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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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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관스님 작성일06-11-23 17:13 조회3,0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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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기도의 공덕
무관 스님 (범어사 포교국장)


오랜만에 선원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도반(道伴)스님과 함께 큰방에서 점심공양을 마치고 금정산 산행을 했다. 지팡이를 각자 하나씩 짚고 걷는 가을산은 너무나 황홀하였다. 어느 새 산의 빛깔은 정상부터 붉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20년 넘게 이 금정산 자락의 품에 안겨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일반 등산객의 왕래가 없는 산길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 길을 골라 등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도반스님과 함께 걷다가, 바위에 좀 쉬었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 정상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눈 아래 펼쳐지는 금정산 준령은 너무 여유로워 보이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가을날 오후, 금정산 풀숲은 나에게 그처럼 넉넉함을 주고 있었다. 산 정상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금정산의 신비로운 외길 숲 사이를 쭉 따라 하산하게 되었다. 흐르는 시냇물 사이로 낙엽이 떨어져 있는데, 나의 안근(眼根)에는 금색으로만 비친다. 그리고 흐르는 물은 마치 차를 우려낸 것처럼 낙엽들과 잘 어우러져 있다.
산과 숲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마음의 평화를 주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연기(緣起)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다섯 가지의 보시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데, 그 다섯 가지 중에서 첫째는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요, 둘째는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웅장한 사찰을 건립하여 보시하라는 말씀보다 왜 공원과 숲을 보시하라 했는가?’
초발심(初發心)때는 부처님께서 왜 공원과 숲을 조성하여 보시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문(山門)에 들어와 정진하며 살다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숲의 조성이야말로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일임을 알 수 있겠다. 조성된 숲과 나무들을 사람들이 보면서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가졌을 때 이것이 기도의 성취이고 기도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한 것에 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혹은 식물이건 간에 모든 생명체들이 제 생명 받아 온 만큼 평안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내는 일이 기도가 아니겠는가. 출가자의 기도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출가한 이후 개인의 영화(榮華)를 위해 기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재가신도들에게 “무엇을 위해 기도 합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거의 대부분의 신도들이 자녀를 위해, 사업성취, 학업성취, 부귀영화, 수명장수 등의 기도를 한다고 말한다. 스님들도 이들을 위해 축원문에 나오는 이름을 읽으면서 기도 성취를 발원한다.
간혹 스님들이 자기 가족의 이름을 빼먹고 축원명단에 넣어놓지 않으면 신도들은 내심(內心) 섭섭한 마음이 생겨, 어떤 신도들은 기도가 끝난 후 스님들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목소리가 좋지 않은 스님이 기도를 할 경우에는 신도들이 나서서 “저 스님은 기도를 못 한다”라며 총평을 내리기도 하니, 기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서울에서 대학 선배스님의 절에서 몇 개월 기도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축원 기도를 하다가 어느 노보살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왜 우리 손자 이름을 부르지 않는가?”였다. 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나의 뇌리(腦裏)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과 안타까움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보름 전,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에서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회의 안건은 해운대 벡스코에서 기독교 단체가 실시한 경악을 금치 못할 기도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그 기도의 내용은 “절이 무너지도록 기도합시다!”라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물을 봤을 때 당황스럽기도 하고 ‘참 상식 밖의 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상물에는 전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 씨의 축하 메시지까지 들어 있었다. 충격이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 타인의 파멸을 기도하는 그 비상식적인 행위에 어떠한 대응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스님이지만 교회가 무너지도록 성당이 무너지도록 기도한 적이 없다. 수많은 명예와 부를 준다고 해도 절대 이런 기도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부처님의 대자비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이며, 중생을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속에서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 가게 해야 하는 사명감을 지닌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15,000여 명의 기독청년들이 모여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하니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종교의 지향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를 떠나, 타인의 파멸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걱정되기도 한다. 물론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들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기도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이며,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자비와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그 포용력이 기도의 공덕(功德)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기도 공덕은 모두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콘크리트벽장 속에 살면서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싶다. 아집과 아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지혜와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도의 공덕은 멀리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마음을 일으키면 온 우주의 기운이 함께 움직인다. 나 자신을 금강석 위에 세운 뒤, 남을 돌아보고 배려할 줄 아는 간절한 그 마음이 기도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이 가을 산의 숲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움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기도(祈禱)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수승한 기도의 공덕이 쌓이는 것이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대나무가 소리를 내고 선원(禪院) 뒤편 왕대나무는 그 위세를 갈바람에 당당하게 맡겨버린다.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과 가을 산의 여유로움이 같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가을 오후, 창틀 속의 계명봉 단풍은 붉게 변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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