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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삶을 위하여-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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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8-22 16:36 조회5,032회 댓글1건

본문

청정법어

영원한 삶을 위하여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음력 7월은 가슴 설레는 달입니다. 우리 불가에서 7월은 효행의 달,  조상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유월 그믐날 밤을 지새우면서 떡을 정성껏 빚고, 설익은 풋과일이라도 따서 껍질이 벗겨지지 않을 만큼 씻고 씻은 다음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절에 와서 천도재를 모셨다고 합니다.
이조 때 효자로 이름난 대학자 이이(李珥) 선생께서는, 󰡐천하의 물건 중에서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천하에 소중한 것이 많지만 자기 몸보다 더 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 소중한 몸은 바로 부모에게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으뜸가는 자연법칙입니다.
우리는 『부모은중경』의 말씀처럼 󰡐어머니의 젖가슴을 잠자리로 하고, 어머니의 무릎을 놀이터로 하고, 어머니의 젖을 음식으로 하고, 어머니의 정을 생명줄로 삼아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은중경』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등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 번 천 번 돌아서 가죽이 터져 뼈가 드러나고, 그 뼈가 닳아 골수가 드러나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세태가 많이 변했고, 인정마저 메말라서 조상이나 부모에 대한 관심은 옛날 사람보다 훨씬 못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천륜은 변할 수 없다는 말처럼 인간 윤리와 도덕의 기본은 불자라면 삼보(三寶)와 부모와 조상에 대한 사랑과 효행입니다.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조상을 위해서 천도재보다 더 좋은 행위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장기도 입재일입니다. 문수산 축서사에서는 매년 음력 7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연중행사로 지장기도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동참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은 지장보살님께 지극하게 기도하여 먼저 가신 부모님과 조고조상(祖考祖上) 및 법계(法界)의 일체 애고혼(一切哀孤魂)이 천도되어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현세의 부모와 일가 친족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잘 되고, 소원하는 바가 성취되시기 바랍니다.
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사대명절의 하나인 우란분절(盂蘭盆節) 또는 우란분재일(盂蘭盆齎日)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시방(十方)에 산재해 있는 유주무주(有主無主) 애고혼(哀孤魂)과 악도에 떨어져 신음하는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법락(法樂)을 얻게 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오늘부터 보름 동안 원력이 크신 지장보살님께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부터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六道)에 몸을 나투어서 󰡐나의 성불을 뒤로 미루더라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서원을 세우고 오늘도 지옥 문전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효행은 내 가족이나 내 조상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과 일체 애고혼을 다 포함합니다. 
여러분의 성심어린 기도와 지장보살님의 지중한 원력이 먼저 가신 모든 영가와 현세의 일가 친족에게 진정한 효행의 계기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이번 호의 법문은 󰡐영원한 삶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덧없어서
모두가 났다가 없어지는 법일세
나고 없어지는 것을 벗어나면
고요한 그것이 즐거움이 되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자로 출생하여 누구보다도 좋은 환경과 조건을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도 29세에 출가하여 6년 동안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무서운 수행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생과 우주의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으시고 4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중생교화를 하시다가 80세 되시던 해 위대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석 달 전에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각지로 순회하시면서 고별법문도 하시고 마지막 준비를 하셨습니다. 가시기 전 날부터는 중인도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대반 열반경』을 설하여 마치셨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선정에 드셨다가 조용히 열반에 드셨는데 시간은 한 밤중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숨을 거두시자 주위의 사라나무에서는 때 아닌 흰 꽃이 만발하여 나무들은 백학처럼 희어졌고, 하늘에서는 갑자기 갖가지 꽃비가 내렸으며, 산새들과 짐승들마저 울음을 터트렸고, 흐르던 시냇물이 그치며 천지가 암흑처럼 어두워지는 이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제자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였습니다. 
󰡒세상이 비었습니다. 세상이 비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구해 줄 이도 없고 우러러 받들 어른도 없습니다. 빈궁하고 외로움 뿐일 것입니다. 의심나는 데가 있다고 한들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임종하시자 곧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예를 갖추어 전륜성왕과 같은 다비식(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시신을 금관에 모시고 대역사(大力士)들로 하여금 구시나가라 성을 아홉 번 돌게 한 뒤에 다비소에 이르렀습니다. 전단향나무로 큰 단을 쌓고 향촉을 던져 다비하려 했지만 금관은 타지 않고 불은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존자 아누루타가, 󰡒이는 상수 제자인 가섭 존자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하 가섭은 5백 제자와 함께 기사굴산에 있었는데, 이상한 광명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즉시 삼매에 들어가 천안(天眼)을 통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섭 존자는 즉시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구시나가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존자가 부처님의 시신 곁에 도착한 것은 7일 후였습니다.
가섭 존자는 열반지에 도착하여 부처님의 관을 붙들고 크게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괴롭고 괴롭습니다. 대성존이시여. 나의 마음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계실 때는 대중이 안락했는데 이제 열반에 드시니 참으로 괴롭습니다. 슬프고 슬픕니다. 대성존이시여, 대자비를 나투시어 저희들의 절을 받으소서.󰡓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관 밖으로 두 발을 쑥 내보이셨습니다. 가섭 존자가 대중과 함께 오른 쪽으로 일곱 바퀴를 돌고 다시 절을 하자 부처님의 두 발에서는 큰 빛이 퍼져나와 온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예를 마치자 발은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가고 열려진 관이 저절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다시 역사들이 칠보의 큰 횃불을 던져 관에 불을 붙이려 했으나 이번에도 불은 모두 꺼지고 맙니다. 그러자 가섭 존자가 말하기를. 󰡒인천(人天)의 횃불로서 어찌 여래의 보관(寶棺)을 다비할 수 있겠는가?󰡓하고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 앞에 나아가 게송으로 청했습니다.

󰡒범속(凡俗)과 불길이 사나와도 어찌 불에 타시게 하오리까. 청하옵나니 삼매화(三昧火)로써 금빛 나는 몸을 사루소서.󰡓

그러자 금관이 놓인 자리에서 일곱 다라수(多羅樹) 높이로 치솟아 올라 허공을 오락가락하다가 삼매의 불로 변하더니 잠깐 사이에 재가 되어,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수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여덟 나라의 왕들이 서로 사리를 독차지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전쟁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로나(徒盧那)라는 바라문이 나서서 왕들을 설득하여 사리를 모든 왕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게 되었습니다. 왕들은 각기 자기 나라에 사리를 모셔가 정성들여 사리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부처님 열반시의 상황은 『열반경』과 『전등록』 등에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모습을 상세하게 알려드린 이유는 불자 여러분께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느껴보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불가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함축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옛 성현들은 임종 직전에 열반송을 읊고 가기도 하고, 눕는 대신 앉거나 서서 가기도 하고, 어떤 선사는 스스로 장작더미에 올라가 신통으로 불을 붙여서 생사를 자유자재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사까지도 해탈하는 열반이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용어입    니다. 

열반(涅槃)이란 범어로는 니르바나(Nirvana)인데, 소리로 번역한 것이 열반이고, 뜻으로 번역한 것이 적멸(寂滅), 무위(無爲) 또는 무생(無生)이라고 합니다.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생사를 초탈하여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열반은 불교 수행의 목적인 해탈을 말합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무지(無知), 무명(無明)의 매임을 다 벗어난 다음에야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나, 『잡아함경』의 󰡐탐욕(貪慾), 진에(嗔  ), 우치(愚痴)가 완전히 없어지고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는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구경지(究境地), 피안(彼岸)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데서 대부분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는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했으나 줄여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진리를 깨달아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불길을 잠재워도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이 있는 한 완전한 열반을 이룰 수 없으므로 육체마저 버린 때라야 참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죽음을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하여 대반열반 또는 반열반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큰 절에 가면 죽음을 앞에 둔 스님들이 거처하는 열반당이란 곳이 있고, 스님들이 입적하신 것을 열반하셨다고 하며,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열반재일이라고 하는 등 열반을 죽음과 동일한 뜻으로 잘못 인식하는 요인이 많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셔야 될 것은 열반이란 불교의 최고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불이나 해탈과 함께 불교 신앙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런 열반을 성취하는 분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처럼 생사를 자재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 법문 첫 머리에 읊은 게송은 이 말씀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게송은 만물의 이치와 수행의 근본을 함축한 유명한 법어입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행(因行)하실 때 들은 말씀입니다.
인행은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전생담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단지 금생에서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도 수행을 쌓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에 8천번 가량이나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그 중 5백번 가량만 사람 몸을 받았고, 7천 5백번 가량은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처님 전생은 바라문이나 전륜성왕, 귀족 또는 농부로 태어나기도 했지만, 코끼리나 사슴, 새 등 축생이나 미물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불자 여러분! 부처님도 사람 몸을 받기는 5백번 가량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 윤회를 안 믿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윤회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생에는 남의 집이나 지켜주는 천덕꾸러기 개도 될 수 있고, 밤낮 탐욕이나 일으키는 사람은 세상에 더러운 돼지가 되어 우리에서 꿀꿀거릴 수도 있고, 남의 빚이나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은 소가 되어 남의 논밭에서 일이나 해주다가 죽을 때는 몸뚱이마저도 보시하는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은 사람으로 태어날 때마다 수행을 하셨습니다. 어느 생에는 설산동자(雪山童子)로서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 산 속에 들어가서 오직 도를 깨닫기 위하여 일념으로 좌선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어디선가 귀가 번쩍 열리는 충격적인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덧없어서
모두가 났다가는 없어지는 법일세.

흡사 목마른 자가 물을 얻은 듯, 배고픈 자가 밥을 만난 듯 설산동자는 이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심오한 노래의 내용은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뒷말이 더 없을까? 그 노래를 부른 주인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오직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나찰만 보였습니다.
설산동자는 나찰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조금 전에 진리의 말씀을 불렀는가?󰡓
나찰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 게도 분명 알고 있을 터이니 들려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찰은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자기는 여러 날을 굶었기 때문에 너무 배가 고파서 도저히 말할 기력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자가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복이 없어서 사람의 따뜻한 피와 더운 살을 먹고 사는데 아무리 구하여도 구할 수가 없구려. 세상에는 사람도 많지만 모두 복덕이 있고 천인들이 수호하고 있으니 나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이렇게 허기를 채우지 못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이다.󰡓
이런 대답을 들은 설산동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나찰의 밥이 되겠노라고 자청했습니다. 그 대신 나머지 진리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나찰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설산동자는, 󰡒썩어 빠질 이 육체를 버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얻고자 하는 일념 뿐이니 의심하지 말고 나머지 구절을 일러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나찰은 마침내 설산동자의 성실한 태도에 감격한 듯 나머지 반 게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앞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생멸멸이 적멸위락󰡑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나고 없어지는 것을 벗어나면 고요한 그것이 즐거움이 되네.󰡑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게송의 반쪽을 일러 준 나찰은 설산동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지금 나의 반 게를 안전하게 들었으니 약속대로 이제 당신의 몸을 나에게 주시오.󰡓
설산동자는 이 게송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주위 여기저기 나무와 돌에 이 게송을 써놓고는 나무 위로 올라가면서,
󰡒나는 몸을 버려서 게송을 들은 값을 갚으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무신은 󰡒그 게송이 무슨 이익이 있기에 몸을 버리려느냐?󰡓고 묻자 동자는 말했습니다. 󰡒이 게송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법이란 공(空)한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이 법을 듣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버리려는 것이다. 이양(利養)이나 재물, 전륜성왕, 사천왕, 제석천왕, 대범천왕이나 인간이나 천상이 즐거움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 몸을 버리노라.󰡓
그리고는 곧 나무에서 손을 놓고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자 이 때 험상궂은 모습으로 목숨을 노리던 나찰이 어느새 제석천왕으로 변해서 공중에서 동자의 몸을 곱게 받았습니다. 나찰은 본래 제석천왕인데 설산동자의 구도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와 같은 연극을 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이야기를 마치시고 그 때의 설산동자는 바로 부처님 자신이었으며, 지난 세상에서 게송 반 구절을 듣기 위하여 몸을 버릴 각오를 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12겁을 초월하여 미륵보살보다도 먼저 성불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설화를 통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반 게를 듣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치다니 너무 대단한 일이라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체험하지 못하면 말문이 닫힙니다. 그리하여 역대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은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잊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이 공부를 위해서 자신을 바쳤습니다. 요즘도 진실한 구도자 중에는 자기 몸을 태우고 희생하면서 공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전생에서부터 간절한 구도심을 가졌습니다. 설산 수도자처럼 깨닫겠다는 지극한 구도심이 장차 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수행은 진실한 체험을 하면 누구나 도를 위해 자기를 아끼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해도 아깝지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한 가지 수행법으로 자신을 던져보십시오. 그런 수행에서 진정한 보람을 느끼게 되고 참으로 만족하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일념으로 몸을 버리면서까지 들으려고 한 사구게의 뜻은 무엇일까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이 게송은 『열반경』의 사구게(四句偈)라 합니다. 사구게란 경전의 뜻을 요약하여 네 구절의 시 형식으로 나타낸 글을 말합니다. 이 사구게는 설산선인이 반 게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법을 위하여 몸을 잊은 위법망구(爲法忘軀) 구도정신을 잘 나타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행이란 말 가운데 󰡐행(行)󰡑은 일체, 모든 것을 뜻합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을 행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모든 것을 오온(五蘊)이라 하는데,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색은 모든 물질적인 존재요,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작용을 말합  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법계(宇宙法界)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무상(無常)의 법칙에 따릅니다. 무상이란 항상 머무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나고 죽고 흥하고 망하는 것이 덧없음을 말합니다.
생명체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모양 있는 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합니다. 생명체는 어떤 생명체(有情物)이든 태어나서(生), 얼마간 머물다가(住), 변해서(異), 없어집니다(滅). 우리 인간도 태어나고 자라서는 늙고 병들어 결국은 죽고 맙니다. 죽으면 살과 뼈는 흙으로 변하고, 피나 고름이나 눈물 오줌 등은 물로 변하고, 따스한 체온은 대기의 온도 일부가 되고, 힘은 바람의 성분이 됩니다. 그리하여 큰 흙덩이가 작은 흙덩이가  되고 결국은 먼지가 되어서 바람 한 번 불면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고, 물의 성분으로 변한 것은 햇빛이 쨍쨍 쪼이면 증발하여 자취조차 없어집니다. 참으로 무상하여 눈물마저 없어진다고 합니다. 
 
형상이 있는 것은(成), 얼마간 그 모양을 유지하다가(住), 결국은 무너져서(壞), 모양 없는 것(空)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 뒷산 바위도 천년만년 꿈적 않고 변치 않을 것 같다가도 서서히 변해서 큰 바위가 작은 바위가 되고,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었다가 결국 흙으로 변하고 먼지로 변하고 맙니다. 다만 다른 물체에 비해 변하는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무상은 허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변천하는 실상을 가리키는 예지의 언어입니다.

변하는 것은 물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변합니다. 불교에서는 정신작용을 수상행식(受想行識) 네 가지로 나눕니다. 수(受)는 감각작용을 말하고, 상(想)은 지각작용을 일컬으며, 행(行)은 의욕을 말하며, 식(識)은 의식을 일컫습니다. 

요즘 우리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삼일은커녕 조석으로 변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가 시행하는 법령도  년중 행사처럼 바뀐다고 지적되곤 합니다. 공인 중에는 여야를 수시로 해바라기처럼 드나드는 인물도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 있는 곳에는 개미나 파리떼가 먹이를 따라 움직이듯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의리나 신념 운운하지만 휴지조각처럼 버리고, 젊은이조차도 조금만 대우가 좋아도 회사를 옮기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며 평생직장이란 말이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인사들의 한결같은 말은, 󰡐나는 결백하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부정이 많은 사람이 많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것은 예사스런 일이고,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머리카락 뒤에서 숨바꼭질하는 벽창우(壁昌牛)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는 어렵다󰡑는 속담처럼, 돈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사람일수록 급하면 부처님 찾다가 변소 갈 적에 마음이 다르고 올 적에 마음이 다르듯이 변합니다. 어떤 경우는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고 하다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요사스럽기만 합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변화무쌍해서 하늘 쳐다보기가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 󰡐제행무상 시생멸법󰡑입니다.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죽고(生者必滅), 만나는 자는 헤어지기 마련이다(會者定離)󰡑라는 말도 이러한 무상한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무상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무상하기 때문에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자연법칙 속에서 생명체는 누구나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일체 만물이 무상하니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게송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앞부분은 우리 중생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고, 뒷부분은 부처님의 세계, 보살의 세계를 노래한 것입니다. 
항상 󰡐변함없는 즐거운 세계󰡑 즉, 부처님의 세계를 꼭 믿으시고 더욱  돈독한 불교 신도가 되셔서 인생에 진정한 보람과 긍지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게송은 무상하고 괴로운 현실을 극복하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항상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밝힌 진리입니다.

󰡐나고 없어지는 것 벗어나면 고요한 그곳이 즐거움이 된다.󰡑
 
󰡐나고 없어지는 것 벗어나면󰡑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생사를 뛰어넘어 영원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일이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뭐니뭐니 해도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을 가장 큰 일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생사문제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면, 󰡐나고 없어지는 것을 벗어나려면󰡑 무슨 방법이 가장 좋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닦아서 인간의 근본실상(根本實相)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근본 실상이란, 인간의 참 모습, 때 묻지 않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근본 성품을 타고 납니다. 그래서 본래는 부처라고 합니다. 본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서 만인의 존경을 받고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성인이 되셨는데, 여러분은 왜 중생의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렵고 괴롭고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까?

근본 이유는 번뇌와 망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은 번뇌 망상의 불꽃으로 활활 불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외치고 있습니다.
󰡒수도승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소. 무엇으로 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꽃으로 타고 있고, 노여움의 불꽃으로 타고 있소. 태어남, 늙어 죽음, 두려움, 헤맴의 불로 타고 있소. 또한 슬픔, 괴로움, 근심, 고민으로 타고 있다고 나는 가르치고 있소.󰡓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온갖 불꽃으로 타고 있는데, 이는 바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서 오는 마음의 불꽃입니다. 그것은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와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은 중생의 삶을 화택(火宅 : 불난 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불꽃을 하루속히 꺼야 합니다. 그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인하여 마음이 어둡고 탁해져서 근본 성품이 드러나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살이가 얼마나 어렵고 괴롭습니까.
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려서 근본 성품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깨달음이라고 하고, 그런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 때묻지 않은 근본성품의 자리를 생사가 없는 자리라고 하고, 생사를 자재(自在)하는 자리, 생사를 해탈하는 자리하고 합니다. 그 자리는 본래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반야심경』의 말씀처럼,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체험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해방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근본적으로 태어나고 죽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본성품 자리를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라지고 오직 진리를 깨달은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곧 사라지거나 변화가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언제나 한결같은 즐거움이기 때문에 󰡐고요한 그곳이 즐거움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번뇌의 불꽃을 지혜와 수행의 바람으로 꺼버리고 본래의 마음,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아무 괴로움 없이 안온(安穩)한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탐욕심이 영원히 다하게 되고, 성냄마저 영원히 사라지고, 어리석음도 영원히 없어져 생사의 고통까지도 영원히 해탈하게 됩니다.
이런 열반이야말로 진정한 열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 수도한 목적도 바로 이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일도 있습니다. 
󰡒내가 본래 무엇을 위하여 출가하였느냐 하면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을 증득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대반 열반경』에는 부처님의 열반을 대열반이라고 했고, 대열반의 특질로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열반의 삼덕(三德)이라 합니다.
그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반야요, 셋째는 해탈입니다. 
법신이란 법을 몸으로 비유한 말로써, 우주와 인간의 근본 진리로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 어디에도 자유스런 본래 모습인 불성을  말합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사는 이의 백년은 진리를 깨닫고 사는 이의 하루만 못하다고 합니다. 
반야는 실상을 비추어 보는 지혜로써 법신의 저 언덕에 이르는 배나 뗏목에 비유합니다. 열반의 경지는 지혜의 빛에 의해서 이르게 됩니다. 이 반야지혜로 법신을 깨달을 때 얻게 되는 일체의 걸림없는 심신의 자유로운 경지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 셋은 서로 하나입니다. 말은 셋이지만 대열반 가운데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신과 반야와 해탈을 갖춘 부처님의 참 모습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쉬고 비우고 놓으면 됩니다. 쉬고 비우고 놓는다는 것은 일체의 잡스런 마음과 생각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겠다는 그 마음도 쉬고, 쉰다는 생각도 쉬고, 참으로 쉬면 법신의 경지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쉴 수 없으니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현대인은 실력을 쌓은 지식인일수록, 희망과 포부가 충천하는 젊은이일수록,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야망인일수록 쉬고 비우려는 노력이 없으면 진정한 삶에 보람과 가치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쉬고 비우기 어려우니까 부득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두 참선이 상승법이라고는 하지만, 『선요』를 쓴 고봉원묘(高峰原妙)선사께서는 󰡐종과 신랑도 구분 못하는 색시가 하는 짓과 같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바로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을 닦는다.󰡑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입니다. 아마 이처럼 인생에 절실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이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진정한 일 중의 일이라고 합니다. 옛 선사들은 궁극적으로는 이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 이 공부만이 참 나 참 자기를 찾아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일체에서 해탈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라는 보물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자기라는 보물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기를 떠난 그 어떤 것도 허망하며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 일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이며 훌륭한 일이라 합니다.
󰡐나란 누구인가?󰡑
󰡐나란 무엇인가?󰡑

도대체 나란 누구인가? 나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모양 이 꼴인가? 멱살을 잡고 밀어붙이듯이, 복싱 선수가 상대 선수를 코너에 몰아넣고 무수히 주먹을 날리듯이 참구하고 참구해 보십시오. 생사가 달린 심각한 문제도 죽자 사자 따지듯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사생결단 하듯이 하십시오,
지난 세월이 후회스러울수록, 자기의 못난 점이 부끄러울수록, 공부 못한 것이 괴로울수록 일체의 괴로움과 슬픔, 부끄러움, 부족한 점, 한스러움을 똘똘 뭉쳐 오직 화두 의정에 분심을 일으켜보십시오. 
또 희망과 포부가 충천할수록, 인생의 목표가 뚜렷할수록, 소원하는 바가 많을수록, 일생에 심각한 고민을 할수록 화두에 자신을 던지고, 화두에 자신을 바쳐 보십시오.
염불하시는 분은 염불에 자기를 던지고 미쳐보십시오. 그리하여 염불자는 염불삼매에 꼭 들어보시고, 참선자는 선정에 꼭 들어 보십시오. 삼매나 선정에 들어보아야 수행하는 진정한 기분을 느낍니다.
삼매나 선정은 수행에 폭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참선한 지가 몇 시간이 지났는지, 염불하는 곳이 어디인지 시공을 초월한 상태를 일컫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잊을 정도로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한 경지를 진실하게 체험해 보십시오. 수행에서 인생의 행복과 보람을 못느끼면 반쪽 인생도 못된다고 합니다. 
더 깊게 들어가서 백척간두(百千竿頭)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큰 깨달음을 얻으면 한 없이 밝고 밝아 안락한 법신을 느낄 수 있으며, 걸림 없는 반야와 대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천하의 선지식들은 입을 모아 법문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잘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옛 선사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오직 선택의 길만이 남았습니다. 현대인은 잘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갖 번뇌의 불길을 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노여움을 버리지 못하며,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하니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번뇌와 더럽힘이 없어야 하고, 애착을 떠나야 하고, 집착을 벗어나야만 진리의 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세상을 밝히는 새벽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갑시다.

지루한 장마 언제 끝날 것인가
문수산 정상은 먹구름만 가득하네
홀연히 어딘선가 회오리 바람 몰아치니
태양은 웃음 짓고 하늘은 한없이 맑구나.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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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서사 작성일

축서사 계간지 여름호 '청정법어'에 올려진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