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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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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7:59 조회3,8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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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박기련_사회복지법인 내원 사무처장

 

 

불교 교리공부를 하다보면 가장 자주 접하는 용어가 있다. 연기, 무아, 중도, 공이라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했다는 사람조차도 이 용어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답을 한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緣起)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연기적 삶이란 무엇인가? 또한 무아(無我)란 무엇이며, 무아(無我), 중도(中道)적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이며, 불교 교리의 핵심인 연기, 무아, 중도, 공(空)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선, 한 가지 정리부터 해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따라서 애매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하며, 쉽다. 아니 쉬워야 한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깨닫기 이전에도 그랬고, 깨달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항상 접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부처님이 고민했던 문제제기, 그 자체가 우리가 항상 일상생활에서 쉽게, 자주 접하는 삶의 문제들이었다. 살고, 죽고, 늙고, 병드는 문제, 사람들이 생활하며 항상 부딪히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그 고민을 해결했다.

부처님은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길에서 사는 그들의 소박한 질문에 답했다. 바르게 답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 언어였으며,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 말씀을 간략하게 간추린 것이 바로 연기, 무아, 공이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 용어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연기, 무아, 공, 중도는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용어로만 다가오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만 생각해보자.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보는 형국을 만들지 말고, 부처님이 가리키신 그 달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라.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관찰해보자.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배부른 현상이 유지될까? 기껏 세 시간이 지나면 배부르다는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또 귀엽게만 느꼈던 딸의 얼굴은 평생 그 귀여움을 간직할까? 그렇지 않다. 깔끔하게 치워놓았던 방은 하루가 지나면 어지러워져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즉, 고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 ‘무아’나 ‘무상’이라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즉, 무아를 내(我)가 없다(無)라는 의미로 해석해서, 나(我)라는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는데(有), 지금 현재도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나라는 존재를 없다고 부처님은 가르쳤는가라고 생각하면 무아라는 용어는 영원히 모순점이며 이해하기 어렵다. 그 뜻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비롯해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으며 바로 이런 현상을 우리는 ‘무아’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규정하자. 그러면 무아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아니, 세상의 이치가 바로 그렇다.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는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무상(無常)이라고도 한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아’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되씹어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정말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찰하고 살펴보면 된다. 관찰해보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세상은 무아다.

공(空)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흔히 공은 ‘비어 있다’는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하면 공(空)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불교에서의 공(空)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무아라는 용어를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의식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인식하는 그 순간과 미래의 그 존재는 같지 않다. 즉 다르다. 그래서 현재의 관점에서 존재하는 그것은 현재적 의미만 있을 뿐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이고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바로 무아다. 무상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씨줄과 날줄이 되어, 때론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론 결과가 되기도 해서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삶이다. 왜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삶인가. 나에게는 자유를 주고, 남에게도 자유를 주는 삶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만 존재할 수도 없고, 남만 존재할 수도 없다. 나와 남이 함께 존재한다.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나와 남이 따로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잠자기 전과 후에 꼭 ‘하루’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점검해보라. 자기 전에는 오늘 내가 한 일을 생각해보라.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냄새 맡은 것, 혀로 한 말 등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을 살펴보라. 깨어나서는 오늘 할 일을 그려봐라. 오랫동안 할 필요는 없다. 3분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그러나 가급적 앉아서 해야 한다. 누워서 하지 말아야 한다. 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대로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면서 생각해보자. 깊고 따뜻한 눈으로 자기를 관찰해 보라.

다른 하나는 밥 먹기 전에 꼭 합장한 후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라. 이 밥을 먹게 된 갖가지 연유와 고마움을 잠깐이라도 가져보라.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줄어들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서로에게 원인과 조건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정진이 관음보살정진이다. 관음보살 정진을 하면서 관세음보살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어떤 가피를 달라고 구하지 말자. 욕심이며, 어리석음이다. 그러지 말고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겠다고 서원을 세워보자. 관음보살의 원력을 내가 실천해 보겠다고 발원해 보자. 그럼 당신은 관세음보살이 된다.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게 된다.

이것이 쉽지 않으면 자기 전과 후에 꼭 자기의 모습을 점검하고 관찰해 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라. 그것이 성냄과 화냄,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화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그것이 불교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착하게 살며 자신을 관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자의 삶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 모든 악(惡)을 짓지 않고, 선(善)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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