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참구법 제 6강 / 화두가 안되면 특단의 조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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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22 조회4,710회 댓글0건본문
화두 참구법 6 -
"화두가 안되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라."
오늘도 늦은 밤에 오시느냐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런 공덕이 훗날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화두가 안되는 사람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라 그런 내용의 법문을 해드리겠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첫째는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시고요.
둘째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살아가시고,
세번째는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고,
넷째는 가급적 묵언을 하시고요,
다섯째는 행동을 자재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실은 세속에 사시다가 보면 그렇게 살기는 어렵겠지만 수행을 하시는 분은 인생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인생관이 정립이 되어서 마음만은 늘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고,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이 공부다” 그래서 옛 어른 말씀에는 “생사보다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공부다” 그런 말씀을 하신 어른도 계십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이 공부다”하는 그런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수식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이 수식관을 해 보셨어요. 잘 되십디까?
마음이 쉬지 못하고 안정이 안 되는 사람이나 또는 아직도 마음 닦는 체험을 조금도 해보지 못한 그런 분들은 (수식관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의 준비 단계로 해서 화두가 참으로 잘 될 수 있는 그런 그 기초 단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 호흡법도 그냥 예사롭게 하지 마세요. 호흡 한번 한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아주 성심 성의껏 아주 철저하게 좀 지극하게 좀 간절한 마음으로, 그 한번이 끝나면 내가 이 세상을 버리듯이 그렇게 자신을 막 던지듯이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번 드린 말씀인데 “수행은 마음이 문제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이 아주 철저하고 아주 돈독하면 이외로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러나 미적지근하고 하는 둥 마는 둥 흉내 내듯이, 보리죽에 물탄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몇 년을 하고 심지어 몇 십년을 해도 별 이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타이트하게 지극하게 막 던지듯이 용맹정진하면 의외로 또 쉽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어쨌든 그 한번 한번이 그 호흡이나 화두나 한번 한번이 참으로 되어서요, (참으로)되는 그런 인생이 되게 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특별한 그런 인생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해서 “나는 잘 못산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다, 나는 못난 사람이다” 그런 그 스스로 “좀 부족하다, 좀 못났다, 어리석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수록 참으로 발심하고 신심을 돈독하게 해서 부처님과 같은 거룩하고 아주 존경스럽고 성스러운 그런 인생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비상한 조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수행이란 무엇이냐? 마음을 닦는데 어떻게 닦느냐? 도대체 어떤 것을 마음을 닦는 것이냐?고 하느냐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일체중생이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다”하셨어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저 땅 속에 있는 지렁이 같은 미물까지도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또 법화경에 다른 구절에는 “준동함령(蠢動含靈, 준동은 벌레, 준동함령은 벌레도 靈이 있다는 뜻)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다”,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쨌든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불성이란 뭐냐?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말해요. 즉 성품을 말해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래요. 여러분께서는 그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본래는 부처다, 내 본 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 그런데 부처님 같으신 분은 그렇게 훌륭하게 그렇게 위대하게, 일세를 풍미하고 살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인생을 사느냐? 그래서 괴롭고 어렵고 힘드시고, 심지어 “못 살겠다 날 좀 살려 주시오” 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느냐?
그것은 번뇌 망상 때문이라는 거래요. 여러분께서 수십생, 수백생을 살아 오면서, 이런 번뇌 저런 망상으로 아니면 여러 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 번뇌와 망상이 내 근본 불성을 흐리게 했다는 거래요. 그것은 비유하면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고 청명했습니다. 이런 날은 저 동해안에 가면 물이 그렇게 맑아요. 막 수십미터 아래가 보여요. 그러나 장마철이나 태풍이 올 때는 온통 바닷물이 막 소용돌이 쳐서 아주 더럽고 탁합니다. 1 미터 아래가 보이지 않아요.
그것처럼 우리 마음도 온갖 번뇌 망상으로 괴로워하고 안절부절하고,못 살겠다 죽겠다 그런 등등 온갖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 마음이 흐려져요. 그래서 근본마음이 보이지 않아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을 닦는다”하는 것은 그 흐린 마음을, 그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해서 깨치게 하는 거래요. 여러분이 많이 하시는 염불이나 주력이나 참선은 물론이고 그런 수행은 마음을 집중해서 그 흐린마음, 그 탁한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수행법이래요. 그것은 집중해서 그런 그 번뇌 망상을 고요하게 해서 고요하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밝아져요. 밝아지면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마음을 타파하는데 본뜻이 있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냐,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그러면서도 흔히 어렵다 어렵다 하는 그 방법은 즉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는 거래요.” “놓는다, 쉰다”합니다. 그러나 참 놀기는 쉬운데 놓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발심 못한 참선자일 수록 모든 인연을 끊고요 ,만사를 쉬어서 도대체 마음 쓸 곳이 없도록 해라”하는 것이 옛어른들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놓고 비우고 쉬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놓을 수만 있으면 철저히 놓고, 비울 수만 있으면 대단하게 비우고 그래서 그 흐린마음,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쉬고 마음을 맑게하는 거래요. 그래서 옛 선사 말씀에 참선자는 천번 쉬고 만번 쉬라 했어요. 쉬고 쉬고 또 쉬고 또 쉬라는 거래요.
개심사에 선섬이라는 그런 선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부란 별 다른 게 없다 그저 놓아 버리는 것이다”즉 마음에 있는 것을 일시에 놓아 버리는 것이 바로 공부다 했어요. “마음에 있는 것을 일시에 놓는다”즉 마음에 있는 생각, 그 마음을 일시에 놓는 것이 공부라는 거래요. 그 놓는 것은 비운다라고도 합니다.
참선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어쨌든 철저히 비우고요. 쉬어도 무섭게 쉬고 놓아도 대단하게 놓아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그렇게 쉬면 ,그렇게 놓으면, 그렇게 비우면 바로 깨닫는다는 거래요.
유명한 임제스님의 말씀에는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청정법신이다 했어요. 이 청정법신이란 부처님의 몸을 말합니다. 쉬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같은 말씀인데 어쨌든 쉬고 쉬어서 그 쉰다는 생각까지도 아주 쉬어서요, 망상과 집착이 사라지면 근본 참모습, 불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요. 그것은 흔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듯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불성입니다. 그렇게 쉬어도 아주 무섭게 쉬고 놓아도 철저히 놓고, 비워도 참으로 비우면 상근기나 발심한 사람은 바로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 어떤 선지식은 “세상에 쉬운 일 중에 쉬운 일이 참선이다” 했어요. 아 비우기만 하면 되니까, 놓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옛 어떤 도인은 견성하기는 “자기 성품을 봐서 부처가 되기는 누워서 떡먹기보다 쉽다”하는 그런 그 대단한 말씀을 하신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우고 놓기만 하면 된다는 거래요. 그렇게 쉬고 비우고 참 놓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 못하니 참 한탄스럽다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의 현대인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 그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과학문명이 아주 고도로 발달이 됐습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로서 과거의 수 십년 전이나 수 백년 전에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아파트에서 이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외형적으로는 잘 살아도요, 과거에 그 어렵고 괴로웠던 춥고 배고팠던 그 시절보다 더 불안하고 더 괴롭다는 거래요. 외형 더 커지고 화려해지면서 발전 할 수록 인간은 점점 왜소해진다는 거래요.
그것은 왜냐? 쉬고 비우고 놓지 못하기 때문 이래요.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 행복을 모르고 불행하게 괴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를 놓고 참으로 비워서 깨치지는 못 하더라도 마음은 지극히 안정이 될 거래요. 그 마음이 안정이 된 그런 상태에서 ‘이 뭣고’ 하면서 화두를 하면 화두가 되는 것 같고 더 의정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 같고 더 느낌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설사 쉬고, 놓고, 비워서 깨치지는 못 하더라도 마음이 지극히 안정이 된 상태에서 최상의 참구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뭐냐? 가난하고 무소유를 실천해라. 옛 어른들은 아주 고구정녕하게 아주 노파심절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옛 어떤 어른은 도(道)를 닦고자하는 사람은 즉 “마음을 닦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가난부터 배워야 된다”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마 가난이라면 몸서리치는 분도 있을 거래요.그러나 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어떤 분은 참선자는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해서 청빈하게 살아야 된다. 또 비슷한 말씀을 하신 분도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거래요. 욕망을 내지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요. 일체 욕망도 버리고 누구에게 애정도 갖지 말고요. 자기에게 어떤 유익한 일에도요. 무심하라는 거래요. 그런가하면 자기를 희생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그런 대승보살심까지도 참선할 때는 버리라는 거래요. 그것마저도 망상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마음도 가지지 말고요. 철저히 가난해야 된다, 즉 번뇌 망상을 피우지 말라는 거래요. 또한 자기 몸도 가난해야 됩니다.
자기 몸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먹고 입고 주하는 이외에는 크게 생각지 말라는 거래요. 요즘 자본주위 체제 사상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데 이 물건은, 소유는 가질수록 많을수록 더 복잡하고 다단하고 번뇌 망상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먹고 살만 하면 큰 욕심을 내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이 중생은 자기 육신도 가급적이면 너무 생각하지 말고요. 재물에 초연해서 그렇게 살아야 업보 중생은 마음을 좀 바르게 쓰고 시야가 바로 보기 때문에 삶 자체가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일부러 “춥고 배고프게 살아라”그런 말씀을 많이 했어요 . 그러나 요즈음은 좀 안 맞는 말입니다 마는 그렇게 어쨌든 가난하게 살려고 즉 번뇌 망상을 덜 피우고 너무 물질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일의(一衣) 일발(一鉢)로 즉 옷 한 벌, 발우 하나로 기포(飢飽)에 무심(無心)하면 도(道)자고(自高)이니라 했어요.(주: 一衣一鉢로 絶人情하면 飢飽에 無心道自高 야운스님의 자경문) 즉 굶주리고 배부름에 무심하면 도(道)는 저절로 높아진다 하듯이, 늘 이 가난한 그런 마음을 가져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해라 합니다.
가난하고 궁하면서도 늘 절제를 지키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고요. 그 청빈과 소욕지족(少慾知足)하라 이것이 수행자의 모습이다 했습니다. 그 청빈과 소욕지족, 즉 적은 것을 욕심을 적게 내서 만족함을 아는 그런 그 생활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참으로 도 닦을 마음이 나는가 하면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멀어져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승가란제(僧伽難提, 부처님 이후 법을 이은 인도의 제 17조 스님)라는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릴 때 출가 했다고 해요. 그런데 타고난 달변이라 아주 법문을 잘 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승가란제스님이 법문을 하면 막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는 거래요. 그분은 법문만 잘 하느냐? 신도들이 시물을 주면 그 시물을 다 나누어 주는 거래요. 그래서 그 분 뒤에는 수십 명 수백 명이 늘 따라 다녔다는 거래요. 그렇게 절에는 쓰지 않고 잘 나누어 주니깐 그 상좌들이 투정을 했다는 거래요. 그러니깐 하시는 말씀이 “물건을 탐착하면 소중한 자신을 잃게 된다. 마음 속에 애착이 있으면, 좋고 나쁨을 가리게 되고, 중생을 차별하게 된다. 신도들에게 베푸는 물건에 탐착하지 말고 욕망 하나를 버린다고 생각해라”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분은 참 훌륭한 분이라 일생동안 뭐 전연 소유하지 않았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늘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다는 그런 대단한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재산을 보면 얼굴을 돌리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다고 해요. 늙어서 쇠약해지고 병이 들자 제자들이 약을 지어 왔는 거래요. 그러니 그 분은 “내가 살 만큼 살았다 살 만큼 살았는데 나는 약을 안 먹을란다” 하면서 제자들을 오히려 설득을 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돌아가실 땐데 제자 한 사람이 스님 곁을 떠나지 않고 병상을 지키고 있으니까 제자에게 하는 말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병으로 인해서 일어난 고통으로 화두를 삼으라‘ 했다는 그런 그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벌떡 일어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갈란다”“스님, 어딜 가시렵니까?” 하니 “나는 ”갈란다“ 하더니 신발을 신고는 뜰 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시더랍니다, 뜰 옆에 나무가 하나 있는데 나무를 하나 떡 잡더니 그대로 꼿꼿하게 가시는 거래요. 그렇게 참 청빈하게 아주 여법하게 사셨으니까 가실 때도 그 입탈 즉 서서 깨끗하게 그렇게 가셔서 후에 사람들에게 아주 존경을 받은 그런 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수행은 가급적이면 좀 청빈해야 돼요 요즈음은 그러기가 어렵습니다만은 그러나 너무 물건에 집착하지 말고 너무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그저 먹을 만한 정도가 되면 탐욕심을 안 내면서 수행하려고 노력해야 이 번뇌 망상이 덜하다 라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류는 옛 어른 그런 그 훌륭하신 승가란제 같은 그런 분의 사상을 본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인류 장래가 밝아 질 거래요. 요즈음 미국식의 자본주의 영향으로 물질이 만능화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배금사상으로 하나 뿐인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서서이 위기로 돌입하고 있다, 그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지구인들이 지금이라도 좀 이성을 되찾고 정신을 좀 바짝 차려서 아끼고 절약하고, 이 지구가 오염이 안 되게 해서요. 인류 전체가 잘 살아가는 지혜를 모을 때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는 뭐냐?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라. 라는 말씀을 옛 어른들은 하시고 있습니다. 사실은 세속에 사시는 여러분께서는 인간관계 자체가 좋은 재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명, 수백 명을 만나시는 그런 분도 계실 거래요. 그런 분들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겠지만 너무 인간관계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거래요. 만날 사람 만나고 가급적이면 복잡하고 다단한 그런 생활을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망상이 끊친다는 거래요. 그래야 진정한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냉정하게 인정을 끊을 줄도 알아야 된다 합니다. 인정이 짙고 인간관계가 좀 복잡하면 자연히 공부에는 손해가 되고요, 도심(道心)은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 중에는 공부에는 사람 노릇까지도 포기하고, 오직 이 공부에 매달려라 하신 그런 분도 계십니다. 특히 출가수행자들 우리 스님들께 해당하는 말인데 오로지 사람 노릇까지도요, 사람으로써 해야 될 윤리와 도덕마저도요, 그것도 버리고 오직 정진 할 때는 정진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한 이십년 전에 돌아가신 통도사의 경봉스님이라는 아주 훌륭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 말씀에 “얘들아!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데서 참사람 나온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흔히 수행자는 바보가 되어도 철저히 바보가 되라는 거래요. 숙맥처럼 천치처럼 주변에 아무 관심도 없이 인정도 베풀 줄 모르고 기본적인 인정마저도 끊고요. 공부 할 때는 그렇게 매진하듯이 막 빠지라는 거래요.
여러분은 그렇게 인연을 끊고 참 숙맥처럼 바보처럼 그렇게 사시기는 어렵지만 공부하실 때는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늘 안 하드라 도요. 순간이나 짧은 시간에도 화끈하게 아주 분명하게 막 빠지듯이 막 미치듯이 용맹정진 하듯이 하면 의외로 쉽게 바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아주 대단하게 애썼던 그런 분은 이 공부가 참으로 간절할 때는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관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막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해도요, 거들 떠 보지도 말라 그런 말씀도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는 좀 지독하게 하고 철저하게 하시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집에서 하실 때 그래하시기는 어려울 텐데 낮에나 뭐 일요일 같을 때 할 때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전화도 웬만하면 받지 말고 푹 빠지는 선사들의 말씀처럼 그렇게 좀 애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큰 일 일수록, 그 대단한 그런 일 일수록 할 때는 좀 무섭게 하고 빠질 때는 아주 대단하게 빠지면 상당한 공덕을 바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황벽스님이라는 아주 대단한 스님이 계셨어요. 키도 크고 아주 건장한 분이 였던가 봐요. 이마에는 주먹만 한 혹이 있었다고 그래요 정진 할 때는 아주 무섭게 했다는 거래요. 그러나 한 이십년 가량 이절 저 절 다니면서 그렇게 해도 진취가 없었던 거래요. 그동안 속가에는 자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홀 어머니가요, 아들이 어찌나 보고 싶던지 늘 아들 생각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 버렸어요.
세상에, 그래서 아들이 어찌나 보고 싶고 보고 싶었던지 눈이 멀어서 이제는 볼 수가 없는 거래요. 어떻게 하면 그 아들을 볼 수 있을까해서 고향에서 조금 나가면 대의강이라는 그 강의 나룻터가 있답니다. 그 나룻터로 배 타러 스님들이 많이 다녔던가 봐요. 그 나룻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한 집을 지어 놓고는 그 늙은 노인이 지나가는 스님들마다 발을 씻겨 드렸다는 거래요. 왜 발을 씻겨 드렸나 아들 황벽스님이 어릴 때 사고가 나서 발가락 하나가 없는 거래요. 발가락이 하나 없는 자기 아들을 만나려고 참 기막힌 이야기죠. 그 황벽스님이 그 이야기를 들은 거래요.
참 마침 그 대의강 나룻터로 가게 된 거래요. 지나가다 보니깐 옛날에 안 보이는 집이 한 채 있거든요, 그 앞에서 어떤 스님의 발을 어머니가 씻겨 주고 있는 거래요. 멀리서 봐도 분명 어머니라 눈물이 막 비 오듯 하는 거래요.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가다가 그냥 끌려서 한 걸음 두 걸음 가다가 보니깐 어머니 가까이 가게 된 거래요. 어머니가 인기척을 알고요 “스님이십니까? 스님께서도 발을 내놓으시지요 하는 거래요”그냥 끌리듯이 발을 내어 드린 것 이래요.
발을 아주 깨끗하게 씻어 드린 거래요. 오른 발을 다 씻고는 “왼발도 주시지요” 하는 거래요. 그제사 황벽스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왼발에는 종기가 나서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어머니 얼굴을 보니깐 이십년간 이미 완전히 할머니가 되었어요. 얼굴도 형편이 없는 거래요. 그래 그 어머니한테 인과법문을 잘 해 드리는 거래요. 그러면서 그래 잘 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얼른 떠나는 거래요. 마침 그 대의강에 도착하니깐 떠나는 배가 있는 거래요.
그 배를 타고 떠나는 거래요. 그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 발을 씻어 주고는 있으니가 조금 뒤에 마을 사람들이 우우 몰려오는 거래요. 우 몰려와 가지고 “아이구, 아들 스님 잘 보셨지요” 하는 거래요 “뭐락하노?” 하면서 벌떡 일어나는 거래요. “조금 전에 간 스님이 황벽스님입니다”하니까 “황벽아! 황벽아!”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황벽아”를 부르는 거래요.
그래 그 나룻터 쪽으로 가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막 뒹굴면서 가는 거래요. 도착해도 이미 배는 떠난 거래요. (어머니는) 막 물로 들어가면서 아들 이름을 부르는 거래요. 그러다가는 물살 센 곳까지 들어가서 빠져 죽습니다. 황벽스님은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어머니 상황을 다 봤는 거래요. 다 보고는 막 고함을 치는 거래요. “부처님이시여, 한 사람이 출가하면 삼족(三族)이 생천(生天)한다고 하는데 한사람이라도 피해가면 부처님께서 절 속인 말씀입니다” 하면서 막 고함을 치는 거래요.
그러고는 나룻터로 돌아와서는 자기 어머니 그 화장을 잘 해 드립니다. 화장을 잘 해드리고는 이런 게송을 읊어요.
(태어)나는 것도 본래 (태어)남이 없고
멸하는 것도 본래는 멸함이 없다
생멸이 본래 비었으니
실상은 항상 머문다
그런 게송 십구를 읊은 거래요.
그 게송을 읊자마자 막 서광이 비치는 거래요. 그 서광이 오색 서광이라. 보니깐 자기 어머니가요, 오색 구름의 서광을 타고요, 하늘로 올라 가는 거래요. 올라 가면서 아들한테 “고맙구나, 너의 법력으로 내가 극락세계에 간다”하면서 합장을 했다 라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실화입니다
후래의 사람들이 그 내를 복복자 복천(福川)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황벽 스님은 더 발심을하는 거래요. 그래서 당시에 유명한 백장스님이라고 아주 대단한 그런 스님이 계셨어요. 백장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무 먹지말라)이란 그런 좋은 법문을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은 마지막까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을 하셨어요. 늘 일을 하니깐 제자들이 보기가 그렇게 딱해 보이는 거래요. 하루는 도구를 살짝 치웠는 거래요.
그러니 그 날은 문을 꼭 잠그고 나오지 않더라는 거래요. “아, 스님, 스님! 공양하십시오” 하면서 성화를 부리니깐 “일일부작이면,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일 불식,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그런 분인데 그 분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를 잘 해서 훗날 대 도인이 됐습니다.
황벽스님이 훗날 왜 그때 어머니에게 아들노릇을 좀 하시고 그렇게 잘 모시고 오지 않으셨느냐 그래 물으니깐 내 공부가 그렇게 까지는 못 됐고 어머니를 보면 볼수록 마음이 흔들릴 것 같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냉정하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해요. 어쨌든 그 도를 닦는 분은 특히 출가인은 그런 아주 냉정함도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집에서 공부하시다가요, 늘 인정을 베풀고 어질고 착한 일만 하고 남에게 베풀기만 해서는 공부할 사이가 없을 수도 있어요. 공부 할 때는 때로는 좀 지독하고, 정말 냉정할 정도로 아주 좀 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렇게 공부할 때는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마음도 내실 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송광사에 대우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분은 효봉스님이라고 아주 훌륭한 조계종 종정도 그 역임한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이 원체 대우스님이 기질이 약한기라. 여자도 그런 여자가 없는 거래요. 대우스님은 흔히 기침도 크게 못하는 분이다 할 정도로 아주 기질이 약한 분이었어요.
그래서 효봉스님께서 “대우야, 대우야! 너는 그냥 금강경이나 읽어라” 그 말씀에 평생 금강경을 읽으신 분인데 6.25사변 때 평양에서 평양시청에 직원으로 있었다는 거래요.
근데 사변이 나서 평양에 국군이 입성하고는 국군의 일부를 따라서 서울로 피난을 왔는 거래요. 서울로 피난 올 때 “내가 사흘이면 올 테니깐 나를 기다리지 말라” 했는 거래요. 근데 사흘이 지나도 안 오더라는 거래요. 그 슬하에 십육칠세 된 그런 딸이 하나 있은 거래요. 딸이 아버지 찾아서 서울로 서울로 왔는 거래요. 그 딸도 며칠간 찾으면 아버지를 찾을 줄 알고 서울까지 와서 며칠간이 아니라 몇 십년 동안 찾아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근데 그 딸이 서울에 와 가지고는 아버지를 백방으로 찾아도 그 서울 한 복판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가 있나요. 그래 그 하루는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아버지 소식을 물으니깐 “너의 아버지가 중님이 됐드라” 하더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날부터는 뭐 절로 절로 아버지를 찾아 다니러 온 절을 다 헤매었다는 거래요. 그러나 없는 거래요. 그 어떤 절에 가니 깐 어떤 스님이 너 그러지 말고 중님들 본부가 조계사에 있으니깐 거기가서 물으라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거기 가니깐 어떤 스님이 그 스님 아마 동화사에 있을 것이다 하드래요. 그래서 동화사로 내려 갔더래요. 내려가니깐 마침 그 법흥스님이라고 그 분은 머리가
아주 좋은 분이래요. 흔히 컴퓨터다 하는 분인데 그 남의 이력 같은 것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인데 누구 누구 하니깐 대번에 아는 거래요. 그냥 컴퓨터에서 뭐 빼듯이 그 자상하게 이야기를 하니깐 아 자기 아버지가 틀림없거든. 그래 그 대우스님은 지금 “선산 도리사에 있으니깐 가 보시오” 하더라는 거래요 바로 선산 도리사에 갔더라는 거래요 선산 도리사에 가니깐 마침 오후에 정진시간이 끝나고 스님들이 주욱 나오라는 거래요. 그래 보니깐 자기 아버지가 있는 거래요. 자기 아버지를 보자 마자 얼른 나가서 “아버지!” 하고 싶었으나 스님들이 쭈욱 나오니깐 그 말은 못하고 숨어서 지켜 봤겠다. 그래 자기 앞으로 나오더라는 거래요. 얼른 나가서 막 아버지하고 했는 거래요.
그러니깐 그 기질이 여성같은 큰 소리 한번 못 치시던 그 대우스님이 왜 나 중노릇 하는데 왔느냐고 호통을 치드라는 거래요. 그때 그 남한에 내려와서 한 십년가량 그 아버지를 찾으려고 그렇게 고생고생 하고 십 년만에 만난 그 아버지가 이젠 표범이 되었는기라. 그래서 어찌나 섧던지 도리사에서 인제 대구까지 가면서 울고 대구에서 저녁에 밤 열차 타고 서울까지 가면서 울고 울고 또 울고 울었다는 거래요. 대우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송광사에서 49재하는데 와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을 끊을 때는 참으로 큰일을 하는 분은 냉정한 그런 모습을 좀 보여야 합니다.
네 번째는 뭐냐?
가급적이면 묵언을 하라! 말을 좀 삼가라! 참선자는 입이 좀 천근 같아야 해요 일체 잡담은 삼가고요, 벙어리처럼 수행을 할 때는 해야 됩니다. 왜냐 아무리 유창하게 막 청산유수같이 말을 해도요. 폭포수같은 언변을 토하더라도요, 말이 없는 것보다 못해요.
말은 아무리 잘 해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요. 달 자체는 아니라는 거래요. 그래서 세속사람도 “침묵은 금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으뜸이다”그런 뜻이지요.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한참 도 닦을 때는 아무 재미도 없는 사람처럼 아무 표정도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입에서 악취가 날 정도로 말을 하지마라” 그렇게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 중에서는 묵언패를 걸고 몇 년간 심지어 십년 이상 묵언하셨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한암스님도 서울 근교의 저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가 오대산에 들어가시면서 “나는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즉 봄 석달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안 배우겠노라”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좀 말을 가급적이면 안하는 것이 좋고, 안 하는 가운데서도 말 없는 가운데서 참으로 진리를 느껴야 됩니다.
그것은 왜냐, 그 진리는 말로써 글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흔히 “언어도단(言語道斷), 말길이 끊어지고 심행처멸(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다” 즉 생각까지도 끊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래요. 즉 아무리 말을 잘해도 어떤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노자께서도 이런 말씀을 했어요.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참으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래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이 진리는 알면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만물과 인간의 근본이치를 도(道)다 합니다. 사실은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래요. 그것을 법(法)이다, 진여(眞如)라 하지만 부득이 그렇게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흔히 법문(法門)을 한다하지만 법문도 이렇게 입을 열어서 하는 법문만이 법문이 아니래요. 언어 이전의 소식 그대로가 진법문(眞法門)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바로 참다운 법문이래요.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로 표현한다면 도리어 못난 그런 법문이 됩니다. 그래서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가 진리를 그대로 드러난 말씀이래요.
이 우주 법계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도 무심히 법문을 하고 법륜을 그대로 굴리고 있는 거래요. 그래서 일체 유정, 무정의 물건마다 각가지 형상마다 사실은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깨치고 나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아닌 것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법문은 “법사가 이 법상에 오르기 전에 이미 다 됐다, 그대로가 법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가급적이면 말을 좀 삼가고 말을 할 때는 참으로 해야 될 말 바른 말 진리의 말만 해야 됩니다.그래서 수행자는 외모는 단정하고, 외부의 모습은 아주 단정하고 여법하고 ,내면은 맑고 밝듯이 말에도 잡스러움이 없어야 하고 일체 사량과 분별을 않아야 됩니다.
이 다섯 번째는 뭐냐? 행동을 자재하라 가급적이면 너무 많이 다니지 말라는 거래요. 이 수행하는 사람을 흔히 좌선한다 이 참선하는 것은 좌선이 가장 쉽고 잘 되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한치 앉으면 한 치 부처고, 두 치 앉으면 두 치 부처다 말이 있습니다. 즉 잠깐 동안이라도 앉으면 부처로 그만큼 자란다는 것이래요. 그래서“한 치라도 똑똑이만 앉으면 그 자리가 부처자리다”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좌선을 찬양하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한 순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한 순간이라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도 났다 했습니다. 항하사란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합니다. 그 갠지스강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 모래만큼의 칠보탑, 일곱가지 보배로 만든 탑을 만드는 것 보다도 낫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 이 보배탑은 결국은 먼지로 돌아 가지만 아무리 좋은 보배라도 그런 보배로 만든 탑이지만 결국은 먼지로 돌아 갑니다. 그러나 한 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얻는다 했습니다.
그만큼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필요 없이 좀 나 다니지 말고 행동은 자제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도 집과 직장과 꼭 가야 할 곳만 다니고 볼 일을 볼 것이지 이리 저리 많이 다녀서 좀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번뇌 망상을 피우는 그런 계기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좌복을 떠나지 않아야 된다 했습니다. 그래서 수좌는 절구통이나 바위처럼 좌복 위에서 움직이지 말라 그런 말씀도 했습니다. 아까 그 말씀 드린 효봉스님은 아주 유명한 스님이신데 그 스님은 한번 앉으면 참선한다고요 보통 여섯 시간정도는 앉았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절구통 수좌라 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해요. 그 분의 그 공부한 일화가 참 많아요.
그중에 한 일화인데 1927년도 여름이었다고 해요. 저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안거에 들어 갈 때 대중스님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는 거래요. “소승은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선과 방선 시간도 없이 또 경행하는 시간도 없이 줄 곧 앉아서 정진하면서 배기겠습니다.”
그렇게 대중에게 통보하고서는 석달동안 아주 막 지독하게 그 뜨거운 아랫목에 앉아서 참 애쓰더란 거래요. 어느날 공양 시간이 됐는데 벌떡 일어나니깐 좌복이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는 거래요. 하도 많이 앉아서 진물이 나서요. 진물이 바지에 젖어서요, 바지하고 좌복하고 붙은 거래요. 그래서 좌복이 떨어지지 않고 일어나더란 거래요.
그렇게 지독하게 정진했다는 그런 분인데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저 표충사 서래각에서 돌아 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요, “무(無)라! 무(無)라!” 즉 화두 참선을 하면서 돌아 가셨기 때문에 당시에 화제가 되시기도 했습니다.스님은 어찌나 참선에 애를 썼던지 이 말년에는 걷지를 못 했어요. 동화사 계실 때나 서래각에 계실 때 보면 어그정 어그정 할 정도로 그렇게 애써서 아주 훌륭한 모범을 보인 그런 분이 계십니다.
티벳트에 가면 티벳트 라마승들은 대단한 수행을 한다는 거래요, 그래서 티벳트 불교가 지금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아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티벳트에는 자연동굴이 많다고 해요. 수행자들이 동굴 속에 들어 간다는 거래요. 이 동굴 밖에서는 창문으로 완전히 차단을 시킨답니다. 들어갈 때는 입은 옷하고 좌복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간다는 거래요.
매일 한 끼씩만 넣어 주는 거래요. 거기서 먹고는 변 보러도 못 나오고요, 그 안에서 변도 다 보고 그 대부분이 동굴 안이 캄캄하답니다. 전깃불이 없는 거래요. 그 어두운데 한 6개월 정도가 되면 눈이 완전히 먼 답니다. 눈이 멀더래도 일단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는 못 하는 거래요. 견성하거나 즉 부처가 되거나 아니면 죽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거래요. 그래 어떤 스님들은 입은 옷이 막 떨어지는 거래요. 떨어져서 알몸으로 막 뒹굴듯이 그렇게도 막 살면서 오직 육자진언(六字眞言) 즉 ‘옴 마니 반메훔’ 그것을 하다가 일생을 그렇게 수행하면서 사시는 그런 분이 티벳트에는 많다고 해요.
그 어떤 스님은 22년간이나 그렇게 지독하게 수행을 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지요. 그런 그 대단한 이야기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겠습니다. 참 그 라마승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시는 분이라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은 들어가서 철저히 자기를 결박해서요, 막 목숨 바쳐 정진한다는 거래요. 그런 그 대단한 분들이 세계 정신세계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여러분들도 발심, 발심, 참으로 발심해서 정말 진정한 그런 수행자가 좀 되셔서 정말 보람 있고,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상으로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고, 가난하게 무소유정신으로 살아가시고, 때로는 냉정하게 인정마저도 끊고, 가급적이면 묵언하면서 행동까지도 자재하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가면서 수행하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법문 내용은 다 번뇌 망상을 없애라”는 거래요. 문제는 번뇌 망상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번뇌 망상을 없애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일상생활에서도요,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마음을 고요히, 고요히 해서 여러분의 삶을 아주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선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고요한데서 마음이 닦이기 시작합니다. 고요하지 못하면 절대 닦이지 않아요. 그런가하면 중생교화도, 보살행도요, 고요해야 참으로 할 수가 있어요. 고요해야 안정이 됩니다. 안정이 되어야 참으로 남을 위하려는 그런 훌륭하고 거룩한 그런 그 마음을 낼 수 있어요. 자기 내면이 번뇌 망상으로 막 들 끓고 괴롭고 그 못살겠는데 남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안정이 되어서 참으로 수행하는 그런 기분을느껴야 “아! 좋구나, 안 할 수 없구나” 해서 쌀독에서 인심 나듯이 남에게도 자연스럽게 베풀게 되고 남을 위하는 그런 생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중생교화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인간관계나 일상생활의 기본도요, 고요한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관계도요, 내가 고요해야, 내 마음이 고요해야 남에게도 고요하게 해 주는 거래요. 그래야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진정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활도 자기가 고요하지 못하면 괴롭고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잘 할 수도 없고, 흉내내는데 급급한 그런 정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고요하게 해서 고요하게 하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밝아져요. 밝아지면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일체 번뇌 망상을 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고요한데서 나의 모든 행복과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공자님 말씀에 “하늘을 보고 땅을 내려다 봐도요, 옆을 보고 뒤를 돌아다 봐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사시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이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참으로 사는 길은 즉 구름 한 점 없으면 태양이 쨍쨍 쪼여서, 오늘 날씨 같은 아주 좋은 날씨가 되듯이 마음이 고요해져서요, 맑아지고 밝아지면 참으로 하늘을 보듯 땅을 보듯, 옆을 보듯, 뒤를 돌아보듯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가장 잘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고요해지면 처처(處處)가 정토라, 어떤 곳이든지 다 부처님 도량이래요. 그런가 하면 사사(事事)가 불공이 됩니다. 일하는 것마다 다 불사(佛事)라, 다 부처님 일이래요. 즉 진리에서 느끼는 그런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문으로 인해서 좀 발심하고 아주 신심을 좀 돈독히 해서 정말 화두에서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꼭 느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래요.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하는 것이 옛 어른들 한결같은 말씀이래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화두가 돼서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한 상태,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항시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면 바로 느껴요. 혹시 화두가 잘 안되는 분은 수식관이라도 좀 해서 얼른 좀 느껴 보세요. 느껴 보면 “아, 안 할 수 없구나, 이 건 뭐 반드시 해야 되겠구나!”하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좀 신심을 좀 더 돈독하게 하고 참으로 마음을 내서 여러분의 인생에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이 선(禪)에서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6강-화두가 안되면 특단의 조치를!(2007년 6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정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화두가 안되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라."
오늘도 늦은 밤에 오시느냐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런 공덕이 훗날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화두가 안되는 사람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라 그런 내용의 법문을 해드리겠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첫째는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시고요.
둘째는 가난하고 무소유 정신으로 살아가시고,
세번째는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고,
넷째는 가급적 묵언을 하시고요,
다섯째는 행동을 자재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실은 세속에 사시다가 보면 그렇게 살기는 어렵겠지만 수행을 하시는 분은 인생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인생관이 정립이 되어서 마음만은 늘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고,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이 공부다” 그래서 옛 어른 말씀에는 “생사보다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공부다” 그런 말씀을 하신 어른도 계십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이 공부다”하는 그런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수식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이 수식관을 해 보셨어요. 잘 되십디까?
마음이 쉬지 못하고 안정이 안 되는 사람이나 또는 아직도 마음 닦는 체험을 조금도 해보지 못한 그런 분들은 (수식관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의 준비 단계로 해서 화두가 참으로 잘 될 수 있는 그런 그 기초 단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 호흡법도 그냥 예사롭게 하지 마세요. 호흡 한번 한번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치듯이 아주 성심 성의껏 아주 철저하게 좀 지극하게 좀 간절한 마음으로, 그 한번이 끝나면 내가 이 세상을 버리듯이 그렇게 자신을 막 던지듯이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번 드린 말씀인데 “수행은 마음이 문제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이 아주 철저하고 아주 돈독하면 이외로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러나 미적지근하고 하는 둥 마는 둥 흉내 내듯이, 보리죽에 물탄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몇 년을 하고 심지어 몇 십년을 해도 별 이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타이트하게 지극하게 막 던지듯이 용맹정진하면 의외로 또 쉽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어쨌든 그 한번 한번이 그 호흡이나 화두나 한번 한번이 참으로 되어서요, (참으로)되는 그런 인생이 되게 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특별한 그런 인생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해서 “나는 잘 못산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다, 나는 못난 사람이다” 그런 그 스스로 “좀 부족하다, 좀 못났다, 어리석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수록 참으로 발심하고 신심을 돈독하게 해서 부처님과 같은 거룩하고 아주 존경스럽고 성스러운 그런 인생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비상한 조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수행이란 무엇이냐? 마음을 닦는데 어떻게 닦느냐? 도대체 어떤 것을 마음을 닦는 것이냐?고 하느냐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일체중생이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다”하셨어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저 땅 속에 있는 지렁이 같은 미물까지도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또 법화경에 다른 구절에는 “준동함령(蠢動含靈, 준동은 벌레, 준동함령은 벌레도 靈이 있다는 뜻)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다”,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쨌든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래요. 불성이란 뭐냐?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말해요. 즉 성품을 말해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래요. 여러분께서는 그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본래는 부처다, 내 본 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 그런데 부처님 같으신 분은 그렇게 훌륭하게 그렇게 위대하게, 일세를 풍미하고 살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인생을 사느냐? 그래서 괴롭고 어렵고 힘드시고, 심지어 “못 살겠다 날 좀 살려 주시오” 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느냐?
그것은 번뇌 망상 때문이라는 거래요. 여러분께서 수십생, 수백생을 살아 오면서, 이런 번뇌 저런 망상으로 아니면 여러 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 번뇌와 망상이 내 근본 불성을 흐리게 했다는 거래요. 그것은 비유하면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고 청명했습니다. 이런 날은 저 동해안에 가면 물이 그렇게 맑아요. 막 수십미터 아래가 보여요. 그러나 장마철이나 태풍이 올 때는 온통 바닷물이 막 소용돌이 쳐서 아주 더럽고 탁합니다. 1 미터 아래가 보이지 않아요.
그것처럼 우리 마음도 온갖 번뇌 망상으로 괴로워하고 안절부절하고,못 살겠다 죽겠다 그런 등등 온갖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 마음이 흐려져요. 그래서 근본마음이 보이지 않아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을 닦는다”하는 것은 그 흐린 마음을, 그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해서 깨치게 하는 거래요. 여러분이 많이 하시는 염불이나 주력이나 참선은 물론이고 그런 수행은 마음을 집중해서 그 흐린마음, 그 탁한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수행법이래요. 그것은 집중해서 그런 그 번뇌 망상을 고요하게 해서 고요하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밝아져요. 밝아지면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마음을 타파하는데 본뜻이 있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냐,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그러면서도 흔히 어렵다 어렵다 하는 그 방법은 즉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는 거래요.” “놓는다, 쉰다”합니다. 그러나 참 놀기는 쉬운데 놓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발심 못한 참선자일 수록 모든 인연을 끊고요 ,만사를 쉬어서 도대체 마음 쓸 곳이 없도록 해라”하는 것이 옛어른들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놓고 비우고 쉬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놓을 수만 있으면 철저히 놓고, 비울 수만 있으면 대단하게 비우고 그래서 그 흐린마음,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쉬고 마음을 맑게하는 거래요. 그래서 옛 선사 말씀에 참선자는 천번 쉬고 만번 쉬라 했어요. 쉬고 쉬고 또 쉬고 또 쉬라는 거래요.
개심사에 선섬이라는 그런 선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부란 별 다른 게 없다 그저 놓아 버리는 것이다”즉 마음에 있는 것을 일시에 놓아 버리는 것이 바로 공부다 했어요. “마음에 있는 것을 일시에 놓는다”즉 마음에 있는 생각, 그 마음을 일시에 놓는 것이 공부라는 거래요. 그 놓는 것은 비운다라고도 합니다.
참선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어쨌든 철저히 비우고요. 쉬어도 무섭게 쉬고 놓아도 대단하게 놓아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그렇게 쉬면 ,그렇게 놓으면, 그렇게 비우면 바로 깨닫는다는 거래요.
유명한 임제스님의 말씀에는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청정법신이다 했어요. 이 청정법신이란 부처님의 몸을 말합니다. 쉬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이라는 거래요. 같은 말씀인데 어쨌든 쉬고 쉬어서 그 쉰다는 생각까지도 아주 쉬어서요, 망상과 집착이 사라지면 근본 참모습, 불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요. 그것은 흔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듯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불성입니다. 그렇게 쉬어도 아주 무섭게 쉬고 놓아도 철저히 놓고, 비워도 참으로 비우면 상근기나 발심한 사람은 바로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 어떤 선지식은 “세상에 쉬운 일 중에 쉬운 일이 참선이다” 했어요. 아 비우기만 하면 되니까, 놓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옛 어떤 도인은 견성하기는 “자기 성품을 봐서 부처가 되기는 누워서 떡먹기보다 쉽다”하는 그런 그 대단한 말씀을 하신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우고 놓기만 하면 된다는 거래요. 그렇게 쉬고 비우고 참 놓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 못하니 참 한탄스럽다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의 현대인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 그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과학문명이 아주 고도로 발달이 됐습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로서 과거의 수 십년 전이나 수 백년 전에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아파트에서 이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외형적으로는 잘 살아도요, 과거에 그 어렵고 괴로웠던 춥고 배고팠던 그 시절보다 더 불안하고 더 괴롭다는 거래요. 외형 더 커지고 화려해지면서 발전 할 수록 인간은 점점 왜소해진다는 거래요.
그것은 왜냐? 쉬고 비우고 놓지 못하기 때문 이래요.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 행복을 모르고 불행하게 괴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를 놓고 참으로 비워서 깨치지는 못 하더라도 마음은 지극히 안정이 될 거래요. 그 마음이 안정이 된 그런 상태에서 ‘이 뭣고’ 하면서 화두를 하면 화두가 되는 것 같고 더 의정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 같고 더 느낌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설사 쉬고, 놓고, 비워서 깨치지는 못 하더라도 마음이 지극히 안정이 된 상태에서 최상의 참구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뭐냐? 가난하고 무소유를 실천해라. 옛 어른들은 아주 고구정녕하게 아주 노파심절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옛 어떤 어른은 도(道)를 닦고자하는 사람은 즉 “마음을 닦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가난부터 배워야 된다”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마 가난이라면 몸서리치는 분도 있을 거래요.그러나 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어떤 분은 참선자는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해서 청빈하게 살아야 된다. 또 비슷한 말씀을 하신 분도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거래요. 욕망을 내지 않는다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요. 일체 욕망도 버리고 누구에게 애정도 갖지 말고요. 자기에게 어떤 유익한 일에도요. 무심하라는 거래요. 그런가하면 자기를 희생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그런 대승보살심까지도 참선할 때는 버리라는 거래요. 그것마저도 망상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어떤 마음도 가지지 말고요. 철저히 가난해야 된다, 즉 번뇌 망상을 피우지 말라는 거래요. 또한 자기 몸도 가난해야 됩니다.
자기 몸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먹고 입고 주하는 이외에는 크게 생각지 말라는 거래요. 요즘 자본주위 체제 사상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데 이 물건은, 소유는 가질수록 많을수록 더 복잡하고 다단하고 번뇌 망상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먹고 살만 하면 큰 욕심을 내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이 중생은 자기 육신도 가급적이면 너무 생각하지 말고요. 재물에 초연해서 그렇게 살아야 업보 중생은 마음을 좀 바르게 쓰고 시야가 바로 보기 때문에 삶 자체가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일부러 “춥고 배고프게 살아라”그런 말씀을 많이 했어요 . 그러나 요즈음은 좀 안 맞는 말입니다 마는 그렇게 어쨌든 가난하게 살려고 즉 번뇌 망상을 덜 피우고 너무 물질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거래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일의(一衣) 일발(一鉢)로 즉 옷 한 벌, 발우 하나로 기포(飢飽)에 무심(無心)하면 도(道)자고(自高)이니라 했어요.(주: 一衣一鉢로 絶人情하면 飢飽에 無心道自高 야운스님의 자경문) 즉 굶주리고 배부름에 무심하면 도(道)는 저절로 높아진다 하듯이, 늘 이 가난한 그런 마음을 가져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해라 합니다.
가난하고 궁하면서도 늘 절제를 지키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고요. 그 청빈과 소욕지족(少慾知足)하라 이것이 수행자의 모습이다 했습니다. 그 청빈과 소욕지족, 즉 적은 것을 욕심을 적게 내서 만족함을 아는 그런 그 생활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참으로 도 닦을 마음이 나는가 하면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멀어져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승가란제(僧伽難提, 부처님 이후 법을 이은 인도의 제 17조 스님)라는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릴 때 출가 했다고 해요. 그런데 타고난 달변이라 아주 법문을 잘 했다는 거래요, 그래서 승가란제스님이 법문을 하면 막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는 거래요. 그분은 법문만 잘 하느냐? 신도들이 시물을 주면 그 시물을 다 나누어 주는 거래요. 그래서 그 분 뒤에는 수십 명 수백 명이 늘 따라 다녔다는 거래요. 그렇게 절에는 쓰지 않고 잘 나누어 주니깐 그 상좌들이 투정을 했다는 거래요. 그러니깐 하시는 말씀이 “물건을 탐착하면 소중한 자신을 잃게 된다. 마음 속에 애착이 있으면, 좋고 나쁨을 가리게 되고, 중생을 차별하게 된다. 신도들에게 베푸는 물건에 탐착하지 말고 욕망 하나를 버린다고 생각해라”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분은 참 훌륭한 분이라 일생동안 뭐 전연 소유하지 않았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늘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다는 그런 대단한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재산을 보면 얼굴을 돌리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다고 해요. 늙어서 쇠약해지고 병이 들자 제자들이 약을 지어 왔는 거래요. 그러니 그 분은 “내가 살 만큼 살았다 살 만큼 살았는데 나는 약을 안 먹을란다” 하면서 제자들을 오히려 설득을 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돌아가실 땐데 제자 한 사람이 스님 곁을 떠나지 않고 병상을 지키고 있으니까 제자에게 하는 말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병으로 인해서 일어난 고통으로 화두를 삼으라‘ 했다는 그런 그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벌떡 일어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갈란다”“스님, 어딜 가시렵니까?” 하니 “나는 ”갈란다“ 하더니 신발을 신고는 뜰 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시더랍니다, 뜰 옆에 나무가 하나 있는데 나무를 하나 떡 잡더니 그대로 꼿꼿하게 가시는 거래요. 그렇게 참 청빈하게 아주 여법하게 사셨으니까 가실 때도 그 입탈 즉 서서 깨끗하게 그렇게 가셔서 후에 사람들에게 아주 존경을 받은 그런 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수행은 가급적이면 좀 청빈해야 돼요 요즈음은 그러기가 어렵습니다만은 그러나 너무 물건에 집착하지 말고 너무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그저 먹을 만한 정도가 되면 탐욕심을 안 내면서 수행하려고 노력해야 이 번뇌 망상이 덜하다 라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류는 옛 어른 그런 그 훌륭하신 승가란제 같은 그런 분의 사상을 본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인류 장래가 밝아 질 거래요. 요즈음 미국식의 자본주의 영향으로 물질이 만능화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배금사상으로 하나 뿐인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서서이 위기로 돌입하고 있다, 그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지구인들이 지금이라도 좀 이성을 되찾고 정신을 좀 바짝 차려서 아끼고 절약하고, 이 지구가 오염이 안 되게 해서요. 인류 전체가 잘 살아가는 지혜를 모을 때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는 뭐냐? 냉정하게 인정을 끊으시라. 라는 말씀을 옛 어른들은 하시고 있습니다. 사실은 세속에 사시는 여러분께서는 인간관계 자체가 좋은 재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명, 수백 명을 만나시는 그런 분도 계실 거래요. 그런 분들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겠지만 너무 인간관계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거래요. 만날 사람 만나고 가급적이면 복잡하고 다단한 그런 생활을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망상이 끊친다는 거래요. 그래야 진정한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냉정하게 인정을 끊을 줄도 알아야 된다 합니다. 인정이 짙고 인간관계가 좀 복잡하면 자연히 공부에는 손해가 되고요, 도심(道心)은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 중에는 공부에는 사람 노릇까지도 포기하고, 오직 이 공부에 매달려라 하신 그런 분도 계십니다. 특히 출가수행자들 우리 스님들께 해당하는 말인데 오로지 사람 노릇까지도요, 사람으로써 해야 될 윤리와 도덕마저도요, 그것도 버리고 오직 정진 할 때는 정진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한 이십년 전에 돌아가신 통도사의 경봉스님이라는 아주 훌륭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 말씀에 “얘들아!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데서 참사람 나온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흔히 수행자는 바보가 되어도 철저히 바보가 되라는 거래요. 숙맥처럼 천치처럼 주변에 아무 관심도 없이 인정도 베풀 줄 모르고 기본적인 인정마저도 끊고요. 공부 할 때는 그렇게 매진하듯이 막 빠지라는 거래요.
여러분은 그렇게 인연을 끊고 참 숙맥처럼 바보처럼 그렇게 사시기는 어렵지만 공부하실 때는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는 늘 안 하드라 도요. 순간이나 짧은 시간에도 화끈하게 아주 분명하게 막 빠지듯이 막 미치듯이 용맹정진 하듯이 하면 의외로 쉽게 바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이 공부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아주 대단하게 애썼던 그런 분은 이 공부가 참으로 간절할 때는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관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막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해도요, 거들 떠 보지도 말라 그런 말씀도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는 좀 지독하게 하고 철저하게 하시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집에서 하실 때 그래하시기는 어려울 텐데 낮에나 뭐 일요일 같을 때 할 때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전화도 웬만하면 받지 말고 푹 빠지는 선사들의 말씀처럼 그렇게 좀 애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큰 일 일수록, 그 대단한 그런 일 일수록 할 때는 좀 무섭게 하고 빠질 때는 아주 대단하게 빠지면 상당한 공덕을 바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황벽스님이라는 아주 대단한 스님이 계셨어요. 키도 크고 아주 건장한 분이 였던가 봐요. 이마에는 주먹만 한 혹이 있었다고 그래요 정진 할 때는 아주 무섭게 했다는 거래요. 그러나 한 이십년 가량 이절 저 절 다니면서 그렇게 해도 진취가 없었던 거래요. 그동안 속가에는 자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홀 어머니가요, 아들이 어찌나 보고 싶던지 늘 아들 생각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 버렸어요.
세상에, 그래서 아들이 어찌나 보고 싶고 보고 싶었던지 눈이 멀어서 이제는 볼 수가 없는 거래요. 어떻게 하면 그 아들을 볼 수 있을까해서 고향에서 조금 나가면 대의강이라는 그 강의 나룻터가 있답니다. 그 나룻터로 배 타러 스님들이 많이 다녔던가 봐요. 그 나룻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한 집을 지어 놓고는 그 늙은 노인이 지나가는 스님들마다 발을 씻겨 드렸다는 거래요. 왜 발을 씻겨 드렸나 아들 황벽스님이 어릴 때 사고가 나서 발가락 하나가 없는 거래요. 발가락이 하나 없는 자기 아들을 만나려고 참 기막힌 이야기죠. 그 황벽스님이 그 이야기를 들은 거래요.
참 마침 그 대의강 나룻터로 가게 된 거래요. 지나가다 보니깐 옛날에 안 보이는 집이 한 채 있거든요, 그 앞에서 어떤 스님의 발을 어머니가 씻겨 주고 있는 거래요. 멀리서 봐도 분명 어머니라 눈물이 막 비 오듯 하는 거래요.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가다가 그냥 끌려서 한 걸음 두 걸음 가다가 보니깐 어머니 가까이 가게 된 거래요. 어머니가 인기척을 알고요 “스님이십니까? 스님께서도 발을 내놓으시지요 하는 거래요”그냥 끌리듯이 발을 내어 드린 것 이래요.
발을 아주 깨끗하게 씻어 드린 거래요. 오른 발을 다 씻고는 “왼발도 주시지요” 하는 거래요. 그제사 황벽스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왼발에는 종기가 나서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어머니 얼굴을 보니깐 이십년간 이미 완전히 할머니가 되었어요. 얼굴도 형편이 없는 거래요. 그래 그 어머니한테 인과법문을 잘 해 드리는 거래요. 그러면서 그래 잘 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얼른 떠나는 거래요. 마침 그 대의강에 도착하니깐 떠나는 배가 있는 거래요.
그 배를 타고 떠나는 거래요. 그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 발을 씻어 주고는 있으니가 조금 뒤에 마을 사람들이 우우 몰려오는 거래요. 우 몰려와 가지고 “아이구, 아들 스님 잘 보셨지요” 하는 거래요 “뭐락하노?” 하면서 벌떡 일어나는 거래요. “조금 전에 간 스님이 황벽스님입니다”하니까 “황벽아! 황벽아!”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황벽아”를 부르는 거래요.
그래 그 나룻터 쪽으로 가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막 뒹굴면서 가는 거래요. 도착해도 이미 배는 떠난 거래요. (어머니는) 막 물로 들어가면서 아들 이름을 부르는 거래요. 그러다가는 물살 센 곳까지 들어가서 빠져 죽습니다. 황벽스님은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어머니 상황을 다 봤는 거래요. 다 보고는 막 고함을 치는 거래요. “부처님이시여, 한 사람이 출가하면 삼족(三族)이 생천(生天)한다고 하는데 한사람이라도 피해가면 부처님께서 절 속인 말씀입니다” 하면서 막 고함을 치는 거래요.
그러고는 나룻터로 돌아와서는 자기 어머니 그 화장을 잘 해 드립니다. 화장을 잘 해드리고는 이런 게송을 읊어요.
(태어)나는 것도 본래 (태어)남이 없고
멸하는 것도 본래는 멸함이 없다
생멸이 본래 비었으니
실상은 항상 머문다
그런 게송 십구를 읊은 거래요.
그 게송을 읊자마자 막 서광이 비치는 거래요. 그 서광이 오색 서광이라. 보니깐 자기 어머니가요, 오색 구름의 서광을 타고요, 하늘로 올라 가는 거래요. 올라 가면서 아들한테 “고맙구나, 너의 법력으로 내가 극락세계에 간다”하면서 합장을 했다 라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실화입니다
후래의 사람들이 그 내를 복복자 복천(福川)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황벽 스님은 더 발심을하는 거래요. 그래서 당시에 유명한 백장스님이라고 아주 대단한 그런 스님이 계셨어요. 백장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무 먹지말라)이란 그런 좋은 법문을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은 마지막까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을 하셨어요. 늘 일을 하니깐 제자들이 보기가 그렇게 딱해 보이는 거래요. 하루는 도구를 살짝 치웠는 거래요.
그러니 그 날은 문을 꼭 잠그고 나오지 않더라는 거래요. “아, 스님, 스님! 공양하십시오” 하면서 성화를 부리니깐 “일일부작이면,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일 불식,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그런 분인데 그 분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를 잘 해서 훗날 대 도인이 됐습니다.
황벽스님이 훗날 왜 그때 어머니에게 아들노릇을 좀 하시고 그렇게 잘 모시고 오지 않으셨느냐 그래 물으니깐 내 공부가 그렇게 까지는 못 됐고 어머니를 보면 볼수록 마음이 흔들릴 것 같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냉정하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해요. 어쨌든 그 도를 닦는 분은 특히 출가인은 그런 아주 냉정함도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집에서 공부하시다가요, 늘 인정을 베풀고 어질고 착한 일만 하고 남에게 베풀기만 해서는 공부할 사이가 없을 수도 있어요. 공부 할 때는 때로는 좀 지독하고, 정말 냉정할 정도로 아주 좀 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렇게 공부할 때는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마음도 내실 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송광사에 대우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분은 효봉스님이라고 아주 훌륭한 조계종 종정도 그 역임한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이 원체 대우스님이 기질이 약한기라. 여자도 그런 여자가 없는 거래요. 대우스님은 흔히 기침도 크게 못하는 분이다 할 정도로 아주 기질이 약한 분이었어요.
그래서 효봉스님께서 “대우야, 대우야! 너는 그냥 금강경이나 읽어라” 그 말씀에 평생 금강경을 읽으신 분인데 6.25사변 때 평양에서 평양시청에 직원으로 있었다는 거래요.
근데 사변이 나서 평양에 국군이 입성하고는 국군의 일부를 따라서 서울로 피난을 왔는 거래요. 서울로 피난 올 때 “내가 사흘이면 올 테니깐 나를 기다리지 말라” 했는 거래요. 근데 사흘이 지나도 안 오더라는 거래요. 그 슬하에 십육칠세 된 그런 딸이 하나 있은 거래요. 딸이 아버지 찾아서 서울로 서울로 왔는 거래요. 그 딸도 며칠간 찾으면 아버지를 찾을 줄 알고 서울까지 와서 며칠간이 아니라 몇 십년 동안 찾아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근데 그 딸이 서울에 와 가지고는 아버지를 백방으로 찾아도 그 서울 한 복판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가 있나요. 그래 그 하루는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아버지 소식을 물으니깐 “너의 아버지가 중님이 됐드라” 하더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날부터는 뭐 절로 절로 아버지를 찾아 다니러 온 절을 다 헤매었다는 거래요. 그러나 없는 거래요. 그 어떤 절에 가니 깐 어떤 스님이 너 그러지 말고 중님들 본부가 조계사에 있으니깐 거기가서 물으라 하더라는 거래요. 그래서 거기 가니깐 어떤 스님이 그 스님 아마 동화사에 있을 것이다 하드래요. 그래서 동화사로 내려 갔더래요. 내려가니깐 마침 그 법흥스님이라고 그 분은 머리가
아주 좋은 분이래요. 흔히 컴퓨터다 하는 분인데 그 남의 이력 같은 것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인데 누구 누구 하니깐 대번에 아는 거래요. 그냥 컴퓨터에서 뭐 빼듯이 그 자상하게 이야기를 하니깐 아 자기 아버지가 틀림없거든. 그래 그 대우스님은 지금 “선산 도리사에 있으니깐 가 보시오” 하더라는 거래요 바로 선산 도리사에 갔더라는 거래요 선산 도리사에 가니깐 마침 오후에 정진시간이 끝나고 스님들이 주욱 나오라는 거래요. 그래 보니깐 자기 아버지가 있는 거래요. 자기 아버지를 보자 마자 얼른 나가서 “아버지!” 하고 싶었으나 스님들이 쭈욱 나오니깐 그 말은 못하고 숨어서 지켜 봤겠다. 그래 자기 앞으로 나오더라는 거래요. 얼른 나가서 막 아버지하고 했는 거래요.
그러니깐 그 기질이 여성같은 큰 소리 한번 못 치시던 그 대우스님이 왜 나 중노릇 하는데 왔느냐고 호통을 치드라는 거래요. 그때 그 남한에 내려와서 한 십년가량 그 아버지를 찾으려고 그렇게 고생고생 하고 십 년만에 만난 그 아버지가 이젠 표범이 되었는기라. 그래서 어찌나 섧던지 도리사에서 인제 대구까지 가면서 울고 대구에서 저녁에 밤 열차 타고 서울까지 가면서 울고 울고 또 울고 울었다는 거래요. 대우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송광사에서 49재하는데 와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을 끊을 때는 참으로 큰일을 하는 분은 냉정한 그런 모습을 좀 보여야 합니다.
네 번째는 뭐냐?
가급적이면 묵언을 하라! 말을 좀 삼가라! 참선자는 입이 좀 천근 같아야 해요 일체 잡담은 삼가고요, 벙어리처럼 수행을 할 때는 해야 됩니다. 왜냐 아무리 유창하게 막 청산유수같이 말을 해도요. 폭포수같은 언변을 토하더라도요, 말이 없는 것보다 못해요.
말은 아무리 잘 해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요. 달 자체는 아니라는 거래요. 그래서 세속사람도 “침묵은 금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으뜸이다”그런 뜻이지요.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한참 도 닦을 때는 아무 재미도 없는 사람처럼 아무 표정도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입에서 악취가 날 정도로 말을 하지마라” 그렇게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 중에서는 묵언패를 걸고 몇 년간 심지어 십년 이상 묵언하셨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한암스님도 서울 근교의 저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가 오대산에 들어가시면서 “나는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즉 봄 석달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안 배우겠노라”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좀 말을 가급적이면 안하는 것이 좋고, 안 하는 가운데서도 말 없는 가운데서 참으로 진리를 느껴야 됩니다.
그것은 왜냐, 그 진리는 말로써 글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흔히 “언어도단(言語道斷), 말길이 끊어지고 심행처멸(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다” 즉 생각까지도 끊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래요. 즉 아무리 말을 잘해도 어떤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노자께서도 이런 말씀을 했어요.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참으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래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이 진리는 알면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만물과 인간의 근본이치를 도(道)다 합니다. 사실은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래요. 그것을 법(法)이다, 진여(眞如)라 하지만 부득이 그렇게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흔히 법문(法門)을 한다하지만 법문도 이렇게 입을 열어서 하는 법문만이 법문이 아니래요. 언어 이전의 소식 그대로가 진법문(眞法門)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바로 참다운 법문이래요.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로 표현한다면 도리어 못난 그런 법문이 됩니다. 그래서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가 진리를 그대로 드러난 말씀이래요.
이 우주 법계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도 무심히 법문을 하고 법륜을 그대로 굴리고 있는 거래요. 그래서 일체 유정, 무정의 물건마다 각가지 형상마다 사실은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깨치고 나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아닌 것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법문은 “법사가 이 법상에 오르기 전에 이미 다 됐다, 그대로가 법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가급적이면 말을 좀 삼가고 말을 할 때는 참으로 해야 될 말 바른 말 진리의 말만 해야 됩니다.그래서 수행자는 외모는 단정하고, 외부의 모습은 아주 단정하고 여법하고 ,내면은 맑고 밝듯이 말에도 잡스러움이 없어야 하고 일체 사량과 분별을 않아야 됩니다.
이 다섯 번째는 뭐냐? 행동을 자재하라 가급적이면 너무 많이 다니지 말라는 거래요. 이 수행하는 사람을 흔히 좌선한다 이 참선하는 것은 좌선이 가장 쉽고 잘 되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한치 앉으면 한 치 부처고, 두 치 앉으면 두 치 부처다 말이 있습니다. 즉 잠깐 동안이라도 앉으면 부처로 그만큼 자란다는 것이래요. 그래서“한 치라도 똑똑이만 앉으면 그 자리가 부처자리다”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좌선을 찬양하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한 순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한 순간이라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도 났다 했습니다. 항하사란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합니다. 그 갠지스강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 모래만큼의 칠보탑, 일곱가지 보배로 만든 탑을 만드는 것 보다도 낫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 이 보배탑은 결국은 먼지로 돌아 가지만 아무리 좋은 보배라도 그런 보배로 만든 탑이지만 결국은 먼지로 돌아 갑니다. 그러나 한 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얻는다 했습니다.
그만큼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필요 없이 좀 나 다니지 말고 행동은 자제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도 집과 직장과 꼭 가야 할 곳만 다니고 볼 일을 볼 것이지 이리 저리 많이 다녀서 좀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번뇌 망상을 피우는 그런 계기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좌복을 떠나지 않아야 된다 했습니다. 그래서 수좌는 절구통이나 바위처럼 좌복 위에서 움직이지 말라 그런 말씀도 했습니다. 아까 그 말씀 드린 효봉스님은 아주 유명한 스님이신데 그 스님은 한번 앉으면 참선한다고요 보통 여섯 시간정도는 앉았다는 거래요. 그래서 흔히 절구통 수좌라 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해요. 그 분의 그 공부한 일화가 참 많아요.
그중에 한 일화인데 1927년도 여름이었다고 해요. 저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안거에 들어 갈 때 대중스님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는 거래요. “소승은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선과 방선 시간도 없이 또 경행하는 시간도 없이 줄 곧 앉아서 정진하면서 배기겠습니다.”
그렇게 대중에게 통보하고서는 석달동안 아주 막 지독하게 그 뜨거운 아랫목에 앉아서 참 애쓰더란 거래요. 어느날 공양 시간이 됐는데 벌떡 일어나니깐 좌복이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는 거래요. 하도 많이 앉아서 진물이 나서요. 진물이 바지에 젖어서요, 바지하고 좌복하고 붙은 거래요. 그래서 좌복이 떨어지지 않고 일어나더란 거래요.
그렇게 지독하게 정진했다는 그런 분인데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저 표충사 서래각에서 돌아 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요, “무(無)라! 무(無)라!” 즉 화두 참선을 하면서 돌아 가셨기 때문에 당시에 화제가 되시기도 했습니다.스님은 어찌나 참선에 애를 썼던지 이 말년에는 걷지를 못 했어요. 동화사 계실 때나 서래각에 계실 때 보면 어그정 어그정 할 정도로 그렇게 애써서 아주 훌륭한 모범을 보인 그런 분이 계십니다.
티벳트에 가면 티벳트 라마승들은 대단한 수행을 한다는 거래요, 그래서 티벳트 불교가 지금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아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티벳트에는 자연동굴이 많다고 해요. 수행자들이 동굴 속에 들어 간다는 거래요. 이 동굴 밖에서는 창문으로 완전히 차단을 시킨답니다. 들어갈 때는 입은 옷하고 좌복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간다는 거래요.
매일 한 끼씩만 넣어 주는 거래요. 거기서 먹고는 변 보러도 못 나오고요, 그 안에서 변도 다 보고 그 대부분이 동굴 안이 캄캄하답니다. 전깃불이 없는 거래요. 그 어두운데 한 6개월 정도가 되면 눈이 완전히 먼 답니다. 눈이 멀더래도 일단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는 못 하는 거래요. 견성하거나 즉 부처가 되거나 아니면 죽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거래요. 그래 어떤 스님들은 입은 옷이 막 떨어지는 거래요. 떨어져서 알몸으로 막 뒹굴듯이 그렇게도 막 살면서 오직 육자진언(六字眞言) 즉 ‘옴 마니 반메훔’ 그것을 하다가 일생을 그렇게 수행하면서 사시는 그런 분이 티벳트에는 많다고 해요.
그 어떤 스님은 22년간이나 그렇게 지독하게 수행을 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지요. 그런 그 대단한 이야기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겠습니다. 참 그 라마승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시는 분이라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은 들어가서 철저히 자기를 결박해서요, 막 목숨 바쳐 정진한다는 거래요. 그런 그 대단한 분들이 세계 정신세계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여러분들도 발심, 발심, 참으로 발심해서 정말 진정한 그런 수행자가 좀 되셔서 정말 보람 있고,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상으로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고, 가난하게 무소유정신으로 살아가시고, 때로는 냉정하게 인정마저도 끊고, 가급적이면 묵언하면서 행동까지도 자재하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가면서 수행하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법문 내용은 다 번뇌 망상을 없애라”는 거래요. 문제는 번뇌 망상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번뇌 망상을 없애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일상생활에서도요,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마음을 고요히, 고요히 해서 여러분의 삶을 아주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선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고요한데서 마음이 닦이기 시작합니다. 고요하지 못하면 절대 닦이지 않아요. 그런가하면 중생교화도, 보살행도요, 고요해야 참으로 할 수가 있어요. 고요해야 안정이 됩니다. 안정이 되어야 참으로 남을 위하려는 그런 훌륭하고 거룩한 그런 그 마음을 낼 수 있어요. 자기 내면이 번뇌 망상으로 막 들 끓고 괴롭고 그 못살겠는데 남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안정이 되어서 참으로 수행하는 그런 기분을느껴야 “아! 좋구나, 안 할 수 없구나” 해서 쌀독에서 인심 나듯이 남에게도 자연스럽게 베풀게 되고 남을 위하는 그런 생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중생교화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인간관계나 일상생활의 기본도요, 고요한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관계도요, 내가 고요해야, 내 마음이 고요해야 남에게도 고요하게 해 주는 거래요. 그래야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진정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활도 자기가 고요하지 못하면 괴롭고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잘 할 수도 없고, 흉내내는데 급급한 그런 정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고요하게 해서 고요하게 하면 맑아져요. 맑아지면 밝아져요. 밝아지면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일체 번뇌 망상을 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고요한데서 나의 모든 행복과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공자님 말씀에 “하늘을 보고 땅을 내려다 봐도요, 옆을 보고 뒤를 돌아다 봐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사시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이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참으로 사는 길은 즉 구름 한 점 없으면 태양이 쨍쨍 쪼여서, 오늘 날씨 같은 아주 좋은 날씨가 되듯이 마음이 고요해져서요, 맑아지고 밝아지면 참으로 하늘을 보듯 땅을 보듯, 옆을 보듯, 뒤를 돌아보듯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가장 잘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고요해지면 처처(處處)가 정토라, 어떤 곳이든지 다 부처님 도량이래요. 그런가 하면 사사(事事)가 불공이 됩니다. 일하는 것마다 다 불사(佛事)라, 다 부처님 일이래요. 즉 진리에서 느끼는 그런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문으로 인해서 좀 발심하고 아주 신심을 좀 돈독히 해서 정말 화두에서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꼭 느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래요.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다 하는 것이 옛 어른들 한결같은 말씀이래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화두가 돼서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한 상태,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항시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면 바로 느껴요. 혹시 화두가 잘 안되는 분은 수식관이라도 좀 해서 얼른 좀 느껴 보세요. 느껴 보면 “아, 안 할 수 없구나, 이 건 뭐 반드시 해야 되겠구나!”하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좀 신심을 좀 더 돈독하게 하고 참으로 마음을 내서 여러분의 인생에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이 선(禪)에서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화두참구법 제6강-화두가 안되면 특단의 조치를!(2007년 6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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