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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주는 잣대, 사홍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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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6-06 12:31 조회2,9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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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주는 잣대, 사홍서원

박 부 영_불교신문 부장

 

 

운전을 하기 전 먼저 스스로 다짐을 한다. ‘침착하자’, ‘먼저 보내자’, ‘이해하자’ 몇 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진다.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은 난폭 운전으로 악명이 높다. 많이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도로를 나서면 여전히 아찔한 경우와 수도 없이 맞닥뜨린다. 아침에 집을 나와 광화문 근처 직장까지 아무리 막혀도 30분이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인데도 깜짝 놀라고 화나게 하는 운전자를 하루 한 번은 만난다. 옆 차선에서 뒤 따라 오다가 갑자기 앞으로 확 끼어들지를 않나, 세 차선을 걸쳐 들어오는 버스, 바쁜 출근시간 주행차선을 차지하고 느릿느릿 가는 차, 1차선으로 좁아지는 길에서 번갈아 가며 진행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머리부터 들이밀고는 ‘미안하다’는 표시도 없이 가버리는 차,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고 욕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경음기를 사정 없이 울리고 전조등을 깜빡이며 분노를 쏟아낸다.

하지만 잘못은 나도 많이 저지른다. 바쁘다는 이유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다 항의하고 욕하면 아량 없다고, 그 정도도 이해 못하냐며 상대방을 또 욕한다.

아침에 몇 번을 다짐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비켜주지 않으려고 속도를 내거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다.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도로 위를 달리며 차문을 내리고 언성을 높인 적도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손해 보는 쪽은 나다. 혼자서 차안에서 분을 삭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가족들과 나들이라도 가는 길이면 들 뜬 마음이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면서 후회한다. 그냥 넘어갈 것을, 괜히 나만 기분 망치고 가족들 마음도 우울해졌는데 내가 조금만 양보하고 이해했으면 나도 기분 좋고 상대방도 모르고 그냥 넘어갔을 것을. 그런 마음을 내다가도 잘못은 잘못됐다고 지적해서 상대방이 알고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알리는 것이 상대방과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행위라며 애써 자위하기도 한다. 사회 초년 시절에는 지하철로 통근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건설한 지 오래 된데다 승객이 많아 늘 붐볐다. 여름철은 에어컨을 세게 가동해 그나마 괜찮지만 두꺼운 외투에다 난방까지 가세하는 겨울은 지하철에 갇힌 1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어김없이 옆 사람과 다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남자들에게 치여 내지르는 여성 직장인들의 비명,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장년의 아저씨들끼리 욕하고 싸우는 소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출근길의 소동은 고통 축에도 못든다. 실직해서 출근이라는 것을 해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 틈에 치여 고생하기 싫으면 남보다 일찍 나와 자기 계발하고 여유롭게 출근하면 된다. 실제 그 같은 직장인이 많다.

문제는 사람이 사람과 부대끼며 살면 크든 작든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멱살잡이를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도로 위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아니면 길을 가다 우연히든 사람들 틈에 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다. 나를 지켜주는 잣대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름 그대로 큰 네 가지 서원이다.

지구는 태양을 도는 위성이다. 그러면서 지구는 또 스스로 회전한다.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소리가 발생한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들리지 않는다.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이른바 가청 주파수를 훨씬 초과하는, 기계로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사홍서원도 마찬가지다. ‘중생을 다 건지리오다’는 보통의 중생이라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약속이다. ‘중생구제’는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하는 일이니 우리 같은 보통의 중생들이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나를 비롯한 ‘뭇 중생’들의 생각이다. 너무 큰 서원이다 보니 지키지 않는다 해서 죄책감이 들거나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법회 때 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죄책감 없이 사홍서원을 반복한다.

그런데 ‘중생을 건지 오리다’ 대신 ‘운전대 잡고 욕하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 보고도 웃으며 손 흔들어 주겠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 마음이 어떨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부터 100일간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부터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아이티 난민을 돕는데 보태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하라면 어떨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쉽게 서원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서원은 내가 마음 먹으면 지킬 수 있는 약속이므로. 그 약속은 작아서 내 귀에 들리기 때문이다.

‘사홍서원’은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약속이며 다짐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키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부처님 얼굴 대하고 스님 만나기가 부끄러워야 한다. 쉽게 아무 생각 없이 약속하고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허위의 약속이 되어서는 안된다.

중생은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다. 나와 멀리 떨어진 미지의 인물이 아니다. 늘 만나고 웃고 화내고 옆에서 지내는 나의 이웃이며 가족이며 직장동료다. 앞질러 가느라 나를 화나게 하는 바로 그 사람, 지하철에서 거친 말로 싸우는 꼴 보기 싫은 아저씨 아주머니, 가뜩이나 좁은 주차장을 두 개나 걸쳐 세워 욕하게 만드는 나의 이웃이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은 다름 아닌 치사하고 비열하며 두 번 다시 마주하기 싫은 그 ‘못된 인간’을 용서하고 보듬고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중생을 구제하기’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에 어렵다. 사홍서원은 그래서 습관화된 일상과의 단절이다.

당신은 평생 내 곁에 붙어 익숙해진 습관 하나를 지금 바로 단절하겠다고 부처님 전에 약속할 수 있겠는가. 아주 작고 우습게 여겼던 작은 습관 하나가 아마 태산보다 더 크고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큰(弘) 서원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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