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52년 봉축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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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5-13 09:54 조회4,033회 댓글0건본문
‘부처님 오신 뜻’을 생각합시다
무여 큰스님
환하게 태어나신 부처님
처음 오르는 해와 같아라
바라볼수록 기쁨에 차니
공중의 달을 보는 것 같네
부처님 황금빛 몸의 광명은
온 세상을 비춰 기쁨을 주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곱 발길을
조용하고 편안히 내딛으셨네
사방을 두루 관찰하면서
진실한 이치 환히 깨달아
괴로운 중생을 구제하기를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맹세했다네
‘삼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여래(如來)가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해탈의 길을 얻기 위해서이니
중생의 결박을 능히 풀어주시고
나고 죽는 괴로움을 없애주시네
쇠하고 늙음을 큰 물살 삼으며
죽음을 바다의 큰 물살 삼을 때
부처님은 지혜의 배 타고 오셔서
온갖 괴로움에서 건져 주시네.
- 이상은 《붓다차리타》 에서 부처님의 탄신을 찬탄하신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의 영화도 버리시고 어둡고 혼탁한 이 세상에 한 줄기의 환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부처님은 참된 진리와 바른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중생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 부정과 부패, 시비와 장단, 갈등과 모순,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뜻 깊은 날을 맞이하여 부처님의 탄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참된 불자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발심하고 정진해야겠습니다.
먼저 불자 여러분께서 아실 것은 부처님의 탄생은 계획된 출생, 맞춤형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시기와 장소, 부모까지도 미리 정해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은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인연과 인과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원력을 세워 스스로 이 땅에 나투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같이 수행을 잘하신 사람은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생사까지도 자유자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금생에 태어나시기 직전에는 십지보살(十地菩薩)로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 계시면서 천상인간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십지보살이란 십지(十地)에 오른 보살이란 뜻입니다. 보살이 성불에 이르는 데는 52단계가 있고, 이 계위(階位) 가운데서 제41위로부터 제 50위까지를 ‘십지’라고 합니다.
이 십지에 이르면 부처님의 지혜가 생겨 어떤 경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공덕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십지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수많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하기 어려운 고행과 참기 어려운 인욕행으로 보살행을 하고 불도를 닦아 십지의 대단한 공덕을 성취하였습니다. 후에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 도솔천에 태어나셔서 그곳의 천왕이 되셨는데 그때 보살님의 이름을 호명(護明)이라 불렀습니다.
일생보처보살은 부처님이 되시기 직전의 일생을 말합니다. 호명보살이 하늘 사람들과 인연이 다해 가니 도솔천에서는 슬픔에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슬프다. 우리 보살님께서 오래지 않아 도솔천을 떠나실 것이니 우리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러나 보살은 천상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천상에서 명(命)이 다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되리라.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면 이별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몸을 버린 뒤에 영원히 나고 죽음이 없는 보리(菩提)를 성취하여 열반의 피안(彼岸)에 이르려 한다.”
마침내 호명보살은 태어날 세계를 관찰하시고, 시기와 대륙, 나라 및 가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시기는 중생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질 때를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세상이 너무 타락하면 종교에 관심을 가져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렸습니다.
대륙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주(州) 가운데 하나를 정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염부주(閻浮洲)는 우리가 사는 인간세계를 말하는데 부처님이 출현하시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나라는 염부주 중에서 인도대륙의 중북부에 위치한 가비라국을 결정하셨습니다. 신분 계급은 귀족으로 부모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부인이 성도(成道)하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다고 선택되었습니다.
가비라국은 지금의 네팔 타라이 지방에 있는 농업국가입니다. 정반왕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위엄이 있고 통치를 잘하는 군주였고, 마야부인은 코오리성의 선각왕(善覺王)의 누이로서 연꽃처럼 예쁘고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사까지도 초탈하고 자유자재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여러분도 수행을 잘 하셔서 견성(見性)하여 불지견(佛知見)이 열리면 호명보살처럼 맞춤형 탄생도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했던 큰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법화경》에서는 그 구체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개발하여 청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이유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 지견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셨느니라.”
‘일대사인연’이라고 표현되는 부처님 오심의 큰 목적은 불지견(佛知見)을 얻게 하기 위해섭니다. 불지견이란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지혜광명(智慧光明)을 뜻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태어나는 불성(佛性), 자기의 근본자성(根本自性)을 깨쳐 불지견을 얻어서 우주의 참된 진리와 존재의 참모습을 밝게 비춰보고 헤아릴 수 있는 큰 지혜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이 이미 증득하신 불지견에 대한 개(開), 시(示), 오(悟), 입(入) 즉,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들에게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진리의 세계로 함께 들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극에는 깨달아야 할 것이 진여자성(眞如自性)이고, 들어가야 할 곳이 열반의 경지이며, 갖추어야할 것이 불지견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고, 부처님의 지견의 세계로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것은 만 중생의 희망이요, 목표입니다. 부처님이 얻으신 지혜광명, 그것은 기나긴 생사윤회의 긴 터널로부터 벗어나는 첩경이요, 모든 삶의 고통을 치유 할수 있는 명약과 같으며,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위대한 문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지혜광명을 얻어 부처님처럼 위대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자비와 원력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보다도 중생의 근원적인 고뇌를 치료하고,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생사까지도 희생하면서 불지견을 얻게 하는 최상의 가르침을 주셨으니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일입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신심과 원력으로 오셨지만 가신지가 오래인 말법세상이라선가, 인간세상의 외형은 점점 화려하고 풍요롭고 편리해지는데, 오히려 내면은 점점 왜소해지고 괴로워지며 사악해지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중생병고의 원인은 바로 무명심(無明心) 때문입니다. 무명심이란 어두운 마음, 탁한 마음을 일컫습니다. 그것을 무지(無知)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존재 근저에 있는 근본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중생고뇌의 모든 원인이 다름 아닌 중생 스스로의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갈파하셨습니다. 중생이 어리석어서 참된 진리와 가치를 알지 못하고 바른 삶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무명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무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분수에 넘치게 이런저런 탐착심, 탐욕심을 일으키고,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대하여 분한 마음을 내고,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이치나 도리에 어두워 사물의 진상이나 실상을 알지 못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켜 마음이 어둡고 탁해진 것을 말합니다.
무명심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제일지(支)가 되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생사윤회의 고통을 끝없이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모든 악과 어리석음의 근본이 됩니다.
부처님은 왜 중생이 고통과 불행 속에 살아가게 되는지 그 원인을 누구 보다도 밝게 아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평생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일깨우고자 하신 것도 결국은 이와 같은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과 방법 즉, 부처님의 지견을 얻고 그 지견에 의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지금 우리는 지극히 혼탁하고 괴롭고 어려운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으로 끝없이 살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간 인류는 경제가 산업화되고 첨단 과학의 발달로 물질은 풍요롭고 화려해져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풍년기근(豊年飢饉)이라는 말처럼 풍요 속에서도 굶주림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물질 위주의 외형적인 성장과 소비, 향락에 타락한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을 더욱 왜소화시키고 도구화 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래는 맑고 깨끗한 인간의 심성을 황폐화시켜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가치에 매달려 자아(自我)마저도 상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아미타경》에는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탁이란 겁탁, 견탁, 번뇌탁, 중생탁, 명탁 등 다섯 가지의 탁한 세상을 말합니다.
첫째, 겁탁(劫濁)이란 시대의 혼탁함을 일컫습니다. 현대와 같이 각종 사회악과 환경오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혼탁한 시대 또는 타락한 시대를 말합니다.
둘째, 견탁(見濁)이란 부정한 사상이나 악한 사상 같은 온갖 그릇된 사상으로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을 일컫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이나 인간의 실상을 바로 판단하는 지혜도 없고,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부처님의 인과설(因果說)이나 윤회설(輪回說)을 믿지도 않고, 잘못된 사상과 전도된 가치관으로 세상을 흐리게 하고 삶을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번뇌탁(煩惱濁)이란 번뇌가 치성하여 정신상태가 혼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중생탁(衆生濁)은 유정탁(有情濁)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생이란 인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악업이 점점 두터워져 근기가 하열하고 됨됨이가 왜소해지는 것을 중생탁이라 합니다.
다섯째, 명탁(命濁)은 수탁(壽濁)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말세현상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지럽고 혼탁한 시대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바른길을 찾을 것인가? 과연 무엇을 등불로 삼아서 살아가야 제대로 가는 길인지 심히 막막하고 혼란하기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참으로 좋은 인연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교보다도 수승하고, 어떤 철학보다도 심오하고, 어떤 학문보다도 방대하고, 어떤 이론보다도 대단한 최상의 법에 인연을 맺었으니 어찌 행운이요,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은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며, 진리와 삶의 올바른 가치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귀를 열며 믿음과 정성으로 삼보를 따른다면 비록 아무리 오탁악세의 말세에 처해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당당하고도 꿋꿋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一心淸淨 國土淸淨) ”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마음이 어둡고 탁한 무명심을 떠나 맑고 깨끗한 청정한 지혜심을 얻게 되면, 그러한 사람이 모여 이루는 이 사회와 국토가 자연히 깨끗한 사회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업력의 소산입니다. 그 업력은 바로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나타난 그림자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오늘의 현상, 즉 오탁악세의 증후들이 바로 남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마음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대처해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고 삶의 등불로 삼아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내면에 갖추고 있는 밝고 깨끗한 마음, 즉 청정한 불성(佛性)이며, 부처님 자신이 깨달아 가르치신 진리뿐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장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
부처님은 오직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하고,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하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불교의 근본사상과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이치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비롯되고 자기를 떠나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천지도 움직이고 만물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도 자기의 한 생각에 달렸습니다.
그 자기를 움직이고 자신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심성(心性)에 따라 전개되고, 근본자성(根本自性)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고, 그 자신이 해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바른 마음과 바른 가치를 가지고 사느냐, 못사느냐?’ 또는 ‘내가 얼마나 바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느냐, 못사느냐?’ 에 따라 인생의 명암(明暗)과 흑백(黑白)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인생 대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 여부가 정해지기도 하고, ‘행복하게 사느냐, 불행하게 사느냐?’ 결정되기도 하고, ‘인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의지하고 등불로 삼으라고 한 자신은 온갖 욕망과 분노심과 어리석음으로 오염된 흐리고 탁한 중생의 마음도 아니고, 일그러지고 딱하게 보이는 중생의 모습을 한 자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구족해 있는 밝고 깨끗하고 청정한 본성으로서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조금도 때묻지 않아서 언제라도 밝고 환한 갖가지 작용을 하고 신통묘용(神通妙用)도 자재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청정한 불성의 자신을 의지하고 등불로 삼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법을 의지하고 삶의 등불로 삼아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법(法)이란 불교의 진리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신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참된 진리와 존재의 참모습을 말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하다고 인식되는 내용이고,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함께 이룰 수 있는 올바르고 참다운 진리이고, 자유와 평등, 평화와 생명, 존중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진리입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어렵고 괴로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오탁악세의 증후들을 곳곳마다 감지하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불행하게 느껴질수록 부처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처로 삼아서 당당하게 꿋꿋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부처님 당시 사위성의 가난한 여인 난다의 등불처럼 조그마한 연등이지만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켜니 어떤 큰 등보다도 무진등(無盡燈)이 되듯이, 청정한 자아와 진리의 등불로 내 삶의 어둠을 밝히고, 나아가 이웃과 사회의 어둠을 밝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이 청정한 자아와 진리를 의지해 사는 삶의 길이 당장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과연 거룩한 삶만이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하고 궁극에는 불국정토(佛國淨土)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이처럼 매년 연등을 밝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의 의지를 다지고 실천하고자 하는 원력 때문입니다.
나무 충만법계 일체제불 (南無 允滿法界 一切諸佛)
나무 화장찰해 무생정토 (南無 華藏刹海 無生淨土)
나무 몽환공화 수월도량 (南無 夢幻空華 水月道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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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 큰스님
환하게 태어나신 부처님
처음 오르는 해와 같아라
바라볼수록 기쁨에 차니
공중의 달을 보는 것 같네
부처님 황금빛 몸의 광명은
온 세상을 비춰 기쁨을 주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곱 발길을
조용하고 편안히 내딛으셨네
사방을 두루 관찰하면서
진실한 이치 환히 깨달아
괴로운 중생을 구제하기를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맹세했다네
‘삼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여래(如來)가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해탈의 길을 얻기 위해서이니
중생의 결박을 능히 풀어주시고
나고 죽는 괴로움을 없애주시네
쇠하고 늙음을 큰 물살 삼으며
죽음을 바다의 큰 물살 삼을 때
부처님은 지혜의 배 타고 오셔서
온갖 괴로움에서 건져 주시네.
- 이상은 《붓다차리타》 에서 부처님의 탄신을 찬탄하신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의 영화도 버리시고 어둡고 혼탁한 이 세상에 한 줄기의 환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부처님은 참된 진리와 바른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중생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 부정과 부패, 시비와 장단, 갈등과 모순,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뜻 깊은 날을 맞이하여 부처님의 탄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참된 불자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발심하고 정진해야겠습니다.
먼저 불자 여러분께서 아실 것은 부처님의 탄생은 계획된 출생, 맞춤형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시기와 장소, 부모까지도 미리 정해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은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인연과 인과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원력을 세워 스스로 이 땅에 나투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같이 수행을 잘하신 사람은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생사까지도 자유자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금생에 태어나시기 직전에는 십지보살(十地菩薩)로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 계시면서 천상인간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십지보살이란 십지(十地)에 오른 보살이란 뜻입니다. 보살이 성불에 이르는 데는 52단계가 있고, 이 계위(階位) 가운데서 제41위로부터 제 50위까지를 ‘십지’라고 합니다.
이 십지에 이르면 부처님의 지혜가 생겨 어떤 경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공덕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십지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수많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하기 어려운 고행과 참기 어려운 인욕행으로 보살행을 하고 불도를 닦아 십지의 대단한 공덕을 성취하였습니다. 후에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 도솔천에 태어나셔서 그곳의 천왕이 되셨는데 그때 보살님의 이름을 호명(護明)이라 불렀습니다.
일생보처보살은 부처님이 되시기 직전의 일생을 말합니다. 호명보살이 하늘 사람들과 인연이 다해 가니 도솔천에서는 슬픔에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슬프다. 우리 보살님께서 오래지 않아 도솔천을 떠나실 것이니 우리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러나 보살은 천상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천상에서 명(命)이 다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되리라.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면 이별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몸을 버린 뒤에 영원히 나고 죽음이 없는 보리(菩提)를 성취하여 열반의 피안(彼岸)에 이르려 한다.”
마침내 호명보살은 태어날 세계를 관찰하시고, 시기와 대륙, 나라 및 가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시기는 중생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질 때를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세상이 너무 타락하면 종교에 관심을 가져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렸습니다.
대륙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주(州) 가운데 하나를 정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염부주(閻浮洲)는 우리가 사는 인간세계를 말하는데 부처님이 출현하시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나라는 염부주 중에서 인도대륙의 중북부에 위치한 가비라국을 결정하셨습니다. 신분 계급은 귀족으로 부모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부인이 성도(成道)하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다고 선택되었습니다.
가비라국은 지금의 네팔 타라이 지방에 있는 농업국가입니다. 정반왕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위엄이 있고 통치를 잘하는 군주였고, 마야부인은 코오리성의 선각왕(善覺王)의 누이로서 연꽃처럼 예쁘고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사까지도 초탈하고 자유자재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여러분도 수행을 잘 하셔서 견성(見性)하여 불지견(佛知見)이 열리면 호명보살처럼 맞춤형 탄생도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했던 큰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법화경》에서는 그 구체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개발하여 청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이유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 지견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셨느니라.”
‘일대사인연’이라고 표현되는 부처님 오심의 큰 목적은 불지견(佛知見)을 얻게 하기 위해섭니다. 불지견이란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지혜광명(智慧光明)을 뜻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태어나는 불성(佛性), 자기의 근본자성(根本自性)을 깨쳐 불지견을 얻어서 우주의 참된 진리와 존재의 참모습을 밝게 비춰보고 헤아릴 수 있는 큰 지혜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이 이미 증득하신 불지견에 대한 개(開), 시(示), 오(悟), 입(入) 즉,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들에게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진리의 세계로 함께 들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극에는 깨달아야 할 것이 진여자성(眞如自性)이고, 들어가야 할 곳이 열반의 경지이며, 갖추어야할 것이 불지견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고, 부처님의 지견의 세계로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것은 만 중생의 희망이요, 목표입니다. 부처님이 얻으신 지혜광명, 그것은 기나긴 생사윤회의 긴 터널로부터 벗어나는 첩경이요, 모든 삶의 고통을 치유 할수 있는 명약과 같으며,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위대한 문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지혜광명을 얻어 부처님처럼 위대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자비와 원력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보다도 중생의 근원적인 고뇌를 치료하고,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생사까지도 희생하면서 불지견을 얻게 하는 최상의 가르침을 주셨으니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일입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신심과 원력으로 오셨지만 가신지가 오래인 말법세상이라선가, 인간세상의 외형은 점점 화려하고 풍요롭고 편리해지는데, 오히려 내면은 점점 왜소해지고 괴로워지며 사악해지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중생병고의 원인은 바로 무명심(無明心) 때문입니다. 무명심이란 어두운 마음, 탁한 마음을 일컫습니다. 그것을 무지(無知)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존재 근저에 있는 근본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중생고뇌의 모든 원인이 다름 아닌 중생 스스로의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갈파하셨습니다. 중생이 어리석어서 참된 진리와 가치를 알지 못하고 바른 삶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무명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무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분수에 넘치게 이런저런 탐착심, 탐욕심을 일으키고,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대하여 분한 마음을 내고,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이치나 도리에 어두워 사물의 진상이나 실상을 알지 못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켜 마음이 어둡고 탁해진 것을 말합니다.
무명심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제일지(支)가 되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생사윤회의 고통을 끝없이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모든 악과 어리석음의 근본이 됩니다.
부처님은 왜 중생이 고통과 불행 속에 살아가게 되는지 그 원인을 누구 보다도 밝게 아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평생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일깨우고자 하신 것도 결국은 이와 같은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과 방법 즉, 부처님의 지견을 얻고 그 지견에 의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지금 우리는 지극히 혼탁하고 괴롭고 어려운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으로 끝없이 살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간 인류는 경제가 산업화되고 첨단 과학의 발달로 물질은 풍요롭고 화려해져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풍년기근(豊年飢饉)이라는 말처럼 풍요 속에서도 굶주림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물질 위주의 외형적인 성장과 소비, 향락에 타락한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을 더욱 왜소화시키고 도구화 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래는 맑고 깨끗한 인간의 심성을 황폐화시켜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가치에 매달려 자아(自我)마저도 상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아미타경》에는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탁이란 겁탁, 견탁, 번뇌탁, 중생탁, 명탁 등 다섯 가지의 탁한 세상을 말합니다.
첫째, 겁탁(劫濁)이란 시대의 혼탁함을 일컫습니다. 현대와 같이 각종 사회악과 환경오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혼탁한 시대 또는 타락한 시대를 말합니다.
둘째, 견탁(見濁)이란 부정한 사상이나 악한 사상 같은 온갖 그릇된 사상으로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을 일컫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이나 인간의 실상을 바로 판단하는 지혜도 없고,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부처님의 인과설(因果說)이나 윤회설(輪回說)을 믿지도 않고, 잘못된 사상과 전도된 가치관으로 세상을 흐리게 하고 삶을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번뇌탁(煩惱濁)이란 번뇌가 치성하여 정신상태가 혼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중생탁(衆生濁)은 유정탁(有情濁)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생이란 인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악업이 점점 두터워져 근기가 하열하고 됨됨이가 왜소해지는 것을 중생탁이라 합니다.
다섯째, 명탁(命濁)은 수탁(壽濁)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말세현상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지럽고 혼탁한 시대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바른길을 찾을 것인가? 과연 무엇을 등불로 삼아서 살아가야 제대로 가는 길인지 심히 막막하고 혼란하기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참으로 좋은 인연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교보다도 수승하고, 어떤 철학보다도 심오하고, 어떤 학문보다도 방대하고, 어떤 이론보다도 대단한 최상의 법에 인연을 맺었으니 어찌 행운이요,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은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며, 진리와 삶의 올바른 가치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귀를 열며 믿음과 정성으로 삼보를 따른다면 비록 아무리 오탁악세의 말세에 처해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당당하고도 꿋꿋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一心淸淨 國土淸淨) ”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마음이 어둡고 탁한 무명심을 떠나 맑고 깨끗한 청정한 지혜심을 얻게 되면, 그러한 사람이 모여 이루는 이 사회와 국토가 자연히 깨끗한 사회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업력의 소산입니다. 그 업력은 바로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나타난 그림자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오늘의 현상, 즉 오탁악세의 증후들이 바로 남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마음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대처해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고 삶의 등불로 삼아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내면에 갖추고 있는 밝고 깨끗한 마음, 즉 청정한 불성(佛性)이며, 부처님 자신이 깨달아 가르치신 진리뿐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장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
부처님은 오직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하고,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하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불교의 근본사상과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이치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비롯되고 자기를 떠나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천지도 움직이고 만물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도 자기의 한 생각에 달렸습니다.
그 자기를 움직이고 자신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심성(心性)에 따라 전개되고, 근본자성(根本自性)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고, 그 자신이 해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바른 마음과 바른 가치를 가지고 사느냐, 못사느냐?’ 또는 ‘내가 얼마나 바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느냐, 못사느냐?’ 에 따라 인생의 명암(明暗)과 흑백(黑白)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인생 대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 여부가 정해지기도 하고, ‘행복하게 사느냐, 불행하게 사느냐?’ 결정되기도 하고, ‘인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의지하고 등불로 삼으라고 한 자신은 온갖 욕망과 분노심과 어리석음으로 오염된 흐리고 탁한 중생의 마음도 아니고, 일그러지고 딱하게 보이는 중생의 모습을 한 자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구족해 있는 밝고 깨끗하고 청정한 본성으로서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조금도 때묻지 않아서 언제라도 밝고 환한 갖가지 작용을 하고 신통묘용(神通妙用)도 자재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청정한 불성의 자신을 의지하고 등불로 삼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법을 의지하고 삶의 등불로 삼아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법(法)이란 불교의 진리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신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참된 진리와 존재의 참모습을 말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하다고 인식되는 내용이고,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함께 이룰 수 있는 올바르고 참다운 진리이고, 자유와 평등, 평화와 생명, 존중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진리입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어렵고 괴로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오탁악세의 증후들을 곳곳마다 감지하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불행하게 느껴질수록 부처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처로 삼아서 당당하게 꿋꿋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부처님 당시 사위성의 가난한 여인 난다의 등불처럼 조그마한 연등이지만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켜니 어떤 큰 등보다도 무진등(無盡燈)이 되듯이, 청정한 자아와 진리의 등불로 내 삶의 어둠을 밝히고, 나아가 이웃과 사회의 어둠을 밝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이 청정한 자아와 진리를 의지해 사는 삶의 길이 당장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과연 거룩한 삶만이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하고 궁극에는 불국정토(佛國淨土)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이처럼 매년 연등을 밝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의 의지를 다지고 실천하고자 하는 원력 때문입니다.
나무 충만법계 일체제불 (南無 允滿法界 一切諸佛)
나무 화장찰해 무생정토 (南無 華藏刹海 無生淨土)
나무 몽환공화 수월도량 (南無 夢幻空華 水月道場)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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