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자아와 진리의 불국정토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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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6-14 16:39 조회4,730회 댓글0건본문
청정한 자아自我와 진리의 등불로 불국정토佛國淨土 이룩하자
무여 큰스님
우러러 생각하니 부처님 큰 성현께서는
진리의 청정계에서 대비 구름을 일으키시어
몸 아닌 몸을 나투시어 삼천 대천 세계를 두루 덮으시고
법 없는 법을 말씀하시어 감로의 비 내리시사
팔만 사천 온갖 번뇌 남김없이 씻어 주시며
가지가지 방편 열어 항상 중생 건지시니
구하는 바 이루시는 골짜기의 메아리이며
원하는 것 쫓아주심은 맑은 물에 달빛이라
이 까닭에 저희들은 청정대원 이루고자
경건하온 마음으로 크신 은덕 비옵나니
자비 거울 비추시어 굽이 살펴 주옵소서
어지럽고 어려운 곳 연꽃처럼 맑히시고
병이 들어 앓는 이에게 어진 의사 되옵시며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 바른 길을 열으시고
어두운 밤중에는 밝은 횃불 되시오며
가난한 사람에겐 무량 보배 얻게 하여
일체 중생 고루고루 평등하게 거두소서.
『석문의범(釋門儀範)』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4월 초파일, 삼계(三界)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시며 모든 중생들의 자비로운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둡고 혼탁한 이 사바세계에 몸을 나투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참된 진리와 바른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으로 괴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깨달음과 불국정토(佛國淨土)라는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온 인류와 더불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부처님은 왜 어렵고 괴로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업연(業緣)으로 태어나는 중생들과는 달리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법신의 몸인데 무슨 연유로 무상한 인간의 육체를 빌어 또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일까요? 중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일깨우시고자 우리들 곁에 강림하신 것일까요?
이러한 부처님의 오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 수행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크나큰 원력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평생 진리의 가르침을 펴시며 중생제도를 위해 정진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이 오직 한 가지 위대한 목적의 인연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법화경』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중생들이 업보로 인해 태어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시지 않아도 될 세상을 일부러 오셨다(願生)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원력을 세워 스스로 이 땅의 삶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의 크나큰 목적, 그것을 경전에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했던 큰 뜻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경전에서는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개발케 하여 청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이유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계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투셨느니라.”
『법화경』
‘일대사인연’이라고 표현된 부처님 오심의 큰 목적,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이미 얻으신 부처님의 지견, 즉 우주의 참된 진리요, 존재의 참 모습을 밝게 비춰보고 헤아릴 수 있는 큰 지혜를 모든 중생들도 깨닫도록 하여 부처님과 같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증득하신 불지견에 대한 개(開)·시(示)·오(悟)·입(入), 즉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진리의 세계에 함께 들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중생과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마음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참 모습을 체득하시어 부처가 되신 분이고, 중생은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까닭에 중생이라 불리어집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지혜, 그것은 기나긴 생사윤회의 긴 터널로부터 벗어나는 첩경이요,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 영원을 살아가는 명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소 그러한 지혜 광명(智慧光明)을 얻으셨으며, 또한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사셨던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얻으셨던 지혜 광명, 부처님이 사셨던 행복한 삶을 우리 중생도 얻게 하여 잘 살도록 크신 자비와 원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처럼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하시며 수행했듯이 마음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슬기나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보통 깨친다,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 ‘깨친다, 깨닫는다’는 의미는 슬기나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아서 알게 되고, 느끼고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선수행에서는 자기의 본성(本性)을 바로 보아서 참 나, 참 자기를 알아서 부처가 되는 것을 ‘깨쳤다, 깨달았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불자여,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그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고스란히 비춰질 것입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얼굴이 예쁘면 예쁜 대로, 모습이 어질고 착하면 어질고 착한 대로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면서 예쁘게 치장을 하고 애지중지하며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그 모습은 참 모습이 아닙니다. 그 육신의 모습이야말로 허망하고 무상한 모습입니다. 그 외형적인 모습은 이 순간도 변해 가고 있으며 따라서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육신이 본래 모습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본래 모습인가? 화두 중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즉,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본래 주인공은 고작 팔구십 생애의 유한한 육신이 아니라, 끝없는 옛적부터 있어온 무한의 본성이요, 무한의 절대생명입니다. 이 본성은 부처님 마음과 꼭 같습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은 다 부처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중생의 본바탕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한 마음, 둘이 아닌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의 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분별심으로 인해 둘로 셋으로, 갖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본래 둘 셋이 아닌 한 마음을 찾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본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고, 참 자기를 바로 찾는 것입니다.
중생도 본래는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의 지혜와 공덕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요. 실천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진실한 바람은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시인도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그 행복은 산 너머에도 또 그 너머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나그네처럼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마치 어두운 밤길을 헤매듯 찾고 있습니다. 갈 길 몰라 헤매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밝은 등불, 행복의 등불을 밝혀 주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돈과 명예나 권세 등 외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너무 집착하고 빠져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외부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차려 놓고 밥을 먹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있으면 좋은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반찬이 별로 없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기쁘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행복은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자기 마음을 닦아서 진실한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참 자기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더한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우루벨라로 가시는 도중에 숲속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 숲에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부인과 함께 놀러 왔습니다. 그 중의 한 젊은이는 아직 미혼이라 창녀를 동반하여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일하게 노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창녀가 그들의 값나가는 물건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깜짝 놀라 그 창녀를 찾아 숲속을 헤매다가 문득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가서 물었습니다.
“존자이시여, 여기서 한 여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왜 여인을 찾고 있소?”
부처님께서 다시 묻자 그들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하고 그들의 물건을 훔쳐간 여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여인을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이 말씀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밖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백유경』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뜨락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것을 보고 같이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락 전체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잃어 버렸소?”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집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왜 집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밖의 뜨락에서 찾고 있는 거요?”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집안은 어두워서 잘 안 보이고, 이 밖의 뜨락은 훤히 잘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듣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어리석은 이의 모습이 지금의 나는 아닐까요? 우리는 진정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서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격은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을 때 인생의 모든 일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요,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일대사인연을 성취하여 구경에는 가정이나 사회가 살기 좋고 행복한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불국정토는 먼저 여러분의 가정에서 시작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집이 낡고 비좁고 시설물이 불편하더라도 가족 상호간에 항상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질시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은 모든 행복의 원천입니다. 가정이 안락하면 세상이 안락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에 시달리더라도 가정에서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면 마침내 성공하고 출세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가정과 사회를 불국정토로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부처님 말씀 따라 불국정토 건설에 열성을 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다짐해야겠습니다.
첫째, 우리 불자들은 마음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심이 청정(淸淨)하면 국토(國土)가 청정하다”고 하셨습니다. 불자가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 끗이 해야 합니다. 한 마음이 깨끗해지면 불토(佛土)도 자연히 깨끗해집니다.
한 마음이란 본래의 마음, 불성(佛性)을 뜻합니다. 우리의 근본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 및 국가까지도 살기 좋은 국토가 됩니다. 불국정토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향입니다. 가정은 행복하고 사회는 건강하며 천하가 태평하여 만물이 안락한 정토를 일컫습니다.
우리 몸의 건강이 마음에서 오듯이 행복한 가정, 건전한 사회도 우리들의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은 뛰어난 화가와 같아서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한 마음(一心)이 될 때 가정도 살 만하고, 사회도 밝아지고 나라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룹니다.
사람들이 불행하고 가정과 사회가 어렵고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어두워져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두운 마음을 밝히십시오. 부처님은 마음을 밝혀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참 나를 찾으라고 입이 아프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자답게 수행해서 마음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그래야만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며 내 집이 즐거운 집이요, 늘 대하는 식구가 부처인 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정토를 건설하려면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의 가치는 삼매경(三昧境)에 들어봐야 진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반쪽 인생도 못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환한 얼굴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환한 얼굴을 합시다. 환한 얼굴이란 밝은 얼굴 미소 띤 얼굴을 말합니다. 밝고 환한 얼굴은 남의 기분을 좋게 하고,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늘 밝은 얼굴, 미소짓는 얼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얼굴을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라고 합니다. 보시 중에는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 즉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습니다. 그 중에 화안열색시도 중요한 보시 중의 하나입니다. 불자는 부드럽고 미소짓는 얼굴로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많이 알고, 항상 입으로 불자라고 이야기하며 다녀도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한 얼굴과 미소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정토로 만드는 좋은 약이며, 때로는 언설이 주지 못하는 위안까지도 선물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경제가 어렵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하고 혼탁한 사회에서 정신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치료법이 될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가정과 직장이 불안하며, 피해망상이나 노이로제에 신음하는 이에게 존엄한 인간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심어주는 것이 응당 보살의 할 바인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에 침잠하고, 친족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지며, 물욕과 향락에 탐닉하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미소는 더 없는 처방전이 될 것입니다.
환한 미소는 집안의 꽃이요, 밝은 얼굴은 사회의 빛입니다. 오늘 환한 얼굴을 한 사람은 최후에도 웃음짓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말로써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라면 말로써 정토를 건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 중에 애어섭(愛語)이 있습니다. 사섭법(四法)의 하나로서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중생을 섭수하여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자는 사랑스런 말로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잘하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말을 했다 하면 진실한 말을 해야 하고 남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르지 않거나 뜻이 없거나 유익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고 언제나 법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거짓말이나 이간질 하는 말,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따위는 말아야 하며, 험담이나 악담은 절대 말아야 합니다.
『법구경(法句經)』의 말씀처럼 “오로지 입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 같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 중생의 불행은 그 입에서 생겨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라는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언어를 매개체로 삼아 우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면서도 말이 가진 한계를 느끼지 않고 전능의 권위를 부여하거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온갖 정보의 홍수를 가져 왔으나 진실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드뭅니다. 오히려 유언비어(流言蜚語)가 횡행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는 것은 다반사(茶飯事)가 되고 있습니다.
불교인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자세를 굳게 가져야겠습니다. 아름다운 말로써 폭력적인 언어를 정화해야 하며,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의(身口意)의 삼밀(三密)에서 구밀(口密)이 바로 이 뜻입니다.
불자는 진실한 말이 가득 찬 세상, 서로 믿을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네 번째, 몸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라면 항상 보시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깨끗한 마음을 내어 법이나 재물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재물이나 법이 없으면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라도 해야 하며, 마음으로나마 베풀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인과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빈궁한 사람이 재물을 보시하지 못하더라도 남이 보시할 때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기뻐하는 복덕이 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으며, 『근본설일체유부』에서는 “보시하면 복이 늘어나고, 원수는 없어지네. 선으로 말미암아 악이 제거되니 미혹(迷惑)이 다하여 열반을 증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을 섭수하여 교화하는 보시는 대행(大行)이라 나고 죽는 괴로움이 있는 사바의 이 언덕에서 불생불멸하는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배와 같으므로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보시만 잘해도 피안(彼岸)의 저 언덕에 이르러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육바라밀(六波羅蜜) 중에서 보시바라밀을 가장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나의 육신이나 능력을 남을 위하여 쓸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보시와 봉사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심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내 이웃들과 내가 가진 육신의 힘과 능력을 나눌 때 불국정토는 건설됩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자신의 직업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는 자기의 직업으로 불국정토를 세워가야 합니다.
직업은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 되고, 정토를 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사를 잘 수행함으로써 정토로 가는 지름길이 되게 하며, 사업가는 자기 사업을 잘 성취함으로써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돕는 일이 되게 하며, 군인은 국토방위를 잘 이행함으로써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며, 요식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돈벌이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고 좋은 음식을 베풀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정토로 가는 길입니다.
직업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역할을 나누어서 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공존하는 사회’ 이것이 불교의 직업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에 귀천을 가리기에 앞서 자기가 맡은 직업에 긍지와 자부를 느끼면서 열심히 일합시다. 각기 다른 직업이지만 남을 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할 때 불국정토가 건설 될 것입니다.
직업이 즐겁다면 인생은 극락이 될 것이고, 일이 괴롭다면 그것이 곧 지옥일 것입니다. 백년을 살 것 같이 직업에 종사하고, 내일 죽을 것 같이 수행합시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나투신 뜻은 오늘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스스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다함께 불국토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깊은 뜻을 잘 알아서 때로는 예쁜 마음으로, 화사한 얼굴로, 달콤한 말로, 자기를 희생하는 육신으로, 남다른 직업의식으로 불사를 성취해야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생각이나 평범한 행위들도 대승적인 보살심을 가지고 일하고 수행할 때 자연스럽게 선행과 덕행이 쌓여 불국정토가 가까워질 것입니다.
보살도는 정성을 다하는 마음,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히신 생명의 참모습, 인간존중의 정신과 평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모든 이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대하는 사람들과 모든 존재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불국토 건설 불사에 동참하는 진정한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심(一心)이 청정하면 국토(國土)가 청정하고
일법(一法)을 깨치면 만법(萬法)을 깨치고
하나를 증득(證得)하면 전부를 증득한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무여 큰스님
우러러 생각하니 부처님 큰 성현께서는
진리의 청정계에서 대비 구름을 일으키시어
몸 아닌 몸을 나투시어 삼천 대천 세계를 두루 덮으시고
법 없는 법을 말씀하시어 감로의 비 내리시사
팔만 사천 온갖 번뇌 남김없이 씻어 주시며
가지가지 방편 열어 항상 중생 건지시니
구하는 바 이루시는 골짜기의 메아리이며
원하는 것 쫓아주심은 맑은 물에 달빛이라
이 까닭에 저희들은 청정대원 이루고자
경건하온 마음으로 크신 은덕 비옵나니
자비 거울 비추시어 굽이 살펴 주옵소서
어지럽고 어려운 곳 연꽃처럼 맑히시고
병이 들어 앓는 이에게 어진 의사 되옵시며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 바른 길을 열으시고
어두운 밤중에는 밝은 횃불 되시오며
가난한 사람에겐 무량 보배 얻게 하여
일체 중생 고루고루 평등하게 거두소서.
『석문의범(釋門儀範)』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4월 초파일, 삼계(三界)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시며 모든 중생들의 자비로운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둡고 혼탁한 이 사바세계에 몸을 나투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참된 진리와 바른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으로 괴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깨달음과 불국정토(佛國淨土)라는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온 인류와 더불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부처님은 왜 어렵고 괴로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업연(業緣)으로 태어나는 중생들과는 달리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법신의 몸인데 무슨 연유로 무상한 인간의 육체를 빌어 또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일까요? 중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일깨우시고자 우리들 곁에 강림하신 것일까요?
이러한 부처님의 오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 수행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크나큰 원력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평생 진리의 가르침을 펴시며 중생제도를 위해 정진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이 오직 한 가지 위대한 목적의 인연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법화경』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중생들이 업보로 인해 태어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시지 않아도 될 세상을 일부러 오셨다(願生)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원력을 세워 스스로 이 땅의 삶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의 크나큰 목적, 그것을 경전에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했던 큰 뜻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경전에서는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개발케 하여 청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이유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계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투셨느니라.”
『법화경』
‘일대사인연’이라고 표현된 부처님 오심의 큰 목적,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이미 얻으신 부처님의 지견, 즉 우주의 참된 진리요, 존재의 참 모습을 밝게 비춰보고 헤아릴 수 있는 큰 지혜를 모든 중생들도 깨닫도록 하여 부처님과 같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증득하신 불지견에 대한 개(開)·시(示)·오(悟)·입(入), 즉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진리의 세계에 함께 들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중생과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마음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참 모습을 체득하시어 부처가 되신 분이고, 중생은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까닭에 중생이라 불리어집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지혜, 그것은 기나긴 생사윤회의 긴 터널로부터 벗어나는 첩경이요,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 영원을 살아가는 명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소 그러한 지혜 광명(智慧光明)을 얻으셨으며, 또한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사셨던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얻으셨던 지혜 광명, 부처님이 사셨던 행복한 삶을 우리 중생도 얻게 하여 잘 살도록 크신 자비와 원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처럼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하시며 수행했듯이 마음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슬기나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보통 깨친다,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 ‘깨친다, 깨닫는다’는 의미는 슬기나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아서 알게 되고, 느끼고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선수행에서는 자기의 본성(本性)을 바로 보아서 참 나, 참 자기를 알아서 부처가 되는 것을 ‘깨쳤다, 깨달았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불자여,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그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고스란히 비춰질 것입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얼굴이 예쁘면 예쁜 대로, 모습이 어질고 착하면 어질고 착한 대로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면서 예쁘게 치장을 하고 애지중지하며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그 모습은 참 모습이 아닙니다. 그 육신의 모습이야말로 허망하고 무상한 모습입니다. 그 외형적인 모습은 이 순간도 변해 가고 있으며 따라서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육신이 본래 모습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본래 모습인가? 화두 중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즉,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본래 주인공은 고작 팔구십 생애의 유한한 육신이 아니라, 끝없는 옛적부터 있어온 무한의 본성이요, 무한의 절대생명입니다. 이 본성은 부처님 마음과 꼭 같습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은 다 부처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중생의 본바탕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한 마음, 둘이 아닌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의 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분별심으로 인해 둘로 셋으로, 갖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본래 둘 셋이 아닌 한 마음을 찾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본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고, 참 자기를 바로 찾는 것입니다.
중생도 본래는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의 지혜와 공덕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요. 실천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진실한 바람은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시인도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그 행복은 산 너머에도 또 그 너머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나그네처럼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마치 어두운 밤길을 헤매듯 찾고 있습니다. 갈 길 몰라 헤매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밝은 등불, 행복의 등불을 밝혀 주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돈과 명예나 권세 등 외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너무 집착하고 빠져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외부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차려 놓고 밥을 먹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있으면 좋은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반찬이 별로 없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기쁘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행복은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자기 마음을 닦아서 진실한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참 자기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더한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우루벨라로 가시는 도중에 숲속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 숲에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부인과 함께 놀러 왔습니다. 그 중의 한 젊은이는 아직 미혼이라 창녀를 동반하여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일하게 노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창녀가 그들의 값나가는 물건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깜짝 놀라 그 창녀를 찾아 숲속을 헤매다가 문득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가서 물었습니다.
“존자이시여, 여기서 한 여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왜 여인을 찾고 있소?”
부처님께서 다시 묻자 그들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하고 그들의 물건을 훔쳐간 여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여인을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이 말씀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밖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백유경』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뜨락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것을 보고 같이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락 전체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잃어 버렸소?”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집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왜 집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밖의 뜨락에서 찾고 있는 거요?”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집안은 어두워서 잘 안 보이고, 이 밖의 뜨락은 훤히 잘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듣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어리석은 이의 모습이 지금의 나는 아닐까요? 우리는 진정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서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격은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을 때 인생의 모든 일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요,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일대사인연을 성취하여 구경에는 가정이나 사회가 살기 좋고 행복한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불국정토는 먼저 여러분의 가정에서 시작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집이 낡고 비좁고 시설물이 불편하더라도 가족 상호간에 항상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질시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은 모든 행복의 원천입니다. 가정이 안락하면 세상이 안락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에 시달리더라도 가정에서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면 마침내 성공하고 출세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가정과 사회를 불국정토로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부처님 말씀 따라 불국정토 건설에 열성을 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다짐해야겠습니다.
첫째, 우리 불자들은 마음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심이 청정(淸淨)하면 국토(國土)가 청정하다”고 하셨습니다. 불자가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 끗이 해야 합니다. 한 마음이 깨끗해지면 불토(佛土)도 자연히 깨끗해집니다.
한 마음이란 본래의 마음, 불성(佛性)을 뜻합니다. 우리의 근본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 및 국가까지도 살기 좋은 국토가 됩니다. 불국정토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향입니다. 가정은 행복하고 사회는 건강하며 천하가 태평하여 만물이 안락한 정토를 일컫습니다.
우리 몸의 건강이 마음에서 오듯이 행복한 가정, 건전한 사회도 우리들의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은 뛰어난 화가와 같아서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한 마음(一心)이 될 때 가정도 살 만하고, 사회도 밝아지고 나라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룹니다.
사람들이 불행하고 가정과 사회가 어렵고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어두워져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두운 마음을 밝히십시오. 부처님은 마음을 밝혀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참 나를 찾으라고 입이 아프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자답게 수행해서 마음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그래야만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며 내 집이 즐거운 집이요, 늘 대하는 식구가 부처인 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정토를 건설하려면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의 가치는 삼매경(三昧境)에 들어봐야 진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반쪽 인생도 못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환한 얼굴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환한 얼굴을 합시다. 환한 얼굴이란 밝은 얼굴 미소 띤 얼굴을 말합니다. 밝고 환한 얼굴은 남의 기분을 좋게 하고,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늘 밝은 얼굴, 미소짓는 얼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얼굴을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라고 합니다. 보시 중에는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 즉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습니다. 그 중에 화안열색시도 중요한 보시 중의 하나입니다. 불자는 부드럽고 미소짓는 얼굴로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많이 알고, 항상 입으로 불자라고 이야기하며 다녀도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한 얼굴과 미소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정토로 만드는 좋은 약이며, 때로는 언설이 주지 못하는 위안까지도 선물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경제가 어렵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하고 혼탁한 사회에서 정신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치료법이 될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가정과 직장이 불안하며, 피해망상이나 노이로제에 신음하는 이에게 존엄한 인간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심어주는 것이 응당 보살의 할 바인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에 침잠하고, 친족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지며, 물욕과 향락에 탐닉하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미소는 더 없는 처방전이 될 것입니다.
환한 미소는 집안의 꽃이요, 밝은 얼굴은 사회의 빛입니다. 오늘 환한 얼굴을 한 사람은 최후에도 웃음짓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말로써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라면 말로써 정토를 건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 중에 애어섭(愛語)이 있습니다. 사섭법(四法)의 하나로서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중생을 섭수하여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자는 사랑스런 말로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잘하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말을 했다 하면 진실한 말을 해야 하고 남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르지 않거나 뜻이 없거나 유익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고 언제나 법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거짓말이나 이간질 하는 말,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따위는 말아야 하며, 험담이나 악담은 절대 말아야 합니다.
『법구경(法句經)』의 말씀처럼 “오로지 입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 같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 중생의 불행은 그 입에서 생겨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라는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언어를 매개체로 삼아 우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면서도 말이 가진 한계를 느끼지 않고 전능의 권위를 부여하거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온갖 정보의 홍수를 가져 왔으나 진실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드뭅니다. 오히려 유언비어(流言蜚語)가 횡행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는 것은 다반사(茶飯事)가 되고 있습니다.
불교인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자세를 굳게 가져야겠습니다. 아름다운 말로써 폭력적인 언어를 정화해야 하며,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의(身口意)의 삼밀(三密)에서 구밀(口密)이 바로 이 뜻입니다.
불자는 진실한 말이 가득 찬 세상, 서로 믿을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네 번째, 몸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라면 항상 보시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깨끗한 마음을 내어 법이나 재물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재물이나 법이 없으면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라도 해야 하며, 마음으로나마 베풀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인과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빈궁한 사람이 재물을 보시하지 못하더라도 남이 보시할 때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기뻐하는 복덕이 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으며, 『근본설일체유부』에서는 “보시하면 복이 늘어나고, 원수는 없어지네. 선으로 말미암아 악이 제거되니 미혹(迷惑)이 다하여 열반을 증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을 섭수하여 교화하는 보시는 대행(大行)이라 나고 죽는 괴로움이 있는 사바의 이 언덕에서 불생불멸하는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배와 같으므로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보시만 잘해도 피안(彼岸)의 저 언덕에 이르러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육바라밀(六波羅蜜) 중에서 보시바라밀을 가장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나의 육신이나 능력을 남을 위하여 쓸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보시와 봉사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심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내 이웃들과 내가 가진 육신의 힘과 능력을 나눌 때 불국정토는 건설됩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자신의 직업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불자는 자기의 직업으로 불국정토를 세워가야 합니다.
직업은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 되고, 정토를 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사를 잘 수행함으로써 정토로 가는 지름길이 되게 하며, 사업가는 자기 사업을 잘 성취함으로써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돕는 일이 되게 하며, 군인은 국토방위를 잘 이행함으로써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며, 요식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돈벌이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고 좋은 음식을 베풀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정토로 가는 길입니다.
직업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역할을 나누어서 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공존하는 사회’ 이것이 불교의 직업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에 귀천을 가리기에 앞서 자기가 맡은 직업에 긍지와 자부를 느끼면서 열심히 일합시다. 각기 다른 직업이지만 남을 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할 때 불국정토가 건설 될 것입니다.
직업이 즐겁다면 인생은 극락이 될 것이고, 일이 괴롭다면 그것이 곧 지옥일 것입니다. 백년을 살 것 같이 직업에 종사하고, 내일 죽을 것 같이 수행합시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나투신 뜻은 오늘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스스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다함께 불국토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깊은 뜻을 잘 알아서 때로는 예쁜 마음으로, 화사한 얼굴로, 달콤한 말로, 자기를 희생하는 육신으로, 남다른 직업의식으로 불사를 성취해야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생각이나 평범한 행위들도 대승적인 보살심을 가지고 일하고 수행할 때 자연스럽게 선행과 덕행이 쌓여 불국정토가 가까워질 것입니다.
보살도는 정성을 다하는 마음,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히신 생명의 참모습, 인간존중의 정신과 평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모든 이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대하는 사람들과 모든 존재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불국토 건설 불사에 동참하는 진정한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심(一心)이 청정하면 국토(國土)가 청정하고
일법(一法)을 깨치면 만법(萬法)을 깨치고
하나를 증득(證得)하면 전부를 증득한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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