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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 일념의 마음씨를 가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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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8-22 16:29 조회3,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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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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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一念의 마음씨를 가꾸자

 

기후스님(축서사 북암)

 

지난 봄에 암자 주변에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으면 하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새 땅을 파내고 고룬 구마동 도리천은 돌 반 흙 반인 데다가 거름기라곤 전혀 없는 건조하고 퍼석한 땅이어서 뒷산에 올라 큰 부대에 부엽토를 긁어 와서 고추, 토마토, 호박 등을 심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오랫동안 낙엽이 떨어져서 저절로 멋진 거름이 되어 있는 데다가 가끔씩 겨울 한철씩만 운수납자가 기거를 했던 쉰 땅이라 기름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밭을 만들면서 여기엔 이것을, 저기엔 저것을 심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군데 제법 큰 채전 밭을 일구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감자 눈을 따서 최대한 속살을 좀 남겨 두어서 보리밥 속에 함께 넣어 삶아 먹으려던 얄팍한 속셈을 다시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고, 또 옥수수가 빨리 익었으면 하는 성급한 마음으로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제 막 옥수수 수염이 마르려고 하는 것을 손톱으로 갈라 보고는 얼른 그 흉터를 덮어버린 그런 동심을 엿보면서 여러 군데 손바닥 보단 조금 더 큰 밭뙈기를 만들었다.

그러한 옛 정의를 그저 되살려보려는 감상적인 농사를 지으려는 마음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것들의 수확에 대한 양적인 부분은 소홀하게 되었다. 그래서 감자도 먹다 남은 작은 것들을 통째로 심기도 했고 제법 큰 것은 반이나 셋 쪽으로 갈라서 그저 심는 재미로만 심고 말았다.

그 후 얼마쯤 지나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면서 어서 빨리 감자 싹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볼 수 없다가 그런 생각이 사라질 때 쯤 여기저기서 뾰족뾰족 새싹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릇 모든 씨앗들이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저마다의 모습과 색깔을 띤 채 이곳저곳에서 흙을 헤집고 올라오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생명의 싱그러움을 새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은 씨감자를 심어야 감자가 크고 많이 달린다는 것이다. 나는 그전 생각만 하고 그냥 먹다 남은 것을 심었으니 감자 농사는 폐농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닐도 깔지 않고 그냥 심었더니 가뭄도 잘 타고 수해도 심하며 또 잡초들이 기승을 부려서 감자 싹이 맥을 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몇 포기를 캐보았더니 과연 메추리 알만한 감자가 서너 개 달랑달랑 달려 있을 뿐이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결과가 온다는 인과의 논리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갖가지의 조건들이 부합해야 그 결과도 좋은 방향으로 드러난다는 인연의 이론을 그 감자 농사가 실증적으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리도 그 어찌 농사짓는 모습에서 한 치라도 벗어남이 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희망하면서 부지런히 오늘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행복의 종자를 심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우린 왜 목적은 분명한데 현재의 언행과 생각은 엇박자를 놓으며 불안과 불만의 종자를 심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우리 스스로의 삶의 내용과 행태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습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가 불쌍하기도, 때론 측은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자신을 자기 의지대로 끌고 가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자기 때문에 한 지붕 두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자기에서 두 살림을 차리고 있는 자기와 늘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불만스러운 자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보려는 생각 때문에 부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이다.

문제는 좋은 종자를 심어서 잘 보살펴야 그에 걸맞은 수확이 있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일인데도 그것이 어째서 우리의 현재적 삶과는 직결되지 않는지에 있는 것이다.

 

행복의 정체는 과연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우리들 각자의 성에 차서 난 행복하다고 콧노래를 흥겹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 하나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온갖 노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아직도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내놓을 만한 그 어떤 확실한 근거나 자료는 없다. 그만큼 행복이라는 정의를 막연한 추상적 개념이거나 현실적으로는 충족되기 불가능한 그 어떤 이상적 피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린 가끔 심한 고통을 당할 땐 그것으로부터 해방만 되면 가장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을 갖기도 하고 집 한 칸이 없어 주인의 눈치를 살필 땐 제발 번듯한 집 한 채만 있으면 그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장담하기도 하며 당신만 곁에 있어주면 내일 이 세상을 하직하더라도 여한이 없다면서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심삼일, 그런 욕구가 충족되면 또 다른 조건의 욕심의 사자가 저 건너편에서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을 내걸고 손짓을 하고 있질 않던가?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희구하는 행복이 그 어떤 부피적인 것이거나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욕망의 언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대적인 관념세계의 불완전한 속성을 잘 간파해서 그것들의 세력으로부터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계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청정한 일념을 일구는 일이 급선무이며 그 세계를 맛보기 위해서 많은 불자들이 나름대로 여러 유형의 정진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청정 일념의 세계가 어느 정도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무지에서 활개치는 삼독의 그늘이 점점 옅어져서 참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인가를 스스로가 어렴풋이 느끼게 되어 있다.

때문에 그 안락하고 만족스러우며 멋스러운 행복의 문턱을 넘는 데는 일념이라는 선근 종자를 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심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심고 있지 않으면서 그저 언젠가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이 내 곁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아주 무책임한 자기 기만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한마디의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면서 푸근한 웃음으로 마주하게 될 때 그곳에서 불성이 꽃 피우고 인간의 삶이 더욱 더 아름다운 향기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념에서 나오는 화엄의 법음이요, 비로나자 부처님의 밝은 광명인 것이다.

그런 세계를 좀더 앞당겨 맛보기 위해서 우린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그 일념 선근을 북돋우는 여러 유형의 신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어떤 사찰에서 봉행되든지 보살계나 법회 등등에 빠짐없이 직접 동참해서 선근을 북돋아야 풍성한 수확을 얻기 마련이다. 눈이 많은 먹다 남은 작은 감자를 심고 비닐도 깔지 않은 어정쩡한 아마츄어식 농사가 아니고 프로의 근성을 발휘하는 보다 확실하고 의미 있는 그런 농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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