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2010-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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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2-25 15:28 조회4,251회 댓글0건본문
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불기 2554년 경인년(庚寅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불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부처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하시는 일이 잘 되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십시오.
금년은 민속 12간지로 호랑이의 해입니다. 특히 올해는 60년만에 맞는 백호(白虎)띠라고 해서 사람들의 기대가 자못 크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우리 한국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해왔습니다. 산이 많은 한반도에는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산다고 해서 ‘호랑이 나라’로 불렸습니다.
호랑이는 영물(靈物)로서 오래전부터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존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게 하는 동물이지만 그 위풍당당한 태도는 때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감탄을 낳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용맹스럽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힘차고 거침없는 동물입니다. 육중한 앞발을 한번 휘두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딥니다. 호시탐탐(虎視耽耽)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그 형형한 눈빛으로 먹잇감을 단숨에 처치하는 지혜는 외경심까지 불러일으킵니다.
또 호랑이는 이런 대단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새끼를 낳아 몇 개월쯤 지나면 어린 새끼를 데리고 언덕으로 간답니다. 어미 호랑이는 언덕 위에서 새끼들을 발로 툭툭 차서 떨어뜨린 다음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걸어갑니다. 어미를 따라오는 놈은 키우고 못 따라오는 놈은 버린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동물입니다. 맹수 새끼는 맹수답게 키워야 살아갈 수 있기에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처럼 유별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살만 되면 자기 영역을 확보하여 어미 호랑이도 얼씬 못하게 하고 살아간답니다.
이런 힘과 명예를 상징하는 호랑이의 기운을 받고 나서일까, 호랑이띠의 인물 중에는 각 분야에서 굵고 단호한 획을 그은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호랑이띠의 사람들은 의리와 정의를 중요시 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적으로 밀어붙이고, 호랑이처럼 우두머리의 자리를 지향하면서도 품위를 잃거나 억척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인년 호랑이해를 맞이하여 호랑이의 특출한 점과 호랑이띠의 장점을 잘 살펴 앞으로 살아가시는데 경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새해 법문은 ‘믿고 사는 사회가 되도록 하자’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장엄경(大莊嚴經)』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공덕은 믿음을 그 사자(使者)로 한다.
그러기에 보물 중에서 믿음이 으뜸이다.”
여기서 ‘사자’는 심부름꾼이요, 중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말합니다. 부처님과 중생 사이에서 심부름꾼이 되고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살다 보면 수행이든 생활이든 수많은 공덕을 쌓게 되는데 그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믿지 않으면 어떠한 공덕도 쌓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보물 중에서 어떤 보물보다도 최상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설사 무엇을 얻는다 해도 쉽게 나가게 됩니다.
십여 년 전 갈브레이드라는 저명한 경제학자가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다’라는 말을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말이 그때보다 요즘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고 나면 무슨 일이 있을지, 내일 또 어떤 사건이 터지지 않을까 두려움과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심이 있고 바른 생각을 하는 분이라면 우리 사회나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밤잠을 설칠 것이며, 인류의 장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여 눈가에 이슬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고, 견성도인(見性道人)이라면 늘 삿갓을 쓰고 다니며 ‘하늘이 부 끄러워, 하늘이 부끄러워’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요즘 나라 안은 세종시 문제로 온통 화제가 되고 전국이 떠들썩합니다. 세종대왕께서 지하에서 들으시면 못난 후손들이 당신 이름을 더럽힌다고 화는 못내시고 안절부절 수라상을 못 받으실 것입니다.
세종시에 대한 구상은 애초부터 없었어야 할 계획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어디까지나 백년대계를 위하여 사심없이 대승적으로 계획했어야 하거늘 소아적인 생각으로 저질러 놓았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저질러 놓았으면 수습이라도 잘 하려고 노력하면 좋으련만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해당 지역출신이냐, 타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 천사람 만사람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두우니 국가사업이란 말이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그럼 왜 이런 못난 짓을 해서 선량한 국민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서 기인합니다.
삼독심이란 우리 인간이 일으키는 탐욕(貪慾)과 분노(忿怒)와 어리석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의 번뇌가 어찌나 독하든지 사람을 죽이는 독사나 독룡(毒龍)과 같다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욕이란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때로는 정도를 잃고 때로는 이성까지 잃으며 탐애하고 탐착하며 온갖 욕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란 탐욕심을 내서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남을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불끈 불끈 내서 괴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음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의 이치나 도리에 어둡고, 사물의 진상이나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지 못하여 비틀거리며 괴롭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삼독심으로 근본 번뇌를 일으키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리하여 근대 고승인 만공(滿空)선사께서는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진치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삼독심을 일으켜 만족할 줄 모르고 번뇌를 일으키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여 폭언을 하고 본의 아니게 두 말로 남을 괴롭히기도 하고, 거짓말로 남을 속여 낭패를 보게도 합니다.
불자라면 이런 망언(妄言)은 하지 않아야 하며, 바른 말, 진실한 말만 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바르고 깨끗한 신용사회가 되도록 해야겠습 니다.
불자라면 거짓된 말은 하지 맙시다.
거짓말이란 거짓이 말 속에 들어 있고 허황된 말을 일컫습니다. 살다가 보면 거짓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속담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듯이 불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늘 바른 말을 하고 진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허황되고 거짓된 말을 예사롭게 하면서 얼굴도 안 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어른이며, 속이는 말을 하시지 않는 어른이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을 따라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자성(自性)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오로지 말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중생이 그 입에서 생겨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지키는 길이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조심하십시오. 언젠가는 내 몸을 도끼와 칼처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거짓말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망언(妄言)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바른 법을 그른 법이라고 하고, 그른 법을 바른 법이라 설명하는 등 마음을 어겨서 하는 말입니다.
둘째, 기어(綺語)입니다. 비단결처럼 번지르르하게 하는 말입니다. 뜻도 없고 이익도 없는 말로서 남이 듣기 좋게 화사하게 하는 말입니다.
셋째, 양설(兩舌)입니다. 두 가지 말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 둘 사이를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넷째, 악구(惡口)입니다. 추악한 말로서 남을 욕하고 분노케 하며 저주하는 말로서 상대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는 등의 폭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벼락 맞아 죽어라, 교통사고라도 나거라’와 같은 말입니다.
옛 어른 말씀에 “거짓말로 속이는 것은 악당의 본질이다”하고 어떤 현인은 “거짓말은 지옥에 이르는 길을 다 간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거짓말이나 하는 악당이 되어 지옥문전에 이르지 않아야 되고 구린내 나는 입은 절대 갖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거짓말로 남에게 원한을 사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법구비유경』에 이런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왕사성(王舍城)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새끼를 낳은 사나운 암소에게 떠받쳐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소 임자는 겁이 나서 그날로 소를 팔아 넘겼습니다. 소를 산 사람은 물을 먹이기 위하여 물가로 소를 끌고 가다가 뒤에서 소가 떠받는 바람에 또 죽고 말았습니다.
소를 샀다가 아버지 목숨을 잃은 아들은 분에 못 이겨 그 소를 잡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소의 고기에 입을 댈 수가 없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습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그 소머리를 사서 짊어지고 가다가 길가 나무 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줄에 매단 소머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잠깐 잠이 들었던 이 사람은 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소 한 마리가 연달아 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왕사성의 빔비사라왕은 괴이하게 여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한 마리의 암소가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알고 싶습니다.”
“죄의 감응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느니라. 오랜 옛날에 세 사람의 상인이 이웃나라로 장사하러 가다 한 외로운 노파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방값과 식대를 넉넉하게 치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초의 말과는 달리 며칠 동안 편안히 숙식을 했으면서도 노파를 만만하게 보고 떠나올 때는 값도 치르지 않은 채 몰래 빠져 나오고 말았다. 노파가 밖에서 돌아와 보니 장사꾼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노파는 수십 리 길을 쫓아간 끝에 겨우 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노파가 그 동안의 숙식비를 달라고 하자 세 명의 장사꾼은 화를 내며 아침에 이미 돈을 주었는데 무슨 돈을 달라 하느냐고 딱 잡아떼었다.
노파는 속은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이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나는 지금 힘이 없어 너희들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생에 기필코 너희들을 만나 이 원한을 갚아 줄 것이다.”
이렇게 저주한 노파가 바로 오늘의 암소이고, 소에게 떠받쳐 죽은 세 사람은 숙식비를 떼어먹고 달아난 그 때의 장사치들이니라."
소름 끼치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감응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물체의 그림자 같이 소리의 메아리같이 털끝도 어김이 없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예사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사람은 신의가 있어야 하고 사회는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나 도덕을 갖추는 기본이 됩니다. 믿음 없이 어떤 성공이나 공덕도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지역간, 계층간, 노사간, 종교간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고 질시하고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한 두 마디로 이야기 할 순 없지만 그간 정치가, 행정관료, 교육자, 재벌, 종교인 등 소위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전긍긍하며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없었고, 사회를 잘 다스리고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한국 국민들의 일대 의식 전환이 혁신적으로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신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정치가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정치가들의 비리가 터져 나오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냈습니다. 한강에 정치가와 소상인이 빠지면 누구를 먼저 건져 주겠느냐는 질문에 모두들 정치가를 지목하더랍니다.
정치가를 먼저 건지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자, ‘투자가치가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등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정답은 “한강물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시 바삐 정치가부터 꺼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둘째는 기독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목사님이 목숨이 다해 천국(天國)에 가게 되었습니다. 막 하늘 문에 다다라 앞쪽을 보자 그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천국 국민들과 한창 담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알아본 하나님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하고 반갑게 맞이하더랍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도 목사님만을 편애한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정색을 하고 해명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내 임기 중에 처음 보는 목사님인데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더랍니다.
지독한 독설입니다. 신도들에게 천국을 가라고 열심히 외치는 목사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 임기 중에 목사를 처음 본다고 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스운 것이 아니고 심각한 것입니다. 세상이 썩어도 지키겠노라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는 목사의 신뢰도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희화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스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수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법사 스님께서 극락세계에 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온통 아름다운 꽃과 새, 향기 그윽한 물, 보기에도 아름다운 보석들로 장엄된 극락세계를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는 신도들에게 물었습니다.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느냐?” 모두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법사 스님은 의기양양하게 “밖에 극락행 버스를 예약해 놓았으니 모두들 어서 빨리 타시오. 내 바로 극락으로 인도해 드리리다.” 하시고 버스에 올라탈 것을 권했는데 정작 타는 분이 한 사람도 없더랍니다.
웬일일까요? 극락이 아무리 좋아도 이승만 못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스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불가에서 스님은 삼보의 하나로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수행에서는 스승의 일언반구도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라서 목숨 바쳐 섬기라고 합니다. 스승의 존재가 그만큼 지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신의 대상이 성직자나 수행자에까지도 미치는 세상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고쳐가야 합니다. 믿음만 확실하면 어떤 어려움도 고쳐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기독교를 믿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느 마을에 삼년이 넘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왠지 다른 해보다 더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땅이 갈라지고 우물이 마르고 짐승들도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의욕을 잃고 제일 중요한 신앙도 잃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비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자 사람들을 교회에 모았습니다.
기우제(祈雨祭)가 열렸던 것입니다. 마을에 신도란 신도는 다 모여 정성껏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정성이 통했는지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도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춤을 췄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산을 안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하자니까 따라한 것일 뿐, 꼭 올 거라는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예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여섯 살짜리 꼬마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웃으며 빨간 우산을 펴들고 “엄마 이리 빨리 오세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 소녀는 틀림없이 비가 올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불교를 생태적으로 믿는 아이 이야기입니다.
설악산 자락 깊은 골 모퉁이에 관음암(觀音菴)이라는 암자가 있었습 니다.
이 관음암에는 젊은 스님과 네살박이 남자아이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아이는 스님의 장조카로 큰 형님 내외가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는 바람에 스님이 맡아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산속의 하루는 해가 짧은 것처럼 여름도 짧고 가을은 더 짧았습니다.
어느날 스님은 겨우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산 아래 마을에 탁발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탁발을 떠나기 전에 스님은 조카를 불러 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개야, 삼촌이 맛있는 거 많이 가져 올 테니까 배가 고프면 관세음 엄마를 불러라. 그러면 관세음 엄마가 먹을 것을 주실 거야. 잠이 와도 관세음 엄마를 부르고 방이 차도 관세음 엄마만 불러라. 알았지?”
조카를 안심시킨 스님은 잰걸음으로 산을 내려와 겨우내 먹을 양식을 장만하느라 날이 저물어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가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스님은 창 밖을 보아도 날이 밝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니 눈이 지붕을 덮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큰 일이 났습니다. 스님은 조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허둥지둥 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고 긴 겨울 한 철을 온갖 걱정을 다 하다가 때로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서성거리기도 하다가 하루 이틀 눈 녹기를 기다리다 그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눈이 녹은 봄이 오자 스님은 서둘러 산길을 겨우 올랐습니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스님의 머릿속에는 먹지 못해 죽어갔을 조카의 원망어린 눈동자가 맴돌았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자 관음암의 산문이 보이고, 아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대웅전 앞마당에 조카로 보이는 동자가 이리저리 뛰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한편으로는 삼촌을 기다리다 죽어 저승에도 가지 못하는 혼이다 싶어 불쌍한 마음이 교차되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산문을 열고 들어서는 스님에게 꼬마아이가 달려와 안겼습니다.
“삼촌~”
“으응.”
반가움과 섬뜩함이 겹치는 마음으로 스님은 물었습니다.
“잘... 잘 있었니?”
스님의 두 눈에는 어느 사이 눈물이 맺혔습니다.
“응, 그런데 금방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
“으응, 좀..”
“그런데 밥은 먹었니?”
“응, 관세음 엄마가 맛있는 밥 주었다. 아까도 같이 놀았는데 어디 갔지?”
하면서 관세음 엄마를 찾는다고 두리번거렸습니다. 조카를 따라 법당으로 간 스님은 ‘아!’ 법당 벽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탱화 주변 흙이 뜯겨진 것을 보고 저절로 손을 모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절을 하면서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말을 믿어준 조카가 대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본보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절 이름을 다섯 살 절 즉, 오세암(五歲庵)이라고 바꿨습니다. 네 살짜리 조카가 굳건한 믿음으로 쌀 한 톨 안 먹고 한 겨울을 탈 없이 보내 다섯 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도 오세암을 참배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기쁨의 미소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때로는 불가사의한 일도 일어나고 기적도 일으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떠한 공덕도 쌓을 수 있습니다. 어른도 쉽지 않은 믿음이 어린이에게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티 없이 맑은 어린이가 가장 부처님과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마하연론(摩詞衍論)』에는 신심의 공덕을 신십종의(信十種義)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열 가지는 징(澄), 결정(決定), 환희(歡喜), 무염(無厭), 수희(隨喜), 존중(尊重), 수순(隨順), 찬탄(讚歎), 불괴(不壞), 애락(愛樂)이 그것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징(澄), 곧 마음을 맑게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번뇌망상은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져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 믿음은 결정(決定)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큰 일을 할 때는 분명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순수하게도 하고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하기 때문에 망설이거나 어떤 번뇌도 없이 분명한 결정을 내리게 하여 일을 확실하게 추진하게 합니다.
셋째, 믿음은 환희(歡喜)를 가져옵니다. 확고한 마음은 온갖 근심과 번민을 제거해 주고 희망과 포부로 설레게 합니다. 그러면 항상 웃으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은 무염(無厭), 싫증을 없애줍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삶이 싫어져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할 수 있으며, 확신 속에서 싫증 없이 꾸준하게 노력하다 보면 남 다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믿음은 수희(隨喜), 기쁨이 따릅니다. 믿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고 불법을 믿고 이웃을 믿으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믿으면 부처님 세계가 가깝고 극락정토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믿음은 남을 존중할 줄 알게 됩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거만하고 분수에 넘쳐서 박복한 사람이 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하심(下心)하고 겸손하여 덕(德)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일곱째, 믿음은 수순(隨順)하는 마음을 길러줍니다. 사람은 때로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의 뜻을 따르고, 남의 가르침을 따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고 쉬어야 큰 것을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수순하는 마음이 없으면 딱딱하고 삭막한 사람이 됩니다.
여덟째, 믿음은 찬탄(讚歎)을 낳습니다. 남의 것을 찬탄하고 남의 일에 감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한 믿음을 가지면 불보살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찬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남에게 찬탄을 아낌없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아홉째, 믿음은 결코 불괴(不壞),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도를 닦고 큰 일을 하시는 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굳건한 믿음의 바탕에서만 흔들림 없이 정진할 수 있고 마침내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수행은 한갓 수고로울 뿐입니다. 믿음은 좌절하지 않게 합니다.
열째, 믿음은 애락(愛樂)을 가져옵니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내서 열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성공하게 되며 즐거움이 올 것입니다.
이 『마하연론』의 가르침처럼 믿음은 우리를 맑고 환희롭게 해줄 것이며, 기쁨과 존중과 찬탄 속에서 자비롭게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또한 흔들리거나 싫증을 내거나 무너짐이 없이 살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을 잘 갖추고 지니면 우리의 삶은 향상되고 수행은 자연스럽게 깊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공덕이 많은 믿음, 나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의 배를 타고 깨달음의 긴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옛부터 우리 불교는 국가나 사회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힘을 발휘했습니다. 신라 때는 삼국통일(三國統一)하는데 역군이 되었으며, 고려 때는 거란족의 침입을 막는 혁혁한 공로를 세워 고려왕조의 기반을 확고히 했습니다. 조선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전국에 승군을 모집하여 곳곳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 불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소납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라고 법문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
‘진정한 웰빙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대명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가장 시급한 것은 사회구성원인 국민 각자가 신뢰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信爲道源功德母)”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회에 나갈 때 우산을 준비했던 소녀처럼, 배고프고 졸릴 때 의심 없이 관세음 엄마를 불러 겨울 석 달 동안을 먹지 않고도 살아 있었던 믿음의 화신 다섯 살박이처럼, 티 없이 맑고 깊은 믿음을 가져 봅시다.
‘서로 믿고 사는 사회’를 위하여 아래 열 가지를 지켜봅시다.
첫째,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자.
둘째, 남을 칭찬하고 헐뜯지 말자.
셋째, 웃는 얼굴로 마음을 따스하게 대하자.
넷째,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하지 말자.
다섯째, 작은 것이라도 베푸는 마음을 갖자.
여섯째,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자.
일곱째, 스스로 낮추고 겸손함을 잃지 말자.
여덟째,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자기 잘못을 참회(懺悔)하자.
아홉째, 작은 은혜라도 감사할 줄 알자.
열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자.
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
복덕은 바닷물과 같이 밀려올 것이며,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가득할 것이고,
찬탄하는 소리에 삼악도(三惡道)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불기 2554년 경인년(庚寅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불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부처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하시는 일이 잘 되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십시오.
금년은 민속 12간지로 호랑이의 해입니다. 특히 올해는 60년만에 맞는 백호(白虎)띠라고 해서 사람들의 기대가 자못 크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우리 한국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해왔습니다. 산이 많은 한반도에는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산다고 해서 ‘호랑이 나라’로 불렸습니다.
호랑이는 영물(靈物)로서 오래전부터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존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게 하는 동물이지만 그 위풍당당한 태도는 때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감탄을 낳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용맹스럽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힘차고 거침없는 동물입니다. 육중한 앞발을 한번 휘두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딥니다. 호시탐탐(虎視耽耽)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그 형형한 눈빛으로 먹잇감을 단숨에 처치하는 지혜는 외경심까지 불러일으킵니다.
또 호랑이는 이런 대단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새끼를 낳아 몇 개월쯤 지나면 어린 새끼를 데리고 언덕으로 간답니다. 어미 호랑이는 언덕 위에서 새끼들을 발로 툭툭 차서 떨어뜨린 다음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걸어갑니다. 어미를 따라오는 놈은 키우고 못 따라오는 놈은 버린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동물입니다. 맹수 새끼는 맹수답게 키워야 살아갈 수 있기에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처럼 유별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살만 되면 자기 영역을 확보하여 어미 호랑이도 얼씬 못하게 하고 살아간답니다.
이런 힘과 명예를 상징하는 호랑이의 기운을 받고 나서일까, 호랑이띠의 인물 중에는 각 분야에서 굵고 단호한 획을 그은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호랑이띠의 사람들은 의리와 정의를 중요시 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적으로 밀어붙이고, 호랑이처럼 우두머리의 자리를 지향하면서도 품위를 잃거나 억척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인년 호랑이해를 맞이하여 호랑이의 특출한 점과 호랑이띠의 장점을 잘 살펴 앞으로 살아가시는데 경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새해 법문은 ‘믿고 사는 사회가 되도록 하자’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장엄경(大莊嚴經)』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공덕은 믿음을 그 사자(使者)로 한다.
그러기에 보물 중에서 믿음이 으뜸이다.”
여기서 ‘사자’는 심부름꾼이요, 중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말합니다. 부처님과 중생 사이에서 심부름꾼이 되고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살다 보면 수행이든 생활이든 수많은 공덕을 쌓게 되는데 그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믿지 않으면 어떠한 공덕도 쌓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보물 중에서 어떤 보물보다도 최상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설사 무엇을 얻는다 해도 쉽게 나가게 됩니다.
십여 년 전 갈브레이드라는 저명한 경제학자가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다’라는 말을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말이 그때보다 요즘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고 나면 무슨 일이 있을지, 내일 또 어떤 사건이 터지지 않을까 두려움과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심이 있고 바른 생각을 하는 분이라면 우리 사회나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밤잠을 설칠 것이며, 인류의 장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여 눈가에 이슬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고, 견성도인(見性道人)이라면 늘 삿갓을 쓰고 다니며 ‘하늘이 부 끄러워, 하늘이 부끄러워’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요즘 나라 안은 세종시 문제로 온통 화제가 되고 전국이 떠들썩합니다. 세종대왕께서 지하에서 들으시면 못난 후손들이 당신 이름을 더럽힌다고 화는 못내시고 안절부절 수라상을 못 받으실 것입니다.
세종시에 대한 구상은 애초부터 없었어야 할 계획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어디까지나 백년대계를 위하여 사심없이 대승적으로 계획했어야 하거늘 소아적인 생각으로 저질러 놓았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저질러 놓았으면 수습이라도 잘 하려고 노력하면 좋으련만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해당 지역출신이냐, 타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 천사람 만사람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두우니 국가사업이란 말이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그럼 왜 이런 못난 짓을 해서 선량한 국민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서 기인합니다.
삼독심이란 우리 인간이 일으키는 탐욕(貪慾)과 분노(忿怒)와 어리석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의 번뇌가 어찌나 독하든지 사람을 죽이는 독사나 독룡(毒龍)과 같다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욕이란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때로는 정도를 잃고 때로는 이성까지 잃으며 탐애하고 탐착하며 온갖 욕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란 탐욕심을 내서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남을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불끈 불끈 내서 괴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음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의 이치나 도리에 어둡고, 사물의 진상이나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지 못하여 비틀거리며 괴롭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삼독심으로 근본 번뇌를 일으키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리하여 근대 고승인 만공(滿空)선사께서는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진치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삼독심을 일으켜 만족할 줄 모르고 번뇌를 일으키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여 폭언을 하고 본의 아니게 두 말로 남을 괴롭히기도 하고, 거짓말로 남을 속여 낭패를 보게도 합니다.
불자라면 이런 망언(妄言)은 하지 않아야 하며, 바른 말, 진실한 말만 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바르고 깨끗한 신용사회가 되도록 해야겠습 니다.
불자라면 거짓된 말은 하지 맙시다.
거짓말이란 거짓이 말 속에 들어 있고 허황된 말을 일컫습니다. 살다가 보면 거짓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속담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듯이 불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늘 바른 말을 하고 진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허황되고 거짓된 말을 예사롭게 하면서 얼굴도 안 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어른이며, 속이는 말을 하시지 않는 어른이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을 따라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자성(自性)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오로지 말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중생이 그 입에서 생겨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지키는 길이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조심하십시오. 언젠가는 내 몸을 도끼와 칼처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거짓말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망언(妄言)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바른 법을 그른 법이라고 하고, 그른 법을 바른 법이라 설명하는 등 마음을 어겨서 하는 말입니다.
둘째, 기어(綺語)입니다. 비단결처럼 번지르르하게 하는 말입니다. 뜻도 없고 이익도 없는 말로서 남이 듣기 좋게 화사하게 하는 말입니다.
셋째, 양설(兩舌)입니다. 두 가지 말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 둘 사이를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넷째, 악구(惡口)입니다. 추악한 말로서 남을 욕하고 분노케 하며 저주하는 말로서 상대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는 등의 폭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벼락 맞아 죽어라, 교통사고라도 나거라’와 같은 말입니다.
옛 어른 말씀에 “거짓말로 속이는 것은 악당의 본질이다”하고 어떤 현인은 “거짓말은 지옥에 이르는 길을 다 간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거짓말이나 하는 악당이 되어 지옥문전에 이르지 않아야 되고 구린내 나는 입은 절대 갖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거짓말로 남에게 원한을 사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법구비유경』에 이런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왕사성(王舍城)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새끼를 낳은 사나운 암소에게 떠받쳐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소 임자는 겁이 나서 그날로 소를 팔아 넘겼습니다. 소를 산 사람은 물을 먹이기 위하여 물가로 소를 끌고 가다가 뒤에서 소가 떠받는 바람에 또 죽고 말았습니다.
소를 샀다가 아버지 목숨을 잃은 아들은 분에 못 이겨 그 소를 잡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소의 고기에 입을 댈 수가 없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습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그 소머리를 사서 짊어지고 가다가 길가 나무 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줄에 매단 소머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잠깐 잠이 들었던 이 사람은 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소 한 마리가 연달아 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왕사성의 빔비사라왕은 괴이하게 여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한 마리의 암소가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알고 싶습니다.”
“죄의 감응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느니라. 오랜 옛날에 세 사람의 상인이 이웃나라로 장사하러 가다 한 외로운 노파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방값과 식대를 넉넉하게 치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초의 말과는 달리 며칠 동안 편안히 숙식을 했으면서도 노파를 만만하게 보고 떠나올 때는 값도 치르지 않은 채 몰래 빠져 나오고 말았다. 노파가 밖에서 돌아와 보니 장사꾼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노파는 수십 리 길을 쫓아간 끝에 겨우 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노파가 그 동안의 숙식비를 달라고 하자 세 명의 장사꾼은 화를 내며 아침에 이미 돈을 주었는데 무슨 돈을 달라 하느냐고 딱 잡아떼었다.
노파는 속은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이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나는 지금 힘이 없어 너희들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생에 기필코 너희들을 만나 이 원한을 갚아 줄 것이다.”
이렇게 저주한 노파가 바로 오늘의 암소이고, 소에게 떠받쳐 죽은 세 사람은 숙식비를 떼어먹고 달아난 그 때의 장사치들이니라."
소름 끼치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감응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물체의 그림자 같이 소리의 메아리같이 털끝도 어김이 없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예사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사람은 신의가 있어야 하고 사회는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나 도덕을 갖추는 기본이 됩니다. 믿음 없이 어떤 성공이나 공덕도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지역간, 계층간, 노사간, 종교간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고 질시하고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한 두 마디로 이야기 할 순 없지만 그간 정치가, 행정관료, 교육자, 재벌, 종교인 등 소위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전긍긍하며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없었고, 사회를 잘 다스리고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한국 국민들의 일대 의식 전환이 혁신적으로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신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정치가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정치가들의 비리가 터져 나오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냈습니다. 한강에 정치가와 소상인이 빠지면 누구를 먼저 건져 주겠느냐는 질문에 모두들 정치가를 지목하더랍니다.
정치가를 먼저 건지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자, ‘투자가치가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등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정답은 “한강물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시 바삐 정치가부터 꺼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둘째는 기독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목사님이 목숨이 다해 천국(天國)에 가게 되었습니다. 막 하늘 문에 다다라 앞쪽을 보자 그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천국 국민들과 한창 담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알아본 하나님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하고 반갑게 맞이하더랍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도 목사님만을 편애한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정색을 하고 해명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내 임기 중에 처음 보는 목사님인데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더랍니다.
지독한 독설입니다. 신도들에게 천국을 가라고 열심히 외치는 목사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 임기 중에 목사를 처음 본다고 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스운 것이 아니고 심각한 것입니다. 세상이 썩어도 지키겠노라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는 목사의 신뢰도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희화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스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수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법사 스님께서 극락세계에 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온통 아름다운 꽃과 새, 향기 그윽한 물, 보기에도 아름다운 보석들로 장엄된 극락세계를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는 신도들에게 물었습니다.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느냐?” 모두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법사 스님은 의기양양하게 “밖에 극락행 버스를 예약해 놓았으니 모두들 어서 빨리 타시오. 내 바로 극락으로 인도해 드리리다.” 하시고 버스에 올라탈 것을 권했는데 정작 타는 분이 한 사람도 없더랍니다.
웬일일까요? 극락이 아무리 좋아도 이승만 못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스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불가에서 스님은 삼보의 하나로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수행에서는 스승의 일언반구도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라서 목숨 바쳐 섬기라고 합니다. 스승의 존재가 그만큼 지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신의 대상이 성직자나 수행자에까지도 미치는 세상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고쳐가야 합니다. 믿음만 확실하면 어떤 어려움도 고쳐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기독교를 믿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느 마을에 삼년이 넘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왠지 다른 해보다 더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땅이 갈라지고 우물이 마르고 짐승들도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의욕을 잃고 제일 중요한 신앙도 잃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비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자 사람들을 교회에 모았습니다.
기우제(祈雨祭)가 열렸던 것입니다. 마을에 신도란 신도는 다 모여 정성껏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정성이 통했는지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도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춤을 췄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산을 안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하자니까 따라한 것일 뿐, 꼭 올 거라는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예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여섯 살짜리 꼬마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웃으며 빨간 우산을 펴들고 “엄마 이리 빨리 오세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 소녀는 틀림없이 비가 올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불교를 생태적으로 믿는 아이 이야기입니다.
설악산 자락 깊은 골 모퉁이에 관음암(觀音菴)이라는 암자가 있었습 니다.
이 관음암에는 젊은 스님과 네살박이 남자아이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아이는 스님의 장조카로 큰 형님 내외가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는 바람에 스님이 맡아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산속의 하루는 해가 짧은 것처럼 여름도 짧고 가을은 더 짧았습니다.
어느날 스님은 겨우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산 아래 마을에 탁발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탁발을 떠나기 전에 스님은 조카를 불러 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개야, 삼촌이 맛있는 거 많이 가져 올 테니까 배가 고프면 관세음 엄마를 불러라. 그러면 관세음 엄마가 먹을 것을 주실 거야. 잠이 와도 관세음 엄마를 부르고 방이 차도 관세음 엄마만 불러라. 알았지?”
조카를 안심시킨 스님은 잰걸음으로 산을 내려와 겨우내 먹을 양식을 장만하느라 날이 저물어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가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스님은 창 밖을 보아도 날이 밝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니 눈이 지붕을 덮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큰 일이 났습니다. 스님은 조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허둥지둥 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고 긴 겨울 한 철을 온갖 걱정을 다 하다가 때로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서성거리기도 하다가 하루 이틀 눈 녹기를 기다리다 그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눈이 녹은 봄이 오자 스님은 서둘러 산길을 겨우 올랐습니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스님의 머릿속에는 먹지 못해 죽어갔을 조카의 원망어린 눈동자가 맴돌았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자 관음암의 산문이 보이고, 아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대웅전 앞마당에 조카로 보이는 동자가 이리저리 뛰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한편으로는 삼촌을 기다리다 죽어 저승에도 가지 못하는 혼이다 싶어 불쌍한 마음이 교차되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산문을 열고 들어서는 스님에게 꼬마아이가 달려와 안겼습니다.
“삼촌~”
“으응.”
반가움과 섬뜩함이 겹치는 마음으로 스님은 물었습니다.
“잘... 잘 있었니?”
스님의 두 눈에는 어느 사이 눈물이 맺혔습니다.
“응, 그런데 금방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
“으응, 좀..”
“그런데 밥은 먹었니?”
“응, 관세음 엄마가 맛있는 밥 주었다. 아까도 같이 놀았는데 어디 갔지?”
하면서 관세음 엄마를 찾는다고 두리번거렸습니다. 조카를 따라 법당으로 간 스님은 ‘아!’ 법당 벽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탱화 주변 흙이 뜯겨진 것을 보고 저절로 손을 모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절을 하면서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말을 믿어준 조카가 대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본보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절 이름을 다섯 살 절 즉, 오세암(五歲庵)이라고 바꿨습니다. 네 살짜리 조카가 굳건한 믿음으로 쌀 한 톨 안 먹고 한 겨울을 탈 없이 보내 다섯 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도 오세암을 참배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기쁨의 미소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때로는 불가사의한 일도 일어나고 기적도 일으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떠한 공덕도 쌓을 수 있습니다. 어른도 쉽지 않은 믿음이 어린이에게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티 없이 맑은 어린이가 가장 부처님과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마하연론(摩詞衍論)』에는 신심의 공덕을 신십종의(信十種義)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열 가지는 징(澄), 결정(決定), 환희(歡喜), 무염(無厭), 수희(隨喜), 존중(尊重), 수순(隨順), 찬탄(讚歎), 불괴(不壞), 애락(愛樂)이 그것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징(澄), 곧 마음을 맑게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번뇌망상은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져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 믿음은 결정(決定)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큰 일을 할 때는 분명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순수하게도 하고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하기 때문에 망설이거나 어떤 번뇌도 없이 분명한 결정을 내리게 하여 일을 확실하게 추진하게 합니다.
셋째, 믿음은 환희(歡喜)를 가져옵니다. 확고한 마음은 온갖 근심과 번민을 제거해 주고 희망과 포부로 설레게 합니다. 그러면 항상 웃으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은 무염(無厭), 싫증을 없애줍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삶이 싫어져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할 수 있으며, 확신 속에서 싫증 없이 꾸준하게 노력하다 보면 남 다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믿음은 수희(隨喜), 기쁨이 따릅니다. 믿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고 불법을 믿고 이웃을 믿으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믿으면 부처님 세계가 가깝고 극락정토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믿음은 남을 존중할 줄 알게 됩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거만하고 분수에 넘쳐서 박복한 사람이 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하심(下心)하고 겸손하여 덕(德)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일곱째, 믿음은 수순(隨順)하는 마음을 길러줍니다. 사람은 때로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의 뜻을 따르고, 남의 가르침을 따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고 쉬어야 큰 것을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수순하는 마음이 없으면 딱딱하고 삭막한 사람이 됩니다.
여덟째, 믿음은 찬탄(讚歎)을 낳습니다. 남의 것을 찬탄하고 남의 일에 감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한 믿음을 가지면 불보살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찬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남에게 찬탄을 아낌없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아홉째, 믿음은 결코 불괴(不壞),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도를 닦고 큰 일을 하시는 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굳건한 믿음의 바탕에서만 흔들림 없이 정진할 수 있고 마침내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수행은 한갓 수고로울 뿐입니다. 믿음은 좌절하지 않게 합니다.
열째, 믿음은 애락(愛樂)을 가져옵니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내서 열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성공하게 되며 즐거움이 올 것입니다.
이 『마하연론』의 가르침처럼 믿음은 우리를 맑고 환희롭게 해줄 것이며, 기쁨과 존중과 찬탄 속에서 자비롭게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또한 흔들리거나 싫증을 내거나 무너짐이 없이 살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을 잘 갖추고 지니면 우리의 삶은 향상되고 수행은 자연스럽게 깊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공덕이 많은 믿음, 나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의 배를 타고 깨달음의 긴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옛부터 우리 불교는 국가나 사회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힘을 발휘했습니다. 신라 때는 삼국통일(三國統一)하는데 역군이 되었으며, 고려 때는 거란족의 침입을 막는 혁혁한 공로를 세워 고려왕조의 기반을 확고히 했습니다. 조선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전국에 승군을 모집하여 곳곳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 불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소납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라고 법문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
‘진정한 웰빙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대명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가장 시급한 것은 사회구성원인 국민 각자가 신뢰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信爲道源功德母)”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회에 나갈 때 우산을 준비했던 소녀처럼, 배고프고 졸릴 때 의심 없이 관세음 엄마를 불러 겨울 석 달 동안을 먹지 않고도 살아 있었던 믿음의 화신 다섯 살박이처럼, 티 없이 맑고 깊은 믿음을 가져 봅시다.
‘서로 믿고 사는 사회’를 위하여 아래 열 가지를 지켜봅시다.
첫째,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자.
둘째, 남을 칭찬하고 헐뜯지 말자.
셋째, 웃는 얼굴로 마음을 따스하게 대하자.
넷째,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하지 말자.
다섯째, 작은 것이라도 베푸는 마음을 갖자.
여섯째,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자.
일곱째, 스스로 낮추고 겸손함을 잃지 말자.
여덟째,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자기 잘못을 참회(懺悔)하자.
아홉째, 작은 은혜라도 감사할 줄 알자.
열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자.
믿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
복덕은 바닷물과 같이 밀려올 것이며,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가득할 것이고,
찬탄하는 소리에 삼악도(三惡道)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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