야 참으로 진의(眞疑)가 돈발할 수 있어요. 근본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뭐 ‘화두 참선한다’ 하면 되기가 어려워요. 상당수가 안정이 안된 상태에서 선(禪)을 하고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그런 분이 상당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기본은 안정이래요. 안정이 돼야 참으로 사는 재미, 진정한 그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을 늘 잊지 마시고 항시 안정을 시키려고 좀 애쓰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화두를 들면서 ‘이뭐꼬’, 또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인가?’, 이렇게 안되는 화두래도 간절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쉬임 없이 그렇게 들어가다가 보면 어느날 간절하게 (화두를) 안 들어도 화두가 막 간절할 때가 있어요. 그 간절한 순간 화두에 힘을 얻어요. 흔히 ‘득력(得力)한다’ 합니다. 이 득력을 하면 그때부터는 의정(疑情)이라고 해요. 진의가 돈발하는 거래요. 그렇게 순간 진의(眞疑, 참된 의심)가 돈발하는 그런 분은 그렇게 많질 않아요. 안되는 화두지만 애쓰고 애쓰다가 보면, 약하지만 끊어질 듯 끊어질 것 같지만 결국 의정이 일어나요.
좀 바짝 애를 쓰면 더 강해집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강한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그렇게 진의가 일어나면 일체, 아주 일체는 아니라, 웬만한 번뇌나 망상은 다 사라져요. 남을 미워한다든가 성을 낸다든가 슬픈 마음, 기쁜 마음, 불안과 공포, 일체 욕망이 마음에서 웬만한 것은 사라져요. 그렇게 마음에서 이런저런, 즉 번뇌나 망상이 사라지면요, 마음이 아주 고요해져요.
고요해지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면 평소에 앉으면 연신 몸을 비틀고 괴로워하고, 그 보기가 딱해 보이는 그런 분도 그런 정도 앉으면 어엿하게 저 등상불(等像佛, 불상)처럼 꼿꼿하게 몇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잘 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나름대로 묘한 그런 재미를 느껴요. 그런데 그 재미는 좀 약해요.
좀 더 들어가면 더 안정이 돼서 더 맑고 더 맑으면 아주 오묘한 그런 기분을 느껴요. 그것을 흔히 안락이다, 편할 안(安), 즐거울 낙(樂), 즉 아주 편하고 즐겁다는 거래요. 그것을 흔히 법열(法悅)이다, 하기도 해요. 즉 진리에서 느끼는 그런 기쁨인데 즉 기쁘다고도 할 수 있고, 아주 즐겁다고도 할 수 있는 오묘한 그런 기분이래요.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을 보통 웰빙(Well-being)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정도라, 그 수준도 조금 못되는 그런 수준이라 '초보단계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화두가 그 정도 되면 뭐 화 같은 것도 거의 안 나요. 뭐 괴로워도 별로 괴롭다는 생각도 안 들고 어디 가도 마음이 넓어지고 커지고 완전히 인간 자체가 서서히 변합니다. 그런 안락한 상태, 아주 희열을 느끼는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마치 꿀이나 사탕을 먹는 거 같애요. 꿀 먹어보세요. 얼마나 달콤한가요. 사탕도 요즘은 사탕이 많지만 옛날 사람들은 사탕 하나 얻어먹으려고 몇십 리를 따라갔다 그런 이야기 할 정도로 얻어먹기 어려웠던 것이 사탕인데 그런 사탕을 입에 넣어봐요. 그렇게 달거든.
그럴 때 그 행복. 그것은 말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행복 같은 것을 아주 느껴요. 그런 그 행복, 그런 그 오묘한 기분, 그것을 흔히 진정한 행복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 행복은 여러분이 세속에서 사시면서 어떤 행위를 한다든가 살아가는 데서 느끼는 그런 행복하고는 전연 달라요.
이 행복은 한번만 느끼면 두고두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행복입니다. 흔히 사람은 행복을 찾는 늑대다, 그렇게 이야기도 합니다. 늑대란 놈이 아주 교활한 그런 동물이라고 하지요. 늑대처럼 아주 교활하게 온갖 잔꾀를 부리면서 오직 행복, 행복 하면서 찾는 것이 행복이라고 해요. 그런 그 행복은 외형적인 행복이라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이런 그 수행에서 즉 도(道)에서 느끼는 행복하고는 비교가 안돼요.
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도 있다고 해요. 나그네처럼 일생을 아무리 다녀도요, 진정한 행복은 못 찾아요. 진정한 행복은 자기 내면에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요. 그 행복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보물 중에 보물이라, 근데 보통사람은 그 보물을 모르고 외부에서 부지런히 평생 고생고생 하면서 찾는다고 찾지만 무상(無常)만 느낄 뿐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만 되면 하지 말라 하지 말라고 참 뭐 보따리 싸 짊어지고 따라다니면서 말려도 안 할 수가 없어요. 왜냐, 그 이상이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뿐이다,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 할 수 없는 것이 선(禪)이다, 그런 정도까지는 여러분이 꼭 느껴봐요.
그러면 절에 나온 보람, 참 추운 날씨에 이 산중까지 온 보람을 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묘한 그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은 화두선보다 묵조선(黙照禪)이 더 깊게 더 쉽게 느껴져요. 화두선도 그런 그 재미를 느끼려면 약간 느슨하게 그렇게 하면 (그런)재미를 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느슨하게 재미를 느낀다고 빠지다가 보면 화두가 그만 없어지고 말아요. 그래서 화두는 조금 못 느끼더라도 맹렬하게 용맹정진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공자께서 말씀하신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아침에 도만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했어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래요. 그 죽음도요 아침에 도만 들으면, 사실은 도(道)는 보는 거래요. 공자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아침에 도만 보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그런 것이 도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 되면 옛 어른 스님들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당신 몸을 희생하고 버린 그런 그 위법망구를 할 수 있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둘째는 뭐냐, 둘째는 선(禪)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머리가 좋아져요, 즉 머리가 맑아져요. 진의(眞疑)가 나서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맑아진다, 했습니다. 거기에서 더 깊게 들어가면 아주 더 고요해져요. 고요해지면 맑아져요. 맑아졌다가는 밝아집니다.
밝아졌다면 깨쳐져요.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한다는 거래요. 즉 중생은 미망중생이다 하듯이 마음이 늘 흐리고 탁해요. 즉 흐리고 탁하니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거래요. 뭐 하는 게 어렵고 힘드시고 괴로워요. 그래서 “못살겠다, 날 좀 살려주시오”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흔히 둔한 사람이다, 뭐 미련한 사람이다, 그렇게도 이야기하는데 그런 분은 본래면목 즉 근본자성이 번뇌망상으로 흐려져 있기 때문이래요.
본래는 누구나 불성이 다 있어요. 불성만 있느냐? 부처님과 같은 초롱초롱한 지혜도 있어요. 그 천재성이 누구나 다 있다는 거래요. 그런데 부처님과 같은 분은 아주 대단한 천재 중에 천재인데,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이 무슨 말을 묻든, 신도가 어떤 질문을 하든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적당한 진리를 설파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비상하고 아주 대단한 분이라. 이런 분이 또 있을까, 이런 양반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지혜로운 분이래요 .
그런 지혜를 보통사람도 다 갖췄다는 거래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지혜롭고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왜 보통사람은 어둡고 둔하게 사느냐? 바로 번뇌망상 때문이라는 거래요. 그 번뇌망상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근본자성을 흐리게 하고 탁하게 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흐리고 탁한 그 무명을 제거하는 작업이 바로 수행이래요. 그래서 그 흐리고 탁한 것을 제거하고 없애면 본래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아주 초롱초롱한 지혜, 아주 천재적인 그런 것을 발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근본 지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누구나 그것을 개발하는 것을 바로 ‘수행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둡고 탁한 그 미망을, 그 무명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맑아져요. 맑아진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진다는 거래요. 기억력이 초롱초롱해진다는 거래요. 그래서 부처님 같은 천재성을 누구나 발굴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학문으로 얻는 지혜, 책을 보고 공부를 한 그런 지혜는 배운 것, 그것밖에 몰라요.
그러나 참선으로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흔히 한량이 없다 합니다. 그래서 흔히 선수행으로서 얻은 지혜를 태양에 비유해요. 태양은 뭐 얼마나 밝습니까? 그런가 하면 학문으로 얻은 지혜는 반딧불에 비유해요. 반딧불은 햇빛이 쨍쨍 쪼이면 반딧불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드러나지가 않아요. 그만큼 비교가 안된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농담처럼 이야기할 때 뭐 좀 안다고 까불고 아는 체 하는 사람한테 “네가 아무리 아는 체 해봐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학문으로 얻은 지식, 그것은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거래요. 그렇게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맑아져요.
맑아지는 것이 바로 머리를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젊은 어머니들이 요새 아이 머리 좋게 하려고 별 수단과 방법을 다 하시는 그런 분도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참선 시키는 거래요. 참선까지는 너무 거창한지 몰라도 마음을 안정만 시키면, 마음만 비우게만 하면, 마음만 쉬게 하면 머리는 자연스럽게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뭐 이런저런 책을 보이고, 번뇌망상을 피우게 하고, 요즈음은 컴퓨터로 온갖 장난질을 하게 하니까 태어날 때는 아주 맑고 제법 괜찮던 아이의 머리도 점점 흐려져서 둔재가 되는데 그만큼 어머니들이 어리석다는 거래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주리반타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참 민망할 정도로 딱할 정도로 저능아래요. 부처님이 뭘 시킬 수가 없었어요. ‘요거해라’ 하면 그거 하다가도 하는 것조차도 잊어버리는 분이라, ‘저거해라’ 하면 저거 하다가 잊어버리는 분이래요. 하도 안타까워서 하루는 아주 애정 어린 말씀을 하시는 거래요.
“주리반타카야, 넌 다른 것은 하지 말고 ‘쓸고 닦으리’만 해라.” 했는 거래요. 근데 ‘쓸고’ 하다가는 또 ‘닦으리’를 잊어버려요. ‘닦으리’ 하다가는 ‘쓸고’를 잊어버려요. 그러고는 우두커니 서 있는 거래요. 그러나 주리반타카는 아주 의지가 강한 분이래요. 부처님 말씀 그대로 실천하고 애쓴 분이라, 아주 저능아지만 애 쓰고, 애 쓰고, 또 애쓰니까 머리가 맑아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머리가 터지는 거래요. 그래서 남방 최고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화두가 좀 되어서 몽중(夢中)에 일여(一如) 즉 꿈 속에서도 화두가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되면 세계적으로 좀 저명한 유명한 천재들,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그런 분들을 조명하듯이 해보면 ‘저런 분은 어느 정도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분들의 대단한 학문이나 성공 자체는 설사 모르더라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그 행동 같은 데서 천재성을 느낍니다. “아, 저 천재는 어느 정도다”, 그런 정도는 몽중에 일여 즉 꿈 속에서도 여여한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이 밤에 캄캄한 밤에 플래시로 이래 뭘 조명하듯이 시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좋아지게 할 수가 있구요.
세 번째는 뭐냐? 선을 잘하면, 선이 제대로 되면 인간성이 변해요.
화두에 큰 힘을 얻어서 수행공덕이 쌓이면 성품이 차츰차츰 변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서서히 큰 인간으로 즉 부처님 같은 도덕을 갖춘 그런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것을 어느 날 갑자기 변하는 것을 느끼는 그런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자기도 자기를 좀 놀랄 정도로 그렇게 변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즉 번뇌망상이 다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넓고 커져요. 그래서 급한 성미도 느린 듯 아주 침착해져요. 행동도 중후해지고요 자세도 의젓해지면서 경거망동 같은 것도 없어집니다. 즉 가벼운 사람, 그런 사람도 아주 묵직하고 중후한 그런 인간으로 서서히 변합니다. 그 정도 되면 또 의지도 강해져요. 뭐 나약하다, 여자 같다 그런 분도 강하고 좀 남성적이고 그래서 우유부단하다든가 그런 사람도 꿋꿋하고 아주 당당하게 그래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기질이 좀 약해서 뭐 하다가는 조금만 하고는 그냥 손 터는 그런 사람도 끝장을 보듯이 막 고집쟁이처럼 끈질기고 지독한 그런 인내력도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선 수행 전에 자기만 알고 아주 소승적이고 옹졸하고 비좁던 사람도요, 남을 용서할 줄 알고 아주 대승적으로 인격을 갖추고 베풀기도 하고요 큰 사람 면모를 즉 부처님 면모로 서서히 변하기도 합니다. 주변에서는 아주 훌륭하다, 존경스럽다, 거룩하다, 그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 정도가 되면 사람이 향취가 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 정도가 됩니다. 늘 같이 사는 부부간이래도요, 달리 보이고 대단하게 보이고 그런 것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태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해요. 어떤 수행을 잘하는 그런 보살이 있었던가 봐요. 가게를 보는데, 그 가게가 시장 골목의 가겐데 그 가게를 지나가는 분이 많았던가 봐요. 큰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인가 봐요. 큰 시장으로 들어가는 분이, 큰 시장에 가서 볼 일 볼 사람도 그 집안만 가면 그 보살의 얼굴만 보면 그냥 들어간다는 거래요. 그래서 꼭 살 것도 없는데, 꼭 그 집에 가서 사려고 시장에 나온 것도 아닌데 그 집에 들어가서는 이것저것 사오는 거래요.
그래서 그 주인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얼굴만 파는 거래요. 그래도 그 물건 사러 오는 분들이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아주 부처님처럼 모셔놓고 큰 가게를 열고는 그렇게 물건을 팔았다는 그런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즉 얼굴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여러 가지 인간 됨됨이가 서서히 변해서 옆 사람도 좀 느껴질 정도로 부처님과 같은 그런 면모를 갖추게 된다는 그런 그 뜻입니다.
넷째는 뭐냐? 일에 능률이 올라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능률이 올라요. 같은 일을 하는데도 선을 해서 집중하는 습(習)이 되고요,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집중하는 힘 자체가 생겨서 이중으로 막 집중이 돼요. 그래서 일에 빠지기가 쉬워요. 일에 막 빠지듯이 집중하니까 일을 뭐 잘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 생산성이 오르고 효과가 아주 크게 원만하게 나기도 합니다.
요즘 학생들 중에서는 보통 이어폰을 끼고 텔레비젼을 틀어놓고 그렇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지요. 컴퓨터를 틀어놓고 게임을 즐기면서 공부하는 그런 학생도 있다고 해요. 사실은 그런 학생이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을 거래요. 집중해야 됩니다. 화두선 하듯이 화두선이 참으로 돼서 집중이 되듯이 그렇게 집중하면 그런 습을 늘 들이고 일은 반드시 집중해야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골프황제라고 하대요. 타이거 우즈요. 그분이 흑인 아버지하고 태국계 여성하고의 몸에서 태어났답니다. 근데 어머니가 위파사나를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아이한테 위파사나를 가르쳤는 거래요. 즉 집중력을 가르쳤는 거래요. 그래서 타이거 우즈가 그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은 대단한 집중이다, 그래서 그 타이거 우즈를 따를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그 근본 원리는 뭐냐, 즉 집중력이래요. 막 집중해서 막 빠져야 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빠져야 돼요. 성공하고픈 사람이나 젊은이일수록, 장래가 창창한 그런 사람일수록 막 빠질 수 있어야 돼요. 일은 어쨌든 빠져야 돼요. 빠져서 미쳐봐야 됩니다.
미치듯이 일도 해야 되고 미치듯이 화두를 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해요. 선정에 안 들어보면 사실 들을 이야기가 없어요. 선정에 들어봐야 이야기가 돼요. 그래야 그 무슨 이야기든지 재미있는 별 이야기를 다합니다. 그렇듯이 일도 막 빠져봐야 돼요. 미치지 못한 사람은 별것 아니래요. 그렇게 막 미칠 정도로 막 빠질 수 있는 것은 집중이래요. 그렇게 집중하니까 잘 안될 수가 없는 거래요.
우리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는 생산성이 안 오른다는 그런 통계가 나왔던데 집중해서 일을 안 하기 때문이래요. 그저 남의 일이니까 제 일처럼 안 하고요. 막 집중해서 짧은 시간에 극대화시키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집중해서 막 되게 빠져서 막 24시간 풀가동 돼서 선정에 빠지면 깨달음에 가깝다,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일도 집중해서 꼭 빠져보시고 그래서 세속적으로도 성공을 하시고 또 선도 좀 잘하셔서 그런 남다른 그런 인생을 꼭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는 뭐냐?, 질병을 고쳐요. 이런저런 병을 고쳐요.
선 수행이 웬만큼 잘되면 병이 안 나요. 선원에 다니는 스님들도 어떤 분은 뭐 약봉지를 늘 가지고 다녀요. 사실 그런 분은 옳게 안될 거래요. 선이 옳게 되면 웬만한 병은 저절로 나아요. 선 수행을 해서 마음이 아주 고요해지고 몸도 아주 편안한 상태가 돼서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동정에 일여한 그런 상태, 그래서 아주 맑고 오묘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재미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그런 정도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져요.
뭐 어디가 아프다, 안 좋다, 오장육부가 어떻다 저떻다, 하지만 저절로 다 나아버려요. 이것은 참선뿐 아니라 염불을 해도 마찬가지고요. 주력을 해도 그렇고 그런 경계만 되면 저절로 나아요. 그것이 이제 수행 공덕이다 하는데 그렇게 묘한 아주 오묘한 행복감을 느낄 그럴 정도까지만 되면 건강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 안 해도 돼요.
그래서 옛 어른 말씀에 수행이 지극하면 노쇠해서 시들어가거나 병약한 사람도 “고목에서 꽃이 피듯이 건강을 되찾고 노화방지도 되어 장수하게 된다”, 했습니다. 그 시들어가던 그런 사람도요, 고목에서 꽃이 피듯이 건강을 되찾는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노화방지도 돼서요, 장수한다 했습니다. 그렇게 좀 오묘한 기분을 느낄 정도, 그런 정도가 되면 신진대사가 촉진이 돼요. 젊음이 와요. 그래서 고목에서 꽃이 핀다는, 표현을 쓰는데 젊음이, 회춘이 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늘 건강을 유지하고 병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한 그런 생각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선 수행은 특히 신경계통의 병에 좋아요. 신경계통 병. 스트레스나 즉 몸에 해로운 육체적 정신적 자극이 가해졌을 때 나타나는 그런 반응인 스트레스나 심리적 장애 아니면 노이로제 같은 그런 정신분열증 같은 그런 정신병이 선에는 아주 좋아요.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신병자나 정신박약자 같은 그런 분도 이 선을 하면 좋아요
어느 정도해서 좋냐? 집중이 되는 상태까지만 가면 저절로 사실은 좋아져버려요. 그래서 정신병이 있는 사람일수록 집중만 잘하게 하면 집중이 잘돼서 기분을 오묘한 그 기분, 그 행복을 좀 느끼고 신진대사가 촉진이 되는 그런 상태가 되면 웬만한 병은 낫고 정신병에 특효가 난다는 것이 옛 어른들의 한결같은 그런 말씀입니다.
일곱째, 신통력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달에 해드렸지요. 신통한 그 공부가 깊어지면 아주 신통한 경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보통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흔히 신(神)이다, 합니다. 뭐 걸림없이 어디든 통한다, 해서 신통이라고 하는데 신통을 느끼면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려워요. 그때는 자기 브레이크가 잘 안돼요. 그럴 때도 자기를 잘 억제하고 자기를 잘 갈무리해서 오직, 오직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하듯이 그렇게 애쓰다가 보면 깨달음을 얻습니다.
선의 목적은 깨달음이래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 효능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 과정에서 사실은 부수적으로 얻는 이익이다, 할 수가 있어요. 한국 선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강조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좋은 점, 장점 그런 것을 아주 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근데 보통 신도님 여러분들 아니면 또 일반적으로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분은 깨달음까지는 너무 거창하고 마음이 안정이 돼서 좀 편안하고 아 맑고 행복을 느끼는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는 거래요. 그러나 선의 목적은 깨달음이래요. 선이 참으로 돼보면 점점 더 욕심을 낼 수밖에 없고 궁극은 깨달음으로 향합니다.
선의 이상은 “자기의 성품을 봐서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래요. 즉 부처란 ‘최상의 인간’이래요.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할 인간의 모델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어떤 사람이든 참 깨달을 수만 있으면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또는 괴로움이 있더라도 깨달으라는 것이 옛 어른 스님들의 한결같은 말씀입니다.
옛날에 덕산(780~785)스님이라는 아주 큰스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얼굴도 잘생기고요 뭐 말씀도 잘하셨다는 거래요. 머리도 아주 좋은 분이고요. 율장을 아주 깊이 연구했던가 봐요. 그래서 성성하게 달통하신 그런 아주 대단한 분이라, 그런데 그분은 특히 금강경(金剛經)을 뭐 강설을 잘했어요. 그래 성씨가 주씨라 “주금강”이다, 했습니다. 그렇게 닉네임이 붙은 그런 분이래요.
그런데 그분은 “천하제일 주금강이다”, 할 정도로 프라이버시가 아주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도반이, 당시 남방에는 선종이 있었는데 남방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 선감 스님이 볼 때는 아주 외도 중에 외도인 남방의 외도들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불한다는 거래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실력으로는 “보살이 육도만행을 그 무량겁으로 닦아도요, 성불하기 어렵다”고만 배웠는데 남방의 외도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하기에 “내 가서 소탕을 해버려야지, 본때를 보여야 되겠다” 하는 뭐 대단한 생각으로 남방으로 행각을 떠났어요.
남방의 어떤 지방을 가다가요, 점심 때가 됐는데 아주 시장한 거래요. 그래 점심 먹을 곳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더니 저 만큼 떡집이 있는 거래요. 떡집에 들어갑니다. 마침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거 떡 좀 주시오.” 주인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주인이 노파라, 아주 볼품없는 노파가 덕산 스님을 아래위로 쓱 훑어보는 거래요.
훑어보고는 “스님이 짊어지고 있는 게 뭡니까?” 묻는 거래요. “아, 금강경소요.” 뭐 금강경에 대해선 자신만만한 분이라 아, 자신만만하게 ‘금강경소요.’ 그랬는 거래요. 그러니까 노파가 “아, 그래요. 스님께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떡을 공짜로 줄 것이요, 대답을 못하면 안 팔겠소.” 하는 거래요. 아 그러니 아, 잘됐다 싶은 거래요. “물으시오.” 했는 거래요.
그러니까 “금강경에 과거심도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다. 스님께서 이 점심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어느 마음으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거래요. 그러니 그 볼품없는 떡장수 노파의 말씀에 천하제일의 주금강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여기서 가까운 곳에 선지식이 계십니까?” 묻는 거래요. 그래 그 노파가 “가까운 곳에 용담원이란 곳에 숭신 선사라는 아주 대단한 스님이 계십니다.” 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용담원에 갑니다. 뭐 떡이고 뭐고 뭐 얻어먹지도 못하고요. 그래 인제 가서는 그간 한참 올라갔는 거래요. 올라가니까 노파에게 참 한 방망이를 되게 얻어맞았는데 그것도 어느 사이에 잊었는 거래요. 평소에 안하무인격인 그 성격이 드러나는 거래요 그래 빈정대듯이 척 용담원에 들어가서 하는 이야기가 “용도 없고 못도 없구먼.” 용담(龍潭), 용용자 못 담. “용도 없고 못도 없구먼.” 했는 거래요.
그때야 저만큼 구석진 곳에서 숭신 선사가 척 나타나면서 “자네가 참으로 용담에 왔네.” 했는 거래요. 그 말에도 대답을 못했는 거래요. 그래서 붙들려 들어가듯이 조실채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법문을 많이 듣는 거래요. 법문을 듣다가 보니까 캄캄한 밤이래요. 다 듣고 나오니까 참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두운 거래요. 그러니까 숭신 선사께서 용심지에 불을 붙여서요 주는 거래요. 막 줄려고 하다가 받으려고 하니까 불을 확 불어버렸어요. 불이 꺼지는 거래요. 꺼지는 순간 깨쳤는 거래요. 깨치고 나서는 어찌나 좋던지 절을 넙죽 합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숭신 선사가 이야기하니 “이제부터 천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치 않겠습니다.” 했다고 해요.
그 이튿날 덕산 스님은 용담사 숭신 선사의 그 법을 받고는 짊어지고 다니던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금강경소를 법당 앞에서 막 다 태우시는 거래요. 태우면서 하시는 말씀이 현묘한 말씀을 - 현묘한 말씀, 아주 깊은 무상심심의 말씀을 말하지요 - 말씀을 다 공부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 남는 격이요, 세간에 중요한 것을 다 알았다 해도 큰 골짜기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했다고 해요. 즉 깨달음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산 스님은 대해탈인, 대자연인이 되어서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아주 대선사가 됩니다. 깨달은 도인들의 깨닫는 순간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떤 도인은 깨닫는 순간 물통 밑이 막 빠지는 듯했다, 했어요.
변소에서 변만 잘 봐도 아주 시원하잖아요. 어떨 때는. 막 물통 밑이 빠진 듯 아주 시원함을 느낀다는 거래요. 깨치는 순간. 어떤 분은 천근같은 짐을 벗은 듯했다. 천근같은 그 무겁고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아주 가볍게 아주 시원하게 아주 후련함을 느꼈다는 그런 분도 있고 사방 벽이 툭 터지는 그런 시원함을 느꼈다, 그런 분도 있고 칠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즉 어두운 밤에 있다가요 갑자기 환히 밝은 그런 것을 느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깨닫는 순간은 가슴 속이 아주 시원하다는 거래요. 아주 시원하고 아주 후련하고요. 그런가 하면 탁 트이고요. 갑자기 막 환히 밝고 깨치는 순간들을 여러분들의 말씀을 종합하면 그래요. 그래서 그 감동이 온몸을 흔들었다, 어찌나 감동스러운지 온몸을 자기가 주체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가슴 속에 맑은 희열이 막 용솟음쳤다 그런 분도 있고요.
그래서 그 깨달음의 경계를 옛 선사는 “그 깨달음의 경계를 뉘라서 알아줄 것인가? 이 깨달음의 기쁨을 짐작이나 할 것인가” 그렇게 말씀하신 분도 있어요. 그래서 어찌나 좋은지 막 순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고요, 막 춤을 덩실덩실 췄다는 그런 분도 있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는 그런 분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요.
그 순간이 어찌나 좋던지 그냥 막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는 거래요. 어떤 분은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고요, 어떤 분은 눈 위를 눈이 자욱하게 온 눈 위를 맨발로 막 미친 사람처럼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고요. 어떤 분은 너무 좋아서 막 싱글벙글 망아지처럼 신발이 벗겨지는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막 발에 피가 나도록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즉 그럴 정도로 깨달음은 참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함이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여러분께서는 깨닫지 못한 분은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이 선은 깨달아서요, 구경(究竟)에는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것이 마지막 얻는 것이래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사까지도 막 초탈하는 거래요. 흔히 생사를 자재한다, 합니다. 자재한다는 것은 자유자재한다는 거래요. 즉 생사도 마음대로 한다는 거래요. 이런 말은 참 옛 선사도 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어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이래요. 내가 태어나고 죽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사시다가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큰일이 많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일이래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대사다, 합니다.
이 생사문제는 선의 시작과 끝이다, 할 수가 있어요. 이 선을 보통 시작하는 분은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대단한 마음을 내고 대체적으로 출가를 합니다. 그래서 아주 애쓰고 참으로 노력해서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것을 바로 수행의 완성이다, 합니다. 옛 어른들은 일에 대해서 아주 한결같이 고구정녕하게 아주 노파심절하게 반드시 생사도 초탈하시라,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옛 선사들이 아주 대단한 스님들이 가실 때는 보통 예언을 했어요. 내가 아무 날 아무 시에 가겠네. 그 예언은 두 가지로 해석해요. 내가 그날 그 시까지만 살다가 고만 죽겠다는 즉 자기 생명의 기한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요, 내가 그날 그 시까지만 살다가 죽겠다, 하는 자기 의지를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참 대단하지요. 즉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했는 거래요. 이것은 여러분도 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 말씀이래요. 조사스님들 말씀이고요.
연세가 좀 높아서 죽음에 대해서 참으로 좀 괴로움을 느끼시고 두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은 꼭 수행을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옛 선사들은 가는 날짜는 물론이고 자기 의지까지 말한 그런 대단한 분이 있었어요. 옛날에 동산 양개 (洞山 良价 807∼869)화상이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 있어요. 조동종(曹洞宗)을 창종한 그런 선사래요.
그 선사는 무정설법이라고, 아주 유명한 설법을 했어요. 하루는 무정설법을 대중한테 잘하고는 법상에서 하시는 말씀이 “난 오늘 갈라네.” 하시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젊은 스님이 “스님, 어디 가실랍니까?” 묻더라는 거래요. 그냥 “갈라네.” 하시더라는 거래요.
그러더니 법상에서 내려가 가지고 방장실에, 즉 당신 방에 들어가더니 앉자마자 그대로 돌아가시는 거래요. 그대로 죽는 거래요. 그야말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뜻대로 그대로 가시는 거래요. 그때는 건강이나 연세나 여러 가지를 봐서 가실 때가 아닌 거래요. 그래서 대중이 그 방에 가서 막 울고불고 했는 거래요.
그러니까 네댓 시간 지나서 비식이 깨어나는 거래요. 깨어나 하신단 말씀이 “아, 내가 갈 때 돼서 가는데 뭘 그렇게 우느냐”고 오히려 호통을 치시는 거래요. 그러면서 일주일간 안심법문을 하는 거래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법문을 잘하시고는 “그래, 이제 내가 가도 되겠지?”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아무 말씀이 없으니까 “여러분 잘 있게. 난 갈라네.” 하고 갔다는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렇게 생사를 아주 마음대로 하신 그런 분이 있었어요.
중국에 방거사라는 분이 있었어요. 방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와 우리 신라의 부설거사처럼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거사 중에 한 분입니다. 방거사는 젊을 때 걸망을 매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인데 어떤 스님이 “처사, 처사, 어딜 가시오?” “과거 보러 갑니다.” “과거 보러 가는 것보다 도인 되는 게 더 안 낫겠습니까?”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과거 보러 가다가는 당시에 유명한 마조 도일 스님이라고 그 선승이 계시는 곳에 막 바로 가서 입산을 했는 거래요.
마조 스님에게 그분은 아주 공부를 잘해서 대 도인이 됩니다. 마조 스님에게 자기만 도인이 됐느냐, 자기 부인하고 아들 딸 남매가 있는데 네 식구가 다 도인이 됐어요. 그래서 사자굴에 오직 사자뿐이다, 할 정도로 전부가 도인이라. 이 네 명의 가는 모습이 당시 아주 화제가 돼서 중국 불교를 중흥시키는 그런 그 계기가 됐다고 해요.
그래 그 일생을 살다가 거사가 인제 돌아가실 때가 됐어요. 그 딸이 아주 총명했던가 봐요. 영조라고. “영조야.” 하고 부릅니다. 부르니까 영조가 쪼르르 오는 거래요. “해가 어디까지 왔느냐? 오시가 되거든 알려 달라.” 하는 거래요. 그러니 영조가 나가서 해를 보더니 “해가 이미 중천에 와 있어요. 빨이 와보세요.” 하더라는 거래요. 그러니까 거사가 문밖으로 나가서 해를 봅니다. 그 사이에 그 영조라는 딸은 아버지가 앉는 그 좌복 위에 얼른 가서 앉더니 그냥 그대로 죽는 거래요,
이해가 좀 안 가시겠지만 이거 실화입니다. 당나라 때 아주 화제가 됐던 이야기래요. 그렇게 그 영조도 도인 중에 도인이라 그냥 자기 몸을 벗는 거래요. 그래 거사는 들어와서 딸 죽은 모습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 내 딸이 제법 빠르군.” 그냥 다른 말도 안하고 내 딸이 제법 빠르군,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방거사가 딸의 다비를 마치고요 일주일이 되는 날이래요. 고을의 태수 우적이란 분이 계셨어요.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납니다. 그래서 쌓였던 정회를 실컷 푸셨는 거래요. 풀고는 현담을 다 마치고 방거사가 문득 게송을 읊기를, “빈꽃의 그림자는 어지러이 떨어지고 태양불꽃의 파도는 거세서 물결치는구나.” 하는 그런 그 시구를 읊고는 태수 우적의 무릎을 베더니 그냥 입적하는 거래요. 그대로 돌아가시는 거래요.
이 소식을 부인에게 알립니다. 부인에게 알렸더니 부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요. 담담하게 하시는 말이 이 어리석은 딸과 무지랭이 영감쟁이가 자기한테도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더라는 거래요. 태수의 심부름꾼이 방거사 아들한테 이제 알리는 거래요. 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한참 일하고 있는데 돌아가셨다, 하니까 그냥 그대로 서 있더니 그냥 한참 서 있는 거래요. 서 있어서 “갈랍니다.” 해도 그냥 서 있는 거래요. 호미를 쥔 상태로 서서 그대로 돌아갔는 거래요. 이미 서서 그대로 돌아갔어요. 그래서 시자는 돌아간 줄도 모르고 얼마를 있어도 뻣뻣하게 서 있는 거래요. 아 그래서 시신을 만져보니까 뻣뻣한 거래요. 그래 놀라서 부인에게 막 달려가서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니 부인이 또 하는 말이 못난 자식 같으니라고.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갔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 뒤에 그 부인이 녹각사라는 절이 있는 데서 재를 올리고요, 유나스님이 절을 집행하는 스님이 부인에게 축원을 해주십시오 하면서 청을 했다는 거래요. 그랬더니 부인이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서요 새로 꽂고는요 “회향을 해서 다 마쳤습니다.” 하더랍니다. 하고 바로 나가더라는 거래요. 그 후에 부인은 고향사람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고요 그래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 도인 가족 그 네 명은요, 그렇게 전부가 다 도인이래요. 전부가 다 돌아가는 것을 마음대로 했어요. 그래서 당시에 당나라 땐데 중국 초야에서는 아주 화제가 되고요, 불교가 갑자기 번창할 수 있는 좋은 그런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마지막 모습이 중요해요.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모습, 즉 라스트신이 어떤 신이냐, 라스트신이 아주 멋지면 보는 이에게 참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좋은 그런 드라마로 기억이 됩니다. 그렇듯이 인생의 드라마도 인생의 라스트신이 좋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 스님들은 마지막 모습이 어떠냐, 마지막 어떻게 가셨느냐에 따라서 옛날 스님들은 그 스님이 도인이다, 아니다 그런 이야기도 했고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 스님에 대한 평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왜냐, 그 마지막 모습이 바로 일생을 함축한 모습이라, 줄이고 줄인 신이래요. 그래서 마지막 모습을 아주 중시합니다.
꺠치진 못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애쓰고 애써서 유종의 미를 거둔 그런 분이 많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사시고 계시겠지만 아무리 잘살아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선이 도(도)가 믹스가 안되면 허망하고 괴롭고 훗날 부끄럽고 한스러운 그런 일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얼마나 선적인 요소가 믹스가 잘되느냐 못되느냐, 그래서 참 행복을 느끼고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 또 생사까지도 초탈하느냐 초탈하지 못하느냐, 거기에 달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길을 들어왔다, 이 이상의 길이 없다, 그런 생각을 늘 하시면서 좀 어렵더라도 힘드시더라도 화두를 놓지 마시고 꾸준히 노력하고 애쓰시다 보면 참으로 좋을 날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좀 어렵고 힘들다는 분이 있어요. 또 의외로 쉽다는 분도 많아요. 그러나 세속에 사시는 분들은 이 세속에서 늘 우리 스님들처럼 항시 애쓰기가 어려워서 더 어렵고 더 힘드실 수밖에 없는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절에 왔을 때나 시간이 있을 때는 바짝 참으로 애쓰면 의의로 쉽다, 바로 된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주사위는 여러분에게 던져져 있습니다.
불교 이상이 없다, 즉 선수행 이상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오직 애쓰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서 잘살았다,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 나와봐라, 나에게 돌을 던질 사람 있거든 한번 던져봐라 하듯이 자신만만한 일생을 방거사 일가처럼 그렇게 마무리를 잘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라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오늘 저녁에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요, 하루 저녁을 잘 정진하시고 그 여운이 한달 내내 없어지지 않도록 해서 또 내달에는 좀 더 차원 높은 그런 공부가 되도록 애쓰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녹취: 구해진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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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2007년 1월부터 10월까지 축서사(경북 봉화) 대웅전에서 있었던
축서사 조실스님이신
무여큰스님의 화두참구법 법문 모두를 전재하였습니다.
큰스님의 자상하시고 자애로운 화두참구에 관한 가르침이
초심자에게는 화두선에 대한 길잡이로써
그리고 구참자에게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혜롭게 해결하여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훌륭한 선의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공부하는 참선자들이
이 땅에 점점 늘어나 마음의 편안함과 안락을 스스로 체험하고
나아가 나라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화두참구법 제10강-선의 효과(2007년 10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날씨가 제법 쌀쌀하지요.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고 변화무쌍하니까 이 날씨마저도 사람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 여름에는 그렇게 비를 뿌리더니 가을인가 했더니 초겨울 기분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의 기후나 변화가 무상하더라도 이 참선하는 사람의 그 마음에는 늘 고요하고 늘 아늑해야 돼요.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뭐 봄철이든, 어딜 가든 어디 오든 늘 고요하고 늘 안정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씨가 좀 추운 날도 이 법당에서 좀 춥다 싶은 이런 법당에서 하룻밤쯤 바짝 좀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오늘은 선(禪)의 효과에 대해서, 이 선을 하면 어떤 효능이 있느냐, 어떤 효과가 있느냐, 어떤 이익이 있기에 세계 사람들이 선을 말하고 선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선(禪)이 상당히 되는 분이 있지요? 아마 계실 겁니다. 흔히 상당히 된다는 것은 진의(진의)가 나는 상태를 보통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정(動靜)에 일여(一如), 즉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한결같이 여여(如如)한 그런 상태를 상당히 된다고 말합니다. 즉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무슨 일을 하거나, 직장 근무를 하거나 늘 변함이 없이 항시 여여한 상태, 그런 상태를 보통 상당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상태는 사고를 해도, 생각을 해도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런가 하면 학생이 책을 읽어도요, 전연 변함이 없고요. 어떤 계획 같은 걸 세워도요 ,전연 변함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결같이 여여하게 되는 것을 상당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상당히 되는 상태, 즉 동정(動靜)에 여여한 그런 상태까지는 꼭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 체험해야 화두(火頭)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요. 그래서 “아! 좋다, 안 할 수 없다, 참으로 이 이상이 없다”, 그런 그 자부심과 아주 긍지를 느낍니다. 그런 정도 되면 인생에 자부심과 긍지도 느껴요. 인생 자체에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고 어디 가도 말은 않지만 내면에서 대단함이 느껴지는 그런 그 긍지를 꼭 느낍니다.
그래서 선(禪)을 하면, 선을 좀 해서 그런 상태에서 사는 것하고 그냥 평범하게 예사롭게 사는 거하고는 훨씬 다르다, 그런 생각을 늘 하시면서 이렇게 참 느껴보셔서 좀 어렵고 힘드시더래도 선에 대해서 꼭 진정한 그런 체험을 반드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속에서 아무리 잘산다고 하더래도요, 선(禪)이 믹스가 돼야 돼요. 돈을 많이 버시고 명예가 대단하시고 아니면 권세가 등등하더라도 또 소중한 가정생활까지도요, 잘사신다, 뭐 행복하다, 외형적으로 그런 말을 하더라도 선이 믹스가 안되면, 즉 마음에 안정이 없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선진국에서 선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선(禪)을 하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어떤 효능이 있을까?
첫째는 안심(安心)을 얻어요. 마음이 편안해져요. 옛 어른 말씀에 마음 편하면 됐지 뭘 더 바랄 것이 있느냐 할 정도도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요. 마음이 편하면 몸까지도 편안해져요. 마음이 편하고 몸도 편하다는 것은 전연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거래요. 그러면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럴 정도로 첫째는 안심을 얻어요.
안심은 모든 행복과 성공과 성불(成佛)까지도요, 그 기초 근본이 돼요. 그래서 여러분께서 늘 평소에 안정을 시키려고 애쓰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흔히 행복, 행복 하는데 행복도 안정이 안되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아무리 여건이 갖추어져도요, 행복을 모릅니다. 자신은 못 느껴요. 남들이 볼 때는 저 양반, 참 어지간히 갖추고 이것저것 다 없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정작 자기 내면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 안정이 안되면 행복을 못 느낍니다.
성공도 그래요 안정의 바탕에서 아주 애쓰고 노력하셔야 돼요. 그래야 드디어 남다른 성공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이 성불(成佛)도 그래요. 안정의 바탕에서 “이뭐꼬” 해야 참으로 진의(眞疑)가 돈발할 수 있어요. 근본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뭐 ‘화두 참선한다’ 하면 되기가 어려워요. 상당수가 안정이 안된 상태에서 선(禪)을 하고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그런 분이 상당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기본은 안정이래요. 안정이 돼야 참으로 사는 재미, 진정한 그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을 늘 잊지 마시고 항시 안정을 시키려고 좀 애쓰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화두를 들면서 ‘이뭐꼬’, 또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인가?’, 이렇게 안되는 화두래도 간절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쉬임 없이 그렇게 들어가다가 보면 어느날 간절하게 (화두를) 안 들어도 화두가 막 간절할 때가 있어요. 그 간절한 순간 화두에 힘을 얻어요. 흔히 ‘득력(得力)한다’ 합니다. 이 득력을 하면 그때부터는 의정(疑情)이라고 해요. 진의가 돈발하는 거래요. 그렇게 순간 진의(眞疑, 참된 의심)가 돈발하는 그런 분은 그렇게 많질 않아요. 안되는 화두지만 애쓰고 애쓰다가 보면, 약하지만 끊어질 듯 끊어질 것 같지만 결국 의정이 일어나요.
좀 바짝 애를 쓰면 더 강해집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강한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그렇게 진의가 일어나면 일체, 아주 일체는 아니라, 웬만한 번뇌나 망상은 다 사라져요. 남을 미워한다든가 성을 낸다든가 슬픈 마음, 기쁜 마음, 불안과 공포, 일체 욕망이 마음에서 웬만한 것은 사라져요. 그렇게 마음에서 이런저런, 즉 번뇌나 망상이 사라지면요, 마음이 아주 고요해져요.
고요해지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면 평소에 앉으면 연신 몸을 비틀고 괴로워하고, 그 보기가 딱해 보이는 그런 분도 그런 정도 앉으면 어엿하게 저 등상불(等像佛, 불상)처럼 꼿꼿하게 몇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잘 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나름대로 묘한 그런 재미를 느껴요. 그런데 그 재미는 좀 약해요.
좀 더 들어가면 더 안정이 돼서 더 맑고 더 맑으면 아주 오묘한 그런 기분을 느껴요. 그것을 흔히 안락이다, 편할 안(安), 즐거울 낙(樂), 즉 아주 편하고 즐겁다는 거래요. 그것을 흔히 법열(法悅)이다, 하기도 해요. 즉 진리에서 느끼는 그런 기쁨인데 즉 기쁘다고도 할 수 있고, 아주 즐겁다고도 할 수 있는 오묘한 그런 기분이래요.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을 보통 웰빙(Well-being)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정도라, 그 수준도 조금 못되는 그런 수준이라 '초보단계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화두가 그 정도 되면 뭐 화 같은 것도 거의 안 나요. 뭐 괴로워도 별로 괴롭다는 생각도 안 들고 어디 가도 마음이 넓어지고 커지고 완전히 인간 자체가 서서히 변합니다. 그런 안락한 상태, 아주 희열을 느끼는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마치 꿀이나 사탕을 먹는 거 같애요. 꿀 먹어보세요. 얼마나 달콤한가요. 사탕도 요즘은 사탕이 많지만 옛날 사람들은 사탕 하나 얻어먹으려고 몇십 리를 따라갔다 그런 이야기 할 정도로 얻어먹기 어려웠던 것이 사탕인데 그런 사탕을 입에 넣어봐요. 그렇게 달거든.
그럴 때 그 행복. 그것은 말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행복 같은 것을 아주 느껴요. 그런 그 행복, 그런 그 오묘한 기분, 그것을 흔히 진정한 행복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 행복은 여러분이 세속에서 사시면서 어떤 행위를 한다든가 살아가는 데서 느끼는 그런 행복하고는 전연 달라요.
이 행복은 한번만 느끼면 두고두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행복입니다. 흔히 사람은 행복을 찾는 늑대다, 그렇게 이야기도 합니다. 늑대란 놈이 아주 교활한 그런 동물이라고 하지요. 늑대처럼 아주 교활하게 온갖 잔꾀를 부리면서 오직 행복, 행복 하면서 찾는 것이 행복이라고 해요. 그런 그 행복은 외형적인 행복이라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이런 그 수행에서 즉 도(道)에서 느끼는 행복하고는 비교가 안돼요.
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도 있다고 해요. 나그네처럼 일생을 아무리 다녀도요, 진정한 행복은 못 찾아요. 진정한 행복은 자기 내면에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요. 그 행복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보물 중에 보물이라, 근데 보통사람은 그 보물을 모르고 외부에서 부지런히 평생 고생고생 하면서 찾는다고 찾지만 무상(無常)만 느낄 뿐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만 되면 하지 말라 하지 말라고 참 뭐 보따리 싸 짊어지고 따라다니면서 말려도 안 할 수가 없어요. 왜냐, 그 이상이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뿐이다,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 할 수 없는 것이 선(禪)이다, 그런 정도까지는 여러분이 꼭 느껴봐요.
그러면 절에 나온 보람, 참 추운 날씨에 이 산중까지 온 보람을 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묘한 그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은 화두선보다 묵조선(黙照禪)이 더 깊게 더 쉽게 느껴져요. 화두선도 그런 그 재미를 느끼려면 약간 느슨하게 그렇게 하면 (그런)재미를 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느슨하게 재미를 느낀다고 빠지다가 보면 화두가 그만 없어지고 말아요. 그래서 화두는 조금 못 느끼더라도 맹렬하게 용맹정진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공자께서 말씀하신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아침에 도만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했어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래요. 그 죽음도요 아침에 도만 들으면, 사실은 도(道)는 보는 거래요. 공자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아침에 도만 보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그런 것이 도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 되면 옛 어른 스님들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당신 몸을 희생하고 버린 그런 그 위법망구를 할 수 있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둘째는 뭐냐, 둘째는 선(禪)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머리가 좋아져요, 즉 머리가 맑아져요. 진의(眞疑)가 나서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맑아진다, 했습니다. 거기에서 더 깊게 들어가면 아주 더 고요해져요. 고요해지면 맑아져요. 맑아졌다가는 밝아집니다.
밝아졌다면 깨쳐져요.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한다는 거래요. 즉 중생은 미망중생이다 하듯이 마음이 늘 흐리고 탁해요. 즉 흐리고 탁하니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거래요. 뭐 하는 게 어렵고 힘드시고 괴로워요. 그래서 “못살겠다, 날 좀 살려주시오”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흔히 둔한 사람이다, 뭐 미련한 사람이다, 그렇게도 이야기하는데 그런 분은 본래면목 즉 근본자성이 번뇌망상으로 흐려져 있기 때문이래요.
본래는 누구나 불성이 다 있어요. 불성만 있느냐? 부처님과 같은 초롱초롱한 지혜도 있어요. 그 천재성이 누구나 다 있다는 거래요. 그런데 부처님과 같은 분은 아주 대단한 천재 중에 천재인데,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이 무슨 말을 묻든, 신도가 어떤 질문을 하든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적당한 진리를 설파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비상하고 아주 대단한 분이라. 이런 분이 또 있을까, 이런 양반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지혜로운 분이래요 .
그런 지혜를 보통사람도 다 갖췄다는 거래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지혜롭고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왜 보통사람은 어둡고 둔하게 사느냐? 바로 번뇌망상 때문이라는 거래요. 그 번뇌망상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근본자성을 흐리게 하고 탁하게 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흐리고 탁한 그 무명을 제거하는 작업이 바로 수행이래요. 그래서 그 흐리고 탁한 것을 제거하고 없애면 본래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아주 초롱초롱한 지혜, 아주 천재적인 그런 것을 발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근본 지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누구나 그것을 개발하는 것을 바로 ‘수행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둡고 탁한 그 미망을, 그 무명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맑아져요. 맑아진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진다는 거래요. 기억력이 초롱초롱해진다는 거래요. 그래서 부처님 같은 천재성을 누구나 발굴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학문으로 얻는 지혜, 책을 보고 공부를 한 그런 지혜는 배운 것, 그것밖에 몰라요.
그러나 참선으로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흔히 한량이 없다 합니다. 그래서 흔히 선수행으로서 얻은 지혜를 태양에 비유해요. 태양은 뭐 얼마나 밝습니까? 그런가 하면 학문으로 얻은 지혜는 반딧불에 비유해요. 반딧불은 햇빛이 쨍쨍 쪼이면 반딧불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드러나지가 않아요. 그만큼 비교가 안된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농담처럼 이야기할 때 뭐 좀 안다고 까불고 아는 체 하는 사람한테 “네가 아무리 아는 체 해봐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학문으로 얻은 지식, 그것은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거래요. 그렇게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맑아져요.
맑아지는 것이 바로 머리를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젊은 어머니들이 요새 아이 머리 좋게 하려고 별 수단과 방법을 다 하시는 그런 분도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참선 시키는 거래요. 참선까지는 너무 거창한지 몰라도 마음을 안정만 시키면, 마음만 비우게만 하면, 마음만 쉬게 하면 머리는 자연스럽게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뭐 이런저런 책을 보이고, 번뇌망상을 피우게 하고, 요즈음은 컴퓨터로 온갖 장난질을 하게 하니까 태어날 때는 아주 맑고 제법 괜찮던 아이의 머리도 점점 흐려져서 둔재가 되는데 그만큼 어머니들이 어리석다는 거래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주리반타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참 민망할 정도로 딱할 정도로 저능아래요. 부처님이 뭘 시킬 수가 없었어요. ‘요거해라’ 하면 그거 하다가도 하는 것조차도 잊어버리는 분이라, ‘저거해라’ 하면 저거 하다가 잊어버리는 분이래요. 하도 안타까워서 하루는 아주 애정 어린 말씀을 하시는 거래요.
“주리반타카야, 넌 다른 것은 하지 말고 ‘쓸고 닦으리’만 해라.” 했는 거래요. 근데 ‘쓸고’ 하다가는 또 ‘닦으리’를 잊어버려요. ‘닦으리’ 하다가는 ‘쓸고’를 잊어버려요. 그러고는 우두커니 서 있는 거래요. 그러나 주리반타카는 아주 의지가 강한 분이래요. 부처님 말씀 그대로 실천하고 애쓴 분이라, 아주 저능아지만 애 쓰고, 애 쓰고, 또 애쓰니까 머리가 맑아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머리가 터지는 거래요. 그래서 남방 최고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화두가 좀 되어서 몽중(夢中)에 일여(一如) 즉 꿈 속에서도 화두가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되면 세계적으로 좀 저명한 유명한 천재들,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그런 분들을 조명하듯이 해보면 ‘저런 분은 어느 정도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분들의 대단한 학문이나 성공 자체는 설사 모르더라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그 행동 같은 데서 천재성을 느낍니다. “아, 저 천재는 어느 정도다”, 그런 정도는 몽중에 일여 즉 꿈 속에서도 여여한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이 밤에 캄캄한 밤에 플래시로 이래 뭘 조명하듯이 시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좋아지게 할 수가 있구요.
세 번째는 뭐냐? 선을 잘하면, 선이 제대로 되면 인간성이 변해요.
화두에 큰 힘을 얻어서 수행공덕이 쌓이면 성품이 차츰차츰 변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서서히 큰 인간으로 즉 부처님 같은 도덕을 갖춘 그런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것을 어느 날 갑자기 변하는 것을 느끼는 그런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자기도 자기를 좀 놀랄 정도로 그렇게 변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즉 번뇌망상이 다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넓고 커져요. 그래서 급한 성미도 느린 듯 아주 침착해져요. 행동도 중후해지고요 자세도 의젓해지면서 경거망동 같은 것도 없어집니다. 즉 가벼운 사람, 그런 사람도 아주 묵직하고 중후한 그런 인간으로 서서히 변합니다. 그 정도 되면 또 의지도 강해져요. 뭐 나약하다, 여자 같다 그런 분도 강하고 좀 남성적이고 그래서 우유부단하다든가 그런 사람도 꿋꿋하고 아주 당당하게 그래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기질이 좀 약해서 뭐 하다가는 조금만 하고는 그냥 손 터는 그런 사람도 끝장을 보듯이 막 고집쟁이처럼 끈질기고 지독한 그런 인내력도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선 수행 전에 자기만 알고 아주 소승적이고 옹졸하고 비좁던 사람도요, 남을 용서할 줄 알고 아주 대승적으로 인격을 갖추고 베풀기도 하고요 큰 사람 면모를 즉 부처님 면모로 서서히 변하기도 합니다. 주변에서는 아주 훌륭하다, 존경스럽다, 거룩하다, 그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 정도가 되면 사람이 향취가 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 정도가 됩니다. 늘 같이 사는 부부간이래도요, 달리 보이고 대단하게 보이고 그런 것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태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해요. 어떤 수행을 잘하는 그런 보살이 있었던가 봐요. 가게를 보는데, 그 가게가 시장 골목의 가겐데 그 가게를 지나가는 분이 많았던가 봐요. 큰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인가 봐요. 큰 시장으로 들어가는 분이, 큰 시장에 가서 볼 일 볼 사람도 그 집안만 가면 그 보살의 얼굴만 보면 그냥 들어간다는 거래요. 그래서 꼭 살 것도 없는데, 꼭 그 집에 가서 사려고 시장에 나온 것도 아닌데 그 집에 들어가서는 이것저것 사오는 거래요.
그래서 그 주인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얼굴만 파는 거래요. 그래도 그 물건 사러 오는 분들이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아주 부처님처럼 모셔놓고 큰 가게를 열고는 그렇게 물건을 팔았다는 그런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즉 얼굴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여러 가지 인간 됨됨이가 서서히 변해서 옆 사람도 좀 느껴질 정도로 부처님과 같은 그런 면모를 갖추게 된다는 그런 그 뜻입니다.
넷째는 뭐냐? 일에 능률이 올라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능률이 올라요. 같은 일을 하는데도 선을 해서 집중하는 습(習)이 되고요,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집중하는 힘 자체가 생겨서 이중으로 막 집중이 돼요. 그래서 일에 빠지기가 쉬워요. 일에 막 빠지듯이 집중하니까 일을 뭐 잘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 생산성이 오르고 효과가 아주 크게 원만하게 나기도 합니다.
요즘 학생들 중에서는 보통 이어폰을 끼고 텔레비젼을 틀어놓고 그렇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지요. 컴퓨터를 틀어놓고 게임을 즐기면서 공부하는 그런 학생도 있다고 해요. 사실은 그런 학생이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을 거래요. 집중해야 됩니다. 화두선 하듯이 화두선이 참으로 돼서 집중이 되듯이 그렇게 집중하면 그런 습을 늘 들이고 일은 반드시 집중해야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골프황제라고 하대요. 타이거 우즈요. 그분이 흑인 아버지하고 태국계 여성하고의 몸에서 태어났답니다. 근데 어머니가 위파사나를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아이한테 위파사나를 가르쳤는 거래요. 즉 집중력을 가르쳤는 거래요. 그래서 타이거 우즈가 그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은 대단한 집중이다, 그래서 그 타이거 우즈를 따를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그 근본 원리는 뭐냐, 즉 집중력이래요. 막 집중해서 막 빠져야 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빠져야 돼요. 성공하고픈 사람이나 젊은이일수록, 장래가 창창한 그런 사람일수록 막 빠질 수 있어야 돼요. 일은 어쨌든 빠져야 돼요. 빠져서 미쳐봐야 됩니다.
미치듯이 일도 해야 되고 미치듯이 화두를 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해요. 선정에 안 들어보면 사실 들을 이야기가 없어요. 선정에 들어봐야 이야기가 돼요. 그래야 그 무슨 이야기든지 재미있는 별 이야기를 다합니다. 그렇듯이 일도 막 빠져봐야 돼요. 미치지 못한 사람은 별것 아니래요. 그렇게 막 미칠 정도로 막 빠질 수 있는 것은 집중이래요. 그렇게 집중하니까 잘 안될 수가 없는 거래요.
우리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는 생산성이 안 오른다는 그런 통계가 나왔던데 집중해서 일을 안 하기 때문이래요. 그저 남의 일이니까 제 일처럼 안 하고요. 막 집중해서 짧은 시간에 극대화시키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집중해서 막 되게 빠져서 막 24시간 풀가동 돼서 선정에 빠지면 깨달음에 가깝다,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일도 집중해서 꼭 빠져보시고 그래서 세속적으로도 성공을 하시고 또 선도 좀 잘하셔서 그런 남다른 그런 인생을 꼭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는 뭐냐?, 질병을 고쳐요. 이런저런 병을 고쳐요.
선 수행이 웬만큼 잘되면 병이 안 나요. 선원에 다니는 스님들도 어떤 분은 뭐 약봉지를 늘 가지고 다녀요. 사실 그런 분은 옳게 안될 거래요. 선이 옳게 되면 웬만한 병은 저절로 나아요. 선 수행을 해서 마음이 아주 고요해지고 몸도 아주 편안한 상태가 돼서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동정에 일여한 그런 상태, 그래서 아주 맑고 오묘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재미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그런 정도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져요.
뭐 어디가 아프다, 안 좋다, 오장육부가 어떻다 저떻다, 하지만 저절로 다 나아버려요. 이것은 참선뿐 아니라 염불을 해도 마찬가지고요. 주력을 해도 그렇고 그런 경계만 되면 저절로 나아요. 그것이 이제 수행 공덕이다 하는데 그렇게 묘한 아주 오묘한 행복감을 느낄 그럴 정도까지만 되면 건강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 안 해도 돼요.
그래서 옛 어른 말씀에 수행이 지극하면 노쇠해서 시들어가거나 병약한 사람도 “고목에서 꽃이 피듯이 건강을 되찾고 노화방지도 되어 장수하게 된다”, 했습니다. 그 시들어가던 그런 사람도요, 고목에서 꽃이 피듯이 건강을 되찾는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노화방지도 돼서요, 장수한다 했습니다. 그렇게 좀 오묘한 기분을 느낄 정도, 그런 정도가 되면 신진대사가 촉진이 돼요. 젊음이 와요. 그래서 고목에서 꽃이 핀다는, 표현을 쓰는데 젊음이, 회춘이 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늘 건강을 유지하고 병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한 그런 생각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선 수행은 특히 신경계통의 병에 좋아요. 신경계통 병. 스트레스나 즉 몸에 해로운 육체적 정신적 자극이 가해졌을 때 나타나는 그런 반응인 스트레스나 심리적 장애 아니면 노이로제 같은 그런 정신분열증 같은 그런 정신병이 선에는 아주 좋아요.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신병자나 정신박약자 같은 그런 분도 이 선을 하면 좋아요
어느 정도해서 좋냐? 집중이 되는 상태까지만 가면 저절로 사실은 좋아져버려요. 그래서 정신병이 있는 사람일수록 집중만 잘하게 하면 집중이 잘돼서 기분을 오묘한 그 기분, 그 행복을 좀 느끼고 신진대사가 촉진이 되는 그런 상태가 되면 웬만한 병은 낫고 정신병에 특효가 난다는 것이 옛 어른들의 한결같은 그런 말씀입니다.
일곱째, 신통력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달에 해드렸지요. 신통한 그 공부가 깊어지면 아주 신통한 경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보통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흔히 신(神)이다, 합니다. 뭐 걸림없이 어디든 통한다, 해서 신통이라고 하는데 신통을 느끼면 자기를 억제하기가 어려워요. 그때는 자기 브레이크가 잘 안돼요. 그럴 때도 자기를 잘 억제하고 자기를 잘 갈무리해서 오직, 오직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하듯이 그렇게 애쓰다가 보면 깨달음을 얻습니다.
선의 목적은 깨달음이래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 효능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 과정에서 사실은 부수적으로 얻는 이익이다, 할 수가 있어요. 한국 선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강조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좋은 점, 장점 그런 것을 아주 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근데 보통 신도님 여러분들 아니면 또 일반적으로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분은 깨달음까지는 너무 거창하고 마음이 안정이 돼서 좀 편안하고 아 맑고 행복을 느끼는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는 거래요. 그러나 선의 목적은 깨달음이래요. 선이 참으로 돼보면 점점 더 욕심을 낼 수밖에 없고 궁극은 깨달음으로 향합니다.
선의 이상은 “자기의 성품을 봐서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래요. 즉 부처란 ‘최상의 인간’이래요.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할 인간의 모델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어떤 사람이든 참 깨달을 수만 있으면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또는 괴로움이 있더라도 깨달으라는 것이 옛 어른 스님들의 한결같은 말씀입니다.
옛날에 덕산(780~785)스님이라는 아주 큰스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얼굴도 잘생기고요 뭐 말씀도 잘하셨다는 거래요. 머리도 아주 좋은 분이고요. 율장을 아주 깊이 연구했던가 봐요. 그래서 성성하게 달통하신 그런 아주 대단한 분이라, 그런데 그분은 특히 금강경(金剛經)을 뭐 강설을 잘했어요. 그래 성씨가 주씨라 “주금강”이다, 했습니다. 그렇게 닉네임이 붙은 그런 분이래요.
그런데 그분은 “천하제일 주금강이다”, 할 정도로 프라이버시가 아주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도반이, 당시 남방에는 선종이 있었는데 남방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 선감 스님이 볼 때는 아주 외도 중에 외도인 남방의 외도들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불한다는 거래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실력으로는 “보살이 육도만행을 그 무량겁으로 닦아도요, 성불하기 어렵다”고만 배웠는데 남방의 외도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하기에 “내 가서 소탕을 해버려야지, 본때를 보여야 되겠다” 하는 뭐 대단한 생각으로 남방으로 행각을 떠났어요.
남방의 어떤 지방을 가다가요, 점심 때가 됐는데 아주 시장한 거래요. 그래 점심 먹을 곳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더니 저 만큼 떡집이 있는 거래요. 떡집에 들어갑니다. 마침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거 떡 좀 주시오.” 주인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주인이 노파라, 아주 볼품없는 노파가 덕산 스님을 아래위로 쓱 훑어보는 거래요.
훑어보고는 “스님이 짊어지고 있는 게 뭡니까?” 묻는 거래요. “아, 금강경소요.” 뭐 금강경에 대해선 자신만만한 분이라 아, 자신만만하게 ‘금강경소요.’ 그랬는 거래요. 그러니까 노파가 “아, 그래요. 스님께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떡을 공짜로 줄 것이요, 대답을 못하면 안 팔겠소.” 하는 거래요. 아 그러니 아, 잘됐다 싶은 거래요. “물으시오.” 했는 거래요.
그러니까 “금강경에 과거심도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다. 스님께서 이 점심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어느 마음으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거래요. 그러니 그 볼품없는 떡장수 노파의 말씀에 천하제일의 주금강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여기서 가까운 곳에 선지식이 계십니까?” 묻는 거래요. 그래 그 노파가 “가까운 곳에 용담원이란 곳에 숭신 선사라는 아주 대단한 스님이 계십니다.” 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용담원에 갑니다. 뭐 떡이고 뭐고 뭐 얻어먹지도 못하고요. 그래 인제 가서는 그간 한참 올라갔는 거래요. 올라가니까 노파에게 참 한 방망이를 되게 얻어맞았는데 그것도 어느 사이에 잊었는 거래요. 평소에 안하무인격인 그 성격이 드러나는 거래요 그래 빈정대듯이 척 용담원에 들어가서 하는 이야기가 “용도 없고 못도 없구먼.” 용담(龍潭), 용용자 못 담. “용도 없고 못도 없구먼.” 했는 거래요.
그때야 저만큼 구석진 곳에서 숭신 선사가 척 나타나면서 “자네가 참으로 용담에 왔네.” 했는 거래요. 그 말에도 대답을 못했는 거래요. 그래서 붙들려 들어가듯이 조실채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법문을 많이 듣는 거래요. 법문을 듣다가 보니까 캄캄한 밤이래요. 다 듣고 나오니까 참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두운 거래요. 그러니까 숭신 선사께서 용심지에 불을 붙여서요 주는 거래요. 막 줄려고 하다가 받으려고 하니까 불을 확 불어버렸어요. 불이 꺼지는 거래요. 꺼지는 순간 깨쳤는 거래요. 깨치고 나서는 어찌나 좋던지 절을 넙죽 합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숭신 선사가 이야기하니 “이제부터 천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치 않겠습니다.” 했다고 해요.
그 이튿날 덕산 스님은 용담사 숭신 선사의 그 법을 받고는 짊어지고 다니던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금강경소를 법당 앞에서 막 다 태우시는 거래요. 태우면서 하시는 말씀이 현묘한 말씀을 - 현묘한 말씀, 아주 깊은 무상심심의 말씀을 말하지요 - 말씀을 다 공부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 남는 격이요, 세간에 중요한 것을 다 알았다 해도 큰 골짜기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했다고 해요. 즉 깨달음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산 스님은 대해탈인, 대자연인이 되어서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아주 대선사가 됩니다. 깨달은 도인들의 깨닫는 순간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떤 도인은 깨닫는 순간 물통 밑이 막 빠지는 듯했다, 했어요.
변소에서 변만 잘 봐도 아주 시원하잖아요. 어떨 때는. 막 물통 밑이 빠진 듯 아주 시원함을 느낀다는 거래요. 깨치는 순간. 어떤 분은 천근같은 짐을 벗은 듯했다. 천근같은 그 무겁고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아주 가볍게 아주 시원하게 아주 후련함을 느꼈다는 그런 분도 있고 사방 벽이 툭 터지는 그런 시원함을 느꼈다, 그런 분도 있고 칠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즉 어두운 밤에 있다가요 갑자기 환히 밝은 그런 것을 느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깨닫는 순간은 가슴 속이 아주 시원하다는 거래요. 아주 시원하고 아주 후련하고요. 그런가 하면 탁 트이고요. 갑자기 막 환히 밝고 깨치는 순간들을 여러분들의 말씀을 종합하면 그래요. 그래서 그 감동이 온몸을 흔들었다, 어찌나 감동스러운지 온몸을 자기가 주체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가슴 속에 맑은 희열이 막 용솟음쳤다 그런 분도 있고요.
그래서 그 깨달음의 경계를 옛 선사는 “그 깨달음의 경계를 뉘라서 알아줄 것인가? 이 깨달음의 기쁨을 짐작이나 할 것인가” 그렇게 말씀하신 분도 있어요. 그래서 어찌나 좋은지 막 순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고요, 막 춤을 덩실덩실 췄다는 그런 분도 있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는 그런 분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요.
그 순간이 어찌나 좋던지 그냥 막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는 거래요. 어떤 분은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고요, 어떤 분은 눈 위를 눈이 자욱하게 온 눈 위를 맨발로 막 미친 사람처럼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고요. 어떤 분은 너무 좋아서 막 싱글벙글 망아지처럼 신발이 벗겨지는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막 발에 피가 나도록 다녔다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즉 그럴 정도로 깨달음은 참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함이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여러분께서는 깨닫지 못한 분은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이 선은 깨달아서요, 구경(究竟)에는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것이 마지막 얻는 것이래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사까지도 막 초탈하는 거래요. 흔히 생사를 자재한다, 합니다. 자재한다는 것은 자유자재한다는 거래요. 즉 생사도 마음대로 한다는 거래요. 이런 말은 참 옛 선사도 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어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이래요. 내가 태어나고 죽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사시다가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큰일이 많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일이래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대사다, 합니다.
이 생사문제는 선의 시작과 끝이다, 할 수가 있어요. 이 선을 보통 시작하는 분은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대단한 마음을 내고 대체적으로 출가를 합니다. 그래서 아주 애쓰고 참으로 노력해서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것을 바로 수행의 완성이다, 합니다. 옛 어른들은 일에 대해서 아주 한결같이 고구정녕하게 아주 노파심절하게 반드시 생사도 초탈하시라,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옛 선사들이 아주 대단한 스님들이 가실 때는 보통 예언을 했어요. 내가 아무 날 아무 시에 가겠네. 그 예언은 두 가지로 해석해요. 내가 그날 그 시까지만 살다가 고만 죽겠다는 즉 자기 생명의 기한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요, 내가 그날 그 시까지만 살다가 죽겠다, 하는 자기 의지를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참 대단하지요. 즉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했는 거래요. 이것은 여러분도 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 말씀이래요. 조사스님들 말씀이고요.
연세가 좀 높아서 죽음에 대해서 참으로 좀 괴로움을 느끼시고 두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은 꼭 수행을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옛 선사들은 가는 날짜는 물론이고 자기 의지까지 말한 그런 대단한 분이 있었어요. 옛날에 동산 양개 (洞山 良价 807∼869)화상이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 있어요. 조동종(曹洞宗)을 창종한 그런 선사래요.
그 선사는 무정설법이라고, 아주 유명한 설법을 했어요. 하루는 무정설법을 대중한테 잘하고는 법상에서 하시는 말씀이 “난 오늘 갈라네.” 하시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젊은 스님이 “스님, 어디 가실랍니까?” 묻더라는 거래요. 그냥 “갈라네.” 하시더라는 거래요.
그러더니 법상에서 내려가 가지고 방장실에, 즉 당신 방에 들어가더니 앉자마자 그대로 돌아가시는 거래요. 그대로 죽는 거래요. 그야말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뜻대로 그대로 가시는 거래요. 그때는 건강이나 연세나 여러 가지를 봐서 가실 때가 아닌 거래요. 그래서 대중이 그 방에 가서 막 울고불고 했는 거래요.
그러니까 네댓 시간 지나서 비식이 깨어나는 거래요. 깨어나 하신단 말씀이 “아, 내가 갈 때 돼서 가는데 뭘 그렇게 우느냐”고 오히려 호통을 치시는 거래요. 그러면서 일주일간 안심법문을 하는 거래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법문을 잘하시고는 “그래, 이제 내가 가도 되겠지?”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아무 말씀이 없으니까 “여러분 잘 있게. 난 갈라네.” 하고 갔다는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렇게 생사를 아주 마음대로 하신 그런 분이 있었어요.
중국에 방거사라는 분이 있었어요. 방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와 우리 신라의 부설거사처럼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거사 중에 한 분입니다. 방거사는 젊을 때 걸망을 매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인데 어떤 스님이 “처사, 처사, 어딜 가시오?” “과거 보러 갑니다.” “과거 보러 가는 것보다 도인 되는 게 더 안 낫겠습니까?”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과거 보러 가다가는 당시에 유명한 마조 도일 스님이라고 그 선승이 계시는 곳에 막 바로 가서 입산을 했는 거래요.
마조 스님에게 그분은 아주 공부를 잘해서 대 도인이 됩니다. 마조 스님에게 자기만 도인이 됐느냐, 자기 부인하고 아들 딸 남매가 있는데 네 식구가 다 도인이 됐어요. 그래서 사자굴에 오직 사자뿐이다, 할 정도로 전부가 도인이라. 이 네 명의 가는 모습이 당시 아주 화제가 돼서 중국 불교를 중흥시키는 그런 그 계기가 됐다고 해요.
그래 그 일생을 살다가 거사가 인제 돌아가실 때가 됐어요. 그 딸이 아주 총명했던가 봐요. 영조라고. “영조야.” 하고 부릅니다. 부르니까 영조가 쪼르르 오는 거래요. “해가 어디까지 왔느냐? 오시가 되거든 알려 달라.” 하는 거래요. 그러니 영조가 나가서 해를 보더니 “해가 이미 중천에 와 있어요. 빨이 와보세요.” 하더라는 거래요. 그러니까 거사가 문밖으로 나가서 해를 봅니다. 그 사이에 그 영조라는 딸은 아버지가 앉는 그 좌복 위에 얼른 가서 앉더니 그냥 그대로 죽는 거래요,
이해가 좀 안 가시겠지만 이거 실화입니다. 당나라 때 아주 화제가 됐던 이야기래요. 그렇게 그 영조도 도인 중에 도인이라 그냥 자기 몸을 벗는 거래요. 그래 거사는 들어와서 딸 죽은 모습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 내 딸이 제법 빠르군.” 그냥 다른 말도 안하고 내 딸이 제법 빠르군,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 방거사가 딸의 다비를 마치고요 일주일이 되는 날이래요. 고을의 태수 우적이란 분이 계셨어요.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납니다. 그래서 쌓였던 정회를 실컷 푸셨는 거래요. 풀고는 현담을 다 마치고 방거사가 문득 게송을 읊기를, “빈꽃의 그림자는 어지러이 떨어지고 태양불꽃의 파도는 거세서 물결치는구나.” 하는 그런 그 시구를 읊고는 태수 우적의 무릎을 베더니 그냥 입적하는 거래요. 그대로 돌아가시는 거래요.
이 소식을 부인에게 알립니다. 부인에게 알렸더니 부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요. 담담하게 하시는 말이 이 어리석은 딸과 무지랭이 영감쟁이가 자기한테도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더라는 거래요. 태수의 심부름꾼이 방거사 아들한테 이제 알리는 거래요. 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한참 일하고 있는데 돌아가셨다, 하니까 그냥 그대로 서 있더니 그냥 한참 서 있는 거래요. 서 있어서 “갈랍니다.” 해도 그냥 서 있는 거래요. 호미를 쥔 상태로 서서 그대로 돌아갔는 거래요. 이미 서서 그대로 돌아갔어요. 그래서 시자는 돌아간 줄도 모르고 얼마를 있어도 뻣뻣하게 서 있는 거래요. 아 그래서 시신을 만져보니까 뻣뻣한 거래요. 그래 놀라서 부인에게 막 달려가서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니 부인이 또 하는 말이 못난 자식 같으니라고.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갔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 뒤에 그 부인이 녹각사라는 절이 있는 데서 재를 올리고요, 유나스님이 절을 집행하는 스님이 부인에게 축원을 해주십시오 하면서 청을 했다는 거래요. 그랬더니 부인이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서요 새로 꽂고는요 “회향을 해서 다 마쳤습니다.” 하더랍니다. 하고 바로 나가더라는 거래요. 그 후에 부인은 고향사람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고요 그래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 도인 가족 그 네 명은요, 그렇게 전부가 다 도인이래요. 전부가 다 돌아가는 것을 마음대로 했어요. 그래서 당시에 당나라 땐데 중국 초야에서는 아주 화제가 되고요, 불교가 갑자기 번창할 수 있는 좋은 그런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마지막 모습이 중요해요.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모습, 즉 라스트신이 어떤 신이냐, 라스트신이 아주 멋지면 보는 이에게 참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좋은 그런 드라마로 기억이 됩니다. 그렇듯이 인생의 드라마도 인생의 라스트신이 좋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 스님들은 마지막 모습이 어떠냐, 마지막 어떻게 가셨느냐에 따라서 옛날 스님들은 그 스님이 도인이다, 아니다 그런 이야기도 했고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 스님에 대한 평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왜냐, 그 마지막 모습이 바로 일생을 함축한 모습이라, 줄이고 줄인 신이래요. 그래서 마지막 모습을 아주 중시합니다.
꺠치진 못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애쓰고 애써서 유종의 미를 거둔 그런 분이 많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사시고 계시겠지만 아무리 잘살아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선이 도(도)가 믹스가 안되면 허망하고 괴롭고 훗날 부끄럽고 한스러운 그런 일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얼마나 선적인 요소가 믹스가 잘되느냐 못되느냐, 그래서 참 행복을 느끼고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 또 생사까지도 초탈하느냐 초탈하지 못하느냐, 거기에 달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길을 들어왔다, 이 이상의 길이 없다, 그런 생각을 늘 하시면서 좀 어렵더라도 힘드시더라도 화두를 놓지 마시고 꾸준히 노력하고 애쓰시다 보면 참으로 좋을 날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좀 어렵고 힘들다는 분이 있어요. 또 의외로 쉽다는 분도 많아요. 그러나 세속에 사시는 분들은 이 세속에서 늘 우리 스님들처럼 항시 애쓰기가 어려워서 더 어렵고 더 힘드실 수밖에 없는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절에 왔을 때나 시간이 있을 때는 바짝 참으로 애쓰면 의의로 쉽다, 바로 된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주사위는 여러분에게 던져져 있습니다.
불교 이상이 없다, 즉 선수행 이상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오직 애쓰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서 잘살았다,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 나와봐라, 나에게 돌을 던질 사람 있거든 한번 던져봐라 하듯이 자신만만한 일생을 방거사 일가처럼 그렇게 마무리를 잘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라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오늘 저녁에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요, 하루 저녁을 잘 정진하시고 그 여운이 한달 내내 없어지지 않도록 해서 또 내달에는 좀 더 차원 높은 그런 공부가 되도록 애쓰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녹취: 구해진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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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2007년 1월부터 10월까지 축서사(경북 봉화) 대웅전에서 있었던
축서사 조실스님이신
무여큰스님의 화두참구법 법문 모두를 전재하였습니다.
큰스님의 자상하시고 자애로운 화두참구에 관한 가르침이
초심자에게는 화두선에 대한 길잡이로써
그리고 구참자에게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혜롭게 해결하여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훌륭한 선의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공부하는 참선자들이
이 땅에 점점 늘어나 마음의 편안함과 안락을 스스로 체험하고
나아가 나라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화두참구법 제10강-선의 효과(2007년 10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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