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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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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5-09 12:37 조회4,59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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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

오늘은 4월 초파일, 불기 2553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인간세계와 하늘나라에서 가장 귀한 스승이시며 모든 중생들의 자비로운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어둡고 척박한 이 사바세계에 나투신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온 인류와 더불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야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오랜 겁 전에 성불하여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 머무시다가 중생들의 고뇌를 천안(天眼)으로 살피시고 고통에서 남김없이 건지고야 말겠다는 서원을 세우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무명(無明)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심(貪心)과 진심(嗔心)과 치심(痴心)의 삼독심(三毒心)을 일으키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법세상의 징후’라고 합니다. 세계는 단 하루라도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와 각종 사회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가족 상호간의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존속끼리 살상살해하고, 심지어 천인공노할 악행과 만행을 저지르는 등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현실을 말세현상이라 개탄하기도 합니다.

험악해진 것은 사람들 마음뿐만이 아닙니다. 자연환경은 이제 인간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황폐해 가는 자연환경도 실은 인간의 마음이 타락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년부터 불어 닥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백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라는 그 파장은 무척이나 커서 전 세계를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고, 인류를 속수무책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나 기업, 개인까지도 어떻게 하면 파산을 면할 수 있을까 묘책을 강구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이 돈에 너무 애착하고 물질에 탐욕심을 일으킨 업보로 돈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들을 깨우쳐 주고 이끌어 주기 위하여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오늘 법문은 ‘출가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라는 제목으로 이런 난국을 맞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의 영화가 비록 쾌락하지만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이 네 가지가 없다고 하면

어찌 내 마음이 기쁘지 않으리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음력 2월 8일은 가비라국의 태자 싣달타가 왕궁의 영화와 아버지 정반왕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고 아름다운 부인 야수다라와 귀여운 아들 라후라를 왕궁에 남겨둔 채 과감히 출가를 하신 날입니다.

불가에서는 출가일을 4대 기념일로 봉행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4월 초파일과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납월 8일 성도절, 사라쌍수 아래서 대열반에 드신 열반절과 함께 성스러운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출가(出家)란 단순한 가출의 의미가 아닙니다. 출가는 범어 pravrajita (프라브라지타)를 번역한 말로서 ‘번뇌에 얽힌 세속의 생활 인연을 여의고 성자의 수행생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싣달타 태자는 그 누구보다도 영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모두 갖춘 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싣달타 태자는 사랑하는 처자와 존경하는 부왕의 곁을 떠나서 밤중에 성벽을 넘어 출가를 결행했습니다. 그것은 온갖 애욕으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진리를 찾아 나선 참으로 뜻 깊은 출발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출가를 위대한 출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어려운 결심과 과감한 행동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싣달타 태자는 출가하기 전에 두 가지의 길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서 깊은 고민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세속적인 영화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성자로서의 진리의 길이었습니다. 왕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세속적인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누리면서 일생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고고한 진리 탐구의 길을 걸어서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고뇌에 빠졌습니다.


싣달타는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싣달타가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시어 온 국민의 축복을 받을 때 정반왕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예언자인 아시타를 불러 아기의 장래를 물었습니다. 아시타는 왕자의 모습을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정반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아시타는 눈물을 멈추고 나서 말했습니다.

“이 어린 왕자에게는 서른 두 가지의 좋은 상과 80가지의 상서로운 몸매가 있습니다. 이런 분은 4천하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거나, 아니면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 전륜성왕이나 부처님이 되시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그게 슬퍼서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전륜성왕이란 인도 대륙을 통일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인도의 전설적인 왕 중의 왕입니다.


싣달타 태자의 번민이 겉으로 드러난 최초의 사건은 농경제(農耕祭) 행사 때의 일입니다. 농경제란 봄이 되어 최초로 밭갈이를 하는 행사로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해마다 이 행사에는 왕을 비롯하여 문무백관들이 참석하여 밭갈이를 시범했습니다. 제일 먼저 왕이 시범하면 대신들이 하고 농부들이 그 뒤를 이어 성대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어느 해 태자도 이 농경제에 참가하여 신기한 듯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신기해 보였지만 흙과 땀에 젖어 헐떡거리는 농부들이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것도 잠깐, 태자의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자 쟁기로 파헤쳐진 흙 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고 나타났는데, 어디선지 모르게 갑자기 새가 날아와서는 벌레를 쪼아 먹으니 더 큰 새가 날아와서 작은 새를 잡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끼리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이 참혹한 광경을 보자 태자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가까운 숲으로 들어가 나무 아래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생명체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른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입니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을 통해 이 세상을 본다면 결국 현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사는 약육강식의 현장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성이 영민해서 남보다 더 깊은 생각을 했던 싣달타 태자가 이 사실을 가볍게 보고 넘길 리 없었습니다.

싣달타 태자는 여기서 최초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깊은 명상에 잠겼던 것입니다. 이를 ‘염부수하(閻浮樹下)의 정관(靜觀)’이라고 합니다. 마침 태자가 앉아 있던 나무가 염부수라는 보리수나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싣달타 태자로 하여금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사문유관(四門遊觀)입니다.

어느 날 태자는 동문 밖으로 산책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허리는 활처럼 굽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고, 숨을 몰아쉬며 걸어가는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노파라 순간 크게 탄식을 하며, 늙음이란 누구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다음 날은 남문 밖으로 나가서 거닐다가 병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파서 괴로워하고 울부짖으며 질병에 시달리는 참상을 보게 됩니다.

다른 날은 서문 밖으로 나가서 상여 행렬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는 생자필멸의 엄연한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이 때 태자의 심정을 『불본행집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태어났다가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을 어찌하랴. 아아, 인생은 허무하고 괴로운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수렁이 우리 앞에 있구나.”

그러나 마지막으로 싣달타 태자가 찾아 나섰던 북문 밖에서는 한 사람의 고고한 수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수행자는 비록 삐쩍 마르고 남루한 옷을 걸치고 외형은 볼품이 없었지만, 걸음걸이는 의젓하고 당당했으며 눈빛은 빛났습니다. 태자는 수행자로부터 ‘해탈의 길을 찾아 출가하였다’는 말을 듣고 한 가닥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 희망이 있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속박의 삶에서 벗어날 해탈의 희망이 있구나.”

이 사문유관으로 싣달타 태자의 출가 의지는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태자의 마음이 출가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을 눈치 챈 정반왕은 크게 걱정합니다.


그래서 태자의 마음을 붙들어보려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삼시전(三時殿)을 따로 지어 계절에 따라서 아늑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별궁을 마련해 주기도 했고, 매일 연회를 베풀어서 태자로 하여금 술과 여자의 환락 속에 즐거움을 느끼고 출가를 단념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히려 태자의 출가의지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 부왕의 뜻대로 태자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였습니다. 부왕이 매일 연회를 베풀어서 태자를 즐겁게 하려는 것은 오히려 큰 오산이었습니다.

어느 날 태자는 연회가 끝나고 나서 피곤에 겨워 쓰러져 정신없이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한 무리의 무희들을 보게 됩니다. 춤추고 놀 때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던 여인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든 추한 모습을 보고 태자는 여자의 아름다움, 쾌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절없는 것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태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더러움과 어리석어 꾀임에 빠지는 것은 여인의 몸보다 더한 것은 없으리라. 갖가지 의복과 구슬 따위로 아름답게 꾸밈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속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련한 것, 그림자와 같고 꿈 같은 것으로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불본행집경』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싣달타 태자는 대단히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속기 쉬운 겉모습에 홀리지 않고 그 뒷면까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값비싼 옷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귀고리, 팔찌, 다이아반지를 끼고 꾸민다 해도 우리 인간의 육체는 피와 고름 대소변이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싣달타 태자는 일찍 이 사실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게 된 싣달타 태자는 정반왕에게 허락을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정반왕이 이 소청을 순순히 허락할 리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왕은 아들을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달래 보았습니다. 그러자 태자는 부왕에게 세 가지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저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소원을 아버님께서 들어주신다면 저는 홀연히 출가와 수도의 길을 포기하겠습니다. 저를 언제나 늙지 않게 해주시고, 저를 항상 건강하게 해주시고, 저를 언제까지나 죽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출가의 길을 포기하겠습니다.”

이러한 태자의 요구를 들은 정반왕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자의 결심이 너무 굳어서 도저히 바꿀 수 없음을 알아차린 정반왕은 이제 물리적으로 출가를 저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에게 성벽과 사대문의 경비를 엄하게 하도록 분부를 내리고 태자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태자의 의지는 더 강해졌습니다.

드디어 2월 8일 밤이 되자 싣달타 태자는 마부 찬타카가 모는 말을 타고 성을 넘어서 출가했습니다.

싣달타는 몰래 성을 빠져나와 얼마간 달려서 옛날 선인들이 살던 숲에 이르렀습니다. 말에서 내린 태자는 몸에 지니고 있던 마니보를 마부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보배를 가지고 가서 부왕에게 드리고 이렇게 말해 주기 바랍니다. 나 태자는 세속적인 욕망은 조금도 없으며 또한 선업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일체 중생이 바른 길을 몰라 헤매며 생사윤회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나이가 적지만 생노병사(生老病死)에는 정해진 때가 따로 없으며, 지금 젊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예전부터 훌륭한 임금들은 나라를 내어놓고 도를 찾아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행 도중에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 결심도 이와 같아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을 때까지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전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몸에 지니고 있던 영락과 패물을 떼어 양모와 야수다라에게 전해주도록 하고 자기의 결심을 모든 친척들에게 전해 주도록 마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사냥꾼이 한 사람 지나가므로 태자는 비단옷을 벗어주고 사냥꾼의 옷과 바꾸어 입고 조용히 숲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시타 선인의 예언대로 싣달타 태자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해 출가하시게 된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

『증아함경(增阿含經)』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출가 동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과 늙음과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와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삶을 위해서였다.”

그렇습니다. 싣달타 태자라는 한 청년이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출가를 결행하게 된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누구나 바라고 일생 동안 염원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출가는 가정이나 사회를 등지고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현실도피나 염세적인 탈출의 수단으로 산속이나 은둔처에서 자기만의 생활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과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방법이란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출가는 한낱 가출에 불과한 무책임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정을 떠나지 않더라도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삶의 길을 터득할 수만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출가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됩니다.

싣달타는 출가하신 후 피나는 정진을 통해서 부처님이 되심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의 출가정신을 이어받는 길은 우리 자신도 생노병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적인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출가는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가정을 버리고 출가할 수는 없습니다. 『비화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삭발하는 것만으로 출가라 하지 않는다. 대정진을 일으켜 중생의 일체번뇌를 제거하려 할 때 이를 출가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출가절을 뜻 깊은 날이 되게 하는 길은 생업을 버리고 입산수도를 하는 외형적인 출가를 하는 일이 아니라 진실로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구제해야겠다는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이요,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삶의 길을 터득하는 데 있습니다.


출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출가(身出家)요, 다른 하나는 심출가(心出家)입니다.

신출가란 형출가(形出家)라고도 하는데 몸으로 출가하는 것, 즉 외형적인 출가를 말합니다. 가정을 떠나 산간의 수도처에서 교단의 일원으로서 출가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심출가는 마음으로 출가하는 것, 정신적인 출가를 말합니다.

비록 출가지만 형식적으로 출가 생활을 하고 수행자로서 위의와 덕성을 잃어버리면 진정한 출가라 할 수 없으며,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일지라도 청정한 계율을 받들어 가지면 참다운 출가라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

대승불교 사상은 신출가보다는 심출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 『유마경』을 들 수 있습니다.

『유마경』은 유마힐이라는 재가 거사를 통해 대승불교 사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진정한 출가는 외형적인 신출가가 아니라 내면적인 심출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마힐은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랏차비족의 부호인데 바이사리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마힐은 병으로 드러누워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병이 들어 누워있는데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큰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가?’

부처님은 그러한 거사의 마음을 알고 제자들 가운데 제1인자인 사리불을 불러 문병을 가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지혜 제일이라는 사리불은 자신은 유마힐의 병문안을 갈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십대제자들을 차례로 불러서 문병을 다녀오도록 부탁하셨지만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들 유마힐 거사에게 질책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십대 제자들도 모두 유마힐 거사로부터 책망을 들을 만큼 유마힐은 뛰어난 덕과 지혜를 겸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유마 거사에게 문병을 갔다가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문병가기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친아들이기도 하고 10대 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라후라에게 “네가 문병을 가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라후라도 부처님께 자기는 유마힐을 문병하는데 적격이 아니라고 사양합니다. 라후라가 문병을 사양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바이샬리 장자의 아들들이 라후라를 찾아와 예배하고 “라후라님, 스님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깨달음을 위하여 출가하였습니다. 그 출가에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하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라후라 존자는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서 상식적인 대답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마힐 거사가 그 곳에 나타나서 라후라 존자에게 말하기를 “라후라여,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서 그대와 같이 설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익도 공덕도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에는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마 거사는 라후라 존자가 말한 출가의 이익이나 공덕을 비판한 다음에 진정한 출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온갖 잡다한 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이교도들을 설복(設伏)하며, 거짓된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며, 욕망의 늪을 나와 이에 집착하지 않으며, 실제로서의 자아에 속하는 것을 모두 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은 혼란하지 않고, 안으로 잔잔한 기쁨을 안고, 중생의 마음을 지키며, 마음은 조용히 무심의 경계를 따라 온갖 과오를 떠나는, 그것이 가능하면 이는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장자의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바른 가르침을 받들어 함께 출가함이 좋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승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면서 출가하기를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장자의 아들들이 말하기를 “거사님, 저희들이 듣기로는 양친의 허가가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하고 출가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를 하려면 양친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가 열두 살이 되던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 와서 “저에게 재산을 물려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라훌라의 손목을 이끌고 니그로다 정사로 가셔서 제자인 사리불에게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재산을 돌려 달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던 라훌라는 졸지에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유산은 바로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손자까지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하게 되자 정반왕은 몹시 상심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 미성년자의 출가는 부모의 동의를 얻도록 해달라고 제의하게 되었고, 부처님께서도 흔쾌히 받아 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마 거사가 권한 것은 그런 외형적인 출가가 아니었습니다.

유마힐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렇다, 그러나 너희들이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교단(敎團)이 정하는 완전한 계율을 받은 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출가는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가의 목적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장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유마 거사는 비록 가정을 가진 재가불자였지만 어느 출가수행자들보다도 훌륭한 인품을 갖추었고, 진리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유마힐 거사와 같은 재가 불자로서의 심출가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발보리심(發菩提心)입니다. 보리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보리심은 무엇인가? 유마힐 거사가 말한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유마 거사는 “너희들이 지금 이 곳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교단이 정하는 완전한 계율을 받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도 여러분도 그런 마음만 갖는다면 이미 출가를 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보살계까지 완전하게 받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최고의 깨달음이란 부처님의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불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마음, 발보리심이란 모든 중생이 다 함께 잘 살자는 소원입니다. 그것이 곧 대비심(大悲心)입니다.


불자 여러분 !

부처님께서는 이천 오백여 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셨습니다.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이 하셨던 것처럼 가정을 버리고 직접 출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바라는 바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가의 동기입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출가를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인생의 근본명제, ‘왜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이 있는가, 어떤 삶이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삶일까’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셨고, 그 의문은 당신이 부처님이 되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부처님의 출가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오직 부처님처럼 성불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소원에 만족하지 말고, 기필코 성불하며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들겠다는 큰 서원을 ‘부처님 오신 날’에 다시 한 번 세워야 할 것입니다.


발심(發心)하라 발심하라 발심하라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의 한결같은 고구정녕(苦口)한 말씀

싣달타 태자의 출가처럼 진정으로 발심하면

중생이 곧 부처요 번뇌가 곧 보리요

예토(穢土)가 곧 정토(淨土) 되리라.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이현재님의 댓글

이현재 작성일

고귀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발심자체가 성불이라 여겨집니다.
본래는 발심이 어디있으며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발심자체가 믿음이여 믿음이 곧 성불인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그냥 저는 쉬었으면 합니다.
출가를 염두하고 계신 위대한 분들이시여
믿고 믿으시기를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