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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기도하는 삶이 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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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0-02-25 15:15 조회3,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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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삶이 귀하고 아름답다

 

 

이미현_출판인

 

살아가면서 누구나 기도를 하게 된다. 꼭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갈구하거나 힘든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사람들은 기도로 답을 얻고자 한다. 따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절로 기도를 하게 됨은 기도가 갖는 힘이 그만큼 강하고 현실에서도 유용하기 때문이리라.

아주 어릴 적 보았던 간절한 기도의 모습들을 기억한다.

궁벽한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곤하게 사셨던 친할머니는 잠깐 숨 고르는 겨울 어느날 햇곡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십리 길을 걸어 칠곡 송림사로 기도하러 가셨다. 할머니는 일년 중 유일한 외출이었던 그날을 기다리며 일년 내내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밭일을 하고 자식들을 거두셨다.

반면, 다리가 불편해 바깥출입이 힘드셨던 외할머니는 커튼이 드리워진 당신 방 아랫목에서 밤낮으로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셨다. 아주 어릴 때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외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던 작은 염불소리 뿐이다.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마당 한켠의 개암나무 아래서 정안수 떠놓고 기도를 올리셨다. 어느 해 겨울인가, 기어이 얼굴에 동상을 입으셨는데도 새벽기도를 쉬지 않아 가족들의 애를 태우셨던 외할머니, 지금도 외사촌오빠들은 돌아가신 할머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이런 기억들로 대표되는 소박한 기도, 가족간의 기도도 소중하지만 나름 애쓰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느 순간 기도의 영역이 확장됨을 느끼게 된다. 나의 생명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모든 유정무정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얽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갈 때 비로소 너를 위한 기도가 가능해지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도 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웃 기독교에서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더욱 귀하게 행해지고 있음도 이 때문이리라.

빈자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마더 테레사 수녀도 매일의 기도를 통해 헌신하는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사랑을 위한 믿음이 서지 않는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 속에서 분명 믿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서게 되었을 때 사랑하게 되며 사랑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사람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불자들의 기도는 참회, 귀의, 발원이다.

참회는 과거로부터 지어 온 잘못은 물론 현재 지은 모든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고 또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부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먼저 참회하고 나서 자신의 원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다.

참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용서를 청하는 겸허한 태도이다. 이는 부처님께 향하는 거짓 없는 마음의 나타냄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마음 자리이기도 하다. 남이 강제로 시킨다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참된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다.

참회는 뉘우침과 반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참회의 진정한 뜻은 다시는 그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중요하다. 아무리 잘못을 뉘우쳤다 하더라도 다음에 다시 그런 잘못과 실수를 저지른다면 진정으로 참회했다고 볼 수 없다. 이를 일러 육조(六祖)스님께서는 “참회의 참(懺)이란 전비(前非)를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다짐”이라고 하셨다.

불교의 모든 의식과 법회는 삼귀의(三歸依)로 시작된다. 삼귀의는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대상이 신과 신의 아들인 예수인데 비해 우리 불교에서는 귀의의 대상이 불법승 삼보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신의 아들 예수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의 교리에서 신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할 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반면 불교에서 믿는다 함은 '불교에 귀의했다'고 말한다. 귀의란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의미다. 참된 진리에 대한 존경이며, 그런 가르침을 가르쳐주신 분에 대한 존경이며, 나도 그와 같은 삶을 살겠노라는 다짐이다.

‘지극한 귀의야말로 성불의 첫걸음’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이 성취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준 행복이 진리에 일치하는,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발원문에는 바라고 구하는 내용에 대한 실천의지가 강하게 들어 있다. 법회 때 발원문을 독송하면 대중들의 신심이 증장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예불 모실 때 자주 독송하는 <이산혜연선사발원문>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대신심을 내게 한다.

흔히 ‘기도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까닭이 기도법을 몰라서라기 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에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는다. 불자라면 불보살의 광명 정대한 자비에 의지하여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치는 자력(自力)의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는 오로지 정성이다. 그렇게만 하면 업장은 날로 맑아지고 복은 저절로 찾아들게 되며 마침내 자성을 보는 경지에까지 이를 것임을 믿어야 한다.

삶은 그 사람의 발원만큼 이루어진다. 정성껏 기도하다 보면 발원이 생기고 행으로 나타나 어느새 자신을 변화시킨다. 참된 기도는 남을 위한 기도이다. 남이 그 가피를 입게 되는 동시에 발원하는 자 안에서도 발원하는 그것이 싹 트고 삶이 풍성해진다.

바로 화엄동산이고 불국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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