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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세계와 수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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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01-17 12:55 조회3,91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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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 밖에 문자를 쓰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선을 단적으로 표현한 함축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 선종의 오가(五家)가 정립이 될 무렵 북종의 원부년간에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서 처음으로 쓴 말이라 합니다.


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35세에 성도(成道)하셔서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설하신 법문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을 흔히 8만4천 법문이라 합니다. 8만4천이란 그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량하다, 방대하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법문은 한량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방대하고 심오합니다.


부처님은 대중설법을 300여 회나 하셨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개인에게나 몇 사람에게 한 법문까지 합하면 그 횟수가 한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대한 일대교설(一代敎說)을 1,2,3,4차로 결집하여 그 성질과 형식을 구분하여 열 둘로 나눈 것을 12부 경전이라 합니다.


중요한 경전을 들면, 깨달은 뒤에 최초로 21일간 설한 불교철학의 진수인 화엄경(華嚴經)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아함경, 방등부(方等部)의 여러 경전들, 600부의 대반반야경(大槃般若經),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법화경, 마지막 열반에 들기 직전 하루 낮 하루 밤에 설하신 열반경이 있습니다. 이들 부처님 말씀을 성언(聖言)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인간들에게 주는 간절하고 노파심절(老婆心絶)한 말씀이고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경전은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는 것이 경전입니다. 수나라 때 영명연수(永明延壽 : 904~975) 스님은 법화경을 1만 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어찌나 지극하게 읽던지 지나가는 양떼들이 우두커니 앉아서 듣다가 가곤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방대한 금과옥조 같은 성스러운 말씀을 해놓으시고도 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찍이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노라.”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렇게 수많은 법문을 하시고도, 참으로 하고 싶은 말씀, 해야 할 말씀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것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근본 진리는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 작용이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도리는 아무리 명문장가라도 표현할 수 없고, 폭포수 같은 언설을 하는 명웅변가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렇게 거룩한 가르침도 근본당처(根本堂處)에서는 쓸데없는 이야기요 불필요한 잔소리일 뿐입니다. 어떤 옛 스님은 경전을 피고름 묻은 헌 종이라 하였고, 또 어떤 선사는 똥 묻은 걸레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는 입만 벙긋해도 그르치고,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집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치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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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에서는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다운 법문은 삼처전심(三處傳心) 뿐이라합니다.


첫째,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보이신 것인데,


부처님께서 영축산(靈鷲山)에서 수많은 대중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고 나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 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아무도 그 뜻을 모르는데 상수제자(上首弟子)인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에 세존(世尊)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는데 이것을 가섭에게 부촉(付囑)하노라.” 하셨습니다.


이로서 가섭 존자는 부처님의 법을 이은 1대 조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둘째는,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의 반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圍國) 급고독원정사(給孤獨園精舍)에 계실 때, 느 날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앉아 설법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가섭이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머리는 덥수룩하게 헝클어지고 의복은 헤어지고 때가 묻어서 흡사 거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아무도 모르는데 세존께서 알아보시고 앉았던 자리의 반쪽을 비껴주며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대중은 모두 이상히 여겼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나의 반 자리에 앉은 비구는 마하가섭이니 그간 두타행을 하면서 도가 확충되었으므로 이와 같이 특대하노라.” 하셨습니다 .


이것이 두 번째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셋째는,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두 다리를 관 밖으로 내보이신 것입니다.


가섭 존자가 영축산에 있다가 세존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만에 당도하였습니다. 세존의 시체를 모셔놓은 관 앞에 나아가 우로 세 바퀴를 돌고, 절을 하였더니 두 다리를 관 밖으로 내밀어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참다운 것은 그렇게 밖에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침 밖에 문자를 쓰지 않고 별도로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법문다운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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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제 일성이,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었네.” 하셨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다는 것은 본 바탕은 부처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부처가 못 되는가? 번뇌망상과 집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무명업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집착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괴롭고 불안하여 마음이 흐려있고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볼 수 없고, 본래면목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잔뜩 흐린 먹구름 때문에 해를 볼 수 없다가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듯이, 태풍이 심하게 불면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어나서 바닷물이 흐려져서 바닷속을 볼 수 없다가 태풍이 지나가고 바다가 잔잔해지면 바닷물이 맑아져서 수십 미터 바다 속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온갖 번뇌망상이 들끓어서 불안하고 어지럽고 괴로우면 마음이 흐려지고 어두워져서 본래면목은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체의 번뇌망상과 근심걱정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져서 나의 본 바탕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이 어두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방법이 선입니다.



선(禪)은 옛 인도말인 ‘산스크리트’어의 드야나(dhyana)에 해당되는 말인데, 야나’는 생각한다, 바르게 생각한다, 생각해서 닦는다는 뜻입니다. 즉 고요히 생각해서 마음을 닦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선의 개념(槪念)이 인도선과 중국선이 다릅니다.


인도에서 말하는 선은 ‘생각한다’, 또는 ‘생각해서 닦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국선은 생각한다, 생각해서 닦는다는 범주를 벗어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바로 마음을 보아서 담박 깨쳐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도선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와 망상을 쉬게 하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여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정(定)이라 하였습니다. 인도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모든 행을 닦으면서 선도 닦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에 있어서는 정(定)이 되고, 팔정도(八正道)에 있어서는 정정(正定)이 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있어서는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교의(敎義)를 떠나 선이 있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의나 이론을 무시하고 선만 닦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말하는 선(禪)은 다릅니다.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수식관(數息觀)에 의해 정신을 통일한 다음에 사념처법(四念處法), 사제관(四諦觀) 등 관법을 실수(實修)하여 인도선과 그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달마 대사께서는 능가경(楞伽經)으로 수행의 지침을 삼고서 마음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습니다. 달마 대사의 수행사상은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선정의 수행이며 불교의 근본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등의 문구에서 차츰 교의 밖에 따로 마음을 보고 깨닫는 법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제4조 도신(道信) 선사는 단순한 수행법인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부르짖으며, 불성을 보는 자는 영원히 생사를 여읜 출세인이라 주장하였으며, 제5조 홍인(弘忍) 대사의 제자 신수(神秀) 화상은 『관심론(觀心論)』에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어떤 법으로 수행해야 옳은가?”라는 질문에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문을 총섭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온 『혈맥론』에서는, “앞의 부처와 뒤의 부처가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할 뿐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불하려면 모름지기 견성해야 한다. 견성 못하면 인과등어(因果等語)가 다 외도법이 되고 만다.” 고 하였고, "만일 불성을 보면 12부 경이 쓸데없는 문자일 뿐이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다만 이 마음 밝히는데 있다.”라고 선언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종지가 차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달마 대사 이후 중국의 옷을 입은 조사선은 인도의 관심선(觀心禪) 또 수정선(修定禪)과 그 성격을 달리한 특수한 선문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선은 중국 임제종의 선맥을 전수계승하여 발전 유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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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면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있습니다.
묵조선은 일체의 사량(思量)과 분별을 끊고, 고요하게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닦는 것을 묵조선이라 합니다. 간화선 이전에는 주로 묵조선을 하였다. 지금도 조동종(曹洞宗)의 수행방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화선은 볼 간(看)자, 화두의 화(話)자, 화두를 보는 선입니다. 화두를 본다는 것은,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것인데, 화두 참구법은 지금까지 인간이 개발한 가장 확실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화두(話頭)란 참선자가 참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조사 스님이 말씀하신 법문이나, 종사(宗師) 스님이 깨달으신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가르치던 행위의 종요(宗要)를 모아 참선자에게 규범이나 과제로 준 것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옛 사람이 만든 규범, 즉 법칙이라 해서 고칙(古則)이라 하고, 공부(公府), 즉 관공서의 안독(案犢), 법령과 같이 준엄한 것이라 해서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화두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학인 스님이 유명한 조주(趙州) 스님께 물었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란 달마(達摩) 대사이다. 달마 대사가 서쪽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뜰 앞에 잣나무니라.”했습니다. 뜰 앞에 잣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뜰 앞의 잣나무”라 하신 것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니라.”하신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대답입니다.



옛날에 동산 수초(洞山守初)라는 큰 스님께 한 어린 스님이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니, 그 때가 여름이라 삼을 만지고 계시다가, 그 삼을 보이면서 “삼 서근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답을 공부의 과제로 준 것이 화두입니다.



이런 깊은 법문은 일반적인 사리에 따르고 논리에 맞는 대화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고나 논리를 거부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이치나 생각으로는 알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으며, 어떤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지식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사 스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며, 삼세(三世) 여러 부처님들의 지견(知見)이 드러나고,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의 안목(眼目)이 나타난 법문 중의 법문입니다. 이와 같이 범상한 생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하고 대단한 법문을 문제로 주어, 깨치게 하여, 자기의 주인공을 찾아 스스로 부처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화두는 뗏목이나 보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 큰 강이 흐른다고 합시다. 강의 폭도 넓고, 물도 깊고, 물살이 센 강이라 수영을 특별히 잘 하는 사람도 겨우 건널 수 있는 강입니다. 그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는데 수영해서 건넌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보트나 뗏목과 같은 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중생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가는 데는 화두가 뗏목이나 보트와 같은 좋은 수단입니다.



강의 이쪽 언덕은 온갖 번뇌와 망상이 들끓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미혹한 중생의 세계이고, 강의 저쪽 언덕은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 즐거움만 남아 있는 열반의 세계, 부처의 세계 또는 극락의 세계라면, 강물이 깊고, 물살이 세고, 파도가 높아서 수영하기가 어려워 뗏목이나 보트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듯이, 현대인은 근기도 하열하고, 신심도 없고, 발심도 못한 데다 간절하고 성실한 마음도 없으니,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화두입니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근기가 하열하고 발심 못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화두입니다.



간화선 이전에는 주로 묵조선으로 수행했으나, 사람들이 점점 왜소해지고 도를 닦으려는 사람도 줄어들고, 수행자로서 부족한 점이나 문제점이 많은지라, 송나라 때 대혜 종고(大慧 : 1089-1163) 선사께서 말법시대 사람들에게 알맞은 수행법을 내세운 것이 간화선이다. 화두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현대인에게 비교적 쉬운, 가장 알맞은 수행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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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화두 참구는 어떻게 하는가?
첫째, 대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로 참선하는 것을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공부한다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화두에 의심을 일으킨다, 화두를 지어간다는 뜻입니다.
화두 참구는 염불하듯이, 이 뭣꼬? 이 뭣꼬 ... 하며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는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생각한다고 알기 쉬운데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는 외우고 생각해서는 몇 년을 하고 몇 십 년을 해도 진의(眞疑)가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을 것닙니다. 화두 참구는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 뭣꼬?”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을까?”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합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입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의정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입니다. 의정이 없는 화두는 화두가 아닙니다.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는 화두 공부가 아닙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데 뜻이 있습니다.
그 의정은 크게 일으켜야 랍니다.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합니다.



둘째, 화두에 대한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화두를 참구하면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다.’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거나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도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이 나고, 진정한 믿음으로서만 불법의 대해를 건널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인은, “세상 사람은 쌀이 양식이지만 수도자는 믿음이 양식이다.” 했습니다. 양식이 없으면 굶어 죽듯이 믿음이 없는 수도자는 이미 수도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고 튼튼할수록 움직임이 없이 높고 크게 자랄 수 있듯이 믿음의 힘이 크고 깊을수록 그 열매가 큰 것입니다.



셋째,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합니다.
옛 선사의 말씀에, “화두 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 자면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스님은, “참선하는 데는 간절함 한 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하였습니다. 어떤 선지식은, “참선자는 간절 절(切)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라.” 하였습니다. 화두는 참으로 간절하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화두 참구에는 여러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간절 간절하게 들어가면 됩니다.
화두를 간절하게 참구하는 것은, 몇 일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심하게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어린애가 집 나간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간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며칠 굶어보세요. 앉으나, 서나, 눕거나, 움직이거나 오직 밥 생각 뿐일 것입니다. 어디 가면 밥이 있을까, 어디 가면 좀 얻어 먹을 수 있을까, 밥 먹을 궁리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간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화두를 간절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심하게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화두 참구를 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다가 사막과 같은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이라면 준비한 물은 다 떨어지고, 몇 일간 전연 물을 못 마셨다면, 오직 물, 물 생각 뿐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에 혈안이 되고 물에 미쳐있을 것입니다.



화두는 물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오직 화두, 화두에 미친듯이 간절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또, 화두는 집 나간 엄마를 생각하는 아이처럼 들어야 합니다.
네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 아이는 늘 엄마 치마자락만 잡고 다니던 아이인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가출했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엄마를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엄마, 엄마, 엄마, 온 집안을 찾아도 없으니, 거리에서 찾고, 이웃집을 다니며 찾아도 없으니, 울며 불며 오직 엄마 생각 뿐일 것입니다.



이런 아이는 사탕 같은 먹을 것을 주어도 마다하고, 장난감도 싫다 하고, 누나나 형이 업어주고 놀아주어도 마다하고 울다가 지쳐서 자다가도 엄마를 찾을 것입니다.
이런 아이가 엄마를 찾고 기다리듯 화두를 들어가야 합니다.
화두는 오직 간절하게, 간절 간절하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6


이상으로서 선의 뜻과 화두와 화두참구법에 대하여 아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의 효능(效能)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첫째, 선은 안심(安心)을 얻습니다.
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 뭣꼬?” “어째서 무(無)라 했을까?” 지극하게 참구하여 진의(眞疑)가 돌발하면 화두만 간절하게 들릴 것입니다. 화두에 의심이 간절하게 일어나면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사라집니다. 괴로운 마음, 슬픈 마음, 성내는 마음,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불안과 공포, 일체의 욕망이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몸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마음과 몸이 편안하면 묘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런 즐거움의 극치가 바로 극락입니다.
극락까지는 체험을 못하더라도 묘한 즐거움만 느껴도 참선을 하지 말라고 말려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수행에서, 도(道)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행복을 느껴보지 못하면 반쪽 인생도 못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머리가 좋아집니다.
화두에 진의가 나서 일체의 번뇌나 망상이 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화두가 더 힘차게 들려 아주 고요해지면 마음은 더 맑고 깨끗해집니다. 맑고 깨끗해진다는 것은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은 본래는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본 바탕은 부처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 바탕이 같다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德相) 즉 도덕(道德)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맑아지면 그 근본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 근본 지혜가 드러나는 것을, 머리가 좋아진다, 기억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것을 자기의 계발이라고도 합니다.



학문으로서 얻은 지혜는 한정이 있고, 그 배운 범위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참선을 하여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한이 없습니다. 비유컨대 선수행으로 얻은 지혜는 태양과 같고, 학문으로서 얻은 지혜는 반딧불과 같습니다.
참선은 젊은 사람일수록, 남보다 앞서고 더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해야 하는 수행법입니다.
참선을 잘 하면 둔재가 천재가 되고, 무능한 사람이 능력자가 되며, 범부가 부처가 되고 도인이 되기 때문에 인간개조법(人間改造法) 또는 인간재생법(人間再生法)이라고도 합니다.



셋째, 의지가 강해집니다.
화두에 진의가 돌발하여 힘을 얻으면 그 도덕의 힘으로 의지가 강해집니다. 평소에 나약하다, 여자 같다는 사람도 강하고 남성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잘 흔들리고, 자주 변하고, 우유부단(優柔不斷)하던 사람도 의지가 꿋꿋하고, 당당하며, 변치 않고,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는 고집쟁이가 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참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사람도 인내력이 생겨 잘 참는다, 지독하다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움직이거나 물들지 않고 잘 참고 견디어 갑니다.



넷째, 인간성이 변합니다.
화두에 큰 힘을 얻어서 수행공덕이 쌓이면 성품이 서서히 변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변한 자기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번뇌망상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면 마음이 넓고 커지며, 급한 성미도 느린 듯 침착해지고, 행동도 중후해지며, 자세도 의젓하여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모습이 사라집니다.
선 수행 전에는 자기만 아는 소승적이고 옹졸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으나, 남에게 사랑도 베풀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줄도 알고, 어려운 보살행도 하여 대승적으로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큰 사람으로 진면모(眞面模)가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다섯째, 일에 능률이 오릅니다.
선 수행을 하여 도덕을 갖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능력을 갖추게 되고 능률도 오릅니다. 능률을 올리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참선자는 화두하듯이 일하는 데도 정신을 집중하니 일에 열중하게 되고, 일을 열심히 빠지듯이 하니 능률은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학생 중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부를 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독서를 하는데 그렇게 하니 어찌 공부를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운동선수도 껌을 쩍쩍 씹으며 게임을 하는데 그런 선수는 유명한 선수, 뛰어난 스포츠맨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정신을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머리를 쓰는 사람일수록 반드시 집중해야 효과가 극대화 됩니다. 일하는 데 정신 집중은 묵조선이 더 효과적입니다.



여섯째, 질병을 고칩니다. 선 수행을 잘하여 마음이 고요해지고, 몸도 편안한 상태가 되어 오묘한 법열을 느끼는 경계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집니다.
이런 경계에서는 우선 몸은 맑고 가벼워집니다. 맑고 가벼워지면 기분은 저절로 좋아집니다. 또 육체 깊은 곳에서 묘한 즐거움까지 느끼면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좋은 기분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면 웬만큼 안 좋던 건강도 어느 사이 좋아지고, 오장육부의 기능이 원만해지고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촉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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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님의 댓글

김종진 작성일

큰스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