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참구법 제 7강 / 용맹정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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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24 조회5,025회 댓글0건본문
화두참구법 7 / 용맹정진하라
오늘 바깥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런 날은 좀 칙칙하고 끈적끈적하고 기분이 좀 안 좋을 텐데, 이런 날씨에도 수행자는 조금도 날씨나 주위환경에 거리낌이 없이 정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정진이 일여(一如)해서 참으로 훗날 화두가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가 되면 바깥에는 이렇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태풍이 몰아쳐도 내면은 아주 고요하고, 아주 맑고, 아주 몸은 가벼워서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까지도 느껴서 안팎이 그야말로 극락과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런 때도 오리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려면 잘 참고 잘 견뎌야 돼요. 잘 이겨내셔야 되고요. 그래서 이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면서 애쓰고 애쓰다 보면 참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끼실 날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선(禪)은 예로 들면 세 철이나 한 삼 년쯤 해도 화두가 제대로 안 되시는 분은 용맹정진을 하시라, 즉 참고 참고 견뎌서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 용맹정진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라는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특단의 조치란 뭐냐? 특별한 조치를 말해요.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조치, 꼭 취해야 될 조치, 안 해선 안 될 조치, 그런 특단의 조치를 꼭 취하시라.
특단의 조치가 첫째는 “일체를 쉬고 만사를 놓으시라!”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하기는 어려워요. 우리 스님들도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할 분들이 많습니다. 신도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하기는 좀 어려우실 거래요. 그러나 꼭 할 것만 하고 그렇게 까지는 다 못하더라도 할 것만 하고, 웬만한 것은 쉬고 놓으실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 댁에서도 하시는 일을 가려하실 줄 알아야 돼요. 여러 가지를 번거롭게, 뭐 다양하게 그렇게 하지 마시고 몇 가지에 집중해서 가려서 그렇게 해야 성공으로 가는 길이고요.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것저것 하게 되면 어렵습니다.
수행하시는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아침에는 염불을 하고, 낮에는 독행을 하고, 또 저녁에는 선(禪)을 하고, 그 다음날은 주력(呪力)을 하고, 어쨌든 어떻게 보면 아주 다양하게 온갖 좋다는 것을 다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은 제대로 안 됩니다. 꼭 한 가지를 택해서요, 오직 외길로 한 우물만 파듯이 그렇게 하셔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좀 제대로 하려면 웬만한 일은 쉴 줄도 아시고 놓을 줄도 아셔야 참으로 큰일을 하실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확고부동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사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마음이 비워지지를 않아요. 비워지지 않으면 애쓰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거의 소득이 없어요. 즉 잘살기 위해서, 행복을 참으로 누리기 위해서, 부처 경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비우실 것은 비우고, 쉴 것은 쉬어야지만 돼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사실 줄도 아셔야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에 너무 욕심이 많아요. 자본주의의 물이 꽉 박혔어요. 그런 분도 큰 욕심 내지 말고요, 청빈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돼요. 소욕지족(少慾知足)을 늘 실천하면서 적은 것이라도 만족하게 알면서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소유물은 많을수록 번거로워요. 그러면 도(道)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늘 청빈사상을 본뜨려고 애쓰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요즘 미국의 최고 부자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라고 합니다. 미국의 최고 부자면 세계에서 가장 갑부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미국 역사상 가장 갑부는 누구냐? 포드자동차 회사를 창업하신 ‘존 포드1세’라는 거래요.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갑부였으면서도 아주 청빈하게 살았다는 거래요.
어떻게 청빈하게 살았느냐? 옷은 헐렁한 다 떨어진 옷을 입었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먹는 것도 햄버거 한쪽 정도 아주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는 거예요. 운동도 부자가 흔히 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안 했다는 거래요. 요즘으로 말하면 골프를 친다든가 좋은 운동을 안 하고 나무 장작개비를 쪼개는 운동만 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돈이 많지만 삶은 청빈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97세까지 사시다가 가셨는데 그분은 일생 동안 늘 아주 빼빼 말랐었다는 거래요. 그래서 어느 날 포드자동차 회사에서 수위가 헐렁한, 참 볼품없는 삐쩍 골은 사람이 들어오기에 “당신 여기 왜 들어오느냐? 우리 회사는 당신 같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는 거래요.
그 회장이 “아유, 저놈 제법 근무를 잘하네.” 하면서 비식이 내면으로는 웃으면서 쫓겨나다가 부사장을 만난 거예요. 부사장이 차에서 내려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니까 그제야 그 수위가 와 가지고 사과를 했다는 그런 일화가 있다고 해요. 그럴 정도로 아주 청빈하게 살았는 거래요. 그렇게 청빈하게 사니까 돈이 많았던 분도 장수를 누리면서, 그분은 돈을 모으는 데 신경을 쓰진 않았더라는 거래요. 좀 특별한 분입니다만. 어쨌든 좀 가난하고 늘 무소유 정신으로 사시려고 애를 쓰셔야 합니다.
세 번째는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 이렇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너무 번거롭게 하시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 내지 해야 할 사람하고는 관계를 맺되 웬만하면 좀 거리감을 두면서, 어쨌든 이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사람도 사귀시라는 겁니다.
네 번째는 가급적이면 묵언을 하고요. 가급적이면 웬만하면 말을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사실 세속에 사시는 여러분은 그렇게는 어렵습니다만 공부할 때는, 정진할 때는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 많은 사람치고 정진 잘하는 분 없어요. 도를 닦는 사람은 늘 입이 천근같아야 돼요.
다섯 번째는 “행동까지도 자제하시라!”고 했습니다. 번거롭게 오고가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늘 안정된 자신을 만들어 가시라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특단의 조치, 이것은 결국은 망상을 쉬고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래요. 망상을 쉬고 망상을 없애고 망상을 제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래요. 망상을 가급적이면 적게 일어나게 하고요.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특단의 조치까지도 취하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가급적 마음을 고요히 할 수만 있으면 늘 고요히 해야 돼요. 그런가 하면 몸을 편안하게 하고요. 몸은 편치 않으면, 즉 무리한다든가 너무 가혹하게 하면 공부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몸을 가급적이면 좀 편하게 하시고요. 즉 몸과 마음을 안정을 시키세요. 안정을.
그 안정이 바로 수행의 기본이래요. 안정이 돼야 화두할 생각도 나고 간절한 생각도 일어나고요. 그래서 화두를 성심성의껏 들 수 있는 발심도 됩니다. 안정이 돼야 수식관을 해도 더 안정이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늘 마음을 안정시켜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좀 안정시키려고 노력하고 늘 안정된 삶을 살려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안정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런 생활을 많이 해요. 특히 돈! 돈! 돈! 하면서 돈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거래요. 필요 이상, 너무 많이 벌려고 애쓰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음악을 틀어도 댄스뮤직 같은 막 흔들고 춤추고 막 괴성을 올리듯이 그런 음악을, 즐긴다기보다는 음악에 미쳤다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 음악을 즐기고. 스포츠도, 스포츠가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 스포츠에 막 빠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막 빠져 있습니다.
스포츠도 건전한 스포츠가 아니라 요즘 격투기 같은 거 보면 싸움도 그런 싸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한테 무슨 안정이 오겠어요. 그런가 하면 컴퓨터 게임 같은 거요. 컴퓨터에 완전히 사람이 빠져 있어요. 그래서 기계에 자기를 맡기고 있어요. 기계에 혼을 빼앗기고 기계의 노예의 되고 있는 거래요.
그런 컴퓨터나 스포츠나 아니면 또 음악이나, 돈까지도요, 짧은 시간에 톡톡 쏘듯이 아편 주사라도 맞듯이 짜릿한, 자극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는 거기서는 닦일 수가 없어요. 즉 마음의 평화란 바로 행복이라. 행복은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이 점점 심화되고, 점점 그런 것을 더 요구하는 시대가 되고 있어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살기가 여러 가지로 좋으면서도 분수 모르게 여러 가지 환경 자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 안타깝죠.
그런 사람일수록 안정이 급선무래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고요하게 해야 돼요. 그래야 참으로 평화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분일수록 어쨌든 화두가 좀 돼서, 아니면 수식관이 좀 돼서 안정이 된 상태에서, 안정이 된 상태에서도 더 안정이 되면 마음은 더 편하고 더 고요하고요, 그런가 하면 묘한 그런 기분까지도 느낄 정도로 그런 상태까지 됩니다.
그러면 사는 참 기분을 느껴요. 그런 정도가 되면 웬만한 망상은 거의 없어져요. 그래서 남을 미워한다든가 남을 싫어한다든가 막 화를 불끈불끈 낸다든가 아니면 어떤 괴로움까지도 다 소멸이 됩니다. 그러면 몸은 아주 가벼워져요. 기분이 좋고요. 그래서 묘한 재미, 행복까지도 느낍니다.
그런 행복이나, 화(禍)의 근본을 퇴치시키고 참으로 바꿀 수 있는 근본은 뭐냐? 바로 안정이래요. 안정만 시키면 행복도 오고요, 안정이 돼야 참으로 화도 멀리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정도가 요즘 그 세상에서 보통 이야기하는 수행법의 정도래요. 웰빙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정도고, 그렇게 마음이 평화스럽고 행복을 느낄 정도, 그런 정도가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는 목적이고 이유래요.
그런데 화두선(話頭禪)에서는 그런 정도에서 사실은 출발해요. 시작이래요. 그래서 화두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애쓰고 노력할 때다, 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께서 그런 정도, 즉 마음이 지극하게 안정이 돼서 일체 번뇌망상이 다 소멸되고 좀 맑고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아주 묘한 법열을 느끼는 그런 정도까지는 꼭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사실 절에 오지 마시라 마시라고 해도 이런 날도 안 올 수가 없어요. 안 오면 자기 손해니까, 오직 그것뿐이라는 그런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시게 될 그런 정도입니다. 그렇게 안정이 된 상태에서 화두가 좀 잘 된다 싶을 때, 아니면 화두가 되긴 되는데 별 진전이 없을 때, 아니면 오늘 저녁처럼 집을 떠나서 전념할 수 있는 이럴 때는 좀 용맹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돼요. 공부가 좀 된다 싶을 때, 그럴 때는 바짝 조이듯이 오직 그것뿐이듯이 막 매달리듯이 애써야 됩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참으로 대단하게 무섭게 막 매달리듯이 애쓰면 의외로 또 쉽게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공부도 그렇게 하듯이 사람은 좀 평범하게 살다가도요, 좀 특별하게 막 무섭게, 막 지독하게 살 때가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즉 특별하게 막 대단하게 살 때가 진취가 있고 큰 이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결을 타듯이 역순경계를 적당하게 헤쳐 나가듯이 자기를 알아서 강약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일도 기회가 왔다 싶거든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그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치듯이 도전하듯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세속에서 ‘기회는 일생에 한 두서너 번 온다.’ 그런 말을 하지요. 그 두서너 번을 놓치면 평생 큰소리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어쨌든 그런 기회는 왔다 하면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놓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하는 분이래요.
그런데 부처님 같은 분은 아주 대단해요. 지독한 고집쟁이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지독하고 아주 대단하고 철저하고 아주 고집쟁이인 분이 바로 부처님이래요. 그래서 부처님의 전생이나 수행담 같은 것 보면 “아, 이런 분도 있구나. 이렇게 대단한 분도 있구나.” 참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지는 그런 장면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피골이 상접해요. 갈비뼈가 다 튀어나왔어요. 그렇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그렇게 어렵고 괴로워도 참고 견디면서 무섭게 용맹정진 했는 거래요. 즉 기회가 왔다하면 놓치지 않았어요. 막 끝장을 보듯이, 막 물고 늘어지듯이, 그래서 남다른 성공을 하신 분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세속에 사시면서도, 이 공부 할 때는 그렇게 하시면서도, 세속적인 일을 할 때나 기회가 오시거든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폴레옹 같은 분 대단하게 느껴지죠. 전기를 보면 참 지독한 사람이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 드는 아주 대단한 분입니다. 그분은 하루 세 시간 이상씩 자지 않았다는 거래요. 일을 하더라도 무슨 일이든지 하면 그냥 막 빠졌는 거래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였었다,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지독하게 일생을 불꽃처럼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황제가 되셨고 훗날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말이 없다.’는 그런 말을 하셨을 거래요.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아주 어렵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수행자는 아무리 어렵고 괴롭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됩니다. 부처로 가는 길은 절대 쉽고 순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참고 견디는 것을 공부로 삼아야 된다. 좋은 도반이나 스승처럼 생각해라.”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무리 능력자라도요 천재성을 가진 분이라도요 참고 견딜 줄 모르면 공덕이 쌓이지 않습니다. 큰일을 절대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꾸준히 참아가면서 노력하고 애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선(禪)하시는 데는 이런 시구가 맞을 때가 있어요. 조선시대 때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조 중에서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로 시작하는 시조가 있어요.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 있는 산이래요. 아무리 높다 해도 하늘 아래 있는 산이라는 거래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오르고 또 오르면, 즉 견성의 고지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산처럼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고지래요.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고지래요.
오르고 또 오르면, 사람은 누구든지 오르고 또 오르면, 한 번 올라서 안 되면 열 번 하고요, 열 번 해서 안 되면 백 번 천 번 하는 거래요. 백 번 천 번해서 안 되면 만 번 십만 번 해요. 올라가다가 미끄러지면 또 올라가고요. 또 미끄러지면 또 도전하는 거래요. 또 못 올라가면 막 미치듯이 애쓰라는 거래요. 그렇게 애쓰다 보면 결국은 올라가게 되는데 참선자들은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하듯이 올라가 보지도 않고 산이 높다고 아예 포기하듯이 화두선도 그런 분이 있어요.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애써 보지도 않고 “아이고, 난 올라갈 수 없다.” 난 못 올라갈 산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수행자는 확고부동한 발심과 신심을 아주 돈독히 해서 애쓰고 애써서 어떻게라도 올라간다는 생각을 하면 의의로 쉽게 또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이 이 공부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 초현통(招賢通)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스님은 육관의 태사가 됐다는 거래요. 육관의 태사란 꽤 높은 벼슬이었던가 봐요. 그러나 남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관직에 올라가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래요. 아주 무상을 느꼈는 거래요. 그래서 당시의 까치 ‘작(鵲)’자 집 ‘소(樔)’자, 작소(鵲樔) 도림(道林)선사라고 계셨는데 그분은 좀 특별한 사람이라 까치집처럼 나무에 얼기설기 집을 지어놓고 늘 거기서 공부하셨다는 거래요.
왜냐? 방 안에서 공부하니까 너무 졸음이 오는 거래요. 그래서 안 졸기 위해서 나무 위에서 했던 분인데, 그 분이 당시 아주 유명한 선사였다는 거래요. 그 선사에게 나아가서 “제가 스님이 될랍니다.”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거래요. “왜 안 됩니까?” “자네는 벼슬이나 해야 돼.” 몇 번 더 가서 간청하듯이 하니까 삭발을 해 주면서 “스님노릇 잘해라.”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그 스님은 너무 고마워서, 그야말로 작소 도림선사의 손과 발이 돼 가지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온갖 시중을 다 해 드리면서 오직 부처님 이상으로 모시고 모셨는 거래요. 그야말로 피나는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도(道) 닦는 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는 거래요. 그래서 주변에서 “아무개가 참 도를 잘 닦는다. 공부를 잘한다.”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그렇게 잘 하셨는 거래요.
그러나 스승이신 작소 도림스님은 16년이 지나도록 “너 공부를 어떻게 하라. 어떻게 하나? 공부가 돼 가느냐?” 한 마디 말도 없는 거래요. 16년간이나요. 그렇게 옆에서 시봉을 잘하고, 그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자기를 위해서 그야말로 희생하고 봉사해도 말 한마디 없는 거래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너무 낙담하신 거래요. 그래서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님에게 “저는 다른 곳으로 갈랍니.” “어디로 갈래?” “제방(諸方)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 그러더니 “불법은 여기에도 조금 있지.” 하면서 담요를 슬쩍 드는 거래요. 담요를 드는 순간 확철대오 하는 거래요. 그래서 어찌나 좋든지 스님 손을 듬뿍 잡고 삼배를 드렸다는 그런 일화가 있어요.
그 16년간이나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고 발심을 시켰는 거래요. 오직, 오직, 오직, 오직 깨치라는 말없는 그런 발심을 시켰어요. 그래서 한순간에 담요를 들어 보이면서 깨치게 했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후에 초현통스님이 그 뒤로도 더 지극하게 더 정성껏 스승을 모셨다 해서 후래 사람들이 포모시자(布毛侍者)다, 즉 ‘담요시자’다, 그런 닉네임을 붙였다고 합니다.
참선자는 16년간이나 그래도 한 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 거래요. 그 사이에 자기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별일이 다 있었을 거래요. 시험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참고 견디면서 그 자체를 공부로 삼았는 거래요. 수행자는 그런 대단함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괴로움도 능히 참을 수 있는 그런 분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초현통스님은 만세의 수도자의 귀감이 되고, 수많은 납자에게 좋은 경책과 법문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참 대단하고 그 무서운 수행을 했기에 값지고 빛나지 않을 수 없었고요, 그 거룩한 수행상은 오늘까지도요,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수행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육신을 다스리기도 어렵지만 옛 선사들처럼 욕됨을 참고, 그 어려운 보살행까지 해 가면서 정진하기는 참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인욕해라.”, 즉 “욕됨을 참아라.” 많이들 강조하셨어요.
부처님 말씀에 “도(道)를 행함에 인욕(忍辱)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하시면서 “참는 미덕에는 계를 지키는 지계(持戒)나 고행(苦行)도 미치지 못한다. 능히 잘 참는 이를 이름하여 대인(大人)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대인, 대인, 보통 말 많이 하는데 능히 잘 참는 분이 대인이래요.
그렇게 참기 어려운 일을 늘 참으면서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해 가면서 그렇게 성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인욕이 제일의 선법이요.” 했습니다. 제일의 선법, 즉 불법이라는 겁니다.제일의 천견(天見)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복의 근원이 된다.” 그렇게도 말씀했습니다. 그런 인욕행이 있어야 걸림 없는 지혜를 갖출 수가 있고요.
부처님의 지혜는 아주 대단한 지혜입니다. 조금도 걸림이 없는 그런 지혜래요. 그런 지혜를 갖출 수가 있고요. 저 언덕을 건너는, 즉 중생계에서 부처계로 가는 그 언덕을 건너는 반야선(般若船)을 탈 수 있으며, 그런 분이 아낌없는 대자비(大慈悲)를 베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욕을 참아가면서도 용맹정진해야 한다는 거예요. 흔히 용맹정진한다, 용맹정진한다 말을 많이 하는데, 진정한 용맹정진은 졸지를 않아야 돼요. 졸지를 않아야 돼요. 그런가 하면 공양한다든가, 용변을 본다든가, 특수한 용무 외에는 일체 용무도 안 보고 오직 공부에만 빠지는 걸 말해요. 공부도 안 되는 공부는 사실은 용맹정진이 아니래요. 성성하고 아주 적적하게 공부가 되는 그런 상태를 용맹정진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맹정진할 때는 흔히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한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한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지독하게 참으로 몸뚱아리까지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을 용맹정진한다 합니다.
즉 공부가 진정으로 애쓸 필요성이 있을 때는 자기 몸을 던져서까지 모든 것을 바쳐서까지 오직 애쓰고 애써도 좋은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옛날 어떤 도인 스님들은 용맹정진할 때는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했다는 그런 분도 있어요. 또 어떤 분은 생사문제를 초탈하는 그런 공부다 해서 ‘생(生)’과 ‘사(死)’자를 써 붙이고 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용맹정진할 때마다 유서를 썼다는 거래요. ‘이번 용맹정진으로 깨치지 못하면 몸을 바꾸고야 말겠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하면서 유서를 써놓고 여덟 번인가 해서 여덟 번 만에 깨치셨다는 일화도 있어요. 즉 그렇게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각오하고, 애쓰고 애써서 참으로 확철대오 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하촌(寺下村)에, 절 밑에 있는 사람들이 “독하다, 독하다, 참선하는 중님보다 더 독할쏘냐.”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선(禪)이 아주 제대로 될 때, 막 성성하고 아주 적적할 때는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날 좀 살려주시오.” 해도 거들떠보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런 때에도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옆집에 불이 났다, 막 사람이 죽어간다 그래도 거기에도 신경 쓰지 말라는 거래요. 심지어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사경을 헤매더라도 거기에도 신경 쓰지 말라는 거래요. 즉 그 정도로 참으로 이 공부를 위해서는 전부를 바치듯이 오직 공부! 공부! 공부를 위해서 애쓰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수좌들을 흔히 냉혈한(冷血漢)이다, 라고 합니다.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래요. 인정머리도. 그런가 하면 철인이다. 막 쇳덩어리 같은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보살행을 하고 자비행을 할 때는 자기 살이라도 뚝 떼어 가지고 보시할 때는 보시하더라도, 오직 이 공부에 미치듯이 애쓸 때는 참으로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정신으로, 할 때는 참으로 애쓰되, 마을에 내려가서도요, 집에서 일도요, 일할 때는 참으로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야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고 남보다 더 앞설 수 있고 참으로 훗날 세상을 움직이는 대단한 사람도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가서 일이 잘 안 되실 때는요, 용맹정진할 때의 생각을 꼭 하세요. 여기서 밤샘할 때 생각을 꼭 해요. 그렇게 하세요. 그래서 안 될 일이 사실 드물 거래요. 지금 마을에 가면 그냥 쉬고 아니면 자는 분들이 많을 거래요. 여러분들은 여기 와서 이렇게 법회를 하고 오늘 저녁에 밤샘할 거예요. 이런 정신으로 나가서도 일하시고 일상생활 하세요. 이런 정신으로 하면 무슨 일인들 안 되겠어요?
어쨌든 공부인은 자신과 공부 자체를 좀 알아서 공부에 강약(强弱)을 두는 것이 좋아요. 그런 강약을 여러분 집에서도 세속에서도 그렇게 두면서 보통정진을 가행정진(加行精進, pra-yoga :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평상시보다 한층 더 정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행정진이라고 함)을 하고요, 가행정진을 하다가 용맹정진 하듯이 강하게 지독한 철저한 모습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독봉 계성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해요. 그분은 무(無)자 화두를 했다고 해요. 늘 무자를 했는 거래요. 그분이 육계라는 곳에서 정진할 때 이야기인데, 그 선사는, 즉 스님이니까 “부모형제도 다 버리고 사람노릇도 마다하고 출가한 승려가 돼서 어찌 편안하게 수행하겠느냐?” 하면서 열심히 아주 용맹정진했다는 거래요.
우리 스님들 출가할 때는 아주 비상하게 출가합니다. 그야말로 세속을 다 버리고 출가합니다. 흔히 스님들은 한참 공부할 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사람노릇도 하지 마라.” 즉 사람으로서 갖춰야 될 가장 기본적인 도리와 인격마저도, 공부할 때는 그것도 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스님이 됐는데 어찌 편안하게 수행하겠느냐? 하면서 아주 열심히 했다는 거래요. 그분은 좀 특별한 분이라, 옷도 아주 허름한 떨어진 옷만 입었다는 거래요. 겨우 참 육신만 가릴 정도였었는 거래요. 옷만 그래 입었느냐? 먹는 것도 늘 배고프게 먹었는 거래요. 일부러 그렇게 먹었는 거래요.
그러면서 대중은 편안하게 큰방에서 자도 자기는 큰방에 한 번도 안 들어가는 거래요. 늘 마루에 의자를 놓고 공부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연일 힘든 공부를 하니까 얼마나 졸리겠어요? 안 졸려고 별 수단과 방법을 다 하는 거래요. 그래도 어느 날 12시쯤 됐는데 좀 졸았던가 봐요.
졸다가 문득 깨니까 스님들이 죽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는 거래요. 그날로 걸상을 치워 버렸는 거래요. 걸상마저도. 치우고는 늘 다니면서 정진했는 거래요. 그렇게 다니면서 정진하니까 다리가 붓고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괴로워도 늘 서서 정진하다가 하루 저녁은 어찌나 괴롭던지 자신도 모르게 벽에 기대 좀 존 적이 있었는 거래요.
깨어보고는 벽에 기대서 졸았다고 부처님 앞에 가서 엉엉 울면서 참회를 하는 거래요.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지독하게 애쓰고 애쓰니까 공부가 서서히 잘 되는 거래요. 하도 지독하다 해서 독봉스님이라는 이름에 빗대어서 “독종스님이다” 그렇게까지 주변에서 불렀다는 거래요. 그러나 아무리 독종스님이라도, 그처럼 신심이 대단하고 지극하게 애써도 몸이 고되고 졸음이 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 거래요.
그때마다 부처님에게 참회하면서 애쓰고 애쓰더니 공부가 차츰차츰 진취가 있더라는 거래요. 어느 날 마지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그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분은 흔히 주변에서 “저 분은 지독해서 그렇지 여러 가지를 봐도 그야말로 보통사람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조실스님들이 “독봉스님을 봐라. 하면 된다. 너희들 안 해서 그렇지. 그만큼 좀 애써 봐라. 애쓰면 깨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해요.
이 공부는 참고 견딜 때는, 사실 그렇게까지 하기는 좀 어려워요. 그러나 웬만한 것은 참고 견뎌야 공덕이 쌓여요. 참으로 깊은 체험을 하고 훗날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조선조 후기 때 지리산 칠불사에 가면 아자선방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당시에 공부를 애썼던 스님이 한분 계셨어요. 추월 조능(秋月 祖能 1506-1544, 조선 중종 때의 스님, 벽송지엄 碧松智嚴선사의 법맥을 이음)스님이라고 그분도 아주 대단한 스님이었던가 봐요. 대중방에서 사시다가 잠잘 때가 되면 방을 나오시는 거래요. 방을 나와 가지고는 마당을 거닐면서 늘 수행을 했는 거래요.
마당을 거니니까 대중보기가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요, 남들 잠 자는데 너무 극성스럽다, 좀 안 좋게 보일까 봐 거기서 십리쯤 떨어진 쌍계사까지 내려갔어요. 쌍계사 가면 육조(六祖)스님의 정상탑(頂相塔)이 있습니다. 탑에 참배도 할 겸 내려가서 참배하고는 올라오는 포행정진을 계속 했다는 거래요. 처음에는 그냥 내려갔다가 올라왔는데 그렇게 오르내리니까 졸음이 많이 오는 거래요. 그래서 큼직한 돌을 하나 짊어지고 내려가는 거래요. 돌을 짊어지니까 얼마나 무겁겠어요. 가다가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하더라도 계속 그렇게 다녔는 거래요.
그렇게 십년을 하루처럼 다녔는 거래요. 내려가서는 육조스님의 정상탑에 백팔배를 지극하게 하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어느 여름날 밤인데 칠불사 밑의 마을이 범왕리인데 범왕리에서 칠불사로 올라가자면 아주 가팔라요. 거기를 올라가다가는 그냥 졸아버린 거예요. 얼마를 졸다가 어깨가 가볍게 느껴지는 거래요. 뒤를 돌아보니까 호랑이가 돌을 척 받치고 서 있더라는 거예요.
즉 스님이 어찌나 공부를 애쓰던지 그렇게 지독하게 간절하게 밤에도 잠을 안 자고 돌을 지고 오르내리면서 상처도 감수하고 그렇게 애를 쓰니까 호랑이도 무심치 않았는 거래요. 척 받치고 있더라는 거래요.
스님 말씀이 “야, 이놈아! 네가 나를 위해서 받치고 있는 것은 가상하다. 그러나 도인공부 못하게 한 그 죄는 네가 어떻게 받을 거냐?” 막 호통을 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슬그머니 사라지더라는 거래요. 그 스님은 하도 고마워서 공양주한테 부탁해서 누룽지를 매일 얼마씩 얻어 가지고 가까운 곳에 바위 위에 놓으면 조금 있으면 없어지고 없어지곤 하더라는 거예요. 즉 호랑이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즉 공부는 아주 대단한 거라. 지극하게 하면 호랑이도 알아줄 정도로 대단함이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조금 뭣합니다만 저도 좀 신비하게 느꼈던 일이라. 한때 오대산 월정사에서 저 상원사를 오르내리면서 포행정진 한답시고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월정사에서 밥을 싸가지고는 상원사 쪽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다가 공부가 되면 그 자리에서 얼마씩, 심지어 몇 시간씩 서 있기도 하고. 그때는 거기에 차가 전혀 안 다녔어요. 또 다리가 좀 아프면 냇가의 바위가 아주 좋아요. 적당한 데 가서 몇 시간씩 앉아 있기도 하고. 여름에는 물이 참 좋거든요. 한강의 원류입니다.
들어가서 덤벙 목욕도 하고. 옷이 검으면 옷 벗어 가지고 설렁설렁 흔들어서 바위 위에 한 두어 시간만 말리면 꾸들꾸들해요. 입을 만해요. 그러다가 또 배고프면 도시락을 먹곤 했었는데. 어느 날은 상원사에서 내려오다가 월정사로 가는 길인데 길섶 바로 내(川) 사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서 정진을 했어요. 몇 시간을 했어요. 몇 시간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밤인데, 얼마를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으니까 누가 옆에서 이래 콱 차요. 콱 차도 처음에는 보지 않았어요. 그냥 그대로 정진한답시고 앉아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또 누군가 콱 차요. 그래 옆을 이래 돌아보니까 큰 물체가, 나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시커먼 놈이 앉아 있어요. 꿈틀거려요. 아, 짐승이구나 싶대요. 그러자 좀 정신을 차리니까 안개가 자욱해요. 안개에 물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요. 비가 올 것 같아요.
대충 꾸려 가지고 얼른 올라가자 싶어서 월정사로 내려가야 되는데, 제 걸음이 그때도 아주 느렸는데 그날은 얼른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챙겨 가지고 막 뛰어가다시피 갔어요. 막 상원사 올라가니까, 상원사 초당이라고 건물이 있습니다. 초당에 막 올라가자마자 소나기가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래요. 그때 이틀 간이나 비가 그냥 막 퍼부었는 거래요.
그래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이 끊기고 그 마을의 집도 떠나가고 사람도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인가 죽었다고 하는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초월스님 체험했듯이 신비감을 느낍니다. 이 공부의 공덕이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겠는데.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아주 오묘한, 말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을 흔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 드릴까? 이것도 제 이야기인데. 그때 초가을쯤 됐는데, 낮인데 상원사에서 막 내려오다가, 거기 조금 내려오면 화전민이 그때 있었어요. 화전민이 심마니 노릇도 하고, 즉 산삼도 캐고 화전민으로 사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화전민 집이 바로 길섶에 있어요. 그 집을 지나니까 여인의 울음소리가 아주 참 슬프게 울대요. 너무 슬프게 들립디다.
그냥 우는가 보다 하고 지나가서 삼일쯤 뒤인가 절에서 들으니까 그 집의 남편이 죽었다는 거래요. 아이가 육남매인데 그날 죽었는 거래요. 그래서 살길이 막연하다고 하면서 원주스님이 쌀을 한말 가지고 내려가시대요. 그러고 한 이십 일쯤 지났을까. 그 집 옆을 또 지나는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지 애들이 막 싸워요. 울고불고. 조금 있다가 그 어머니 되는 여자 분이 나오대요. 그 여자 분을 만나자마자 내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어요.
그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한 달포 전쯤, 오대산에 가면 조개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요. 조개계골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대요. 조개골을 들어가다 보니까 입구에 집이 몇 채 있고 그 위에는 집이 없어요. 다 소개되고. 집 뒤로 한참 올라가니까 묘가 두 기가 있어요. 묘 옆에 앉아서 정진을 좀 하다가 거기서 도시락을 먹었어요.
먹고 앉아 있는데, 정진한다고 앉아 있는데 저만큼 뭐가 하얗게 보여요. 뭔가 봐도 모르겠어요. 얼른 일어나 가지고 가 보니까 하얀 뱀 새끼가 두 마리가 엉켜있어요. 백사래요. 한참 이래 보니까 신기해요. 보고는 또 앉아서 공부를 했어요. 한 두어 시간은 했을 거래요. 하고는 일어나서 몸을 좀 푼다고 좀 왔다 갔다 하다가 보니까 아직도 있는 거래요. 자상하게 보다가는 문득 생각이 나는 거래요.
“백사 옆에는 산삼이 있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산삼 생각이 나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봤지요. 그런데 한족 구석진 곳에, 산삼은 삼지 오엽이래요. 가지가 세 개 나고 잎사귀가 다섯 개래요. 그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삼을 한 번도 안 봤어요. 그런데 직감적으로 산삼이다 싶어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옆에도 두 포기가 더 있는 거래요. 그래도 난 뭐 산삼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캐고 싶은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보고는 그냥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보니까 그 생각이 문득 들어요. 그래서 내가 그 보살한테 저기에 캘 게 있다고 하니까, 아 그러냐고. 호미를 가지고 나오라고. 그래 거기서 한 십리는 떨어졌을 거래요. 데리고 가가지고 내가 산삼을 가리키니까 깜짝 놀라면서 막 가가지고 확 이렇게 부둥켜안으려고 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 나를 보더니 캐도 되냐고 물어요. 아, 캐시라고. 그렇게 캐는 걸 보고는 나는 그냥 내려왔어요.
그분이 그날 그 주변을 샅샅이 봤겠지.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봤겠지. 일곱 뿌리나 캤는 거래요. 진짜 산삼인 거래요. 한 뿌리는 삼백 몇 년이나 된 그런 산삼이었어요. 서울의 종로5가에 가서 감정을 하니까 한 뿌리는 삼백 몇 년 됐다고 하대요.
그때 한진고속의 조중훈씨가 월정사 법당 짓는 데 시주를 많이 했습니다. 거의 그분이 짓다시피 했어요. 그분이 산삼도 오대산 산삼이 좋다 해서 산삼 백년짜리 한 뿌리만 누군가 캐 주면 고속버스 한 대를 주겠다고 했었는 거래요. 고속버스를요. 그 보살이 일곱 뿌리를 팔았는 거래요. 나중에 이야기가 들리는데 고속버스 세 대 값을 받았다는 거래요. 하루는 나한테 삼산 다 판 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나는 필요 없으니까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그랬더니 훗날 서울로 이사도 하고 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어쩌다가 상원사에 오면 한 번씩 들르곤 했던 그런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산삼도, 요즘은 그 산삼을 발견하면 내가 먼저 먹을 것 같아요. 그러니 안 보이는 거라. 그 때는 참 순수했어요. 그런 걸 전혀 생각을 안 했어요. 순수하고 때 묻지 않고. 남들이 볼 때는 어쨌는지 몰라도 내 자신은 그랬어요. 그렇게 좀 맑고 깨끗하게 사니까 보였는 거래요.
수행은 보통사람이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특별한 대단함이 있습니다. 훗날 공부가 잘 돼서 신통한 그런 경계 같은 것도 느끼면 참 “오직 이것뿐이다, 이건 뭐 안 할 수가 없다. 막 밀어내도 아무리 말려도 할 수밖에 없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참으로 애쓰면 대단한 것을 체험할 날이 있을 겁니다.
과거세에 저 설산(雪山)에서 중생과 도를 위해서 공부했던 설산동자라는 그런 분이 계셨다고 해요. 아주 열렬한 구도자라. 설산동자가 오직 도만 참구했어요. 도를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던 대단한 분이래요. 그래서 제석천이 저 설산동자가 과연 도를 구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냐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석천이 그 무시무시한 나찰의 얼굴을 해서, 나찰의 얼굴이지만 아주 유창하게 부처님의 계문을 설하는 거래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이것이 바로 나고 죽는 법이다.” 아, 그 유명한 게송을 설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설산동자는 그 게송만 들어도 그렇게 좋은 거래요. 기분이 보통 좋은 게 아니래요.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그러한 게송을 읊을 만한 선인(仙人)이 안 보이는 거라. 나찰만 보이는 거래요. 그래서 나찰한테 “당신이 설했느냐?” “그렇다.” “그 뒷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알려줄 수 없겠는가?” “그건 안 된다. 당신이 만약에 그것을 참으로 듣고 싶거든 당신 살을 좀 다오. 나는 사람 살만 먹는 사람인데 한 사흘을 굶었더니 내가 지금 너무 힘이 없다. 힘이 없어서 설할 기력마저도 없다. 나에게 살을 주면 설해주겠다.” 그러는 거래요.
그래서 설산동자는 “그러면 좋다. 설해주기만 해라. 그러면 내 몸 전체를 당신에게 바치겠노라.” 합니다. 그래서 설산동자가 입었던 옷을 쫙 펴 놓고 앉으라고 하고서 자기는 앞에서 합장하고 반게(半偈, 나머지 게송)를 듣는 거래요.
반게를 들으려고 하니까 “당신이 참으로 진심이냐? 여덟 자를 위해서 당신 육체를 나한테 바쳐서야 되겠느냐? 그러지 말라.” “그래도 좋다. 어쨌든 반게, 즉 시구(詩句) 반만 설해 달라. 그러면 내가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겠노라.” 하니까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게송이죠? “생멸이 이미 멸해 버리면 적멸이 곧 낙이 된다.” 아주 유명한 게송입니다. 이것을 설하니까 “좋다.” 그러면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막 떨어지려고 하는데 나찰이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해서 받았다는 그런 일화가 있어요. 부처님의 전신 이야기인데 부처님의 전신도 그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은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는 도를 위해서는 몸을 잊으라는 거래요. 몸을 바치라는 거래요. 아무리 바쳐도 부족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흔히 인생과 청춘을 송두리째 바치라는 거래요. 이런 말은 보통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쳐도, 그렇게 전부를 던져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도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영명 연수(永明 延壽, 중국 송나라 때)선사라고 아주 유명한 승려인데, 그분 말씀에 “가령 화두를 참구해서 철저히 깨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귀에 스침이나마 영원히 도의 씨앗이 될 것이니 세세생생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즉 지옥,아귀,축생 같은 나쁜 세상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잃지 않으며, 화두를 잘 하면 내 생에는 잘하지 못하더라도(그런 뜻도 있습니다.) 사람 몸은 잃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치게 되리라.” 했습니다.
화두는 정신을 아주 맑게 합니다. 아주 초롱초롱하게 해요. 즉 천재성을 발굴하는 것이 화두이기도 해요.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대지혜를 갖출 수가 있는 것이 바로 화두인데. 그래서 다시 태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치게 되리라, 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공부가 이 공부입니다. 그런 공부의 공덕은 말로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이것은 누구도 표현이 불가능해요. 자기가 실제 체험해 봐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늦게 여기까지 온 이 공덕과 참으로 용맹정진해서 그 공덕과, 그런가 하면 여러분이 늘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고, 애써서 참으로 화두를 타파하면 그건 뭐 금상첨화이고. 설혹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좋은 공덕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고요. 이 공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공부에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꼭 느끼시고 참으로 사람으로서 갈 길을 바르고, 좀 제대로 아주 원만하게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그렇게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면서 애쓰셔야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공부가 된다 싶을 때, 또 공부가 되는 듯해도 좀 미적지근할 때,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공부의 한계를 느낄 때, 나는 발심이 안 됐다, 나는 신심이 돈독하지 못하다, 아니면 나는 신도다, 아니면 근기가 하열한 여성이다, 등등의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일수록 할 때는 참으로 기회가 왔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떻게라도 붙들고 늘어지듯이 애쓰면 의외로 또 쉽게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흔히 여기 보살님들은 “우린 여자니까, 보살이니까 어렵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흔히 있는데, 여성은 여성 특유의 장점 중의 장점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바로 모성애래요. 그걸 발굴하세요. 그걸 계발하세요. 그럼 남성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의식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도 했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라는 거래요.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못하는 공부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애쓰고 애쓰면서 참고 견디면서 때로는 화끈하게 용맹정진해서 여러분의 공부가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즉 성성하고 아주 적적해서 인생의 참 보람과 행복을 꼭 느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7강- 용맹정진하라(2007년 7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오늘 바깥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런 날은 좀 칙칙하고 끈적끈적하고 기분이 좀 안 좋을 텐데, 이런 날씨에도 수행자는 조금도 날씨나 주위환경에 거리낌이 없이 정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정진이 일여(一如)해서 참으로 훗날 화두가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가 되면 바깥에는 이렇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태풍이 몰아쳐도 내면은 아주 고요하고, 아주 맑고, 아주 몸은 가벼워서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까지도 느껴서 안팎이 그야말로 극락과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런 때도 오리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려면 잘 참고 잘 견뎌야 돼요. 잘 이겨내셔야 되고요. 그래서 이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면서 애쓰고 애쓰다 보면 참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끼실 날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선(禪)은 예로 들면 세 철이나 한 삼 년쯤 해도 화두가 제대로 안 되시는 분은 용맹정진을 하시라, 즉 참고 참고 견뎌서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 용맹정진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라는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특단의 조치란 뭐냐? 특별한 조치를 말해요.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조치, 꼭 취해야 될 조치, 안 해선 안 될 조치, 그런 특단의 조치를 꼭 취하시라.
특단의 조치가 첫째는 “일체를 쉬고 만사를 놓으시라!”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하기는 어려워요. 우리 스님들도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할 분들이 많습니다. 신도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하기는 좀 어려우실 거래요. 그러나 꼭 할 것만 하고 그렇게 까지는 다 못하더라도 할 것만 하고, 웬만한 것은 쉬고 놓으실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 댁에서도 하시는 일을 가려하실 줄 알아야 돼요. 여러 가지를 번거롭게, 뭐 다양하게 그렇게 하지 마시고 몇 가지에 집중해서 가려서 그렇게 해야 성공으로 가는 길이고요.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것저것 하게 되면 어렵습니다.
수행하시는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아침에는 염불을 하고, 낮에는 독행을 하고, 또 저녁에는 선(禪)을 하고, 그 다음날은 주력(呪力)을 하고, 어쨌든 어떻게 보면 아주 다양하게 온갖 좋다는 것을 다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은 제대로 안 됩니다. 꼭 한 가지를 택해서요, 오직 외길로 한 우물만 파듯이 그렇게 하셔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좀 제대로 하려면 웬만한 일은 쉴 줄도 아시고 놓을 줄도 아셔야 참으로 큰일을 하실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확고부동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사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마음이 비워지지를 않아요. 비워지지 않으면 애쓰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거의 소득이 없어요. 즉 잘살기 위해서, 행복을 참으로 누리기 위해서, 부처 경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비우실 것은 비우고, 쉴 것은 쉬어야지만 돼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사실 줄도 아셔야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에 너무 욕심이 많아요. 자본주의의 물이 꽉 박혔어요. 그런 분도 큰 욕심 내지 말고요, 청빈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돼요. 소욕지족(少慾知足)을 늘 실천하면서 적은 것이라도 만족하게 알면서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소유물은 많을수록 번거로워요. 그러면 도(道)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늘 청빈사상을 본뜨려고 애쓰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요즘 미국의 최고 부자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라고 합니다. 미국의 최고 부자면 세계에서 가장 갑부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미국 역사상 가장 갑부는 누구냐? 포드자동차 회사를 창업하신 ‘존 포드1세’라는 거래요.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갑부였으면서도 아주 청빈하게 살았다는 거래요.
어떻게 청빈하게 살았느냐? 옷은 헐렁한 다 떨어진 옷을 입었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먹는 것도 햄버거 한쪽 정도 아주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는 거예요. 운동도 부자가 흔히 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안 했다는 거래요. 요즘으로 말하면 골프를 친다든가 좋은 운동을 안 하고 나무 장작개비를 쪼개는 운동만 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돈이 많지만 삶은 청빈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97세까지 사시다가 가셨는데 그분은 일생 동안 늘 아주 빼빼 말랐었다는 거래요. 그래서 어느 날 포드자동차 회사에서 수위가 헐렁한, 참 볼품없는 삐쩍 골은 사람이 들어오기에 “당신 여기 왜 들어오느냐? 우리 회사는 당신 같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는 거래요.
그 회장이 “아유, 저놈 제법 근무를 잘하네.” 하면서 비식이 내면으로는 웃으면서 쫓겨나다가 부사장을 만난 거예요. 부사장이 차에서 내려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니까 그제야 그 수위가 와 가지고 사과를 했다는 그런 일화가 있다고 해요. 그럴 정도로 아주 청빈하게 살았는 거래요. 그렇게 청빈하게 사니까 돈이 많았던 분도 장수를 누리면서, 그분은 돈을 모으는 데 신경을 쓰진 않았더라는 거래요. 좀 특별한 분입니다만. 어쨌든 좀 가난하고 늘 무소유 정신으로 사시려고 애를 쓰셔야 합니다.
세 번째는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 이렇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너무 번거롭게 하시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 내지 해야 할 사람하고는 관계를 맺되 웬만하면 좀 거리감을 두면서, 어쨌든 이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사람도 사귀시라는 겁니다.
네 번째는 가급적이면 묵언을 하고요. 가급적이면 웬만하면 말을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사실 세속에 사시는 여러분은 그렇게는 어렵습니다만 공부할 때는, 정진할 때는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 많은 사람치고 정진 잘하는 분 없어요. 도를 닦는 사람은 늘 입이 천근같아야 돼요.
다섯 번째는 “행동까지도 자제하시라!”고 했습니다. 번거롭게 오고가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늘 안정된 자신을 만들어 가시라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특단의 조치, 이것은 결국은 망상을 쉬고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래요. 망상을 쉬고 망상을 없애고 망상을 제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래요. 망상을 가급적이면 적게 일어나게 하고요.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특단의 조치까지도 취하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가급적 마음을 고요히 할 수만 있으면 늘 고요히 해야 돼요. 그런가 하면 몸을 편안하게 하고요. 몸은 편치 않으면, 즉 무리한다든가 너무 가혹하게 하면 공부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몸을 가급적이면 좀 편하게 하시고요. 즉 몸과 마음을 안정을 시키세요. 안정을.
그 안정이 바로 수행의 기본이래요. 안정이 돼야 화두할 생각도 나고 간절한 생각도 일어나고요. 그래서 화두를 성심성의껏 들 수 있는 발심도 됩니다. 안정이 돼야 수식관을 해도 더 안정이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늘 마음을 안정시켜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좀 안정시키려고 노력하고 늘 안정된 삶을 살려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안정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런 생활을 많이 해요. 특히 돈! 돈! 돈! 하면서 돈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거래요. 필요 이상, 너무 많이 벌려고 애쓰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음악을 틀어도 댄스뮤직 같은 막 흔들고 춤추고 막 괴성을 올리듯이 그런 음악을, 즐긴다기보다는 음악에 미쳤다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 음악을 즐기고. 스포츠도, 스포츠가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 스포츠에 막 빠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막 빠져 있습니다.
스포츠도 건전한 스포츠가 아니라 요즘 격투기 같은 거 보면 싸움도 그런 싸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한테 무슨 안정이 오겠어요. 그런가 하면 컴퓨터 게임 같은 거요. 컴퓨터에 완전히 사람이 빠져 있어요. 그래서 기계에 자기를 맡기고 있어요. 기계에 혼을 빼앗기고 기계의 노예의 되고 있는 거래요.
그런 컴퓨터나 스포츠나 아니면 또 음악이나, 돈까지도요, 짧은 시간에 톡톡 쏘듯이 아편 주사라도 맞듯이 짜릿한, 자극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는 거기서는 닦일 수가 없어요. 즉 마음의 평화란 바로 행복이라. 행복은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이 점점 심화되고, 점점 그런 것을 더 요구하는 시대가 되고 있어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살기가 여러 가지로 좋으면서도 분수 모르게 여러 가지 환경 자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 안타깝죠.
그런 사람일수록 안정이 급선무래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고요하게 해야 돼요. 그래야 참으로 평화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분일수록 어쨌든 화두가 좀 돼서, 아니면 수식관이 좀 돼서 안정이 된 상태에서, 안정이 된 상태에서도 더 안정이 되면 마음은 더 편하고 더 고요하고요, 그런가 하면 묘한 그런 기분까지도 느낄 정도로 그런 상태까지 됩니다.
그러면 사는 참 기분을 느껴요. 그런 정도가 되면 웬만한 망상은 거의 없어져요. 그래서 남을 미워한다든가 남을 싫어한다든가 막 화를 불끈불끈 낸다든가 아니면 어떤 괴로움까지도 다 소멸이 됩니다. 그러면 몸은 아주 가벼워져요. 기분이 좋고요. 그래서 묘한 재미, 행복까지도 느낍니다.
그런 행복이나, 화(禍)의 근본을 퇴치시키고 참으로 바꿀 수 있는 근본은 뭐냐? 바로 안정이래요. 안정만 시키면 행복도 오고요, 안정이 돼야 참으로 화도 멀리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정도가 요즘 그 세상에서 보통 이야기하는 수행법의 정도래요. 웰빙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정도고, 그렇게 마음이 평화스럽고 행복을 느낄 정도, 그런 정도가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는 목적이고 이유래요.
그런데 화두선(話頭禪)에서는 그런 정도에서 사실은 출발해요. 시작이래요. 그래서 화두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애쓰고 노력할 때다, 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께서 그런 정도, 즉 마음이 지극하게 안정이 돼서 일체 번뇌망상이 다 소멸되고 좀 맑고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아주 묘한 법열을 느끼는 그런 정도까지는 꼭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사실 절에 오지 마시라 마시라고 해도 이런 날도 안 올 수가 없어요. 안 오면 자기 손해니까, 오직 그것뿐이라는 그런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시게 될 그런 정도입니다. 그렇게 안정이 된 상태에서 화두가 좀 잘 된다 싶을 때, 아니면 화두가 되긴 되는데 별 진전이 없을 때, 아니면 오늘 저녁처럼 집을 떠나서 전념할 수 있는 이럴 때는 좀 용맹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돼요. 공부가 좀 된다 싶을 때, 그럴 때는 바짝 조이듯이 오직 그것뿐이듯이 막 매달리듯이 애써야 됩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참으로 대단하게 무섭게 막 매달리듯이 애쓰면 의외로 또 쉽게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공부도 그렇게 하듯이 사람은 좀 평범하게 살다가도요, 좀 특별하게 막 무섭게, 막 지독하게 살 때가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즉 특별하게 막 대단하게 살 때가 진취가 있고 큰 이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결을 타듯이 역순경계를 적당하게 헤쳐 나가듯이 자기를 알아서 강약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일도 기회가 왔다 싶거든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그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치듯이 도전하듯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세속에서 ‘기회는 일생에 한 두서너 번 온다.’ 그런 말을 하지요. 그 두서너 번을 놓치면 평생 큰소리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어쨌든 그런 기회는 왔다 하면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놓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하는 분이래요.
그런데 부처님 같은 분은 아주 대단해요. 지독한 고집쟁이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지독하고 아주 대단하고 철저하고 아주 고집쟁이인 분이 바로 부처님이래요. 그래서 부처님의 전생이나 수행담 같은 것 보면 “아, 이런 분도 있구나. 이렇게 대단한 분도 있구나.” 참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지는 그런 장면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피골이 상접해요. 갈비뼈가 다 튀어나왔어요. 그렇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그렇게 어렵고 괴로워도 참고 견디면서 무섭게 용맹정진 했는 거래요. 즉 기회가 왔다하면 놓치지 않았어요. 막 끝장을 보듯이, 막 물고 늘어지듯이, 그래서 남다른 성공을 하신 분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세속에 사시면서도, 이 공부 할 때는 그렇게 하시면서도, 세속적인 일을 할 때나 기회가 오시거든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폴레옹 같은 분 대단하게 느껴지죠. 전기를 보면 참 지독한 사람이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 드는 아주 대단한 분입니다. 그분은 하루 세 시간 이상씩 자지 않았다는 거래요. 일을 하더라도 무슨 일이든지 하면 그냥 막 빠졌는 거래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였었다,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지독하게 일생을 불꽃처럼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황제가 되셨고 훗날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말이 없다.’는 그런 말을 하셨을 거래요.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아주 어렵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수행자는 아무리 어렵고 괴롭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됩니다. 부처로 가는 길은 절대 쉽고 순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참고 견디는 것을 공부로 삼아야 된다. 좋은 도반이나 스승처럼 생각해라.”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무리 능력자라도요 천재성을 가진 분이라도요 참고 견딜 줄 모르면 공덕이 쌓이지 않습니다. 큰일을 절대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꾸준히 참아가면서 노력하고 애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선(禪)하시는 데는 이런 시구가 맞을 때가 있어요. 조선시대 때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조 중에서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로 시작하는 시조가 있어요.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 있는 산이래요. 아무리 높다 해도 하늘 아래 있는 산이라는 거래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오르고 또 오르면, 즉 견성의 고지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산처럼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고지래요.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고지래요.
오르고 또 오르면, 사람은 누구든지 오르고 또 오르면, 한 번 올라서 안 되면 열 번 하고요, 열 번 해서 안 되면 백 번 천 번 하는 거래요. 백 번 천 번해서 안 되면 만 번 십만 번 해요. 올라가다가 미끄러지면 또 올라가고요. 또 미끄러지면 또 도전하는 거래요. 또 못 올라가면 막 미치듯이 애쓰라는 거래요. 그렇게 애쓰다 보면 결국은 올라가게 되는데 참선자들은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하듯이 올라가 보지도 않고 산이 높다고 아예 포기하듯이 화두선도 그런 분이 있어요.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애써 보지도 않고 “아이고, 난 올라갈 수 없다.” 난 못 올라갈 산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수행자는 확고부동한 발심과 신심을 아주 돈독히 해서 애쓰고 애써서 어떻게라도 올라간다는 생각을 하면 의의로 쉽게 또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이 이 공부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 초현통(招賢通)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스님은 육관의 태사가 됐다는 거래요. 육관의 태사란 꽤 높은 벼슬이었던가 봐요. 그러나 남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관직에 올라가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래요. 아주 무상을 느꼈는 거래요. 그래서 당시의 까치 ‘작(鵲)’자 집 ‘소(樔)’자, 작소(鵲樔) 도림(道林)선사라고 계셨는데 그분은 좀 특별한 사람이라 까치집처럼 나무에 얼기설기 집을 지어놓고 늘 거기서 공부하셨다는 거래요.
왜냐? 방 안에서 공부하니까 너무 졸음이 오는 거래요. 그래서 안 졸기 위해서 나무 위에서 했던 분인데, 그 분이 당시 아주 유명한 선사였다는 거래요. 그 선사에게 나아가서 “제가 스님이 될랍니다.”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거래요. “왜 안 됩니까?” “자네는 벼슬이나 해야 돼.” 몇 번 더 가서 간청하듯이 하니까 삭발을 해 주면서 “스님노릇 잘해라.”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그 스님은 너무 고마워서, 그야말로 작소 도림선사의 손과 발이 돼 가지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온갖 시중을 다 해 드리면서 오직 부처님 이상으로 모시고 모셨는 거래요. 그야말로 피나는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도(道) 닦는 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는 거래요. 그래서 주변에서 “아무개가 참 도를 잘 닦는다. 공부를 잘한다.”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그렇게 잘 하셨는 거래요.
그러나 스승이신 작소 도림스님은 16년이 지나도록 “너 공부를 어떻게 하라. 어떻게 하나? 공부가 돼 가느냐?” 한 마디 말도 없는 거래요. 16년간이나요. 그렇게 옆에서 시봉을 잘하고, 그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자기를 위해서 그야말로 희생하고 봉사해도 말 한마디 없는 거래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너무 낙담하신 거래요. 그래서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님에게 “저는 다른 곳으로 갈랍니.” “어디로 갈래?” “제방(諸方)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 그러더니 “불법은 여기에도 조금 있지.” 하면서 담요를 슬쩍 드는 거래요. 담요를 드는 순간 확철대오 하는 거래요. 그래서 어찌나 좋든지 스님 손을 듬뿍 잡고 삼배를 드렸다는 그런 일화가 있어요.
그 16년간이나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고 발심을 시켰는 거래요. 오직, 오직, 오직, 오직 깨치라는 말없는 그런 발심을 시켰어요. 그래서 한순간에 담요를 들어 보이면서 깨치게 했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후에 초현통스님이 그 뒤로도 더 지극하게 더 정성껏 스승을 모셨다 해서 후래 사람들이 포모시자(布毛侍者)다, 즉 ‘담요시자’다, 그런 닉네임을 붙였다고 합니다.
참선자는 16년간이나 그래도 한 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 거래요. 그 사이에 자기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별일이 다 있었을 거래요. 시험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참고 견디면서 그 자체를 공부로 삼았는 거래요. 수행자는 그런 대단함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괴로움도 능히 참을 수 있는 그런 분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초현통스님은 만세의 수도자의 귀감이 되고, 수많은 납자에게 좋은 경책과 법문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참 대단하고 그 무서운 수행을 했기에 값지고 빛나지 않을 수 없었고요, 그 거룩한 수행상은 오늘까지도요,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수행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육신을 다스리기도 어렵지만 옛 선사들처럼 욕됨을 참고, 그 어려운 보살행까지 해 가면서 정진하기는 참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인욕해라.”, 즉 “욕됨을 참아라.” 많이들 강조하셨어요.
부처님 말씀에 “도(道)를 행함에 인욕(忍辱)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하시면서 “참는 미덕에는 계를 지키는 지계(持戒)나 고행(苦行)도 미치지 못한다. 능히 잘 참는 이를 이름하여 대인(大人)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대인, 대인, 보통 말 많이 하는데 능히 잘 참는 분이 대인이래요.
그렇게 참기 어려운 일을 늘 참으면서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해 가면서 그렇게 성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인욕이 제일의 선법이요.” 했습니다. 제일의 선법, 즉 불법이라는 겁니다.제일의 천견(天見)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복의 근원이 된다.” 그렇게도 말씀했습니다. 그런 인욕행이 있어야 걸림 없는 지혜를 갖출 수가 있고요.
부처님의 지혜는 아주 대단한 지혜입니다. 조금도 걸림이 없는 그런 지혜래요. 그런 지혜를 갖출 수가 있고요. 저 언덕을 건너는, 즉 중생계에서 부처계로 가는 그 언덕을 건너는 반야선(般若船)을 탈 수 있으며, 그런 분이 아낌없는 대자비(大慈悲)를 베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욕을 참아가면서도 용맹정진해야 한다는 거예요. 흔히 용맹정진한다, 용맹정진한다 말을 많이 하는데, 진정한 용맹정진은 졸지를 않아야 돼요. 졸지를 않아야 돼요. 그런가 하면 공양한다든가, 용변을 본다든가, 특수한 용무 외에는 일체 용무도 안 보고 오직 공부에만 빠지는 걸 말해요. 공부도 안 되는 공부는 사실은 용맹정진이 아니래요. 성성하고 아주 적적하게 공부가 되는 그런 상태를 용맹정진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맹정진할 때는 흔히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한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한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지독하게 참으로 몸뚱아리까지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을 용맹정진한다 합니다.
즉 공부가 진정으로 애쓸 필요성이 있을 때는 자기 몸을 던져서까지 모든 것을 바쳐서까지 오직 애쓰고 애써도 좋은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옛날 어떤 도인 스님들은 용맹정진할 때는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했다는 그런 분도 있어요. 또 어떤 분은 생사문제를 초탈하는 그런 공부다 해서 ‘생(生)’과 ‘사(死)’자를 써 붙이고 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용맹정진할 때마다 유서를 썼다는 거래요. ‘이번 용맹정진으로 깨치지 못하면 몸을 바꾸고야 말겠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하면서 유서를 써놓고 여덟 번인가 해서 여덟 번 만에 깨치셨다는 일화도 있어요. 즉 그렇게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각오하고, 애쓰고 애써서 참으로 확철대오 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하촌(寺下村)에, 절 밑에 있는 사람들이 “독하다, 독하다, 참선하는 중님보다 더 독할쏘냐.”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선(禪)이 아주 제대로 될 때, 막 성성하고 아주 적적할 때는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날 좀 살려주시오.” 해도 거들떠보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런 때에도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옆집에 불이 났다, 막 사람이 죽어간다 그래도 거기에도 신경 쓰지 말라는 거래요. 심지어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사경을 헤매더라도 거기에도 신경 쓰지 말라는 거래요. 즉 그 정도로 참으로 이 공부를 위해서는 전부를 바치듯이 오직 공부! 공부! 공부를 위해서 애쓰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수좌들을 흔히 냉혈한(冷血漢)이다, 라고 합니다.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래요. 인정머리도. 그런가 하면 철인이다. 막 쇳덩어리 같은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보살행을 하고 자비행을 할 때는 자기 살이라도 뚝 떼어 가지고 보시할 때는 보시하더라도, 오직 이 공부에 미치듯이 애쓸 때는 참으로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정신으로, 할 때는 참으로 애쓰되, 마을에 내려가서도요, 집에서 일도요, 일할 때는 참으로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야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고 남보다 더 앞설 수 있고 참으로 훗날 세상을 움직이는 대단한 사람도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가서 일이 잘 안 되실 때는요, 용맹정진할 때의 생각을 꼭 하세요. 여기서 밤샘할 때 생각을 꼭 해요. 그렇게 하세요. 그래서 안 될 일이 사실 드물 거래요. 지금 마을에 가면 그냥 쉬고 아니면 자는 분들이 많을 거래요. 여러분들은 여기 와서 이렇게 법회를 하고 오늘 저녁에 밤샘할 거예요. 이런 정신으로 나가서도 일하시고 일상생활 하세요. 이런 정신으로 하면 무슨 일인들 안 되겠어요?
어쨌든 공부인은 자신과 공부 자체를 좀 알아서 공부에 강약(强弱)을 두는 것이 좋아요. 그런 강약을 여러분 집에서도 세속에서도 그렇게 두면서 보통정진을 가행정진(加行精進, pra-yoga :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평상시보다 한층 더 정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행정진이라고 함)을 하고요, 가행정진을 하다가 용맹정진 하듯이 강하게 지독한 철저한 모습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독봉 계성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해요. 그분은 무(無)자 화두를 했다고 해요. 늘 무자를 했는 거래요. 그분이 육계라는 곳에서 정진할 때 이야기인데, 그 선사는, 즉 스님이니까 “부모형제도 다 버리고 사람노릇도 마다하고 출가한 승려가 돼서 어찌 편안하게 수행하겠느냐?” 하면서 열심히 아주 용맹정진했다는 거래요.
우리 스님들 출가할 때는 아주 비상하게 출가합니다. 그야말로 세속을 다 버리고 출가합니다. 흔히 스님들은 한참 공부할 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사람노릇도 하지 마라.” 즉 사람으로서 갖춰야 될 가장 기본적인 도리와 인격마저도, 공부할 때는 그것도 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스님이 됐는데 어찌 편안하게 수행하겠느냐? 하면서 아주 열심히 했다는 거래요. 그분은 좀 특별한 분이라, 옷도 아주 허름한 떨어진 옷만 입었다는 거래요. 겨우 참 육신만 가릴 정도였었는 거래요. 옷만 그래 입었느냐? 먹는 것도 늘 배고프게 먹었는 거래요. 일부러 그렇게 먹었는 거래요.
그러면서 대중은 편안하게 큰방에서 자도 자기는 큰방에 한 번도 안 들어가는 거래요. 늘 마루에 의자를 놓고 공부했다는 거래요. 그렇게 연일 힘든 공부를 하니까 얼마나 졸리겠어요? 안 졸려고 별 수단과 방법을 다 하는 거래요. 그래도 어느 날 12시쯤 됐는데 좀 졸았던가 봐요.
졸다가 문득 깨니까 스님들이 죽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는 거래요. 그날로 걸상을 치워 버렸는 거래요. 걸상마저도. 치우고는 늘 다니면서 정진했는 거래요. 그렇게 다니면서 정진하니까 다리가 붓고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괴로워도 늘 서서 정진하다가 하루 저녁은 어찌나 괴롭던지 자신도 모르게 벽에 기대 좀 존 적이 있었는 거래요.
깨어보고는 벽에 기대서 졸았다고 부처님 앞에 가서 엉엉 울면서 참회를 하는 거래요.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지독하게 애쓰고 애쓰니까 공부가 서서히 잘 되는 거래요. 하도 지독하다 해서 독봉스님이라는 이름에 빗대어서 “독종스님이다” 그렇게까지 주변에서 불렀다는 거래요. 그러나 아무리 독종스님이라도, 그처럼 신심이 대단하고 지극하게 애써도 몸이 고되고 졸음이 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 거래요.
그때마다 부처님에게 참회하면서 애쓰고 애쓰더니 공부가 차츰차츰 진취가 있더라는 거래요. 어느 날 마지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그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분은 흔히 주변에서 “저 분은 지독해서 그렇지 여러 가지를 봐도 그야말로 보통사람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조실스님들이 “독봉스님을 봐라. 하면 된다. 너희들 안 해서 그렇지. 그만큼 좀 애써 봐라. 애쓰면 깨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해요.
이 공부는 참고 견딜 때는, 사실 그렇게까지 하기는 좀 어려워요. 그러나 웬만한 것은 참고 견뎌야 공덕이 쌓여요. 참으로 깊은 체험을 하고 훗날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조선조 후기 때 지리산 칠불사에 가면 아자선방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당시에 공부를 애썼던 스님이 한분 계셨어요. 추월 조능(秋月 祖能 1506-1544, 조선 중종 때의 스님, 벽송지엄 碧松智嚴선사의 법맥을 이음)스님이라고 그분도 아주 대단한 스님이었던가 봐요. 대중방에서 사시다가 잠잘 때가 되면 방을 나오시는 거래요. 방을 나와 가지고는 마당을 거닐면서 늘 수행을 했는 거래요.
마당을 거니니까 대중보기가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요, 남들 잠 자는데 너무 극성스럽다, 좀 안 좋게 보일까 봐 거기서 십리쯤 떨어진 쌍계사까지 내려갔어요. 쌍계사 가면 육조(六祖)스님의 정상탑(頂相塔)이 있습니다. 탑에 참배도 할 겸 내려가서 참배하고는 올라오는 포행정진을 계속 했다는 거래요. 처음에는 그냥 내려갔다가 올라왔는데 그렇게 오르내리니까 졸음이 많이 오는 거래요. 그래서 큼직한 돌을 하나 짊어지고 내려가는 거래요. 돌을 짊어지니까 얼마나 무겁겠어요. 가다가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하더라도 계속 그렇게 다녔는 거래요.
그렇게 십년을 하루처럼 다녔는 거래요. 내려가서는 육조스님의 정상탑에 백팔배를 지극하게 하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어느 여름날 밤인데 칠불사 밑의 마을이 범왕리인데 범왕리에서 칠불사로 올라가자면 아주 가팔라요. 거기를 올라가다가는 그냥 졸아버린 거예요. 얼마를 졸다가 어깨가 가볍게 느껴지는 거래요. 뒤를 돌아보니까 호랑이가 돌을 척 받치고 서 있더라는 거예요.
즉 스님이 어찌나 공부를 애쓰던지 그렇게 지독하게 간절하게 밤에도 잠을 안 자고 돌을 지고 오르내리면서 상처도 감수하고 그렇게 애를 쓰니까 호랑이도 무심치 않았는 거래요. 척 받치고 있더라는 거래요.
스님 말씀이 “야, 이놈아! 네가 나를 위해서 받치고 있는 것은 가상하다. 그러나 도인공부 못하게 한 그 죄는 네가 어떻게 받을 거냐?” 막 호통을 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슬그머니 사라지더라는 거래요. 그 스님은 하도 고마워서 공양주한테 부탁해서 누룽지를 매일 얼마씩 얻어 가지고 가까운 곳에 바위 위에 놓으면 조금 있으면 없어지고 없어지곤 하더라는 거예요. 즉 호랑이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즉 공부는 아주 대단한 거라. 지극하게 하면 호랑이도 알아줄 정도로 대단함이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조금 뭣합니다만 저도 좀 신비하게 느꼈던 일이라. 한때 오대산 월정사에서 저 상원사를 오르내리면서 포행정진 한답시고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월정사에서 밥을 싸가지고는 상원사 쪽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다가 공부가 되면 그 자리에서 얼마씩, 심지어 몇 시간씩 서 있기도 하고. 그때는 거기에 차가 전혀 안 다녔어요. 또 다리가 좀 아프면 냇가의 바위가 아주 좋아요. 적당한 데 가서 몇 시간씩 앉아 있기도 하고. 여름에는 물이 참 좋거든요. 한강의 원류입니다.
들어가서 덤벙 목욕도 하고. 옷이 검으면 옷 벗어 가지고 설렁설렁 흔들어서 바위 위에 한 두어 시간만 말리면 꾸들꾸들해요. 입을 만해요. 그러다가 또 배고프면 도시락을 먹곤 했었는데. 어느 날은 상원사에서 내려오다가 월정사로 가는 길인데 길섶 바로 내(川) 사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서 정진을 했어요. 몇 시간을 했어요. 몇 시간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밤인데, 얼마를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으니까 누가 옆에서 이래 콱 차요. 콱 차도 처음에는 보지 않았어요. 그냥 그대로 정진한답시고 앉아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또 누군가 콱 차요. 그래 옆을 이래 돌아보니까 큰 물체가, 나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시커먼 놈이 앉아 있어요. 꿈틀거려요. 아, 짐승이구나 싶대요. 그러자 좀 정신을 차리니까 안개가 자욱해요. 안개에 물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요. 비가 올 것 같아요.
대충 꾸려 가지고 얼른 올라가자 싶어서 월정사로 내려가야 되는데, 제 걸음이 그때도 아주 느렸는데 그날은 얼른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챙겨 가지고 막 뛰어가다시피 갔어요. 막 상원사 올라가니까, 상원사 초당이라고 건물이 있습니다. 초당에 막 올라가자마자 소나기가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래요. 그때 이틀 간이나 비가 그냥 막 퍼부었는 거래요.
그래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이 끊기고 그 마을의 집도 떠나가고 사람도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인가 죽었다고 하는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초월스님 체험했듯이 신비감을 느낍니다. 이 공부의 공덕이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겠는데.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아주 오묘한, 말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을 흔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 드릴까? 이것도 제 이야기인데. 그때 초가을쯤 됐는데, 낮인데 상원사에서 막 내려오다가, 거기 조금 내려오면 화전민이 그때 있었어요. 화전민이 심마니 노릇도 하고, 즉 산삼도 캐고 화전민으로 사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화전민 집이 바로 길섶에 있어요. 그 집을 지나니까 여인의 울음소리가 아주 참 슬프게 울대요. 너무 슬프게 들립디다.
그냥 우는가 보다 하고 지나가서 삼일쯤 뒤인가 절에서 들으니까 그 집의 남편이 죽었다는 거래요. 아이가 육남매인데 그날 죽었는 거래요. 그래서 살길이 막연하다고 하면서 원주스님이 쌀을 한말 가지고 내려가시대요. 그러고 한 이십 일쯤 지났을까. 그 집 옆을 또 지나는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지 애들이 막 싸워요. 울고불고. 조금 있다가 그 어머니 되는 여자 분이 나오대요. 그 여자 분을 만나자마자 내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어요.
그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한 달포 전쯤, 오대산에 가면 조개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요. 조개계골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대요. 조개골을 들어가다 보니까 입구에 집이 몇 채 있고 그 위에는 집이 없어요. 다 소개되고. 집 뒤로 한참 올라가니까 묘가 두 기가 있어요. 묘 옆에 앉아서 정진을 좀 하다가 거기서 도시락을 먹었어요.
먹고 앉아 있는데, 정진한다고 앉아 있는데 저만큼 뭐가 하얗게 보여요. 뭔가 봐도 모르겠어요. 얼른 일어나 가지고 가 보니까 하얀 뱀 새끼가 두 마리가 엉켜있어요. 백사래요. 한참 이래 보니까 신기해요. 보고는 또 앉아서 공부를 했어요. 한 두어 시간은 했을 거래요. 하고는 일어나서 몸을 좀 푼다고 좀 왔다 갔다 하다가 보니까 아직도 있는 거래요. 자상하게 보다가는 문득 생각이 나는 거래요.
“백사 옆에는 산삼이 있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산삼 생각이 나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봤지요. 그런데 한족 구석진 곳에, 산삼은 삼지 오엽이래요. 가지가 세 개 나고 잎사귀가 다섯 개래요. 그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삼을 한 번도 안 봤어요. 그런데 직감적으로 산삼이다 싶어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옆에도 두 포기가 더 있는 거래요. 그래도 난 뭐 산삼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캐고 싶은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보고는 그냥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보니까 그 생각이 문득 들어요. 그래서 내가 그 보살한테 저기에 캘 게 있다고 하니까, 아 그러냐고. 호미를 가지고 나오라고. 그래 거기서 한 십리는 떨어졌을 거래요. 데리고 가가지고 내가 산삼을 가리키니까 깜짝 놀라면서 막 가가지고 확 이렇게 부둥켜안으려고 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 나를 보더니 캐도 되냐고 물어요. 아, 캐시라고. 그렇게 캐는 걸 보고는 나는 그냥 내려왔어요.
그분이 그날 그 주변을 샅샅이 봤겠지.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봤겠지. 일곱 뿌리나 캤는 거래요. 진짜 산삼인 거래요. 한 뿌리는 삼백 몇 년이나 된 그런 산삼이었어요. 서울의 종로5가에 가서 감정을 하니까 한 뿌리는 삼백 몇 년 됐다고 하대요.
그때 한진고속의 조중훈씨가 월정사 법당 짓는 데 시주를 많이 했습니다. 거의 그분이 짓다시피 했어요. 그분이 산삼도 오대산 산삼이 좋다 해서 산삼 백년짜리 한 뿌리만 누군가 캐 주면 고속버스 한 대를 주겠다고 했었는 거래요. 고속버스를요. 그 보살이 일곱 뿌리를 팔았는 거래요. 나중에 이야기가 들리는데 고속버스 세 대 값을 받았다는 거래요. 하루는 나한테 삼산 다 판 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나는 필요 없으니까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그랬더니 훗날 서울로 이사도 하고 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어쩌다가 상원사에 오면 한 번씩 들르곤 했던 그런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산삼도, 요즘은 그 산삼을 발견하면 내가 먼저 먹을 것 같아요. 그러니 안 보이는 거라. 그 때는 참 순수했어요. 그런 걸 전혀 생각을 안 했어요. 순수하고 때 묻지 않고. 남들이 볼 때는 어쨌는지 몰라도 내 자신은 그랬어요. 그렇게 좀 맑고 깨끗하게 사니까 보였는 거래요.
수행은 보통사람이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특별한 대단함이 있습니다. 훗날 공부가 잘 돼서 신통한 그런 경계 같은 것도 느끼면 참 “오직 이것뿐이다, 이건 뭐 안 할 수가 없다. 막 밀어내도 아무리 말려도 할 수밖에 없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참으로 애쓰면 대단한 것을 체험할 날이 있을 겁니다.
과거세에 저 설산(雪山)에서 중생과 도를 위해서 공부했던 설산동자라는 그런 분이 계셨다고 해요. 아주 열렬한 구도자라. 설산동자가 오직 도만 참구했어요. 도를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던 대단한 분이래요. 그래서 제석천이 저 설산동자가 과연 도를 구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냐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석천이 그 무시무시한 나찰의 얼굴을 해서, 나찰의 얼굴이지만 아주 유창하게 부처님의 계문을 설하는 거래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이것이 바로 나고 죽는 법이다.” 아, 그 유명한 게송을 설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설산동자는 그 게송만 들어도 그렇게 좋은 거래요. 기분이 보통 좋은 게 아니래요.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그러한 게송을 읊을 만한 선인(仙人)이 안 보이는 거라. 나찰만 보이는 거래요. 그래서 나찰한테 “당신이 설했느냐?” “그렇다.” “그 뒷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알려줄 수 없겠는가?” “그건 안 된다. 당신이 만약에 그것을 참으로 듣고 싶거든 당신 살을 좀 다오. 나는 사람 살만 먹는 사람인데 한 사흘을 굶었더니 내가 지금 너무 힘이 없다. 힘이 없어서 설할 기력마저도 없다. 나에게 살을 주면 설해주겠다.” 그러는 거래요.
그래서 설산동자는 “그러면 좋다. 설해주기만 해라. 그러면 내 몸 전체를 당신에게 바치겠노라.” 합니다. 그래서 설산동자가 입었던 옷을 쫙 펴 놓고 앉으라고 하고서 자기는 앞에서 합장하고 반게(半偈, 나머지 게송)를 듣는 거래요.
반게를 들으려고 하니까 “당신이 참으로 진심이냐? 여덟 자를 위해서 당신 육체를 나한테 바쳐서야 되겠느냐? 그러지 말라.” “그래도 좋다. 어쨌든 반게, 즉 시구(詩句) 반만 설해 달라. 그러면 내가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겠노라.” 하니까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게송이죠? “생멸이 이미 멸해 버리면 적멸이 곧 낙이 된다.” 아주 유명한 게송입니다. 이것을 설하니까 “좋다.” 그러면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막 떨어지려고 하는데 나찰이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해서 받았다는 그런 일화가 있어요. 부처님의 전신 이야기인데 부처님의 전신도 그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은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는 도를 위해서는 몸을 잊으라는 거래요. 몸을 바치라는 거래요. 아무리 바쳐도 부족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흔히 인생과 청춘을 송두리째 바치라는 거래요. 이런 말은 보통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쳐도, 그렇게 전부를 던져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도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영명 연수(永明 延壽, 중국 송나라 때)선사라고 아주 유명한 승려인데, 그분 말씀에 “가령 화두를 참구해서 철저히 깨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귀에 스침이나마 영원히 도의 씨앗이 될 것이니 세세생생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즉 지옥,아귀,축생 같은 나쁜 세상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잃지 않으며, 화두를 잘 하면 내 생에는 잘하지 못하더라도(그런 뜻도 있습니다.) 사람 몸은 잃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치게 되리라.” 했습니다.
화두는 정신을 아주 맑게 합니다. 아주 초롱초롱하게 해요. 즉 천재성을 발굴하는 것이 화두이기도 해요.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대지혜를 갖출 수가 있는 것이 바로 화두인데. 그래서 다시 태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치게 되리라, 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공부가 이 공부입니다. 그런 공부의 공덕은 말로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이것은 누구도 표현이 불가능해요. 자기가 실제 체험해 봐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늦게 여기까지 온 이 공덕과 참으로 용맹정진해서 그 공덕과, 그런가 하면 여러분이 늘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고, 애써서 참으로 화두를 타파하면 그건 뭐 금상첨화이고. 설혹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좋은 공덕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고요. 이 공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공부에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꼭 느끼시고 참으로 사람으로서 갈 길을 바르고, 좀 제대로 아주 원만하게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그렇게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면서 애쓰셔야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공부가 된다 싶을 때, 또 공부가 되는 듯해도 좀 미적지근할 때,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공부의 한계를 느낄 때, 나는 발심이 안 됐다, 나는 신심이 돈독하지 못하다, 아니면 나는 신도다, 아니면 근기가 하열한 여성이다, 등등의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일수록 할 때는 참으로 기회가 왔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떻게라도 붙들고 늘어지듯이 애쓰면 의외로 또 쉽게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흔히 여기 보살님들은 “우린 여자니까, 보살이니까 어렵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흔히 있는데, 여성은 여성 특유의 장점 중의 장점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바로 모성애래요. 그걸 발굴하세요. 그걸 계발하세요. 그럼 남성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의식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도 했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라는 거래요.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못하는 공부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애쓰고 애쓰면서 참고 견디면서 때로는 화끈하게 용맹정진해서 여러분의 공부가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즉 성성하고 아주 적적해서 인생의 참 보람과 행복을 꼭 느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7강- 용맹정진하라(2007년 7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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