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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참구법 제 9강 / 진의(眞疑)에서 선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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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29 조회5,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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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참구법 9 - 진의(眞疑)에서 선정(禪定)까지

 

오늘도 늦은 밤에 오시느라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진의(眞疑)에서 선정(禪定)까지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화두 참구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화두는 어떻게 참구해야 되는가? 어떻게 해야 의정이 진하게 나는가?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일으킬 수 있는가? 의정을 일으키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입니다. 화두 자체도 아주 좋은 법문이기도 하지만 참선자에게는 의정을 일으켜서 화두를 깨치는 데 본뜻이 있습니다.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렇게 의정을 일으켜서 의정을 깨치려면 어떻게 일으켜야 되느냐, 화두참구의 요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3요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화두참구의 요령은 첫째는 간절하게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화두는 아주 간절하게 들어야 돼요. 간절 간절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주 간절하게 들어야 되고요. 둘째는 성심성의껏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듯이 모든 것을 바치듯이 오직 그것뿐이듯이 그렇게 성심성의껏 들어가셔야 되고, 세 번째는 간단없이 즉 끊임없이 꾸준하게 지속이 되게 그렇게 드는 것이 화두참구의 요령입니다. 그래도 의정이 안 나는 분은 3요소, 큰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래서 참으로 의정을 일으키라고 했습니다.

 

참선자는 큰 신심이 있어야 돼요. 신심이 뭐냐,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부처님과 꼭 같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질을 확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둘째는 뭐냐, 화두를 깨치면 바로 부처 경계다,라는 그런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요. 안 되는 사람은 큰 분심을 낼 필요가 있어요. 왜 안 되는가. 삼세의 여러 부처님과 천하 선지식들이 다 이 관문을 통과했는데 그런데 나는 왜 안 되는가, 나도 본래는 부처인데 본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은데 왜 나만 안 되는가. 큰 분심을 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아주 지극하게 아주 대단하게 철저하게 그렇게 의심을 지어가셔야 됩니다.

 

그렇게 지어가시되 아주 지혜롭게 하세요. 아주 지혜롭게. 그 한번 한번을 예사롭게 하지 말고 한번 한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작가가 작품을 만들 듯이 그렇게 지극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렇게 들어가면 참으로 진의가 돌발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화두가 제대로 의정이 안 나고 주작(做作)으로 즉 화두가 되다가 안 되다가 그렇게 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참으로 한번 물어보세요. 과연 “네가 화두 할 생각이 있느냐? 진심으로 발심했느냐? 오직 이 길 뿐”이라는 그런 생각을 했느냐.?

 

“화두는 마음이 문제다”라는 말을 드렸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즉 얼마나 발심하느냐, 얼마나 지극하고 얼마나 대단한 그런 마음을 내서 공부를 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발심한 분은 의외로 쉽게 바로 될 수도 있는가 하면 발심 못하고 멍청하게 흐릿하게 하는 둥 마는 둥 흉내 내듯이 그렇게 하는 분은 어렵고 어려운 그런 일일 수가 있습니다.

 

화두는 한 번, 한 번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오직 그것 뿐”이듯이 하는 그런 습을 들이고 그런 자세와 그런 생각으로서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 중에서는 화두 할 때는 “자기가 가장 비참할 때, 가장 처절할 때, 가장 괴로울 때, 가장 어려울 때를 늘 생각하라는 거래요. 그렇게 어렵고 괴롭고 처절하고 비참할 때가 어떤 때겠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이래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 빈사상태 같은 그럴 때를 늘 생각해서요, 참으로 애를 쓰라는 것이  옛 어른들의 한결같은 그런 말씀이래요.

 

마음을 내도 좀 큰마음을 내서 정말 화두가 될 것처럼 흉내 내듯이하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그런 화두가 아니라 정말 한 번, 한 번에 막 목숨을 걸듯이 그래 하면 의외로 쉽고 의외로 빠르고 바로 될 수 있는 공부가 바로 참선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큰 발심을 해서요, 대의심을 일으켜야합니다. 어떤 의심을 일으키느냐?

 

옛 어른들은 의정(疑情)은 불덩이같이 큰 불덩이같이 막 일으키라는 거래요. 그래서 불법(佛法)과 세법(世法)을 통틀어서 천만 의심을 똘똘 뭉쳐서 본참(本參) 공안(公案)에서 해결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심 저런 의심 살아오시다가 무수한 수많은 그런 의심들을 똘똘 뭉쳐가지고요, 본참 공안, 자기가 참구하는 그 공안에 뭉쳐서 그래서 진심으로 의심을 일으키라는 거래요. 그래서 360뼈마디, 우리 뼈마디가 360개나 되는 뼈마디랍니다. 그래 모공(毛孔)이 팔만 사천 모공이다, 합니다. 숨구멍이 팔만 사천 개나 된다는 거래요. 그런 전심으로 평생의 기력을 다해서 젖 먹을 때 힘까지 다 내서요, 그렇게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서 참으로 그렇게 애쓰면 의심하지 않아도 의심이 저절로 되고요. 의정이 저절로 될 그럴 날이 옵니다. 염불하는 것이 뭐꼬?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한번 한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해요.

 

화두에 의심은 처음엔 강하게 나다가 약하게 나기도 해요. 일자로 나기도 해요. 강하게 나다가 약하게 나는 순간 약하다 싶으면 얼른 또 화두를 챙기세요. 그런가 하면 일자로 나는 경우는 보통 나다가는 뚝 떨어지듯이 해요. 떨어지는 순간 의심이 없는 순간에 바로 또 챙기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하다가 보면 순간 번뇌망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망상이 떠오르는 순간 그 망상을 향해서 화두를 들어요. 그런가하면 졸음이 온다든가 흐리멍텅한 몽롱한 그런 상태가 될 때도 있어요. 그런 상태가 되자마자 바로 그럴 때는 약간 소리를 내도 괜찮아요. 강하게 의정을 일으켜요. 그러면 졸음도 가고 화두도 힘차게 들립니다. 화두는 그렇게 하면서 한결같이 한순간도 놓치질 않아야 돼요.

 

사실은 세속에 사는 여러분은 그렇게까지 하시기가 좀 어려울 거래요. 그러나 오늘 저녁 같은 때 집을 떠나서 참으로 애를 쓰실 때는 한순간도 안 놓치듯이 막 아주 간절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오직 한길 귀결처만, 즉 깨칠 것만 생각하면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듯이 막 밀어붙이듯이 그렇게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애쓰다가 보면 진의, 진짜 의심이 일어나요.

 

진의는 어떻게 돌발하느냐, 주작화두(做作話頭)래도, 화두가 되다가 말다가 하는 그런 화두래도 애쓰다가 보면 어느 날 문득 간절하게 들질 않았는데 화두가 아주 간절할 때가 있어요. 간절한 순간 화두에 힘을 얻어요, 동력을 내요. 그렇게 힘을 얻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는 그렇게 간절하게 들리는 분은 드물어요. 그렇게 아주 간절하게 들리는 분 중에서는 자기도 막 놀랄 정도로 확 간절하게 들리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순간 화두가 힘을 얻기도 하고, 보통은 그 안되는 화두라도 애쓰고 애쓰다가 보니까 진의가 나긴 나요. 나도 아주 약하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아주 약한 그런 진의가 감정이 일어나듯이 나요. 그렇게 일어나더래도 진의가 일어난다 싶거든, 확실하고 분명하거든 그걸 놓치지 마세요. 좀 약하더래도 막 끊어질 것 같더래도요. 오직 그럴 때는 그걸 안 놓치려고 아주 애를 써요. 그럴 때는 잠잘 시간도 잠도 자지 말고요 아주 급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 말고요. 그런가 하면 식사 때가 돼도요, 밥도 먹지 말고 막 놓치지 않고 붙들고 늘어지듯이 애쓰는 거래요.

 

보통사람들이 안되던 화두가 좀 되는 듯 싶은데 식사 때면 밥 다 먹고, 잘 때가 되면 자고요, 방선 시간이 되면 노니까 그간 좀 됐던 것이 그냥 없어지고요. 심지어 우리 스님들은 반결재 될 때까지는 아주 열심히 해서 되는 상태가 돼도, 반결재 지나면 보통 느슨해져요. 공부도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니까 서서히 약해지다가 아주 없어지게 돼요.

 

화두는 한번 됐다 싶으면 놓질 않아야 돼요. 막 물고 늘어지듯이 막 오직 그것뿐이듯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그것도 외면하고요, 막 씨름하듯이 애쓰는 거래요. 몇 시간만 애쓰면 화두가 그냥 달라져 버려요. 하룻밤쯤 밤샘 하면 대번에 달라져요. 며칠쯤 하면 아주 순숙(純熟)이 돼요.


그런데 이러한 고비를 거의 못 넘겨요. 그래서 몇 년을 하고 몇 철을 하고 심지어 수십 년을 해도 아주 지독하고 아주 철저하고 오직 그것뿐이듯이 그렇게 못하는 그런 분들은, 즉 고비를 못 넘으면 공부다운 공부를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은 독종 중에 독종이어야 된다는 거래요. 아주 막 지독할 때는 지독해야 된다는 거래요. 어느 때 지독해야 하냐, 그럴 때 지독해야 해요.

흔히 용맹정진한다 하는데 보통은 잠 안 자고 정진하는 것을 용맹정진한다 하는데, 그런 용맹정진은 사실은 용맹정진이 아니라, 화두가 될 때 참으로 애쓰는 것이 용맹정진이래요. 그럴 때는 어쨌든 용맹정진하면 하는 것만큼, 애쓰면 애쓴 것만큼 분명하게 이득이 있고 소득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회가 왔다 하면 안 놓쳐야 돼요.

 

그럴 때는 옆집에 불이 났다 해도 가볼 필요도 없어요. 심지어 선원에서 옆에 앉은 도반이 사경을 헤매도 신경도 쓰지 말라는 거래요. 길가다가 어떤 분이 물에 빠져서 막 떠내려간다고 할 때 “날 좀 살려주시오” 하더래도 그것도 외면하라는 거래요. 참으로 애쓸 때는 오직 그것뿐이듯이 그렇게 애써야 정진이 참으로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애쓰면 몇 년간 아니면 몇 수십 년간 애쓴 것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화두 하듯이 여러분이 세속에서 사시면서도요, 무슨 일이든지 기회가 왔다 하면 놓치지 않으셔야 돼요 사람은 일생에 두서너 번은 기회가 온다고 해요. 어떤 기회든 참으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기 인생을 당당하게 값어치 있게 펼칠 만한 그런 기회는 보통 두 번 내지 세 번 온다는 거래요. 그럴 때 화두 하듯이 애쓰면 사실은 성공 못할 그럴 분이 드물 겁니다.

 

기회가 왔다 하면 안 놓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두의 힘을 얻으면 놓을래야 놓을 수 없어요.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고요. 늘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화두가 가고 화두가 오고 화두가 먹고 화두가 일하는 것 같고 조금도 급하지도 않아요. 그런가 하면 느리지도 않고요. 한결같이 쫓아도 달아나지도 않아요. 늘 소소영영하고 목전(目前)에 늘 현전합니다.

그렇게 의심이 간절해서 끊이지 않는 것을 진의(眞疑)다, 진짜 의심이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의정(疑情)이 일어나야 화두를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주작화두(做作話頭) 즉 억지로 일으키는 화두는 그냥 의심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건 공부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화두 한다, 참선 한다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화두를 확고히 해서요 조금도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돼요. 오직 막 화두만 밀고 나가야 돼요. 그럴 때는 흔히 잘되니까 잘된다는 생각을 내기도 하고 막 기분도 냅니다. 화두에 득력(得力)을 했다 해서 뭐 별것 아니네, 대단찮네, 그런 생각을 낼 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을 절대 안 내야 됩니다. 화두는 잘 될수록 마음은 더 담담하게 해야 돼요. 더 자신을 낮춰야 돼요. 그러면서 아주 원리 원칙적으로 더 애쓰고 더 지극하게 더 간단없이 더 밀고 나가야 돼요. 그러면 화두는 이내 순숙해집니다. 약간 건방진 생각을 한다든가 잘 된다는 생각을 한다든가 마음을 놓는 순간 이미 화두는 그르치고 말아요. 아주 타이트해서 조금도 빈틈없을 정도로 막 밀어붙일 때는 밀어붙여야 됩니다.

 

옛 선사 말씀에 이 공부는 모름지기 “활구(活句)에 참(參)할 것이요 사구(死句)로 참하지 말라. 활구 아래서 얻으면 불조(佛祖)와 더불어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거니와 사구 아래서 얻으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 하셨어요. 화두 참구는 활구참선을 해야 돼요.

활구참선이 뭐냐? 화두에 일체 사량 분별심을 붙이지 말고요, 오직 단순하게 어째서 무(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인가? 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즉 무자(無字) 화두 같으면 무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분별심, 사량심, 일체 생각을 붙이지 마세요. 무라면 진무(眞無)인가 허무(虛無)인가 문무인가 유무인가 별생각을 다 할 수가 있어요. 그런 일체 생각을 붙이지 말고 오직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왜 무라고 했을까. 무라고 한 본뜻 그 이유만 밝히면 돼요.


그런가 하면 이뭐꼬 하시는 분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이뭐꼬 이뭐꼬 그렇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순간은 조금 되는 듯해요. 기분이 달라져요. 그러나 그런 이뭐꼬는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 순간뿐이래요.

그래서 본참 공안, 본래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은 아주 단순하게 해야 됩니다. 전연 분별심이나 생각을 안 붙여야 돼요. 오직 어째서 또는 왜 무라고 했을까? 아니면 마삼근인가? 화두만 지극하게 의정을 지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화두를 타파할 수가 없어요. 설사 타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화두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하더래도 그것은 그야말로 분별심이래요. 화두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말길이 끊겨야 돼요. 심행처멸(心行處滅)마저도 끊긴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그래서 어떤 분별심이나 어떤 사량심도 거기에는 닿을 수가 없어요. 오직 깨쳐야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분명하게 애쓰다가 보면 참으로 깨칠 날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화두에 대해서 아주 지극한 그런 마음을 늘 가지시면서 오직 이것뿐이다.

 

요즘은 이런저런 수행법이 많은데 그 수행법의 대다수가 어떤 수행법이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거래요. 화두참선은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방법이래요. 사실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초보단계라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 화를 면하고 이런 저런 번뇌망상을 다 제거해서 좀 편하게 좀 안락을 누리면서 사시는 그런 정도는 대단치 않아요.

 

화두에서 그것은 초보단계고요. 참으로 자기 생사문제, 삶과 죽음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대단한 그런 법문 중에 법문이고 그런 수행법이 화두다, 그래서 최상승법이다, 최고의 법이다, 여러 가지 표현을 하는데 화두는 보통 수행법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오직 화두 화두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그렇게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동정(動靜)에 일여(一如)되는 그런 상태가 있어요. 여러분 중에 직장에 다니는 분이나 세속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가장 의심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뭐냐? 과연 일하면서도 화두를 할 수가 있는가? 수행을 할 수가 있느냐? 아마 궁금증을 많이 갖는 분이 있을 거래요.

 

일을 하시면서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초보단계나 아주 썩 잘되면 좀 어려워요. 썩 잘되면 일부러 화두를 좀 느슨하게 해야 됩니다. 초보단계, 즉 화두가 잘 안 되는 상태에서는 안 되고 화두가 진의가 나서 동정에 일여한 상태, 즉 앉아서나 서서나 그렇지 않으면 왔다 갔다 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즉 움직이거나 가만있거나 또 여여(如如)한 그런 상태가 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보살님들이 댁에서 청소를 하면서, 아니면 빨래를 하면서도 화두가 여여하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 이것저것 하면서도 화두를 꾸준하게 들 수가 있어요. 그런가 하면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직장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런 상태는 동정에 일여한 그런 상태가 돼야 됩니다.

 

화두에 진의가 나도요, 앉아서는 잘되는 것 같은데 서서 뭐 일하다가 보면 화두가 희미하게 좀 없어지는거 같애요. 정신을 바짝 차리면 화두가 되는데 일에 빠져버리면 어느 사이에 화두가 없어져 버려요. 그렇게 움직이면, 일하면, 화두가 없어지는 그런 상태가 되거든 행선(行禪)을 하시기 바랍니다. 즉 움직이면서도요, 일하면서도 화두하는 습을 들이세요.

 

그럴 때는 일도 하면서 화두 자체에 바짝 애를 쓰다가 보면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됩니다. 그냥 일하면서 되기도 하지만 말 하면서도요, 화두가 전연 변함이 없고요, 심지어 책 읽으면서도 화두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정도가 됩니다. (화두하면서도) 상당히 정독할 수 있어요. 그런가 하면 사고를 해도 변하질 않아요. 그런 정도 돼야 동정에 일여한 제대로 화두가 갖추어진 그런 상태다,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화두에 진의가 나서요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요,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들리는 그런 상태, 아주 여여하고 아주 순일한 그런 상태, 그런 상태가 되더래도 화두가 늘 힘차게 기운이 일어나듯이 화두를 들어가야 돼요. 즉 가라앉고 무기력하지 않아야 돼요. 의정이 불덩이처럼 확확 타오르듯이 그렇게 지어가면 참으로 될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에 일여한 그런 상태가 되면 화두는 화두대로 하고요, 즉 그럴 때는 일일이 화두를 챙기지 않아도 늘 들려 있어요.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고요. 항시 여여해요. 항시 성성해요. 그러면서도 일은 일대로 집중해서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일거양득이다, 그렇게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될 때는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쉬워요. 속효심이란 뭐냐? 얼른 화두가 더 잘됐으면, 얼른 깨쳤으면, 얼른 깨치게 할 수 없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혹시 어디 선지식이 없을까? 이런저런 빨리 해 마칠 생각을 하기 쉬워요. 그런 생각을 전연 하지 말고 늘 담담하게 하되 아주 원칙적으로요, 잔꾀를 부리질 않아야 됩니다.

 

그렇게 동정에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되다가는 몽중(夢中)에도 꿈속에서도요, 막 화두가 되는 그런 상태가 돼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도 화두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분명히 꿈은 꿈인데 화두는 돼요. 즉 그럴 정도로 화두가 아주 힘차게 됩니다.

 

어떨 때는 동정에 든다 해서 마음을 놓고 기분을 내고 자부심을 갖다가 어느 날 꿈을 꿨는 거래요. 꿈을 꾸었는데 꿈에는 전혀 화두가 안 되고요, 꿈도 세속인들 꿈 처럼요, 그런 분은 겉모습은 스님이거나 아니면 화두합네 하면서 상당히 갖춘 그런 모습일지 몰라도 내면에는 완전히 속인과 다름없고 그야말로 아주 초보단계라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정신을 좀 바짝 차려서 참으로 애쓰고 노력하다가 보면 몽중에도 꿈속에서도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됩니다.

 

몽중에 일여 정도가 돼야 화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본격적으로 조금씩 이야기할 만한 그런 정도가 됩니다. 즉 지혜가 나서 아는 소리도 조금씩 하고, 책을 넘겨도 조금씩 넘어가는 그런 정도가 돼요. 그렇게 좀 잘 돼도 절대 아까 말씀드렸듯이 건방진 생각, 내가 뭐 안다, 지혜가 났다 그런 생각을 전연 안 하고 그럴수록 더 자신을 낮춰야 돼요. 더 겸허하고 더 담담한 마음으로 더 하심(下心)해서요 애쓰고 노력하면 의외로 쉽게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화두가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해요. 이 성성(惺惺)이란 아주 맑은 상태를 말해요. 아주 맑고 또렷또렷한 상태. 적적(寂寂)이란 고요함을 말해요. 화두는 성성하고 아주 적적하게 들어야 돼요. 성성은 작용(作用)을 말해요. 적적은 본체(本體)를 말합니다.

 

성성한 것은 깨어 있음으로써 흐릿하고 멍청한 그런 마음을 다스리고요. 적적한 것은 고요함으로써요, 객관의 경계와 선악도 온갖 번뇌와 망상을 다스려요. 그런데 성성은 그렇게 성성하니까 산란한 마음을 내기 쉬워요. 그런가 하면 적적은 아주 고요하고 고요한 상태, 그건 무기(無記)에 빠지기 쉬워요. 즉 화두 없이 멍청한 상태, 그런 상태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화두참구는 성성, 아주 맑고 맑은 또렷또렷한 성성과 적적이 적당해야 돼요. 그것이 적당하면 즉 고르게 평등하게 가지면 깨침에 가깝다, 견성에 가깝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제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성성하고 적적을 보면 돼요. 성성만 되고도 적적이 없으면 그건 공부가 제대로 되는 게 아니래요. 적적만 하고 성성이 없으면 그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적적하면서도 아주 성성해야 돼요. 그래야 참으로 제대로 된다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참선은 그 묘함이 성성한 데 있어요. 화두가 성성해서 몸이 아주 가볍고 편안하고 아주 거뜬해지면 지혜가 생겨요. 이전에는 이해가 안 되던 그런 경전이나 어록을 보면 막 나가요. 그냥 막 넘길 거 같애요. 그렇게 몇 구절 안다 해서 “아, 내가 대단한 지혜를 갖췄다” 그런 생각을 절대 안 해야 돼요. 그런 정도는 옛 어른은 “좋은 지혜가 생겼다 해서 깨달았다는 것은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격”이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수미산은 아주 대단한 그런 산 중에 산이라 그걸 태우려 한다는 거래요.

 

지혜가 생겨도 절대 지혜가 생겼다, 내가 알았다, 어떤 분은 견성했다, 그런 생각을 전연 안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알았다고 어디 가서 써먹으려고 하지도 말고요. 그런 상태가 되면 어디 가면 법문하고 싶어서 막 입이 근질거려요. 그럴 때도 잘 참고, 자기 관리가 잘돼서 오직 그럴수록 더 애쓰고 더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 시절에는 화두는 상승하고 견해는 분명하나 자세히 점검해보면 그럴 때도 아주 은밀한 아주 미세한 망상이 왔다 갔다 할 때가 있어요. 그것이 전연 없어야 돼요. 아주 주의하고 경계해야 될 땝니다. 그럴 때 신통한 그런 경계를 느낄 때도 있어요.

 

신통(神通)이란 보통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것을 신이라고 해요. 전연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것을 신(神)이라고 하고, 걸림없이 통한다 해서 통(通)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신통은 있다가도요 어두워지면 없어져 버려요.

 

조사 문중에서 참선 문중에서는 신통을 논하진 않았어요. 왜냐 신통은 지엽적이고 현혹되면 본분사를 잃기 때문이래요. 그러나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어요. 예를 들어서 여기 문을 다 잠그고요, 정진을 하다가 보면 순간 문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다가는 바깥 경계가 보여요. 바깥 경계뿐 만 아니라 몇 십리 밖 몇 백리 밖까지도 보일 수가 있어요. 즉 안목이, 심안(心眼)이 열리면 그래요.

 

흔히 천안통(天眼通)이다 합니다. 즉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어떤 장애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멀리까지 보이는 그런 경우를 말해요. 제가 참선한 지 몇 년쯤 되선데 강원도 어디에 어떤 노스님이 수행을 잘 하시는 그런 노스님이 계신다고 해요. 그래서 물어물어 그 노스님 계시는 곳을 찾아갔어요. 강원도 강릉에서 떨어진 명주군 어딘데, 조그마한 토굴에서 혼자 사시는데 꼭 촌 할아버지 비슷해요. 이북 출신인데 말씀도 아주 뭐 이북 토박이 그대로고요. 그런데 어쩌다 말씀을 하시는데 아주 진한 이북 사투리지만 아주 골수, 정곡을 찌르는 듯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처음 배우니까 좀 실망스러웠어요. 이 노장님이 무슨 도가 있겠나 싶은 그런 생각이 들대요. 그러나 멀리 갔으니까 한번 자상히 보자, 해서 일거일동을 자상하게 봤어요. 그러니까 아, 좀 달라요. 눈매라든지 그 말씀하시는 거라든지 여러 가지가 도가 있는 분이다, 그런 것이 느껴지대요. 하루는 그 노장님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만 하시는 거래요. 밭에 나가서 밭 매고 거두고 그렇지 않으면 나무 하시고, 저는 밥을 했고요.

 

저녁이면 같이 나란히 앉아서 정진했는데 한 9시쯤 됐는데 앉아계시다가 무릎을 탁 치시면서 “아이쿠 이거 큰일났네 큰일났어” 하면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안절부절 하시는 거래요. “아, 왜 그러십니까? ”하니까 “지금 아무 데 누구 집이 탄다”는 거래요. “타도 크게 탄다”는 거래요. 그러면서 뒷짐을 지시고는 왔다 갔다 하시면서 큰일 났다고 그러시는 거래요. 그 집이 어디냐, 토굴에서 한 40리가량 떨어진 집인데 노스님을 잘 모시는 보살댁이래요. 저도 한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었어요.

 

좀 느끼는 점이 있어서 그냥 막 달려 내려갔지. 한 시간 가량 가니까 당도하겠대요. 집이 엄청 많이 탔어요. 타도 아주 꽤 많이 탔어요. 자상하게 보고 좀 거둘 거 좀 거들어드리고 그래 올라갔는 거래요. 올라가니까 막 고개 올라가니까 “아, 어서 오게” 하면서 마중을 나와계시는 거래요. 그러면서 “집 어디 어디 어떻게 얼마나 탔지하면서 가본 나보다 더 자상히 아시는 거래요.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노스님 말씀한 그대로라. 제가 올라와서도 조금 더 탄 그것까지 이야기를 하더라니까요. 그래서 이 노장 참 어지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그러고 나서 몇 달쯤 뒨데 점심공양을 하려고 하는데, 둘이 사니까 고 전날 밥이 좀 남았었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애요. 그런데 노장님이 열다섯 명 분 어치를 더 하라는 거래요. 아 뭐 하려고 그렇게 밥을 많이 하느냐고, 그러니까 해봐, 그러시대요. 그래 하기 싫은 것을 했어요. 밥을 다 해서 밥을 막 푸려고 하니까 17명 손님이 올라오는 거래요. 그거 가지고 나누어서 드리니까 딱 맞는 거래요. 그날부터 노장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얼마간 모시고 산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통이래요.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즉 심안이 열리면요. 누구나 다 열릴 수가 있어요. 다만 이 심안이 열리더라도 혹 여러분이 정진하다가 혹 그런 비슷한 그런 경우가 있더래도 아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그냥 자기만 알고 자기만 느끼고 간직할 따름이지 그걸 어디 가서 써먹으려고 하고 아는 소리 하고 자기를 내세우다보면 어느새 자기 마음이 흐려져요. 그러면 없어져 버려요. 없어지면 아주 허탈해요.

 

그래서 저 사무실 같은 데 앉아서 보면 손님이 오면 아, 저 손님은 어디로 갈 것이다, 뭐 하러 오는 손님이다, 그런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별로 걷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하루 종일 걸어도 지칠 줄 모르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걸음도 아주 사뿐사뿐 뭐 그렇게 걷는 것 같고요.

 

그런가 하면 좀 내성적이고 어디 가면 자기주장도 못하는 좀 소극적이고 그런 사람도 그 정도가 되면 아주 당당하고 남성적이고 큰소리 땅땅 치듯이 그렇게 자기주장을 하고요. 남 앞에서 이야기도 못하는 그런 분도 즉 어눌하게 말씀하시는 그런 분도 폭포수 같은 그런 말도 막 하기도 하고, 그런 정도가 되면 이야기하고 싶어서 좀이 쑤셔요. 막 근질근질해요. 어디 가면 아는 소리 하고 싶어서.

 

그런 그 보통사람이 느끼기 어려운 그런 아주 신통한 아주 신비한 그런 느낌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말조심하고 입조심하고 모르는 것처럼 고개 푹 수그리고 오직 화두만 하다가 보면 참으로 대단한 그런 그 견처를 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는 병중에도요, 중병에 들거든 흔히 중병에 들면 화두를 놓기가 쉬운데 중병에 들어도 화두를 놓질 않아야 돼요. 중병에 들수록 화두가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가 돼야 돼요. 웬만한 병이 들어도요, 즉 화두가 좀 돼서 아주 성성하고 적적한 그런 상태가 되면 온몸에서 희열을 느낄 정도로요, 법열을 느낄 정도로요, 즉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도 할 수 있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오묘한 것을 느껴요. 즉 화두가 돼서 번뇌망상이 막 들끓다가 그런 번뇌망상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고요해져요.

 

고요해지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묘한 기분을 느껴요. 그것을 흔히 법열(法悅)이다, 합니다. 그것은 진리에서 느끼는 그런 기쁨이래요.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도 할 수 있는, 말로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것을 느껴요. 그런 정도만 느끼면 웬만한 병은 저절로 나아요. 웬만한 것은요. 그건 뭐 염불을 해도 그렇고 주력을 해도 그렇고 어떤 것을 하든 그런 상태만 되면 웬만한 병은 저절로 나아요. 아주 중병, 지병 같은 것은 안 낫지만 웬만한 것은 낫습니다. 그런 상태가 될 정도로 늘 화두만 하는 거래요. 그러면 건강에도 아주 좋습니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그렇게 안정이 되고 안정이 돼서, 참으로 좀 안정이 되면 맥박 뛰는 것까지도 아주 느리게 뛰어요. 아주 느리게. 맥박 뛰는 것까지도요. 즉 그만큼 안정이 된다는 거래요. 그런 상태에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거래요. 아주 좋은 상태인데. 그런 상태까지는 아시기가 어렵겠지. 그렇게 그런 상태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지고 건강이 좋아지면 뭐 장수 하는 건 물론이고요. 그래서 옛날 스님들 뭐 백세다, 백이십세다, 백사십세다 하면서 당신이 살 만큼 사시고 그렇게 스스로 가시게 되는데 그렇게 생사까지도 자유자재로 하는 초탈하는 그런 정도까지가 됩니다.

 

“생사를 초탈한다, 자유자재한다” 이런 말은 참 이해하기가 좀 어렵겠지만 애쓰다가 보면 그런 것을 느껴요. 애쓰다보면 여러분이 꿈속에서도 화두가 여여한 상태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은 화두가 아니더래도 여러분이 하시는 일로 몽중일여가 되는 것은 어려워요. 어쨌든 화두가 꿈 속에서도 여여한 상태가 되면 생사가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분명히 둘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느껴요.

 

요즘은 첨단으로 삼세 윤회가 증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런 첨단이 아니더래도 자기 스스로 생사가 둘이 아니구나, 윤회하는 것은 분명하구나, 그걸 스스로 느껴요. 그런 정도로 느낄 정도면 자세나 생각이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사실은 예사롭게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반듯하게 제대로 살지 말라고 해도 안 살 수가 없어요. 인과가 분명하니까요.

 

옛날 중국에 ‘동산사’라는 그런 절이 있었는데 ‘수연’이라는 선사가 계셨답니다. 그분은 아주 대단한 분이라 깨친 뒤에도 늘 탁발을 해서요, 즉 동냥을 해서 대중을 먹여 살렸다는 거래요. 자비보살이라. 아주 자비한 분이라 여름에는 발가벗고 저녁이면 풀 속에서 모기한테 자기 피를 공양을 시켰는 거래요. 모기한테. 큰스님이라 해서 좋은 옷 같은 걸 해드리면 당신은 백결 누더기를 입고요. 막 깁고 깁고 또 깁고 또 기운 그 볼품없는 옷을 입고도, 좋은 옷은 다 보시하는, 그런 그 대단한 분인데 그래서 주변에서 존경을 받던 그런 분이래요.

 

하루는 대중들한테 내가 멀지 않아 선정에 들 것이다. 내 선정에 들거든 벽돌로 쌓아가지고 앉은 그 자세 그대로 위에 지붕만 해서 내 3년 뒤에 깰 테니까 그래 잘 보관해달라, 부탁을 하더라는 거래요. 참 어느 날 선정에 드시는 거래요. 그렇게 벽돌로 비바람을 면하게 해드렸더니 3년 만에 비식이 깨듯이 일어나셔 가지고는 아따, 기분좋다, 하면서 나오시더라는 거래요. 3년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그래 또 지시를 하고 또 열심히 사시는 거래요.

 

어떻게 열심히 사셨느냐, 큰 절을 하나 짓는 거래요. 큰 절을 짓고 당신 할 만큼 해놓으시고는 어느 날 대중들한테 내가 오늘 갈란다, 하는 거래요. 그때가 천희 2년이라고 해요. 섣달그믐 이틀 전인데, 다시 정(定)에 들어가는 거래요. 선정에 드는 거래요. 선정에 들면서 49년이 지난 뒤에 내 무덤을 열어보면 내가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그 때 돼서 내 뒤처리를 해 달라, 하더랍니다. 그대로 가시는 그 모습을 그대로 참 보존했는 거래요.

 

49년이 지났어요. 그때 정관이라는 그런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태수 지방 관료한테 이야기를 해서 그 무덤을 파봤다는 거래요. 파보니까 돌아가셨는데 꼭 피부가 산 사람 비슷하더라는 거래요. 너무 산 사람 같애. 그래서 검측을 해가지고요, 그 절의 서쪽에 어떤 법당에 잘 모셔서 만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게 했다 해서 당시 화제가 됐다는 그런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이 참으로 깊으면 3년간이나 심지어 49년간 그렇게 선정에도 들었다는 그런 대단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 선정은 어떻게 돼야 되느냐, 즉 화두와 내가 하나가 돼야 돼요. 심신일여(心身一如),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돼야 돼요. 화두와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런 상태, 그래서 화두에 완전히 빠진 상태, 화두 하는 곳이 축서사인지 여러분의 아파트인지 모를 정도로요. 막 앉았는 것 같은데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완전히 빠진 그런 상태를 흔히 선정이다,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선정에는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선정에 들 때는 평시와 다른 느낌이 들어요. 얼굴이나 가슴이나 어깨나 손이나 좀 보통 때보다도 좀 약간 물속에 들어가면 바다 같은 데 들어가면 좀 무겁게 느껴지잖아요. 그거 비슷하게 좀 무겁게 느껴져요. 그러면서도 내면은 아주 고요하고 아주 편안하죠.

어쨌든 그런 깊은 선정에는 들어가야 됩니다.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에서 나요. 선정에서요. 선정은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는 지혜를 낳습니다. 선정으로 말미암아서요,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고요, 부처가 되고요,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다 선정의 힘이래요.

 

옛날에는 아주 대단한 그런 스님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왜 적으냐, 즉 선정을 익힌 그런 스님들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깊은 그런 선정까지도 들어서 정말 이 공부가 화두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 것을 느껴서 여러분이 화두 한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 정말 복이 많다, 나아가서는 오직 이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화두에서 인생의 참 행복을 느끼고요, 보람과 긍지도 꼭 이 공부에서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주 중요한데 여러분은 아주 좋은 길을 택했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듣기 좋게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최상승의 길이래요. 사실 이 이상의 길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도 좋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려면 화두가 돼야 됩니다. 화두 이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즘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웬만한 방법은 초보단계는 느낄 수가 있어요. 그저 마음의 평화를 얻고 번뇌망상을 좀 없애는 그런 정도는, 초보단계는 거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그런 몽중일여, 오매일여의 견처를 넘어서 깨치고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화두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라성 같은 그믐밤에 저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무수한 별들 같은, 중국이나 한국에도 많은 도인이 계셨지만 아주 대단한 도인들이 참 많았어요. 세계에 요즘 문화유산이다 해서 이런저런 문화유산을 많이 세계 보물로 지정도 합니다만 가장 뛰어난 보물 중에 보물이 옛 스님들의 어록이래요.

 

이거는 뭐 아주 대단해요. 이건 아주 대단해요. 그런 그 대단한 그런 법문도 하고 그것을 참으로 누릴 수 있는 길은, 방법은 “화두가 최상승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좀 하기가 어렵다고도 하지만 처음에 잘 안 되는 분은 수식관을 말씀드렸지요. 수식관을 좀 하시되 수식관으로 안정이 되거든 반드시 꼭 화두를 해서 화두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참 행복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뭐 아주 잘 들어오셨어요. 주사위는 여러분에게 이미 던져져 있어요. 어떻게 여러분이 잘 갈무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참으로 변하고 바꿀 수가 있습니다. 흔히 팔자는 못 고친다, 그런 말을 하지만 팔자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화두선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인생 자체를 완전히 원점에서 막 새로 만들 듯이 시나리오를 새로 쓰듯이 써서 못난 사람을 부처처럼 만들고요, 아주 참 둔한 사람을 지혜가 초롱초롱한 사람으로 만들어서요, 일생을 정말 잘살았다는 말을 참으로 하게 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러분께서는 길은 아주 좋은 길을 택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얼마나 애쓰느냐가 중요한데, 참으로 애쓰면 또 의외로 쉽고 바로 될 수도 있습니다. 늘 그렇게 애쓰긴 어렵더래도 늘 노력하고 애쓰다가 보면 되는 날이 있을 거래요. 그럴 때는 그간 어렵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 다 없어지고 진정한 복락을 누릴 날이 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도 좀 특별한 그런 생각을 하셔서, 정진을 좀 잘해서 이 늦은 밤에 온 보람과 긍지를 꼭 느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9강-진의(眞疑)에서 선정까지(2008년 9월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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