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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돌마을 송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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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작성일07-08-10 14:42 조회4,4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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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과 글이 끊어지지 않는 선돌마을 송석헌(松石軒)



송석헌(松石軒)은 동애 선생이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일 뿐만 아니라 글과 효행을 닦고 전수하여 오늘까지 이어온 공간이다. 송석헌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면서 효와 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선돌(立石)은 이름에서 보듯이 바위와 관련이 많은 마을이다. 동네 어귀에 앉아 있는 선돌은 손님을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진사 급제 형상을 한 복두바위, 문과 급제자의 형상을 한 사모바위, 일산바위(조개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한 바위가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동제도 바위에 올리는데 그 유래가 재미있다.
제를 지내다 보면 그 해 돌아가실 분 중 한 명이 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생원 진사의 경우 푸른 도포를 입은 모습으로 바위에 드러나며, 문과 급제자가 있을 것 같으면 사모관대를 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을 수령하는 이가 있으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함양 여씨가 초당(草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다가 예천군 개포면 벌방이라는 동네로 떠난 뒤 선돌을 개간한 이는 사복재(思復齊) 권정(?~1412)의 9대손인 권상중(權尙中)이다. 그는 영주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강원도 영월과 봉화의 경계인 우구치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 서숙(좁쌀) 천석을 벌어서 선돌에 들어와 농지를 개간하였다. 봉화는 조선후기에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개간되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 안동권이면도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보니 봉화는 다른 지역과 달리 유가(儒家) 사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정자(亭子) 수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등 유물이 다수 보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옛것을 글과 눈, 귀로 익혀서 지니고 계신 분이 있으니 동애 권헌조 선생이 그 분이다.
송석헌(松石軒)은 동애 선생이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일 뿐만 아니라 글과 효행을 닦고 전수하여 오늘까지 이어온 공간이다. 송석헌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면서 효와 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동애선생과 선친의 효행기


동애 선생은 양친이 살아계실 때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음식을 조리할 때는 가능한 무르게 하여 씹기 편하도록 하고 따로이 말씀이 없어도 즐겨 드시는 것을 알아내어 상에 올렸다. 하루 세 번 문안인사를 올렸으며 양친께서 몸져 누워 계실 때는 손수 미음을 끓여서 3년간 간병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도 생전과 같이 하루 세 번 성묘를 하였는데 오늘까지 외출한 날을 제외하고 빠짐없이 하고 있다.
선생의 선친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마루에 빈소를 차리고 앉아 계셨는데, 눈물이 짚을 적시고 흘러 마룻바닥에 물기가 배고 마루 밑에는 하얀 염분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20대(代)에 걸쳐 끊어지지 않는 글과 효행


개척시조 권상중(權尙中)은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를 모실 관을 살 돈이 없어 나무를 끈으로 묶어서 지게에 지고 나갔는데 눈 내리고 땅이 얼어 묻을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노루 두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가니 땅이 얼지 않아 그 곳에 장사를 지냈고, 모친을 다른 한 마리가 앉았던 자리에 모셨다. 후일 집안을 일으킨 뒤 이 일이 한이 되어 무덤을 다시 만들려 하였으나 땅을 보는 지관(地官)이 말하기를, 이 자리는 범의 형상이기 때문에 삽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만 두었다.
권용형(權用衡)은 권상중의 셋째로 어머니 병이 위독하자 변을 맛보고 증세를 판단하였으며 하늘에 빌어 병을 낫게 하였다. 이듬해 아버지의 종기가 심해지자 자신의 입으로 빨아냈으며 돌아가시자 6년 동안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살았는데, 낮에는 까마귀 떼가 날개짓으로 더위를 식혀 주었으며 겨울에는 범 두 마리가 감싸 안아서 추위를 막아주었다. 탈상(脫喪)한 뒤 주위에서 효자라고 칭송하기에 영월 땅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는데, 도둑들도 알아보고 권 효자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놓고 갔다. 이에 주인은 잃은 물건을 찾아가라고 밖에 내어 놓으니 도둑이 찾아와 사용할 것을 간청했다. 여기에서도 효자라고 소문이 나기에 결국 진천 땅으로 옮겨 살았다.
권명신(權命申)은 권상중의 증손으로 이광정(李光庭)의 제자가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그는 글보다는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 공부는 스스로를 닦아 기르는 것이라 하여 수단과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이때부터 그와 후손들은 송석헌에서 살았는데 드디어 천석꾼 살림살이를 이루었다. 이처럼 권씨 집안의 효와 글은 집안이 어려울 때나 넉넉할 때나 가리지 않고 사복재 권정에서 동애 선생까지 20대(代)를 끊어지지 않고 내려왔다.


내 아들은 숙맥일세, 숙맥
‘어버이를 사랑하는 이는 남에게 나쁘게 아니하고 남에게 오만하게 아니한다. 『소학』’
권용형은 이 글귀를 듣고 효행과 학문에 뜻을 두고 평생 자신을 갈고 닦았다. 어버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돌아가셔서도 섬김에 지극한 그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물었다. “자네 아들이 효자라면서” “그건 모르겠고 내가 하는 말은 다 듣는다네.” 벗을 집에 데리고 와서 아들에게 얘기했다. “소가 밥맛이 없는 듯하니 보리를 베어다 먹여라” 아들은 아무 말하지 않고 다 익어가는 보리를 베자 아버지는 다시 얘기했다 “보리가 다 익어가니 베지 말거라.” 아들은 두말하지 않고 베기를 중단하였다.
“그럼 자네 아들은 어떻게 하는지 한 번 가보세”
“얘야 소가 밥맛이 없으니 보리를 베어먹여라” “아버지 다 익어가는 보리를 왜?”
“자네 아들은 어째서 보리를 베었는가?”
“내 아들은 숙맥일세, 숙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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