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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서사 가을호 텍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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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 작성일05-12-19 16:06 조회4,025회 댓글1건

본문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 성철 스님
육조 혜능 대사 유적지 답사기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음력 시월 초하루는 유서깊은 문수산 축서사에서 매년 연중행사로 열리는 100일 관음기도 입재일입니다. 동참하신 여러분과 그 가정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가득하여 건강하고 하시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매년 100일 기도를 하시고, 이 외에도 평상시에 기도를 하시고 특별기도도 하실텐데 기도가 잘 되십니까? 또 기도하는 보람과 공덕을 느끼십니까?
기도를 보통하시고 흉내만 내시는 분은 별 느낌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열심히 하시고 지극하게 하시는 분은 분명히 보람과 긍지를 느끼실 것입니다.
기도는 하시는 것만큼, 애쓰면 애쓰는 것만큼 공덕이 있습니다. 가피(加被)나 느낌이 없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안 될수록 더 지극한 신심을 내고 더 굳건한 원력을 세워 열심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스스로 ‘나는 못난 사람이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는 단점과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등등 지혜롭지 못하고, 부족하고 고칠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낄수록 더 열심히 하시고, 더 자주 하시고, 더 지극하게 해보십시오. 기도는 바라는 전부를 성취해 줄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개발하고, 자기를 완성하고, 깨달음으로 가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해라, 말아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고 꼭 해야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안 하면 자기 손해입니다.
사람은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속담에 ‘빌면 무쇠도 녹는다’고 하였습니다. 옛 어른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절하게 기도하며 간절하게 일하라. 그러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불자 여러분께서는 100일 관음기도를 열심히 하셔서 기도하는 보람과 가피를 진정으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호의 법문은 육조 혜능(慧能) 대사의 유적지 답사기로 하겠으니, 신도 여러분께서도 중국 선종 사찰을 여행하시는 기분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서기 2005년 9월 7일 오전 10시 40분,
소승은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 선원장급 대덕 스님 25명과 함께 ‘선의 원류를 찾아서-달마에서 혜능까지’라는 이름으로, 14박 15일의 일정 동안 중국 선종 중요 사찰 답사길에 올랐습니다.
순례지는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광동성,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등지에 산재해 있는 초조 달마(達摩) 대사의 유적지를 비롯하여 단비(斷臂)로 유명한 2조(祖) 혜가(慧可) 대사, 명저 신심명(信心銘)의 3조 승찬(僧璨) 대사, 6조 혜능 대사 관련 유적지를 순방했습니다. 그 외에도 7조로 추앙받는 남악(南嶽) 스님, 천하(天下)의 마조(馬祖) 스님, 선원청규(禪院淸規)를 제정하신 백장(百丈) 스님, 임제종의 종조(宗祖)인 임제(臨濟) 선사, 옛 부처의 후신으로 불리어지던 조주(趙州) 선사 등 화려한 역대 조사 스님들의 유적지를 참방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번 순례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육조 대사의 유적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2000년 1월 1일, 새로운 한 세기를 열면서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는 인류 역사상 세계를 움직인 100대 명저를 뽑았습니다. 불교계에서는 『불경(佛經)』과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선발되었습니다.
경(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한 책을 말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고승 대덕들이 쓴 어록(語錄)이나 저술이 무수히 많지만 ‘경’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경』 뿐입니다.
그 『단경』을 쓰시고, 사실상 중국 선불교의 종조(宗祖)이시며, 돈오견성론(頓悟見性論)을 주장하여 조사선(祖師禪)을 확립한 업적과 명성을 남긴 분답게 선종 사찰 조사전에는 단골로 어김없이 모셔진 분이 육조 대사였습니다. 그런 대사지만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혜능 대사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광동성(廣東省) 신주(薪州) 출신입니다. 할아버지가 관리로 있다가 좌천되어 귀양가서 일반 백성으로 전락되었다고 합니다.
대사는 3세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겨우 호구지책을 면할 정도로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어질고 착한 사람인데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 마을에서도 효자라 소문났다고 합니다.
당시 조혼하던 풍습이 있었지만 대사는 24세가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땔감 나무를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한 짐 지고 신주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 마음에 곧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겉으로는 나무 장사나 하던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대단한 선근(善根)이 있었습니다.
혜능이 “이 경전은 어디에서 얻은 것입니까?”하고 물으니 독경하던 사람이 “황매(黃梅) 홍인(弘忍) 선사가 계신 곳에서 얻었다”라고 말하자 바로 홍인 대사에게 갈 뜻을 냈습니다. 그러나 바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을 걸려 가까스로 어머니를 설득하여 오조사(五祖寺)로 출가하였습니다.


오조사는 호북성 황매현에 있는 절로서 홍인 대사가 오랜 동안 주석하시면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펴기도 하고 열반에 든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혜능이 홍인 조사의 의발을 전수받아 6조가 되었으며, 『단경』에 나오는 일화처럼 신수(神秀) 대사와 혜능의 게송으로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도량이기도 합니다.
혜능이 홍인 대사를 친견하니 대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느냐?”
“영남의 신주에서 온 백성이온데,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너 같은 남쪽 변방의 오랑캐가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혜능은 단호히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佛性)에야 어찌 남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홍인 대사는 야만인 취급을 받던 변방 오랑캐 출신 혜능의 ‘불성에야 어찌 남북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대기(大機)가 번뜩이는 대답에 다소 놀라면서도 흡족해했을 것입니다.
이는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신,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불교의 기본 사상인 불성평등론(佛性平等論)과 같습니다. 혜능은 후일 이와 같은 불성론을 우리 자신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원만구족한 자성(自性)으로 구체화시켜, 자성을 철견하면 곧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돈오견성선(頓悟見性禪)을 꽃피우게 됩니다.
그러나 홍인 대사는 겉으로는 무시해버린 채 방앗간으로 가서 방아나 찧으라고 합니다.
오조사에는 혜능이 1천3백 년 전에 방아를 찧던 방앗고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 있던 디딜방아와 방아를 찧던 돌은 호북성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오조사의 주건물로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앞에는 천왕전(天王殿), 뒤에는 비로전(毘盧殿), 성모전(聖母殿)이 있고, 양 옆에는 선원과 후원채 및 요사가 있었습니다. 이들 건물은 1966년도부터 1976년도까지 중국을 휩쓸었던 홍위병의 난동으로 파괴되었다가 1980년대 초에 중창되고 보수되어 겨우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중국 선종 사찰의 건물은 대부분이 최근에 중창하거나 보수한 것이라 내부에도 볼 만한 유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찰 뿐만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북경의 유명한 자금성(紫金城)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금성은 명(明), 청(淸)조의 황궁으로 면적이 무려 72㎢나 되고, 방 수가 무려 9,000여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궁중 내 방에서 하룻밤씩만 자도 27세까지 될 때까지 자야 할 만큼 엄청난 숫자입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의 배경이 되어 세계에 알려진 자금성의 대문이 바로 중국의 얼굴, 중국의 상징이 되고 있는 천안문(天安門)입니다.
이 자금성도 건물뿐, 내부는 텅텅 비어 있고, 전시물의 거의 전부가 모조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어떤 문화재 전문가는 ‘중국이 비어 있다’고 했습니다.
오조사의 특이한 전각은 홍인 대사의 생모상을 모신 성모전(聖母殿)입니다. 현재 모셔진 생모상은 1985년도에 소조했다고 합니다. 성모전은 청나라 건륭(1736~1745) 초에 최초로 건립되었습니다. 홍인 대사의 생모는 당 태종(598~649) 때 칙명에 의해 성모로 봉해져 중국 유일의 성모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혜능이 오조사에 머문 지 8개월 만인 어느 날 홍인 대사께서 제6대 조사를 정하고자 제자들의 심게(心偈)를 공모했습니다. 홍인 대사는 깨달은 바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게송을 지어 승당과 방장실을 연결하는 복도 벽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오조사 홍인 문하의 학인들은 이미 후계자 물망에 오른 신수(神秀) 선사가 5조의 의발(衣鉢)을 전수하리라 생각하고 아무도 심게를 써올리지 않았습니다. 신수 선사가 맨 먼저 게송을 붙였습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身是菩提樹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으니 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時時勤拂拭
때 묻지 않도록 하라 勿使惹塵埃

신수 선사의 게송이 방장실 옆 복도 벽에 붙자 다른 학인들은 예상대로라는 듯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혜능이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는데 한 노승이 방앗간을 지나가면서 신수 선사의 게송을 염송하였습니다. 혜능은 이 때까지도 5조가 심게를 공모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혜능은 노화상에게 그 게송의 내용을 알려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신수의 게송과 그 뜻하는 바를 설명듣고 난 혜능은 당돌하게도 노스님에게 부탁드립니다.
“행자가 한 수 지을테니 스님께서 좀 적어주시겠습니까?”
노승이 쾌히 승낙하며 글씨를 모르는 혜능 대신 써 준 게송이 유명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게송입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 菩提本無樹
밝은 거울도 그 받침이 없는 것 明鏡亦非臺
불성은 언제나 청정하거늘 佛性常淸淨
어디에 티끌이 있으랴 何處有塵埃


혜능의 이 게송은 선종사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일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는 남종선(南宗禪)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수 선사의 북종선(北宗禪)과 자연스럽게 대비되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논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한 조사의 지위에도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선종사에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황매 오조사에는 이 게송이 붙었던 복도 벽이 조당(祖堂) 옆 요사채에 있어서 감명이 깊었습니다.
오조사에서는 5조 대사의 진신상을 모신 법우탑(法雨塔)이 있는 진신전과, 656년에 창건되어 달마 대사, 혜가 대사, 승찬 대사, 도신 대사 등 4대 조사상을 모신 조사당 등이 참배할 만합니다.
그 외에도 백련지(白蓮池), 선정사(禪定寺), 5조 만보탑, 비흥교라는 다리 등의 유적이 있습니다.
5조에게서 법을 전수받아 6조(祖)가 된 혜능 대사는 후계자 다툼으로 인해 산 속에 숨어 살면서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15년 후, 676년에 나타난 곳이 광동성 광주에 있는, 현 광효사(光孝寺)인 법성사(法性寺)입니다. 법성사는 육조 대사께서 오조사에 이어 두 번째로 인연을 맺은 도량입니다. 전설로는 달마 대사가 중국에 건너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이라고 합니다.
육조 대사가 법성사에 도착하니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학인들 여럿이 모여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한 학인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자 다른 한 학인은 “아니다,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혜능 대사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직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뿐이오.”라고 하여 대중들이 감탄하였습니다. 이 풍번문답(風幡問答)을 한 곳이 바로 현재의 방장실 앞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풍번당이라는 정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풍번문답 인연으로 정식으로 삭발을 하고 주지 인종(忍宗) 법사로부터 비구계를 받게 됩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육조 대사가 삭발한 머리카락을 보관 중인 삭발탑이 단연 시선을 끕니다. 8면 7층의 전탑으로 높이는 5.5m라고 합니다. 당 의풍 원년(677년)에 건립하고, 송나라 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탑 옆에는 수령이 1,500년인 보리수가 한 주 있습니다. 502년에 인도승(印度僧) 지약 삼장이 심은 것인데, 인도 스님이 중국에 심은 최초의 보리수라고 합니다. 육조 대사께서 이 나무 밑에서 수계를 했다 합니다.
육조 대사에 관련된 유물 유적으로는 조사당의 목조 육조상이 있습니다. 조사당 건물은 송대에 건립된 전각인데, 향대(香臺)에 목조 혜능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광효사는 당·송대의 품격을 물씬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 절은 1961년 전국주요문물단위로 지정되었고, 1986년 종교활동 개방사찰로 국무원 비준을 받아 원래의 불교사찰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다른 중국 사찰에 비해 경내가 말끔히 정화되어 있고, 유물 유적들도 잘 관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간 16~17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화복원 속도가 빨라 한국의 시내 어느 사찰을 방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혜능 대사는 광효사에 1년 가량 머물다가 677년에 조계(曺溪) 남화사(南華寺)로 옮겨 방장으로 취임합니다.
“나에게 법이 있는데, 이름도 글자도 없고, 눈도 귀도 없으며, 몸도 마음도 없으며, 말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고, 안과 밖과 중간이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색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다.”


“인성(人性)은 본래 깨끗한 것인데, 망념(妄念)을 일으키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세인의 성(性)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만법은 자성에 존재한다. 세인의 성이 깨끗함은 마치 푸른 하늘과 같다.
일체 번뇌망상이 비록 자성에 존재하더라도 자성이 물들지 않으면 중중존(衆中尊)이라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모두 인성(人性) 가운데 있으며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첫번째 법문은 본성이 공적(空寂)하다는 것이고, 그 아래 법문은 ‘인성은 본래 푸른 하늘과 같이 깨끗하다. 부처와 십이부 경전도 그런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광동성 소관시에 위치한 대법사(현 대감사)에서 설한 상당법어 중의 한 구절입니다. 대감사(大鑑寺)는 대사의 설법도량임을 기념하기 위해 당 헌종 황제가 그의 시호를 붙여 개칭되었습니다.
육조 대사가 광효사의 학인들에게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데 위 자사가 그의 설법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감사로 모셔 관료들과 승려, 신도가 함께 법문을 들었습니다. 저 유명한 『육조단경』은 대감사의 설법을 중심으로 편찬되었습니다. 대감사의 설법을 계기로 육조 대사의 본격적인 행화가 조계 남화선사(南華禪寺)에서 36년간 펼쳐진 것입니다.
대감사의 설법은 육조 대사의 법력을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중요한 법석(法席)이었습니다. 그후 조계 남화선사로 돌아가 황폐해진 절을 중건하고 돈오의 선리(禪理)를 널리 펼치신 것입니다.
대감사에서 남화선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낯익은 글씨가 자주 보였습니다. 바로 ‘조계(曹溪)’라는 두 글자입니다. 남화사 앞 냇물의 이름도 조계이고, 뒷산도 조계산이며, 남화사의 정문도 조계문이었습니다. 순간 서울 조계사 주변에 서성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원래 ‘조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마을에 조(曹)씨들이 많이 살고, 동구에 시내가 흐르고 있다 하여 ‘조씨 집성촌의 시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후 남화사가 조계 마을에 건립되어 육조 대사가 남화사에 오래 주석하셨으므로 대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조계종’이나 ‘조계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대사께서 가장 오랜 동안 사신 절이 남화사입니다. 남화사는 원래는 보림사(寶林寺)라 하였고, 당대에는 흥천사(興泉寺)라고도 하였다가 송나라 때부터 남화사라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남화사는 이번 순방 사찰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승려수도 120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선원 대중도 40여 명이나 되어서 가장 감명 깊었던 곳이었습니다.
이 절도 청대(淸代) 이후 황폐해진 상태였으나 1934년 국민당 정부 시절 이한위 장군이 중국 불교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허운(虛雲) 법사를 초청하여 남화사를 비롯하여 대감사, 운문사를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육조 대사께서는 당 의봉 2년에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이후 삼십여 년 간 법력을 펴셔서 명실공히 육조 도량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화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의 황금기인 당·송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였고,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 유명한 선종조정(禪宗祖庭)으로 ‘영남 제일 선사(禪寺)’라는 칭호도 붙었습니다. 남화선사는 한·중·일의 선승들이 평생 동안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고향 같은 곳입니다.
그럼 육조 혜능 대사의 사상은 무엇인가?
혜능 대사의 사상적 핵심은 불성론(佛性論)과 돈오견성설(頓悟見性說)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자심(自心)의 바탕 위에 각성여래(覺性如來)가 큰 지혜광명을 나툰다”고 하였으며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니 자불(自佛)이야말로 진불이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깨칠 수 있고, 깨치면 진불(眞佛)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대사는 “본심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무익하다”고 하며 “자성의 심지(心地)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명철하면 자기의 본심을 알 수 있다.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진여(眞如)의 본성은 지혜로써 관조하여 일체의 법을 취함도 버림도 없는 것이 곧 견성하여 불도를 이루는 것이라 하여 돈오견성을 중심사상으로 폈습니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실천으로써 무념(無念)을 종지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로 삼으며, 무주(無住)로써 근본을 삼았습니다.
현재 중국에선 이런 사상이 크게 펼쳐지지 못하고 수행하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다만 남화사와 몇 개 사찰에서만 수행 정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대사께서 가신 지가 1천5백년이 되었지만 진귀한 유물들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유명한 육조 대사의 진신상(眞身像)을 비롯하여 당 시대에 조성한 천불 가사 및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성지(聖旨), 북송나무로 조각한 오백 나한상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보물들을 보기 전에 육조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탑은 대웅전 바로 뒤에 자리한 8면 5층의 전탑으로 대단히 크고 높습니다. 당 현종 개원 6년(718년)에 건립된 것으로 그후 훼멸되었다가 송대에 복원하여 그 건축 기법이 전형적인 송탑(宋塔) 형식입니다.
이 탑 밑의 지궁(地宮)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신 후 미륵불 탄생 때까지 대자대비하게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지장보살의 여러 모습을 소조하여 모셨습니다.
원래는 이 탑 1층에 육조 대사의 진신상을 모셨으나, 지금은 육조전으로 옮겨 봉안하고 있습니다. 진신상을 모셨을 때는 남화사 신앙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탑이라면 한국 불자들은 부처님을 모신 사리탑을 연상하는데, 중국의 탑은 벽돌이나 나무로 쌓은 탑이 많고, 부처님의 탑보다 옛조사들의 탑이 더 많았습니다.
육조탑을 참배하고 육조전에 오르니 앞 기둥에는 ‘조인운광 남천불지(祖印雲光南天佛地)’라는 잘 쓴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서니 사진으로 많이 본 그 얼굴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진신의 얼굴은 새카맣게 옻칠된 상태였는데 화려한 좌대 위에 올려져 유리관 속에 잘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대사의 진신을 대하니 온몸이 긴장해 굳어지는 듯하더니 땀이 비 오 듯하였습니다. 얼마 후 정색을 하고 예의를 갖추고 나니 대사에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이 용솟음쳤습니다.
대사의 시신을 그대로 불상처럼 모신 육신상은 여러 가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경탄스럽고 공경스러워 순간 진정한 발심이 되었고, 신앙심이 돈독하게 고취되었습니다.
육신 보살, 인간 부처, 중생이 곧 부처임은 혜능 대사께서 살아 생전에 누누이 강조했던 사자후였는데 마치 살아 있는 목소리로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진신상은 1천3백여 년이나 된, 현존하는 중국 선종 최고의 등신불(等身佛)입니다. 이 진신상에 얽힌 일화가 많은데, 가장 최근인 문화혁명(1966~1976) 때의 일입니다. 혁명을 일으킨 홍위병들이 육조의 진신상을 파괴하려고 도끼로 진신상의 팔뚝을 내리치자 흰 뼈가 튀어나와 질겁을 하고 다시는 해칠 생각을 않고 철수했다는 것입니다.
육조 전에는 대사의 진신상 외에도 좌우로 명·청대의 고승이자 남화사의 중흥 불사를 한 감산 선사와 단전 선사의 육신불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육조 대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옻칠을 하고 향을 바른 갈색 등신불이었습니다. 3구의 등신불 모두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육조 전에는 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로부터 받았던 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가사에는 1천 개의 불상과 20가지의 신(神), 용(龍)이 금실로 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가사를 일명 ‘천불 가사’라고 부른다 합니다. 수가 정교하고 아주 화려하며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발우는 명대(1523년)에 받은 것입니다. 이 밖에 측천무후가 통천 원년(696년), 혜능 대사의 무위돈오법(無爲頓悟法)을 시방에 전파하여 중생제도를 찬양한 내용의 성지(聖旨)와 원·명 황제들이 내린 성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육조전을 지나 조사전에 이르니 거기에도 육조 스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조사전에는 초조 달마 대사로부터 육조 대사, 위앙종과 임제종 법맥의 정맥을 이룬 남악 회양(南嶽懷讓) 선사의 소상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초조 달마 대사로부터 왼쪽은 홀수의 조사를, 오른쪽에는 짝수의 조사상을 모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6조 이후 남종선의 양대 산맥을 이룬 청원 행사(靑源行思) 선사는 모시지 않고 남악 선사상(禪師像)만 모신 것이었는데, 남악 선사를 6조의 정맥(正脈)으로 보는 듯했습니다. 남악과 청원 두 선사는 7조(祖)라고 불리는 거목입니다.
조사전 뒤 종루에는 청대 유물인 천불천탑과 송대에 조각한 오백 나한상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천불탑은 5층 철탑으로 높이 5.1m의 크기였습니다. 양식은 목조 전탑식인데, 층계가 분명하고 탑신에 주조한 대소 1천 개의 불상들의 자태가 아주 단아했습니다. 종루 2층의 범종은 남종 건도 3년(1167년)에 주조한 것인데 곡강현의 24경(景) 중 하나로 일명 남화만종(南華晩鐘)이라고 합니다.
대웅전과 연결된 종루 옆 전각에 있는 오백 나한상은 현재 3백 개 가량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북송 경력 연간(1045~1048)에 조성된 목조 나한상들은 조각이 아주 섬세하고 법의(法衣)의 흐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아주 유연합니다. 대단한 불교 예술품이었습니다.
대웅전 뒤에는 1천 명분의 밥을 지었다는 천승과(千僧鍋)라는 큰 솥이 있습니다. 서기 191년에 주조된 것으로 남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대사께서 개발하여 물을 즐겨 마셨다는 탁석천(卓錫泉)을 지나 등성이를 넘으니 허운(虛雲) 화상의 사리탑이 있습니다. 허운 화상은 『참선요지(參禪要旨)』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으로서 근대 중국 선불교의 중흥조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몇 안 되는 선원에는 허운 화상의 가르침으로 인해 거의 다 ‘염불하는 것이 누구인가[念佛是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남화사에는 기둥에 곳곳마다 이 화두가 붙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1839년생으로 101세에 대감사를 비롯하여 남화사, 운문사 등을 중창하고 120세에 돌아가신, 가장 존경받는 고승입니다.
남화를 떠날 때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짧고 한정된 시간에 여러 곳을 보려니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하루 이틀 충분히 머물며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육조 대사는 713년 8월 3일, 30여 년 간의 남화사 시대를 마감합니다. 그리하여 광동성 신흥현 집성진 용산에 있는 그의 생가터에 건립한 국은사(國恩寺)로 돌아갑니다.
조사께서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고 국은사로 떠나려고 하니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조사께서 이제 가시면 언제 돌아오나이까?”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처음 올 때부터 잎이 없었느니라.”
봄이 되면 새 잎이 돋아나 여름에는 무성하다가 가을이 되면 떨어져 결국은 뿌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결국은 자기의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대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국은사는 대사의 출생 도량이면서 동시에 원적 사찰이 되었습니다.
사찰 입구에 도착하니 폐방에는 선종 성지(禪宗聖地)라는 네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국은사는 임제종 소속이고 상주 승려가 30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대웅전 입구에서 본 사찰 건물은 대부분 청대 양식으로 보였습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좌우 보처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불단 양 옆에는 20나한을 모셨습니다.
보통 16나한, 18나한인데, 이유인즉 육조가 광효사에서 조계 남화사로 올 때 나한 2명이 나타나서 동행했다 하여 20나한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중국 선종 사찰은 통상의 나한수를 바꾸고, 조사나 선사들의 상을 모시는 조사전이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있는 등 한국 사찰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파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의 육조전에는 기둥에 전불심인(傳佛心印)이라는 편액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좌대에는 청대에 조성된 육조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로는 혜능 대사의 핵심 선사상인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천(不遷)을 큰 글씨로 붙여 놓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좌우 면벽에는 『육조단경』을 붓글씨로 정성껏 써서 액자에 걸어 놓았습니다. 유물로는 대사가 사용했다는 옹기 발우와 물그릇, 당 측천무후의 성지(聖旨) 등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육조 대사의 좌대 옆에 육조 부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패에는 성부휘행요노공(聖父諱行瑤盧公) 모 이씨(母李氏) 지연위(之蓮位)라고 써 놓았습니다. 대사가 대단한 효자라고는 하지만 한국 사찰 관습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육조전에는 별도로 육조 기념당이 있었는데, 혜능 대사의 생애를 12장의 채색 그림으로 붙여 놓았습니다. 기념당에는 향대에 백옥으로 만든 육조 부친상을 모시고, 그 아래 육조상을 모셨습니다. 상의 크기는 부친이 크고 아들은 작았습니다. 육조전 옆의 절 담문을 나가면 육조 부모의 묘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합장묘인데 콘크리트로 아주 잘 단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국은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조계 남화사의 육조탑과 같은 보은탑입니다. 탑을 보는 순간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이 탑은 대사께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혜와 절을 지어준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당나라 중종 황제가 705년 혜능 대사의 명성을 듣고 입경(入京)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혜능은 거절합니다. 사신이 “그렇다면 황제에게 올릴 심요(心要)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도에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게 없다. 번뇌가 보리이고 보리가 곧 번뇌이다. 본래 1이 2이고 2가 1이며 동과 서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


사신이 “대승의 불법관(佛法觀)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명(明)이란 무명(無明)과 같은 것이다. 본래의 성품은 둘이 없고 오직 하나일 뿐이다.”


황제는 이 두 말씀에 감명하여 황실이 입은 은혜에 보답하여 국은사를 창건하였다 합니다. 그 대사에 그 황제라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713년 8월 3일 향년 75세로 열반에 드십니다.
대사는 원적에 앞서 자성이 곧 진불(眞佛)이며,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본래가 한몸이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골자로 임종게를 남기고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법문을 합니다.
“너희들은 잘 있으라. 내가 죽은 뒤에 세속의 정으로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거나 사람들의 조문을 받고 상복을 입거나 하는 일을 절대 하지 말라. 이렇게 하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정법(正法)이 아니니라. 오직 자신의 본심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잘 보면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며, 생도 사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가는 것도 없느니라.”


대사는 이 말씀을 유언으로 하시고 저녁 산책을 나가서 뒷산 큰 바위 위에 휴식하는 것처럼 앉았다가 그대로 입적합니다. 대사가 천화하자 국은사와 남화사가 서로 시신을 모실 묘탑을 세우겠다고 경쟁을 벌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찰 간의 팽팽한 대립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소주 자사와 신주 자사가 내놓은 방법이 육조 영전에 동시에 분향해 향 연기가 날아가는 쪽에 묘탑을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향연은 남화사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육조 대사의 시신은 서거한 지 1백일 만에 국은사에서 남화사로 옮겨졌습니다. 대사의 시신은 옻칠을 하고 향을 발라 영구보존키로 했습니다. 관 속에 보존되어 있던 시신은 원적 29년 후인 742년 육조탑(영조탑)을 건립하고 관을 해체해 육신상으로 봉안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육조 대사의 일대기에 맞추어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유적지를 순례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관람하니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깊이 느끼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부족해 참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육조 대사라는 큰 인물을 현대적 시각으로 조감하고 평가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현재 중국 불교는 어린 아이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 이후 중국 불교가 극히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멸망한 상태에서 공산화되어 그 일부 지방마저 완전히 소멸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불교가 1961년에 일부 사찰이 전국주요문물단위로 지정되면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국가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일부 사찰에 한하여 1986년에 종교 활동 허가를 받아 중국 불교의 어둠이 점차 걷히고 서서히 새벽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완전히 죽은 고목에서 새순이 겨우 트는 정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5,000년 역사에 당·송 시대 같은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대단한 국가입니다. 그간 무수한 내전과 외침으로 동산(動産) 문화재나 유형 문화재는 파괴되고 반출되었지만 인쇄물은 보관되어 탄력을 받으면 일취월장할 수 있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오랜 동안 빈사상태, 사망상태에 있었던 중국 불교였지만 육조 대사의 유적지만은 건재하였습니다. 대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가 1,300년이 되었지만 선종 사찰 조사전에는 대사의 조상이 빠짐없이 모셔져 있었고 국은사, 대감사, 남화사, 광효사 등 대사와 인연 있는 도량에는 곳곳마다, 구석구석에 육조 스님의 유물과 전설이 풍부하여 명실상부한 육조 도량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은사는 대사의 집이나 대사의 기념관, 또는 박물관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대사가 아무리 큰 인물일지라도 아직까지도 그렇게 존경을 받고 모셔지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다만 대사의 사상이 선양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완화되고, 종교 활동이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서 중국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신문화 창달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를 닦는 사람에게 있어 불성론과 돈오견성설은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성언(聖言)입니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본래는 부처이다’, ‘자기의 성품을 보아 몰록 깨달으면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씀은 특정 종교의 경지를 떠나 만고의 진리이고 시공을 초월한 대단한 법어입니다.
소납의 단편적인 여행기를 통해 불세출의 대사를 다시 한 번 상기하시고, 대사와 같은 위대한 수행자가 되기를 발원하시기 바랍니다.
당말 5대때 덕소(德韶 : 890~971) 선사가 법안종의 개산조인 법안 문익(法眼文益 : 885~958)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조계의 한 방울 물입니까?”
“조계의 물 한 방울이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누군가 소납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조계의 물이다.”
가중현량(嘉仲賢良)에게 드리는 글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어서 사람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야 비로소 도라 했으니, 이는 진실한 말입니다. 마음만 진실하면 사람과 부처 모두가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조사께서는 오로지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성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나 가진 이 마음은 오랜 세월 전부터 청정무구하고 애초부터 집착이 없으며, 고요하되 비추면서 응연(凝然)하여 마침내 주관과 객관이 없어 완전하고 고요합니다. 그러나 다만 자성을 지키지 않고 한 생각을 허망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이윽고 가없는 지견을 일으켜 모든 존재[有]에 표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 있는 자리에 항상 이 본지풍광을 차고 있으면서 한 번도 어두운 적이 없었으나 6근(根)과 6진(塵)에 부질없이 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숙세의 근기를 바탕으로 모든 불조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신 경계를 만난다면, 그대로 뒤집어서 기름때 낀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적나라하게 되어 대뜸 깨치게 됩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확연하게 이 성품을 분명히 깨칠 뿐인데, 무슨 다시 사람이니 부처니 마음이니 하겠습니까.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 위에 한 점의 눈을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은데, 다시 무슨 허다한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종문(宗門)에서는 말이나 문자를 세우지 않고 최상승의 근기만을 인정할 뿐입니다.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고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깨쳐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명의 껍데기를 부숴버려 조금도 의혹이 없습니다. 그대로 단박에 밝혀서 하루 종일 외연을 굴려서 위없는 오묘한 지헤를 이루나니, 어느 겨를에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며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겠습니까.
한 번 진실하면 일체가 진실하며,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압니다. 마음의 근원에 만유(萬有)를 총괄하고, 세상 저 밖에서 방편의 기틀을 움켜쥐어서 사물에 응(應)하는 대로 형체를 나타내니 나에게 법마다 원만하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생각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마음마음이 머물지 않아 이 영원히 사는 길을 밟는다면 불조와 똑같은 덕, 같은 본체와 작용, 그리고 같은 깨달음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방 백리 되는 고을 다스리는 것쯤이야 손끝에나 있겠습니까?
백성을 편안히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면 저절로 편안해집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 한 기미(機微)에 동화되며 모든 차별이 이 하나의 관조에 일치됩니다. 티끌 같은 법계도 두루 통하는데 하물며 사람과 부처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 원오심요, 원오 극근 선사
맑은 인연을 아는 사람은 바른 법을 얻고
바른 법을 얻은 이는 청정한 도를 이룬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환희심과 기쁨으로
놀라움으로
뜨거운 가슴 벅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처음 만났던 그 날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흘렀습니까
그 아름답던 초발심이
빛바랜 무명옷처럼
가슴 깊은 곳에
잊혀지지는 않았습니까
잠든 초발심을 깨우는 목탁소리를
전해 드립니다
발심을 돌아보며 / 심산 스님 홍법사 주지
천태 대사의 눈으로 보는 초발심 / 최동순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초발보리심을 잊지 말라 / 하정은 불교신문 기자
하나
발심을 돌아보며
심산 스님 (홍법사 주지)
일체유심조라는 법문을 듣고 청천벽력 같은 느낌에 전신이 짜릿하고 환희롭던 때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사람의 경계를 넘어 신선이나 도인의 개념으로 보이던 법문하시는 스님의 모습에 한없는 동경심을 느끼며 신선해 하던 그때가 어제 같다. 거기서 받은 종교적 감동은 오늘도 나를 바로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


발심의 시간을 돌아보라는 말에 모처럼 출가 이전부터 오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의 시작을 강원도 강릉에서 경상남도 울산으로 옮겨서 시작했다. 단순한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모든 개념의 변화를 감당해야 하는 큰일이었다. 울산으로 이사한 후 중학교 때에는 교회도 가 보았지만 와 닿는 느낌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학교 선배들의 권유로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물론 뭘 알아서라기보다는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거의 절에 간다는 사실과 많은 학생들이 불교에 긍정적이라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렇게 절에 간 지 한 달이 지난 4월 5일 식목일날, 절에서도 나무심기 행사를 했다. 사월의 아침햇살이 법당 앞 향나무 사이로 비춰질 때 단청과 어우러진 조화는 이제 부처님과 함께 하겠노라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난 5월에는 신입생 환영 야외법회가 있었다. 그때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찾은 통도사에서 안내 겸 법문을 해주신 분은 현재 중앙승가대학 총장이신 종범 큰스님이셨다. 스님의 일체유심조 법문은 봄 햇살에 감동하던 식목일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청천벽력같은 충격이었다. 풍겨지는 모습과 잔잔한 말투, 거기에 더해지는 마음에 대한 법문은 공감, 황홀, 흠모, 동경으로 이어져 나는 넋을 잃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이 마음이 만듭니다. 예를 들면 어두운 밤에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어둠 속에 무서운 존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 속에 악마며 귀신이며 도깨비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으로 만들어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없으나 내 마음이 상상으로 만들고 무서워하고 또 다른 미혹으로 연결되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놀음입니다.”


어찌나 공감이 컸던지 지금도 설렌다. 어릴 때 소 먹이러 간 기억이 있다. 그때 소들은 골짜기에다 풀어놓고 아이들은 편을 갈라 총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면 모두 흩어져 각각 숲 속에서 움직이는데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스님 법문대로 혼자 숨어서 온갖 생각을 동원해서 악마도 만들고 귀신도 만들고 정의의 기사도 만들면서 때론 무서움을 느끼기도 하고 정의로움에 우쭐하기도 했던 복잡한 마음구조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이후 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막연한 흠모의 마음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발심의 계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를 결심할 즈음에는 “한 생각 돌이키니 일체가 내 것”이라는 말이 공감이 되어 마치 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착각을 했다. 나를 구속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일상생활에 자유자재할 것만 같은 출가 사문의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지만 걸림 없는 자유자재한 삶을 살겠노라는 옹골찬 기상에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치 세상이 내 손 안에 있는 듯 했다. 대단한 발심이었다. 마침내 수계를 할 때는 벌써 누더기 기워 입고 바랑 하나 둘러 멘 치열한 수행자의 익은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초심에 나를 불교와 인연 맺게 한 기억할 만한 계기가 발심이라면 발심은 한 번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추억 같은 삶의 전환점이 아니라 끝없이 나를 향상시키는 계기임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내게는 때때로 재발심의 기회가 왔음도 깨닫게 되었다.


근래에 도심 포교의 10년을 접고 이곳 홍법사에 오면서부터는 대만 불광산사를 창건하신 성운 대사의 글에서 본 “오늘날의 젊은 승가는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하리라 하는 신심이 있어야지, 내가 불교 덕을 보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라는 말에 재발심하게 되었다.


이 말은 중국 본토의 진공 스님이 대만에 간 성운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데, 출가는 불교에 의지해서 한 생을 편하게 살아가려는 소극적인 마음이 아니라 나를 통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제대로 펼쳐지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뜻이다.


생각할수록 의미 있는 말이었다. 일단 출가하면 모든 의식주가 다 해결되고 신분도 급상승해서 신도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으로 방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내가 불교 덕을 본다는 뜻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불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실천할 때 부처님께 빚지지 않는 신심 있는 출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행만 잘하면 될 일이지만 그것도 내 수행을 위해 부처님 덕을 본 것이니까 수행의 덕을 다시 중생들에게 회향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불교 덕을 보는 삶을 산다는 무서운 말이었다. 순간 전율이 느껴졌다.


스님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이 내 덕을 보게 하리라는 생각을 가져야지 내가 남편 덕을 보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식이 내 덕을 보게 해야지 내가 자식 덕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소속된 단체가 내 덕을 보게 해야지 내가 그 단체의 덕을 보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다니는 절이 내 덕을 보게 할 신심이 있어야지 내가 절 덕을 보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내가 되어야지 나를 위해 세상이 필요하기를 바라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엄청난 말이었다.


산중불교를 도심으로 나오게 하고 이제는 국제화를 향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이러한 가르침은 시기적으로나 의미에 있어 재발심하는 데 충분한 교훈이 되었다.

천태 대사의 눈으로 보는 초발심
최동순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천태 대사(天台大師)라는 이름은 천태산을 중심으로 활약했다고 하여 붙여졌다. 다른 이름으로는 ‘지의 선사’라고 불리며, 불교 수행을 중심으로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신 분이다. 동아시아 불교에 있어 천태 대사의 위치는 매우 높다.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화엄과 천태의 한 부분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천태 대사는 그 누구보다 초발심을 강조한 분이셨다. 초발심은 불교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중요하게 적용된다. 어떤 분야 혹은 어떤 일에 발을 들여놓든 선배들은 초심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 놓는다. 특히 어렵고 힘든 수행의 길에 입문하는 스님들에게 있어 초발심은 더욱 엄격히 강조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 일관성 있게 초발심을 꾸준히 유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인지 경전 여러 곳에서 초발심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의 경전이나 대승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문에 입문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사미와 사미니들이 수습해야 하는 『초발심자경문』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총림의 장중한 계단(戒壇) 의식을 본다면 초심을 잃기는 어려울 것이다. 팔뚝에 아로새기는 연비의식은 초심을 강조하는 정점(頂點)이다.
천태 대사는 한·중·일 동아시아 불교 행법의 기틀을 마련한 선사(禪師)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중국과 인도의 환경이 서로 다르므로 불교의 이해와 실천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천태삼대부 등 많은 가르침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가운데 초발심을 강조한 부분이 여러 곳이나 된다.
천태 대사는 어릴 적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였다. 또한 전쟁의 결과로 유복했던 가정과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슬픔에 잠긴 그는 대불상 앞에서 세상을 자비로운 곳으로 만들겠노라고 맹세하며 머리를 깎았다. 어려운 수학기를 거쳐 스승인 혜사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양자강 하류인 금릉과 천태산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분열되었던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무력에 의한 정치적 통일을 완성했지만, 남쪽 사람들의 반감이 매우 컸다. 이에 문제와 그의 아들 진왕(晋王)은 천태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에 의한 통치’를 약속함으로써 진정한 통일을 이루었다.
황제의 스승으로서 천태 대사는 수나라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차원 높은 불교 수행법인 천태지관법을 개설하였다. 천태지관은 『차제선문(次第禪門)』을 시작으로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완성되는데 정밀한 사상체계와 행법체계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그를 교관일치(敎觀一致)를 주장한 선사라고도 한다.
천태 대사의 가르침 가운데서는 초발심을 강조한 부분이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 세밀한 분석주의자인 그는 초발심에 관해서도 수행의 지위(地位)와 그 상징성을 여러 번 설명하였다.
천태 대사가 천태산 수선사(修禪寺)에서 활약할 당시였다. 선수행을 위하여 수선사에 입문하는 초심자들에게 교재로 제공되던 『수습지관 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입문자들의 초발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양한 비유를 들고 있다.
그는 『수습지관』에서 『화엄경』의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是便成正覺)을 인용하고 있다. 즉 초발심자는 이미 제법의 진실한 모든 성품들을 완전히 깨우친 것이라고 하였다. 초발심보살은 스스로 혜신을 구족하고, 그 일신(一身)으로 다시 무량신(無量身)을 화현시키므로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열반경』을 인용하면서 또 다시 발심(發心)을 강조한다. 발심이란 한결같아야 하며, 결코 둘로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이며 끝까지 변치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다시 『대품반야경』의 문구를 예로 들어 초발심은 곧 도량에 안좌하고 있으면서도 법륜을 굴린다고 하였다. 이미 초심에 일체의 불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초발심에 대한 부분을 여러 번 인용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변성정각(便成正覺), 즉 깨달음을 이룬 상태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초발심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천태 대사는 많은 고뇌를 한 것 같다. 그 고뇌는 초기 전법(傳法)을 하던 시절에 겪었다. 천태 대사는 당시 사람이 많이 모인 금릉 와관사에서 좌선 입문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엄청난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득도자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였다. 선(禪) 입문자들은 증가하는데 비해 본격 수행자로 이어지는 득도자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는 입문자들의 초발심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초보자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지니고 대사는 천태산으로 향했다.
천태산에 입산한 그는 산의 정상인 화정봉(華頂峰)에서 두타행을 하면서 새로운 관법을 시도하였다. 즉, 지관을 중심으로 수행체계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초발심자를 인도하는 교재로서 『수습지관 좌선법요』를 지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초발심자들에게 매우 세밀하고 자상하게 가르침을 베풀면서 깨달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도록 하였다. 천태 대사는 이 책에서 증과(證果)라는 깨달음의 장(章)을 두어 수행을 통한 목표를 설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당시까지 번역된 좌선과 관련된 경전들을 참고하여 좌선 방법을 체계화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습지관 좌선법요』는 좌선 입문자들을 위한 가장 오랜 책으로 전해진다.
불교의 실천인 선수행에 입문하는 자를 초발의 보살이라고도 한다. 수행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보살인 것이다. 초심자를 깨달음을 성취한 보살의 경지에 올려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초기 불교의 사선정(四禪定)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네 가지의 선정은 욕계(欲界)인 중생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색계(色界) 이상 무색계에서 선정이 이루어지므로 보살의 지위가 되어야 참다운 수행이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천태 대사의 뜻을 계승하여 『천태사교의』를 지은 고려의 제관 스님은 초발심보살이 이미 원교(圓敎)의 수행지위에 올라 있다고 한다. 천태종의 수행지위를 순서적으로 장교, 통교, 별교, 원교라 할 때, 이미 최고의 수행 반열에 오른 셈이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초발심에 사실상 엄청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적어도 부처님과 같다거나 부처님 경지에 들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천태 대사는 그 자신이 끝까지 초발심을 잃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장안관정은 천태 대사가 입적하자 생전의 모든 자료들을 모아 『국청백록』이라는 책으로 편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천태 대사가 한결같이 초발심으로 수행에 매진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까지 번역된 모든 경전들을 분석하고 새로운 종파를 탄생시키는 기틀을 마련했으면서도 천태 대사는 항상 삼매의식이나 좌선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대불(大佛) 앞에서 서원하기를 전쟁이 없고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움이나 요행에 기댄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수행을 펼치고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지녔던 초발심을 유지하고 입적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되새겼던 것이다.
누구나 진행되던 일이 위기에 봉착하면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하거나 올바른 기준을 찾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의 자기 점검도 결국 초심을 찾는 것이다. 수행자의 여정은 곧 생활이라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입문자의 초심이 다양한 경계에 끄달려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천태 대사는 선 입문자들에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것은 다시 초발심과 만난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초발보리심을 잊지 말라
하정은 (불교신문 기자)
1999년 4월 어느 날 조계종 총무원장실. 당시 총무원장이셨던 고산 스님과 함께 원택 스님과 일철 스님은 반듯하게 세워진 곧은 의자에 나란히 앉으신 채로 50여 미터 전방에서 입장하는 단발머리 신입사원을 맞이하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 달 여 앞두고 봄볕이 완연했던 그 때 그 시절, 불편한 정장차림에 잔뜩 긴장한 신입사원의 이마와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고였습니다. 세 분의 스님은 면접관이셨습니다.
우선 세 스님을 향해 한 분씩 합장을 해야 맞는지 한꺼번에 해도 되는 것인지부터 막혔습니다. 합장 자세로 90도로 숙이고 한참을 있으니 한 스님이 웃으시면서 “됐으니까 앉으라.”며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왜 이 신문사에 오셨습니까?”
‘불교 대중화에 대한 의견’이나 ‘조계종 포교정책에 대한 문제점’ 혹은 ‘재가수행의 방향’ 등 미리 연습했던 질문에 비하면 참으로 당연하고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할말을 잃었던 신입사원은 원장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조계사 경내 현수막을 발견하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아마도 포교사 양성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현수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법을 구현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참된 ‘포교사’가 되렵니다.”
“어허~ 기자가 되려고 와서는 무신 놈의 포교사인가. 그러면 포교사가 되지 그래?”
농담 섞인 면접관 스님의 반문이 농담인 것조차 몰랐던 단발머리 신입사원은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불교신문의 슬로건이 떠올랐거든요.
“한 장의 불교신문은 한 사람의 포교사입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포교를 통해 빛을 주고 힘을 주는 기사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분의 스님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한 스님은 빙긋 웃으며 ‘뻔한 이야기를 하는군’ 하며 책상 위 종이에 뭔가 체크를 하셨고, 다른 한 분은 어린아이를 쳐다보듯 걱정스런 눈빛을 보였고, 나머지 한 분은 아예 면접지를 접으시고 다음 신입사원을 기다리는 눈초리였습니다.
물론 대학 졸업논문에 관한 내용이나 신상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은 그렇습니다. 등에 땀이 맺히고 심장이 곤두박질쳤던 면접실에서의 10여 분이 지난 뒤 1주일 후 통보를 해준다는 공지사항을 듣고 조계사를 빠져나오자, 그때부터 걱정이 솟구쳤습니다. 합격통보가 오지 않는다면 백수가 될 테니 앞날이 걱정이요, 통보가 온다 해도 그토록 거창하게 부르짖었던 면접 때 발언을 과연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후회만이 엄습해왔습니다.
‘아~ 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갈마를 하는 것도 아니고, 출가를 하려고 은사 스님 앞에 선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건방지게 중생구제니 포교니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까. 나의 불교관이나 인생관부터 소박하게 이야기를 끄집어냈어도 신뢰감이 가고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달은 수줍음을 타는 듯 자주 구름 속에 숨는다. 초발심의 수행자도 달처럼 수줍어하며 하심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한낱 중생인 나는 왜 간과했을까.
후회가 체념으로 바뀔 무렵, 뜻밖의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침내 그토록 바랐던 ‘불교신문 기자’가 된 내겐 주민등록증보다 더욱 값어치 있는 기자증이 생겼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5월. 부처님이 우리 곁에 오셨듯이 나 역시 다시 태어난 듯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리라 발원했습니다.
처음으로 맡았던 출입처는 지역으로는 강원도와 충청도였고 분야로는 어린이·청소년 포교 부문이었습니다. 지방마다 독특하게 전해오는 불교풍속 행사를 직접 취재하면서 몰랐던 전통을 체험하고, 불교를 공부하고 지키고 향유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취재 후 기사를 쓴다고 이것저것 본 대로 들은 대로 잔뜩 써서 지도 선배에게 제출하면 원고는 예외없이 되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기사를 쓰라고 했지, 누가 일기를 쓰라고 했느냐? 팩트가 없지 않느냐? 도대체 취재를 한 거냐, 여행을 간 거냐?”
예기치 못한 호통에 서러움이 북받치면 화장실에 달려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온 적도 많았습니다.
팩트(fact)? 우리말로 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내가 거짓된 글을 썼다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인데….’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 날마다 ‘기사 전쟁’을 치르면서 수습기자 딱지를 떼었습니다. 6년 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낮이면 취재 하고 밤이면 기사 쓰기에 여념이 없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팩트 잡기’는 기자생활 평생을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 여겨집니다. 특히 불교의 대사회 활동이 본격화된 2000년 이후부터는 불교 언론이 불교계의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신중하고 진지한 자세로 신문제작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가끔 흐트러지고 해이해진 정신으로 취재와 기사 쓰기를 게을리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책상 서랍 깊숙이 감춰놓은 수습기자 시절 원고들을 꺼내어 봅니다. ‘팩트 없는 일기’라고 혼쭐이 났던 원고지만, 그 행간 속에는 정성과 감흥과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구석구석 빨간 펜으로 죽죽 그어진 지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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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행님의 댓글

보덕행 작성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