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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 따르면 가피는 절로 입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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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2-25 15:27 조회3,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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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 따르면 가피는 절로 입게 돼

 

지장 스님_서울 대원정사 주지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그대로 보고 알라’는 뜻이다. 중생들은 누구나 집착과 분노와 무지를 가지고 있고 이것 때문에 자신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하며 또 자기 방식대로 대상을 받아들인다. 대상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또 자기 방식대로 대상을 받아들이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 즉 분별심이 생기고 이러한 분별심은 또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실재하는 것들을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다. 나의 마음, 감정, 생각 등은 정신적인 것이고 그 이외에 모든 것은 전부 물질적인 것이다. 주변을 아무리 큰 눈으로 바라봐도 결국 이 두 가지밖에는 없다. 사실인 대상을 보면서 정신적인 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일 뿐이라고 알면서 보면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정견은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 있든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 즉, 정신과 물질의 작용일 뿐임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신 작용과 물질 작용일 뿐인데 다시 그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어떤 분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영원하지 않다. 둘째, 자기 스스로 생겨나기 보다는 어떤 조건과 원인에 의지해서 생겨나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하고 고유한 실체가 따로 없이 조건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무상과 무아의 성품을 온전히 알고 본다면 이것을 바로 정사유(正思惟)라고 한다.

정사유는 원래 연기법(緣起法)을 보고 아는 것인데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곧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실재하는 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 법칙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며 이것도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본다 할 때 무상과 무아의 성품을 분명히 보고 아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여실지견이라 하는 것이다.

여실지견을 다른 말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반야(般若)는 인도말 ‘빤야(panna)’를 음역한 말이고 바라밀은 공덕을 가져오는 실천행을 말한다. ‘빤야’ 즉, 반야의 의미는 사실의 본래 성품(무상·무아)을 꿰뚫어 보고 아는 것이며 사실을 사실대로 제대로 잘 아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라고도 부른다.

반야심경에서 무상·무아의 성품을 한 마디로 공(空)하다고 표현하며 중생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나’를 다섯 무더기로 구분하고 각각의 무더기 역시 무상하고 무아라고 올바로 알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실천 수행법을 핵심만 요약 설명하고 있다.

간화선 수행에서는 화두를 이용해 본래의 성품자리를 빨리 효과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인데 본래의 성품자리 역시 그러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무상·무아의 무성품(無性品)이 본래 성품이기 때문에 본래 성품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괴롭지 않고 지혜롭게 살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괴롭지 않기 위해서는 괴롭게 할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괴롭게 하는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바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그 순간에는 잘 모르지만 미래 언젠가 반드시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할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즉, 물질과 정신 작용일 뿐이라고 정견하고 무상·무아의 성품을 정사유하면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래서 마음이 괴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하고 회의적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재미없다는 생각마저 없이 평온하고 청정한 마음 상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즐거운 마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혹자는 그런 마음으로 살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고 염세적 사고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먼저 할 수도 있다.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살면 염세적 사고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긍정적 자신감이 생겨난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외부 대상이나 겉 형상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산다. 재산이나 지위, 명예, 외모, 능력 같은 것에 의지하고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살며 자신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로 아는 지혜가 커지면 자기 안에 커지고 있는 지혜에 의지해 자신감이 생긴다. 외부의 어떤 것에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사실은 자신감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아쉬운 것이 있고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무아를 잘 알아 외부에 있는 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면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어지고 기대하는 것도 줄어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에 의한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냥 생겼다면 자만과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지혜에 의지해서 생긴 것이라 그 누구도 괴롭게 하지 않는다. 자신감이 생기면 생활이 더욱 활기차 진다. 목적과 결과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신나게 산다. 그런 긍정적 모습으로 살면 주변에 맑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여들고 맑고 지혜로운 기운이 모여든다. 그렇게 되면 하는 일이 저절로 잘 될 수밖에 없다. 절로 일이 잘 되면 그것은 사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도와준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즉 지은 대로 받은 것이다.

어떻게 지어서 받았는가.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해서 얻어진 공덕인 것이다.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해서 지혜를 키워 공덕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자비이며 가피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자 한다면 무작정 부처님에게 자신의 욕망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부처님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셨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을 잘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반드시 가피는 체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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