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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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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2-25 15:19 조회3,2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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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주는 행복

 

권 기 찬_대한불교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연구원

 

요즘 같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법당을 가득 메운 채 기도정진하고 있는 대중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옷깃이 여며지면서, ‘저 분들이 없다면 한국불교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까?’하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곤 합니다. 기도하고 있는 불자들의 서원(誓願)이 개인의 행복을 희망하는 소박한 것이든, 우주의 평화를 기원하는 웅대한 것이든 간에 한 분 한 분의 청정심(淸淨心)은 우리 주위를 맑게 하는 구슬입니다.

옛 선사께서는 “불교를 통합해서 논하자면, 인연을 종지로 한다(通論佛敎, 因緣爲宗)”고 하신 바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緣起)를 현대어로 바꾸면 네트워크(Network)입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는 세세생생 쌓아놓은 업연(業緣)을 매개로 촘촘히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서는 각자 지은 별업(別業)이 개인의 삶을 이루고, 한 국토의 중생 전체가 지은 공업(共業)에 의하여 세계를 이룬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것을 구멍 없는 철추처럼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쳇바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우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에 의해 끝없이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을 밝히면 그 빛은 자연히 주위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로움을 위한 자리(自利)가 바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기도인이 가정을 평화롭게 한다면 가족 구성원은 다시 직장과 학교에서 그 마음을 전하여 온 세상이 불국(佛國)으로 변하게 되겠지요. 반대로 내가 한(恨)을 품고 분노를 방출하면 ‘한 생각’움직였을 때 벌써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냥불 하나가 들판을 불태우듯 우리는 ‘한 생각’ 단속을 못해서 아차하는 순간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를 하게 될까요? 대부분 가피(加被) 때문에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눈앞에 닥친 삶의 고(苦)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다가 불보살의 위신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가닥을 잡을 수 없을 때 법당으로 달려오게 됩니다. 가피는 현실에서 바로 해결해주시는 현증가피(現證加被), 꿈으로 현몽하시는 몽중가피(夢中加被), 직접 나타나 보이신 바는 없지만 평소 안락과 행복이 이루어지는 명훈가피(冥勳加被)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우리들은 우선이 현증가피요, 좀 늦어져도 몽중가피를 바라며 어린애 보채듯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짖고는 합니다. 그 분들이 워낙 자비하셔서 그렇지 만일 우리가 불보살의 입장이 된다면 사방팔방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호출하는 불자들의 염원에 녹초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염불기도, 주력기도, 절기도 등 어떠한 형태의 기도를 막론하고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신화엄론(新華嚴論)』에서 통현(通玄)장자는 “골짜기의 메아리가 무심하고 정해진 처소가 없지만 연(緣)을 따라 널리 응한다”고 불보살의 대자비를 묘사한 바 있습니다. 기도를 성취하신 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기도가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는 얼마나 지극한 마음을 쏟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타력(他力)을 믿고 의지하였더라도 결국은 자력(自力)에 의해 성취됩니다.

불보살의 가피력은 억만금을 보시한 부자(富者)와 향 한 개 올린 빈자(貧者)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부처님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목숨 바치기를 아승기겁을 했더라도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공덕만 못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마음이냐가 중요할 뿐 외형은 관계치 않기 때문에 타력으로 출발했더라도 결국 자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신묘한 교화를 체험하면 참으로 우리 불법이 묘법(妙法)임을 절감하게 되며, 그 분들의 가르침에 숙연해집니다.

제 지인의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그는 불교를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이해력도 빨라서 교리논쟁이라도 벌어지면, 마치 십대제자 중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 존자라도 된 것처럼 장광설을 늘어놓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지독히 아파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끙끙 앓아보니 면전에 닥친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러고도 내가 불자라고 돌아다녔다니 불조에게 죄를 지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알았던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었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매주 철야정진을 하며 참회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수개월의 기도를 통해 대승(大乘)의 종지를 마음에 깊이 느끼게 되자 그의 기도는 불법 홍포를 위해 살겠다로 한 걸음 향상되었습니다.

불보살님이시여!

만일 제가 불조의 정법이 이 땅에 하루라도 더 머무르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이 길을 가게 하시옵고,

전생의 업장이 지중하여 그럴 그릇이 못된다면

오늘 밤 숨이 끊어지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매일 기도를 올렸습니다. 정말 이 순간이 마지막이어도 좋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였고, 결국 자신의 서원대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한 행복은 반드시 소원성취에만 있지 않습니다. 소원이 성취되는 것은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일 뿐 불교의 목표는 아닙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법의 대해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佛法大海,信爲能入)”는 용수(龍樹)보살의 말씀처럼, 불자의 믿음을 성취시켜 깨달음의 강을 건널 배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모든 경전이 “이와 같이(如是)”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유가 신성취(信成就)에 있듯, 올바른 기도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 청정한 마음은 자연히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미워하고, 사랑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쉬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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