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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그 '길'을 알고자 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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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2-25 15:17 조회2,9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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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그 ‘길’을 알고자 길에 오르다

 

김윤희_월간 맑은소리맑은나라 발행인

 

2008년 3월 12일, 약간의 추위를 느끼며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곱 시간 가량 중국 대륙의 하늘을 가로질러 인도의 중심부를 날아 도착한 비행기는 아주 소박한 공항, 그곳 카트만두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지구 안의 깨알 같은 존재로 한 생을 살아가는 나에게 불혹을 넘겨 찾아간 네팔의 첫 인상은 물길이 터지듯 감동이 섬광처럼 밀려오는 느낌 그대로였다. 착륙을 앞두고 내려다본 낮고 빨간 벽돌집의 군상은 그 오래전 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의 변두리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며 집들 옆으로 군데군데 서 있는 초록의 나무들은 아주 잘 다듬어진 성탄의 트리를 연상케 했다.

섭씨 38도를 웃도는 더위가 살갗을 파고들었으나 감동의 수위를 삼키지는 못했다. 고작 10여 명이 넘는 일행 가운데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탈수 증세를 보이며 입국수속을 기다리던 공항의 대합실에서 실신해 모두를 긴장하게 했고, 몇 분의 스님들은 일념으로 기도를 하며 우려를 표했다.

잠시 후 털고 일어난 도반은 예의 웃음을 보이며 조금 전의 긴장감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그렇게 입국 수속을 기다리고 가이드를 기다리는 더딘 시간은 비행기를 타고 간 시간의 절반에 해당되는 시간만큼을 더 요구해오는 거였다.

“이쯤이야, 사십여 년을 만나지 못하고도 살아 온 땅인데 고작 한 두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랴.”하는 위안이 일었다. 그렇게 공항의 대합실을 눈으로 익히고 나니 멀리서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1년 전 나의 사무실을 한 스님과 함께 방문했던 한국이름 ‘민수’였다. 그는 몇 해 전까지 한국에 근로자로 와서 일을 했으며 민수라는 이름이 맘에 들어 한국에서는 자연스레 그 이름으로 생활을 했다는 친구였다.

“민수씨!”하고 부르자, 우리 일행과 민수 역시 너무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리하여 구면임을 안 일행들은 ‘발도 넓지.’라며 반색했고, 민수 또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한 시간 반 가량을 기다렸으니 안내자가 갖는 의미는 인솔자와의 만남이라는 의미 외에 인연법을 떠올리게 했다.

마음먹고 갔다 해도 길을 알려주는 이가 없다면 나와 일행들은 국제 미아 비슷한 상태로 네팔의 어느 거리를, 넓고 넓은 대륙 인도를 헤매고 있을 것이며 불빛이 귀한 그곳의 밤거리를 어둠으로, 미혹으로 끝도 없이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팔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이유로 1박 2일의 여정만을 함께 한 뒤, 민수와 우리들은 이별을 해야 했다. 풍부한 상식과 해박한 논리로 유머를 곁들여 안내를 해 주던 민수는 인도 본국에 입국하면 지켜줘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할 행동을 요모조모 짚어주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만나게 될 가이드는 더 큰 기대였다. 비자 심사를 끝내고도 카트만두 공항에서 민수를 기다렸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리니 뉴델리가 집이라는 가이드는 아주 다부진 체구로 우리들 곁에 다가와 다시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은 가이드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한국의 모 어학당에서 한국어 교육을 아주 모범생으로 이수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모두에게 초면이었으나 자신이 ‘왕자’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왕자님!’ 하고 부르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노라며 호언장담을 하는 거였다. 그러니 1박 2일의 민수에서 12박 13일의 왕자에게로 우리들의 전부를 이관 받는 장면이 마치 판문점에서의 기념비적인 교환처럼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와 영어에 능통한 그는 능숙한 한국어로 친밀도를 높여갔다. 먹는 음식도 함께였고, 잠자고 일어나는 일도 호흡을 맞추어야만 하는 우리들은 마치 수학 여행길에 풀어놓은 학생들인 양 왕자의 눈을 피해 늦은 밤 외출을 했고, 가지 말라는 화장터를 겁도 없이 달려가 상주들의 비난을 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성지에서 만나는 이방인들과의 자리에서는 빈틈없이 일행들을 챙기는 것이 그렇게도 고마운 인솔 선생님이 따로 있지 않았다.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왔는가?’ ‘어떤 인연의 끌림으로 이 성지를 성큼성큼 밟고 있는가?’하는 물음들이 찾아가는 곳마다,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탄생지, 성도지, 열반지 등 고행의 길을 마다않고 몸속의 뼈를 아낌없이 썼을 부처님의 구도행을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어쩌면 얄퍅한 지식을 갖고 진짜를 구별하고자 애를 쓰는 가짜들의 어리석은 행각이 아닐까 하는 자조섞인 물음도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열반지 쿠시나가르에서의 눈물은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메라를 조준해 렌즈 안에 잡히는 일행들을 보니 거의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숙연함은 스님들의 반야심경 봉독으로 고조를 이루었다.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법을 전하고 있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보존되어 다시 역사를 만들고 있는 성지는 가이드 ‘왕자’의 설명으로 가장 훌륭한 ‘길’을 이어주고 있었다.

끊어질듯 이어진 인도의 도로, 그 도로를 너무도 완벽하게 운전하는 전세버스 운전자와 조수, 깊은 밤을 달려도 제 시간에 도착하는 일은 여간해서 불가능한 기차, 철로 끝에 서서 도착하는 기차에 재빠르게 짐을 옮겨 싣는 셀파와도 같은 짐꾼들. 그들 모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안내자였으며 ‘길’을 아는 선구자임에 분명했다.

보름의 여정을 마치고 어둠이 자욱한 새벽,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이륙하는 비행기는 분명 동쪽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마음은 도착지인 그 처음의 길, 카트만두의 상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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