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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참구법 제 4강 / 화두참구의 3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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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19 조회4,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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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부터 10월까지 큰스님께서

법문하여주신 초보자를 위한 화두참구법 가운데

네번째 강의내용입니다.

법문 전문을 올리오니 귀담아듣고 새기어

일생의 큰 공부 삼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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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 날씨가 따뜻했지요. 봄기운이 일어나듯이 화두가 잘돼서 맑고 향기롭고 행복을 누리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화두참구의 3요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화두참구의 요령은 간절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화두참구는 아주 간절하게 들어야 돼요. 화두가 “간절 간절해서 막 눈물이 날 정도로 아주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 안 해서는 안 될 것처럼 꼭 해야 될 것처럼 반드시 해야 될 것처럼 그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절실한 것이 화두래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화두다”, 그래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왜냐?, 여러분의 인생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고요,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되게 하고요, 인생대사인 생사까지도요, 여러분 자신이 태어나고 죽는 가장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사실은 화두에서만 느낄 수 있어요. 즉 도(道)에서만 느낄 수 있어요. 화두(공부를 해서) 진정한 행복을 못 느끼면 흔히 “행복을 말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행복, 말만 들어도 사실은 설레는 말입니다. 누구나 가장 바라고 소중한 말 중에 하나가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왜 사느냐? 물으면 행복을 위해서라는 사람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행복에 둔다는 것이래요.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찾는 늑대다”, 라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늑대는 아주 교활한 그런 동물이라고 해요. 그 늑대처럼 행복을 위해서 온갖 교활한 짓을 다 하는 것이 인간이란 것이래요. 그러나 늑대처럼 행복을 위해서 교활한 행동을 다 해서 얻는 그런 행복, 그런 행복을 흔히 ‘보통 행복이다’, 합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그런 행복, 그런 행복은 그냥 보통 평범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인데 그보다 더 큰 행복, 즉 진정한 행복, 큰 행복은 도(道)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화두는 깨달음을 열어서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를 깨달아서요, 부처가 되어서요, 부처란 가장 완성된 가장 완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생 대사 중에 대사인 생사(生死)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대사가 무엇이겠어요. 인생대사란 뭐니 뭐니 해도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입니다. 이 일은 큰일 중에 큰일이라, 가장 큰일이 바로 생사문제입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하셨습니다. 유위법(有爲法)이란 인연에 의해서 생멸(生滅)하는 현상계의 일체 존재를 말합니다. 즉 “모든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幻像)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은 줄 알아야 된다”,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근본이 허망해요. 그래서 결국은 꿈과 같이 사라지는 존재이고요. 이 환상과 같이 헛된 존재이라, 거품과 같이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없어지는 존재이고요, 그림자와 같이 실체가 없는 그런 존재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중에서는 젊고 건강하다고 무상(無常)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도 이 순간에도요, 죽음으로 향하고 있어요. 저기 예쁜 얼굴의 아가씨가 있는데 저런 예쁜 아가씨도 지금은 뭐 전연 주름이 없는 것 같지만 잔주름이 보이지 않게 서서히 늘어나고 있어요. 저 까만 머리도 하얗게 세어지고 있습니다. 저 힘찬 허리도요 활처럼 휘어지고 있어요. 넘치는 기력도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 이 몸뚱어리래요.

 

무상(無常)은 인간의 실상을 가리키는 예지의 언어라, 사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요. 부처님 말씀에 사람의 목숨은 찰나에도 구백 번을 생멸한다 했습니다. 그 구백 번을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는 거래요. 그래서 천하장사 영웅호걸이라도요, 숨 한번 들이켰다 내쉬지 못하면 바로 내생이래요.

 

이 참으로 허망한 것이 이 몸뚱어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무상하고 허망한 줄 알아서요,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오직 화두뿐이라는 간절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사실 화두가 안 되는 상태에서 간절한 마음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두가 돼서요 몽중에서, 즉 꿈속에서도 여여한 상태, 한결같이 들리는 상태나 깊은 잠에서도, 즉 숙면에서도요 여여한 상태, 변하지 않고 늘 들리는 그런 상태가 되면 “아, 생사가 둘이 아니구나! 본성은 죽지 않고 영원하구나!”,라는 느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정도 되면 참으로 오묘한 그런 희열도 느껴서 참으로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이 이것이로구나,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화두하는 참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껴요. 뭐 그 정도 되면 어디가 ‘아프다 괴롭다 찌뿌둥하다’, 웬만한 병은 저절로 다 나아요. 화두가 안 돼서 그렇게 들끓던, (참 옛 어른 말씀처럼) 가마솥에 물 끓듯이  들끓던 번뇌망상도 다 소멸이 돼서요, 아주 고요하고 고요해요.

 

어느 정도 고요하냐? 심장의 맥박까지도 아주 느리게 뛰는 것 같아요. 그렇게 고요해요. 그런 정도가 되면 어쨌든 화두 하는 진정한 보람과 긍지와 그런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 법열(法悅)만 느끼면 그런 희열만 느끼면 아, 오직 화두뿐이다, 화두를 하지 말라 말라 해도 안 할 수가 없어요. 오직 화두에 절실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저번 시간에 또한 마음공부는 마음이 문제이고 성의가 문제라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화두참구는 진심으로 해야 하고 성심성의껏 해야 합니다. 화두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얼마나 성심성의껏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진심으로 발심해야 된다고 했어요. 참선자는 이 일이 가장 큰일이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이 일뿐이라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해요. 그래서 이것만은 반드시, 반드시래요,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인의 말씀에 마음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했습니다.

 

어떤 선사는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하신 분도 있어요. 이 발심만 하면 화두는 저절로 된다는 거래요. 흔히 화두가 안 된다 안 된다 화두 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발심이 안 된 상태에서 그걸 하기 때문이래요. 화두 할 그릇이 안 되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진정한 발심자는 어찌 화두 안 되는 것을 고심할 것이며, 어찌 깨치지 못할까 걱정하겠어요. 어찌 생사문제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래서 화두참구는 열심히 하고 성심성의껏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라 하셨습니다. 정성이 감응하면 능히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하셨어요. 또 어떤 경전에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하라, 지극한 마음으로 하면 능히 구하는 바를 얻는다”,고도 하셨어요. 도를 구하고 마음을 닦는 데는 지극한 마음과 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이 세상의 보통 일은 예사롭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는 달라요. 마음공부는 마음이 문제라 이 공부는 참으로 대단한 마음을 내면 의외로 바로 될 수가 있는 공부가 이 공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심을 못하고 성의 없이 형식적으로 흉내 내듯이 그렇게 하면 어렵고 어려워요. 그런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화두참구는 한결같이 끊임없이 쉬지 말고 즉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하는 것이 향상하는 길이다, 그런 말씀도 드렸어요. 이 화두참구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요, 한결같이 물 흐르듯이 쉼 없이 꾸준하게 지어가야 돼요. 화두로 가고 화두로 오고, 화두로 먹고 화두로 일하면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화두를 떠나지 않아야 돼요. 그러다가 심지어 깊은 잠에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늘 집중해서 몰입하니 어찌 견성하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화두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댁에서도요, 일할 때나 공부할 때나 매사에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도 조그마한 일도요, 즉 사소한 일도 예사롭게 하지 마세요. 아주 간절하게 하고 성심성의껏 하고요, 한결같이 그래 하세요. 그래 하면 조그만 일이라도 공덕이 쌓이고 그래서 결과는 대단한 그런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화두를 하고 살아도 잘 안 되시는 분은 서원을 꼭 세워보십시오. 일생의 서원을요. 서원이란, 자기 일생의 서원을 맹세코 반드시 이루어야 말겠다는 원을 불보살님에게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못났다, 나는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일수록 서원을 세워서 서원을 향해서 아주 노력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서원은 일생의 원이래요. 바로 목표입니다. 불자라면 견성성불, 자기의 성품을 봐서 부처가 돼어서, 불도를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그런 원을 세워야 됩니다.

 

여러분은 가정을 가지고 식구를 이끌어야 되니까 세속적인 일생의 서원도 한번 세워보십시오. 그래서 그 서원을 향해서, 즉 목표를 향해서 꾸준하게 노력하고 애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서원이 없는 사람은 오늘 가셔서 지금이라도요 바로 세워서 그 목표를 향해서 일생을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원(願)은 목표요 꿈이래요. 그것을 희망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바로 인생의 포부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꿈과 희망이 충천해야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 건강에 관계없이요 남녀노소도 불문하고요 희망과 포부가 막 불타야 돼요. 눈매는 고양이가 쥐 잡듯이 초롱초롱하고요.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쥐구멍 앞에 딱 버티고 앉아서 꼼짝 않습니다. 나오기만 나오면 그냥 처치하려고 잔뜩 노려보고 있어요. 그런 고양이가 쥐 잡으려고 잔뜩 노려보고요, 초롱초롱한 눈초리로 막 기다리고 있듯이 또 양 어깨는 천하를 책임지듯이 막 힘차게요.

 

여러분의 양 어깨로 우주법계의 천하를 책임질 듯이 좀 힘차게 가지세요. 가슴은 뜨겁고 설레야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어서 설레야 돼요.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내일이 없어요. 그런 사람은 기대할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그런 꿈과 희망이 위대한 사람을 만들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설사 업(業)이 좀 두텁더라도 그 두터운 업도 녹일 수가 있는가 하면, 질병이나 재앙에 허덕이고 죄악으로 설혹 괴로워 하더래도요, 좋은 약과 같은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연세가 높고 중병이 든 사람이래도 절대 서원의 꿈과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서양의 어떤 철학자(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 1632.11~1677.21)가 “나는 내일 이 세상이 다한다 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내일 이 지구 땅덩어리가 다 없어진다고 하더래도요, 사과나무를 심는 거래요. 마지막까지 애를 쓰고 노력하는 거래요.

 

미국인 중에 클라크 박사(William Smith Clark, 1826.0 – 1886.3)라는 분이 계셨다고 해요. 그분이 1차대전 때 일본의 삿포로 농대를 떠나면서 유명한 말을 남기셨다고 해요. "Boys, be ambitious!"(보이스 비 앰비셔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했답니다. 여러분께서도 비록 나이가 많고 연세가 높은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소년들처럼 야망을 가지십시오. 즉 발심을 하세요.
 
우리 스님들 중에 돌아가실 때 앉아서 꼿꼿이 앉아서 정진하는 자세로 돌아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그 모습을 흔히 좌탈입망(坐脫立亡)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분은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느냐, 마지막까지 숨이 딸깍 그치는 그 순간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자세로 계시다가 가시는 거래요. 참 그 대단하지요.

 

보통사람은 돌아가실 때 되면 며칠 전부터 인사불성이래요. 나무장작개비 같습니다. 그런 것이 보통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래요. 그런데 선사들은 마지막까지 화두를 안 놓치는 거래요. 숨이 딸깍 그치는 순간 화두가 놓쳐지면서 그대로 굳어지시는 거래요. 앉은 자세로 죽는 모습이 바로 좌탈입망이래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애써도 좋은 것이 바로 수행이고 인생이래요. 어쨌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한결같이 해도 안 되시는 분은 서원을 세워서 대신심(大信心)을 일으켜보세요. 대분심(大憤心)을 일으켜보시고요, 대의심(大疑心)을 내보세요.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을 흔히 화두 참구의 3요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화두가 안 되시는 분은 이 3요소를 참으로 대단하게 내시고 일으켜보십시오.

 

첫째는 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대신심을 가지세요. 불교철학의 진수라고 하는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다(信爲道元功德母 신위도원공덕모)”,고 했습니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 돼요. 그런 믿음이 모든 공덕을 쌓는 어머니처럼 된다는 거래요. 그러므로 믿음은 일체선법(一切禪法)을 기르느니라, 했습니다.
 
이 지도론이란 책을 보면 “믿음으로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고, 지혜로서 걷는다” 했습니다. 종경록에는 “불법을 구하는 이가 큰 신심이 있다면 훌륭한 보배를 얻을 것이나, 신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리라” 했습니다.

 

도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이 납니다. 진정한 믿음으로서만이 큰 공덕을 쌓을 수가 있고 불법(佛法)의 대해(大海)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 말씀에 “세상 사람은 쌀이 양식이지만, 도를 닦는 사람은 믿음이 양식이다”, 하셨어요. 양식이 없으면 굶어죽듯이 믿음이 없는 수도자는 이미 수도자가 아닙니다.

 

깊은 믿음이 있어야 깊은 신근(信根) 즉 깊은 믿음의 뿌리가 생기고요. 깊은 신근과 깊은 믿음의 뿌리에서 실력이 납니다. 믿음의 힘이 납니다. 신근 없이 신앙의 힘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신앙의 힘은 신심의 뿌리가 튼튼할수록 무한의 힘이 생깁니다. 신앙생활에서 믿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그런 일이나 상식을 초월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 신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자기의 본성과 불법과 화두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져야 돼요. 백퍼센트 믿어야 돼요. 아니 백 퍼센트 이상 완전하게 아주 완전하게 믿어야 됩니다. 믿되 무엇을 믿느냐,?

 

참선자는 첫째 불성 즉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성품에 대해서 확신이 서야 합니다. 참선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저한 그런 믿음을 가져야 돼요. 어떤 사람이든 “마음은 본래 부처다”, 즉 시방세계 불보살, 역대조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확고부동한 그런 믿음을 가져야 돼요.

 

참선자는 비록 현재는 모양의 차별이 있고 능력의 차이가 있고 또 쓰는 덕행과 수용하는 수명의 차이가 있더래도요, 자신의 근본 바탕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나도 본래는 부처였다, 본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는 그런 확신에서 바로 참선 시작이 돼야 됩니다. 또한 그 본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멸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어떠한 곳에서도 때 묻거나 더러워지지 않아요. 항상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는 불법에 대한 확신이래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5년간 아주 고구정녕(苦口丁寧, 입이 쓰도록 당부하고 당부하다)하고 아주 노파심절(老婆心切)하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흔히 성언(聖言)이다 합니다. 그 성스러운 말씀을 정리한 것이 바로 12부경전이래요. 그 12부경전은 위없이 높고 깊은 아주 미묘한 법이라 그 법문이 생사를 요달하고 윤회를 벗어나는 진리의 말씀임을 철저히 믿어야 됩니다.

셋째 화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돼요.

 

화두는 옛 조사스님들이 깨달음을 열은 진리를 보여준 법문이래요. 화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지견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지견이 그냥 드러난 말씀이라, 천하 선지식의 안목이 드러난 아주 심오한 말씀이래요. 그래서 그것은 이치나 생각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언어나 문자로도 알 수 없습니다. 알음알이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것은 오직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참선자는 화두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아주 온전히 믿어야 됩니다.

 

화두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불신한다든지 반신반의하는 그런 마음이 없어야 돼요. 화두가 조사가 설한 화두인가? 화두로 공부하면 과연 견성할 수 있을까? 공부가 조금이라도 안 되면 화두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망상을 피웁니다. 그러나 화두에는 일체 분별심과 사량심을 안 붙여야 돼요. 조금도 불신하는 그런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화두를 하다가 화두가 잘 안 되면 이런 망상 저런 망상 별 망상을 다 붙여요. 심지어 잘하고 있는 화두까지도 의심하고 망상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체 망상을 붙이지 않아야 돼요. 그래서 화두를 불신하는 조그마한 마음도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화두를 불신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 자체를 의심하고, 분별심을 낸다면 절대 진의(眞疑)가 일어날 수가 없어요. 진의는 굳건한 믿음의 바탕에서만 오직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강철 같은 굳은 신심으로, 생철로 된 사람같이 철저히 믿고 수미산과 같이 흔들림이 없어야, 즉 그런 불굴의 정진력을 일으킬 수 있어야 흔들림이 없는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흔히 참선자 중에서는 화두가 안 된다, 의정이 안 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온전하고 결정적인 그런 믿음이 없이 의정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진정한 의정을 일으켜서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라 말 어느 날이었는데 한 더벅머리 총각이 즉 강원도 강릉에 가기 위해서 대관령 고개를 넘다가 길섶 숲속에 한 노스님이 발가벗고 앉아 계시는 것을 봤어요.

 

“스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네.”
이 청년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해하자 스님은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이 숲속에 있는 모기와 벌레들에게 내 몸과 피를 먹이고 있다네.” 했다는 거래요.

 

모기와 벌레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다니 못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그 노스님의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은 그 청년은 스님을 따라서 오대산 월정사로 입산을 했다는 거래요. 이 노스님이 누구냐하면 중국에서까지 동방 대보살로 존경을 받으면서 구산선문(주 :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종(禪宗)을 산골짜기에서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 중에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 : 통일신라 말 무염(無染)이 충남 보령시 성주사(聖住寺)에 개창한 산문. 구(九)산문의 하나로서, 2,000여 명이라는 당대 최대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제자로 대통(大通)·심광(深光)·자인(慈忍)·여엄(麗嚴)이 있고, 심광의 제자에 현휘(玄暉)가 있다)을 일으킨 무염(無染 801∼888)선사이고 그 청년은 훗날 유명한 구정(九鼎)조사가 됩니다.

 

이 청년이 자신도 수행자가 되겠다고 하니 노스님은 행자에게 인욕과 하심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방편을 써봅니다. “행자야, 도 공부는 밥은 먹으면서 해야 된다. 밥을 지어야 되겠는데 우선 저 솥이나 잘 걸어보거라.” 하는 거래요. 행자가 보기에 솥은 제대로 걸린 것 같았어요. 그러나 큰스님의 말씀이라 하루 종일 걸려서 솥을 잘 걸었어요.

 

저녁 어스름해서 절에 들어오신 큰스님은 솥 걸어놓은 것을 보더니 당장 호통을 치시는 거래요.
“네 이놈, 이걸 솥이라고 걸었느냐, 그런 정성으로 도 닦으러 입산했느냐, 밥값도 못하겠구나.” 하셨다는  거래요. 다음날은 날이 새자 바로 솥 걸기를 시작했다는 거래요. 그날도 땀을 흘려가면서 성심성의껏 걸었습니다. 그러나 노장님이 보시더니 노발대발하면서 막 꾸중만 하시는 거래요.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정성껏 걸었으나 야단만 치시는 거래요. 무려 아홉 번째 솥을 다시 걸었을 때야 겨우 꾸중을 면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거래요.

 

“흠흠, 네 놈은 좀 쓸 만하구나.”


멀쩡하게 잘 걸려 있는 무쇠솥을 아홉 번이나 새로 걸게 해도 조금도 불평 없이 이 스승의 뜻을 고스란히 따르는 행자는 훗날 구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어요. 아홉 구자 솥 정자, 솥을 아홉 번 걸었다 해서 구정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런데 구정은 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완전 까막눈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행자들처럼 경전을 읽거나 염송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를 가엾게 여겼던 어떤 도반 행자가 큰스님 친견하기를 권합니다. 구정은 도반이 시키는 대로 무영 선사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큰스님께서
“즉심이 불(卽心佛)이니라.” 했어요. 즉 마음이 곧 부처니라 했어요.

 

그런데 워낙 무식한 구정인지라 ‘즉심이 불’이라는 스승의 말을 ‘짚신이 불’이라는 말로 알아듣고 말았는 거래요.

짚신이 불(佛)이라고? 짚신이 부처라고? 짚신이 어떻게 부처일까? 처음에는 의심이 되기도 했으나 워낙 스승을 지극하게 믿고 존경하는 구정인지라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래요.

 

우리 스님은 부처님인데 허튼 말을 하실 리 없어. 가장 분명한, 가장 좋은 아마 법문일 거야, 그렇게 믿는 거래요. 구정은 이렇게 생각하며 짚신이 불이라고 막 철저히 믿는 거래요. 그날부터는 짚신을 안고 다니기도 하고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고 선반에 올려놓기도 하고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오직 참구를 한 거래요.

 

“짚신아, 짚신아, 어째서 부처이냐, 어째서 네가 부처이냐,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가?”
의심을 놓을 줄 모르고요 오직 의심에 의심을 했다는 거래요.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구정은 산에 올라가요. 나무를 한 짐 해놓고 쉬고 있었습니다. 구정은 짚신을 벗어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짚신아,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 어째서 네가 부처냐?” 의심에 의심을 하다가 문득 삼매에 든 거래요. 얼마를 지났을까, 구정은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앉았는지 서 있는지도 산인지 절인지도 모르고 깊은 선정에 빠져 오뚝하게 앉아 있을 뿐이래요.

 

이때 홀연히 불어오는 바람에 지게가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짚신의 끈이 걸려서 뚝 끊어지고 맙니다. 그 순간 구정은 확철대오해요, 크게 깨치는 거래요. 구정은 잠시 후에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막 큰소리로 우하하 웃으며 춤을 췄다는 그런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방 주변에 떠도는 이야기래요

 

즉 믿음만 철저하면 짚신이 불이라고 한들 깨칠 수 있어요. 믿음은 그렇게 대단해요. (주: 오대산 가운데 동대산 만월봉 팔부능선에 관음보살을 모신 암자인 동관음암이 있다. 오대산에 있는 사찰 대부분이 자장율사와 관련되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성덕왕 때 보천(寶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동관음암 역시 마찬가지다. 그 후 동관음암의 역사에 알려진 바가 없고 신라말 무염(無染 801∼888) 선사가 머물 때 구정선사 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오고  위와같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근기도 하열하거니와 남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큰 병통입니다. 그러나 공부인은 선지식의 일언반구에도 믿음을 확실하게 가져서 조금도 의혹이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 콩을 팥이라고 해도 믿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종경록(宗鏡錄 : 북송 北宋의 법안종法眼종에 속하는 영명 연수(永明延壽)스님의 저서로서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승불교의 경론 60부와 중국·인도의 성현 300인의 저서를 비롯해 선승(禪僧)의 어록·계율서·속서 등을 널리 인용 방증했다. 그 내용상의 뜻은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心外無佛), 온갖 것이 다 법(觸目皆法)'임을 나타내고 있다)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은 천불(天佛)이라도 구제할 수 없다”, 천불의 부처님이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거래요.

 

가령 몇 만도나 되는 뜨거운 태양을 차게 하고 차거운 달을 뜨겁게 한다고 할지지언정 부처님의 말씀은 털끝만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니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조금도 불신하는 마음이 없어야 돼요.

 

그래서 옛 선사 말씀이 만약 능히 “신심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견성성불을 못하겠는가?” 했다고 해요. 신심만 돈독하면 견성성불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거래요. 그 유명한 중봉 명본(中峰 明本 1263-1323) 스님이라는 큰스님께서는 “설사 이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신심만 퇴진하지 않으면 한두 생을 넘지 않고 누구나 깨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화두가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을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참선자는 철저한 믿음을 가져서 화두에 대한 간절한 마음뿐이어야 됩니다. 확고한 믿음 없이 불법의 대해를 건너려고 하는 것은 한갓 수고로운 일뿐이래요. 그렇게 해서 얻은 공덕으로 무엇을 깨치겠다. 그리고 화두가 좀 잘돼서 그야말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겠다는 마음도 이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화두가 안 되는 분일수록 철저하게 믿고 완전히 대신심을 내보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화두가 안 되는 사람은 분심을 일으켜보세요.

 

염불하는 것이 뭐꼬?, 어째서 삼서근인가? 여러분이 한번 일러보세요. 옛 어른들은 대답을 못하면 밥값도 못한다 했어요. 옛날 선지식 중에는 몽중일여가 안 되면, 꿈속에서도 화두가 여여한 한결같이 들리는 상태가 안 되면 참선자 취급도 안 했어요. 어떤 분은 아예 상대도 안 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면서 또 한편 몽중일여가 되어서 점검해서 되면 갈 때는 여비도 두두룩하게 주셨다는 그런 일화도 있습니다.

 

어쨌든 참선자가 화두가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화두는 참선자의 생명과 다름이 없어요. 한순간이라도 화두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주 괴롭게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나만 못한단 말인가. 막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의 치라도 떨면서 몸부림을 쳐보세요. 때로는 식음까지도 막 전폐하면서요. 깨치지 못한다면 죽을 각오까지도 하면서요. 용맹 용맹정진해보세요. 옛날 스님들 중에서는 화두가 안돼서 몸을 바꿔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실제 몸 바꾸려고 했던 그런 분까지도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주리반타카라는 출가승이 계셨어요. 근데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어요. 저능아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뭘 가르치고 시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참 답답하고 참 안타까워 주리반타카에게 동정어린 말씀을 내리십니다.

 "주리반타카야, 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항상 ‘쓸고 닦으리’, ‘쓸고 닦으리’ 만 해라."

 

쓸고 닦으란 말은 마음의 때를 쓸고 마음의 때를 닦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 ‘쓸고 닦으리’만 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쓸고’ 하다가는 ‘닦으리’를 잊어버려요. ‘닦으리’를 하다가는 또 ‘쓸고’를 잊어버려요. 그렇게 참 답답한 그런 사람이지만 주리반타카는 끈질긴 아주 끈질긴 분이었어요. 때묻지 않은 그런 사람이고요.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시키는 그대로 하시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래서 시키는 그대로 그야말로 끈질기게 고집스럽게 하니까, 결국 일념이 되고 무심의 경지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의 선근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해서 참 바보요, 저능아라 부처님이 그렇게 안타까워하시고 또 대중에게 심지어 놀림까지도 받던 주리반타카도 아라한과를 증득했어요. 즉 이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거래요. 그래서 부처님은 의심만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근대 고승인 만공 스님께서는 장맛만 알아도 깨칠 수가 있다. 즉 장맛이란 장이 쓰고 맵고 덤덤한 그 장맛, 그 장맛만 알아도 이 감각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어요. 그런 장맛만 알아도 깨칠 수가 있다는 거래요. 즉 누구나 깨칠 수 있다는 거래요. 그런데 깨치지 못하는 것은, 화두가 안 되는 것은 제대로 안 해서라는 거래요. 그래서 안 되는 분은 자기가 안 할 뿐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분심을 일으켜보세요. 분심도 대분심을 일으켜보세요. 그래야 큰 의정을 일으킬 수가 있고 큰 의정을 일으켜야 크게 깨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다문제일이라는, 즉 가장 많이 들으셨다는 아난 존자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이 계실 때는 깨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수제자인 마하가섭 존자가 좌장이 돼서 기사굴산(칠엽굴이 있는 산이름)에서 경전을 일차 결집할 때 참석을 거부당합니다. 그 아난 존자는 부처님을 무려 25년간이나 그림자처럼 모셨다는 거래요. 이 아난 존자는 기억력도 아주 출중해서 부처님이 언제 어디서 몇백 명의 대중에게 무슨 법문을 했다는 그 내용까지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런 제자래요. 그런데 깨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당했는 거래요.

 

아난 존자는 크게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침식마저도 포기하고요 오직 정진 정진 정진 막 애썼는 거래요. 너무 정진에 애쓰다보니까 아주 피로했는 거래요. 졸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머리가 방바닥에 닿는 순간 쾅 하고 닿는 순간 막 확철대오한 거래요. 깨치자마자 달려갑니다. 결집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쾅쾅 두드립니다. 그러니까 가섭 존자가 “누구냐?” 합니다. “아난입니다.” “왜 왔느냐.” “깨쳤습니다.” 그러나 가섭 존자는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지금은 열쇠가 없으니 문을 열어줄 수 없다. 내일 오너라.” 합니다. 그러니까 열쇠구멍으로 안에 불빛이 빤히 보이는 거예요. 그래 신통력으로 열쇠구멍으로 들어가서요, 홀연히 결집에 참석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두 안 되는 사람은 아난 존자처럼 막 분심을 낼 줄 알아야 돼요. 왜 나만 못한단 말인가, 삼세 모든 부처님이 이 도리를 깨달아서 불국정토를 창화했고, 즉 부처님이 되셨고요 역대 모든 조사스님과 천하 선지식이 다 이 관문을 통과해서 명현종사가 되었는데, 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그들이 장부면 나 또한 장부가 아닌가. 그들과 같이 불성이 있고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나도 갖췄고, 그들과 더불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데 왜 나만 안 된단 말인가. 그들이 가는 길을 왜 나만 못 간다는 말인가.

 

그렇게 분심을 일으키면서 지금 이생이 이와 같으니 내생 또한 이와 같을 것이 아닌가. 세세생생 이와 같으니 어느 때나 이 일을 마칠 것인가. 이렇게 정진해도 되겠는가. 이러고도 참선을 말하고 화두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런 수행이 얼마나 이익이 있겠는가. 지금도 늦지 않다, 성불 두 글자를 이마에 붙여놓고요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분심을 일으켜서 옛 스님의 말씀처럼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서 막 단칼에 두 동강을 내듯이 오직 화두 화두에 목숨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대만 못할 리 없어요. 그대만 안 될 리 없습니다. 참으로 분심을 내서 미친 듯이 한번 참구해보세요. 그러면 의외로 쉽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마 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대의심을 내보십시오.

 

대의심이란 화두를 강하게 철저하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이라 말길이 끊기고 생각마저도 끊어져서 어떤 분별심으로도 알 수 없는 도리를 드러낸 아주 심오한 말씀 중에 말씀이기에 오직 깨쳐서 타파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타파하려면 의정을 일으켜야 돼요. 화두의 생명은 의정입니다. 의정을 크게 일으켜야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칠 수 없습니다. 화두의 의정은 옛 선사의 말씀처럼 우리 몸에 있는 골절 360개와 팔만 4천 개의 털구멍의 온몸으로 불덩이같이 막 의정을 일으켜야 돼요. 그때는 젖 먹는 힘까지 다 내서 죽자 사자 오직 의정, 의정, 의정-화두에만 모든 것을 바치듯이 오직 화두 화두뿐인 것처럼 간절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그렇게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게 의정을 일으켜서 공부가 저절로 익어서, 내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한덩어리가 되고. 타성일편이 되게 해야해요, 그래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꽉 막힌 그 은산(銀山- 은으로 만든 산과 철벽, 또는 쇠로 만든 벽)처럼 어찌할 수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 돼고, 한바탕 죽어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흔히 대사일번 건곤신이 되는, 그러한 곳에서 크게 살아나는 경지가 되게 해야 해요.

 

어쨌든 여러분이 그렇게 화두를 참으로 애쓰고 애써서 깨치시기 바랍니다.
여기 세속에 계시는 여러분께서는 화두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일이 잘 안되고 어렵고 힘든 그런 사람은 아주 큰 대신심을 내듯이 대분심을 내듯이 오직 의정만 일으키듯이 좀 화끈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오직 일, 일, 일에도 미쳐보시기 바랍니다.

 

법문이 좀 딱딱하지요? 재미가 좀 없다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수행하는 방법이고 부처되는 방법이기 때문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부처님이란 아주 대단한 분입니다. 경전에 보면 경전은 소설처럼 자상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부처님의 그 거룩하고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모습이 드러납니다. 부처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래요. 그런 사람이 되는 방법을 보통사람이 들으니 어려운 것 같고 뭐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요. 왜냐? 그분이 살아온 인생과 나의 인생이 다르고요 ,그분의 업과 내 업이 다르기 때문이래요.

 

예를 들면 앉는 것도 그래요. 습이 되어 화두가 되는 사람은 앉기만 하면 그렇게 편안해요. 몇 시간 앉아도 잠깐 앉은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잘 가고. 심지어 내가 앉은 곳이 절인지 아파튼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앉는다든가 수행이 잘 안되는 그런 사람은 5분만 있어도요 움직이고 부시럭거리고 몸을 흔들고 막 비틀고 괴로워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애쓰다가 보면 참으로 지극하게 노력하고 애쓰다가 보면 참으로 부처님처럼, 법당에 계시는 등상불처럼, 꼿꼿하게 여법하게 그렇게 앉으실 수가 있습니다.

 

화두가 안 된다, 수행이 잘 안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안 되는 이유는 이 화두를 담을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래요. 어쩌면 아직도 화두를 닦는 것이 체질에 아직도 덜 맞기 때문이라. 보통사람에게 수행이란 사실은 아주 고급스러운 거래요. 그래서 아직 적응이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행은 안 할 수가 없어요. 안 하면 자기 손해래요. 왜냐 최상의 최고의 길이기 때문이래요.

 

이 길은 가라 마라 할 필요가 없어요. 안 가면 자기 손해래요. 아무리 어렵더래도 아무리 괴롭더래도 아무리 힘들더래도요 해야 되는 공부고, 반드시 가야 되는 길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지금은 조금 어렵고 힘드시더라도 훗날 화두가 참으로 되면 정말 보람과 긍지를 느끼실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아주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세요. 인류 최상급인 선문화(禪文化)를 접하고 있어요. 사실 이 이상이 없어요. 정신문화 중에 최고급이고 최상급이 화두선이래요.

 

우리 한국이 세계, 즉 인류에게 내세울 최고품이 무엇인 줄 아시겠어요? 요즘 삼성재벌에서 세계 일류 상품을 열몇 개 생산한다고 하던데 그것하고도 비교가 안 되는 상품이라면 최고의 상품은 바로 화두 참선이래요. 선문화는, 화두선(話頭禪) 문화는 최고급 정신문화래요. 요즘은 미래학자들이나 첨단을 걷는 사람 중에서도 인류가 평화롭게 살고 이 지구촌이 살 만한 곳이 되려면 선문화가 발전되어야 되고 미래의 종교는 선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답니다.

 

그 선불교 중심에 화두선이 우뚝 서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안 되지만 난 반드시 해야 된다, 꼭 해야 된다, 여기에서 내 인생의 승부를 참으로 걸어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바른 생각을 하는 분이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법회에 나오신 것만도 아주 자랑스럽게 다행스럽게 생각해도 아주 좋습니다. 이 선문화를 잘 체험하고 실천해서. 우선 여러분 자신의 품격을 높여보세요. 화두는 여러분을 부처님과 조사스님과 같은 최고의 인간으로서 이끌고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가장 성스럽고 가장 훌륭한,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 바로 불교적인 인간이래요. 가장 빠른 방법이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화두선이래요. 그런 인간을 만드는 데. 그런 성스러운 고급스러운 문화를 절대 여러분만 향유하지 마세요. 여러분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잘 전달해서 여러분 가정의 문화를 아주 고급화하고 높여서 비록 지금 사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이 아주 보잘 것 없더래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상향인 불국정토, 그 누구나 바라는 누구나 갈구하는 그 불국정토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미국에 어떤 한국계 학생이 대학에서 총기난동 사건을 일으켜서 60여 명을 사상해서 온 나라가 죄인이라도 된 듯이 괴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육은 그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나 싶어요. 교육은 가르치려고만 해서는 안 돼요. 그런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라 할 수 없어요. 행동하는 교육, 마음을 닦는 교육이 되어야 인간이 되고 인격이 함양이 됩니다. 한국 교육은 입시 위주의 지식교육을 하는데 지식도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실천수행을 해야 올바른 교육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천수행을 하는 교육이라면 어찌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세계 역사상에 큰 전쟁은 거의가 종교전쟁이라고 해요.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는 중동전은 사실은 종교전쟁입니다. 중세기 십자군전쟁 때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되었다는 거래요. 1,2차 대전 이전까지는 사람이 새까맣게 타죽는 흑사병으로 가장 많이 죽었고요 ,그 다음이 십자군전쟁 때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로마 교황께서 인류에게 사과한 적도 있습니다. 이슬람교도 한때는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칼을 들고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으라고 했다는 거래요.

 

우리 불교는 단 한 차례도 불교를 위해서, 포교를 위해서 전쟁을 한 적이 없었어요. 이런 종교는 세계사에 없는 일이래요. 부처님 말씀 중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 중에서 사섭법(四攝法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라고 있어요. 사섭법이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으로 이 중생을 교화하는 한량없는 마음이래요. 즉 중생을 즉 남을 사랑하고 이웃을 어여삐 여겨서 교화하는 네 가지 한량없는 그런 마음이래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첫째는 자무량심(慈無量心)입니다.

사랑 자(慈),. 자비라고 하는 자(慈)입니다. 자무량심을 내라는 거예요. 즉 절대 성내지 않고 남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한량없는 마음이래요. 남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더라도요, 혹은 나에게 어떤 고통을 주고요, 괴로움을 주면서 설사 참기 어려운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하더래도 절대 성내지 않고요. 참고 견디면서 한량없이 사랑해서 즐거움을 주는 그런 마음이래요.

 

둘째는 비무량심(悲無量心)입니다.

자비하는 비(悲). 슬플 비(悲)자. 비무량심이래요. 비무량심이란 절대 성내는 법 없이 남의 이익과 고통을 덜어주는 한량없는 마음이래요. 사람이란 누구나 괴롭고 어려우면 화내고 성낼 수도 있는데 성내고 화내지를 않고요 남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한없는 마음이래요.

 

세 번째는 희무량심(喜無量心)입니다.

기쁠 희자 희. 기쁨을 주는 걸 기본으로 해서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낙을 얻게 하고요 희열케 하려는 한량없는 마음을 내는 거래요.

 

네 번째는 사무량심(捨無量心)입니다.

버릴 사입니다. 사무량심은 절대 탐내지 않고요 즉 탐내는 법 없어, 다른 이에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친하는 즉 애증원친(愛憎遠親)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요 항상 평등을 유지해서 한량없는 그런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마음이래요. 이런 사람을 진정으로 대승보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고 구하기 위해서 온다는 거래요. 중생의 종류에 수순하기 위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보살은 자기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도, 삼악도, 즉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인 이 곳에 떨어져 가장 어렵고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거나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깨달음을 얻지 않겠다고, 오직 중생교화의 서원을 세우고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해서 보살이라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보살이라 했습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바로 부처님의 제자래요. 이런 분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겠어요. 이런 분에게는 전쟁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이런 가르침을 받고 수행을 하니까 참으로 부처 경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하룻밤 철야정진을 하는데 이 철야정진 하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마세요. 한번 한번을 그야말로 처음이고 마지막인 듯이 하루하루를 애쓰고 애써서 막 화두에 매달리듯이 막 목숨을 걸듯이 하셔서 수행에서 진정한 보람과 긍지와 행복을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위없는 보리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확철대오 무상대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화두 일구에 목숨을 걸어보십시오.

 

화두 일구에 참으로 목숨을 걸어보면 구하고자 하는 바를 능히 구하고 깨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깨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일구에 목숨을 걸어서 몸과 마음까지 잊어버린 곳에 이르면 화두가 돼서 참으로 내 몸이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마음까지 잊어버린 곳에 이르면 오직 화두에 즉 빠지면 참 부처 여여하여 자색광명 이루리라 했습니다.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4강-화두참구의 3요소(2007년 4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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