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법문

  >   무여스님   >   감로법문

감로법문

선(禪)이란 무엇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12-28 18:13 조회4,146회 댓글1건

본문


선(禪)이란 무엇인가


불기 2544년(2000) 음력 10월 1일 백일기도 입재일 법문




신도여러분! 오늘은 매년 년중행사로 열리는 100일 관음기도 입재일입니다. 동참하신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가득하여 여러분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매년 100일 기도를 하시고, 이 기도 외에도 매일 하시고 수시로 하실텐데, 기도가 잘 됩니까, 기도하는 공덕을 느끼고 있습니까?


기도가 잘 되고, 공덕을 느낀다는 것은 기도가피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 . . . . 지극하게 기도하므로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힘을 얻고 이익을 얻는 것을 가피를 입는다고 합니다.


가피에는 현훈가피(顯熏加被)와 명훈가피(冥熏加被)가 있습니다.


현훈가피란 기도를 하여 바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게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지극하게 매달리듯이 기도하여 소원하는 바를 바로 이루는 것을 현훈가피라 합니다.


명훈가피는 은근한 가피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느끼는 가피입니다.


잘 안되는 기도이지만 지극하게 애쓰다가 보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가 된다는 것은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이 되어 고요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요해지면 맑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이 맑고 가벼워지면 묘한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묘한 기분이란 즐겁다고도 할 수 있고, 기쁘다고도 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입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정도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니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니 자연히 잘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애쓰다가 보면 웬만한 일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렇게 은근하게 서서히 성취되는 것을 명훈가피라고 합니다.


기도자는 가피를 느낄 정도로 하셔야 합니다. 가피를 느끼지 못하는 기도자는 가피를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가 잘 되어서 가피를 느낄 정도면 여러분의 인생이 변하고 발전할 것입니다. 날로 나날이 좋아서 달로 해로 진보하고 발전해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100일 관음기도 입재를 잘 하셔서 올 한 해를 잘 마무리 하시고, 새해에는 더욱 알차고 보람있는 한 해가 되도록 애써 보시기 바랍니다.


위없이 높고 깊은 미묘한 법


오늘은 선(禪)에 대한 법문을 하겠습니다. 그간 기도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였으니 앞으로는 선에 관한 법문을 자주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 하십시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것, 즉 우리의 주인공을 흔히 마음, 마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마음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도 합니다. 유명한 육조혜능(六祖慧能 : 638-713) 스님께서는 남악회양(南嶽懷讓 : 677-744) 선사가 오니까, "무슨 물건이 왔는가?" 하였답니다. 회양 선사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다가 8년만에야 드디어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해서 육조 스님의 적자(嫡子)가 되셨습니다. 그것을 부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다만 부처일 따름입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소위 "이뭣꼬?"라는 화두인데, 이 "이뭣꼬?"를 하시는 분은 "이뭣꼬?"를, "무(無)"자 화두를 하시는 분은 무(無)자를,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하시는 분은 마삼근을 꼭 깨치시기 바랍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는 사람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희롱하며 사실 것이요, 못 깨치는 사람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스님이든 재가 신도이든, 인생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이 화두를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기의 화두를 깨쳐서 부처님과 같은 인격과 도덕을 갖추어 어떤 삶 보다도 참으로 보람있고 긍지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평생 공부하고 참구해야 할 불법은 아주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최상의 진리입니다. 이 이상이 없습니다.


천수경(千手經) 처음에 나오죠.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고요. 무상(無上), 위 없는, 위 없다는 것은 최상, 최고라는 뜻입니다. 심심(甚深), 깊고, 깊은 참으로 깊은 법이 불법입니다. 미묘법(微妙法),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체험으로만 알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법입니다. 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불법은 어떤 종교 보다도 심오하고, 어떤 철학 보다도 수승하고, 어떤 사상과도 비교가 안되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선(禪)과 교(敎)


이 불법으로 가는 길이 크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부처님의 교(敎)이고, 다른 한 길은 선(禪)입니다.


서산(西山) 대사의 말씀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부처님께서 35세에 성도(成道)하셔서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설하신 법문을 말합니다. 그 간절하고 노파심절(老婆心絶)한 말씀을 8만4천법문이라 합니다. 8만4천이란 수는 무량하다, 방대하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법문은 한량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방대하고 심오합니다.


이 방대한 일대교설(一代敎說)을 성질과 형식을 구분하여 열둘로 나눈 것을 12부 경전이라 합니다.


중요한 경전을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뒤에 최초로 설하신 경전이 화엄경(華嚴經)입니다. 21일간 설하셨다고 합니다. 내용은 성기사상(性記思想)과 법계연기법(法界緣起法)으로 불교철학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을 설하였으나 워낙 철학적이고 심오하여 신도들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청중들의 수준에 맞춰서 대기설법(對機說法)한 말씀이 아함부(阿含部)의 여러 경전입니다.


아함부의 경전은 주변 16국을 다니면서 12년 동안 설하신 것입니다.


'업(業)이란 무엇인가, 4성제(聖諦)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8정도(正道)는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12인연법(因緣法)은 어떻게 닦을 수 있는가.' 등 불교학의 기초가 되고, 불교의 기본 입장을 잘 정리한 말씀과 부처님의 체취가 가장 물씬하게 풍기는 언행록(言行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붓다를 이해하는데 좋은 경전입니다.


아함시 뒤에는 방등부(方等部)의 여러 경전을 8년간 설합니다. 유마경(維摩經), 승만경 등 대승경전을 설했습니다.


그 뒤에는 22년간 반야부(般若部)의 여러 경전을 설하셨습니다. 제부(諸部)의 반야경은 설한 기간도 가장 오래지만, 그 분량도 가장 방대합니다. 대반반야경(大槃般若經)은 무려 600권이나 됩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金剛經)도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그 이름처럼 반야부 경전의 요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반야부의 핵심사상은 공(空) 사상입니다.


다음으로 설한 것이 법화열반부(法華涅槃部)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전성기에 5년 동안 영축산(靈鷲山)에서 설한 것으로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불승법(一佛乘法)을 주장하고, 보살정신(菩薩精神)을 일깨워 불제자로서 무한한 신심과 발심을 일으키게 하는 경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설하신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설한 말씀으로 불성론(佛性論)이라는 인간의 근본을 꿰뚫는 획기적인 말씀과 인생은 무상하니 열심히 정진하고, 정법을 보호하고 지키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경전이 있습니다.


세속의 책은 세 번 읽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경(佛經)은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매료되고 빠져듭니다. 어떤 경전이나 조사 스님의 어록(語錄)은 매일 읽어도 날로 나날이 새로운 느낌이 납니다. 그만큼 심오한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삼처전심(三處傳心)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45년간 그렇게 대단한 성스러운 말씀이라고 하는 진리의 말씀을 해놓으시고도 열반경에 보면 "나는 일찌기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노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구정녕하게 노파심절(老婆心絶)한 말씀을 해놓으시고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노라."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참으로 하고 싶은 말씀, 참으로 해야 할 말씀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것은 부처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근본 진리는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 작용이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도리는 아무리 명문장가라도 표현할 수 없고, 폭포수 같은 언설을 하는 명웅변가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법문다운 법문을 세 곳에서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입니다.


첫째,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보이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축산(靈鷲山)에서 수많은 대중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고자 할 때, 대범천왕(大梵天王)이 금발라화(金鉢羅花)를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 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아무도 그 뜻을 모르는데 상수제자(上首弟子)인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에 세존(世尊)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는데 이것을 가섭에게 부촉(付囑)하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둘째는,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의 반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圍國) 급고독원정사(給孤獨園精舍)에 계실 때입니다. 어느 날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앉아 설법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가섭이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머리는 덥수룩이 헝클어지고 의복은 헤어지고 때가 묻어서 흡사 거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중 가운데 아무도 모르는데 세존께서 알아보시고 앉았던 자리의 반 쪽을 비껴주며 앉으라고 하였습니다.


대중은 모두 이상히 여겼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나의 반자리에 앉은 비구는 마하가섭이니 그간 두타행을 하면서 도가 확충되었으므로 이와 같이 특대하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셋째는,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두 다리를 관 밖으로 내보이신 것입니다.


가섭 존자가 영축산에 있다가 세존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만에 당도하였습니다. 세존의 시체를 모셔놓은 관 앞에 나아가 우로 세 바퀴를 돌고, 절을 하였더니 두 다리를 관밖으로 내밀어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것은 그렇게밖에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침 밖에 문자를 쓰지 않고 별도로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법문다운 법문입니다.


이런 법문도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재물의 산성을 쌓고, 권세가 충천하고, 명예가 온 세상에 가득하더라도 반쪽 인생도 못된다고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근본 진리를 깨치는데 선(禪)이 가장 수승합니다.



선의 개념


여러분, 선이란 말 많이 들었지요? 선, 선이 좋다 하는데 선이 무엇이고, 왜 좋다고 하겠습니까?


선은 옛 인도말인 '산스크리트'어의 드야나(dhyana)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드야나'는 생각한다, 바르게 생각한다, 생각해서 닦는다는 뜻입니다. 즉 고요히 생각해서 마음을 닦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와 같은 말입니다.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닦는다고 할 때 어떤 물건을 닦듯이 닦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탁하고 더러워진 것을 마음이 흐리다, 어둡다고 합니다. 이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을 마음을 닦는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장마철의 하늘과 같고, 밤중과 같다고 합니다. 장마철에 먹구름으로 잔뜩 흐려 해를 볼 수 없는 하늘과 같고, 밤중과 같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중생계는 암흑(暗黑)의 세계라고 합니다.


중생을 말할 때, 미망중생(迷妄衆生), 미혹(迷惑)한 중생이라 합니다. 중생은 어둡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무엇에도 홀리고, 사소한 것에도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 운운 하며 큰소리 치지만, 광명(光明)의 세계인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면 캄캄한 밤중과 같이 봉사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통 인간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같은 분이 보실 때는 가엽게 불쌍하게 안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을 안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선의 개념(槪念)이 인도선과 중국선이 다릅니다.


인도선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각한다, 생각해서 닦는다는 범위를 말하지만, 중국의 선은 더 심오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성품을 보는 것은 자기의 주인공, 참 자기 즉 참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참나가 아닙니다. 이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우리 몸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자동차를 움직는 운전수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인공입니다.


그 참나, 참 주인공을 바로 보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선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참나, 주인공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보는 것을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부처라고 합니다. 본래 부처라는 말은 본 바탕은 즉 주인공 또는 참나는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본바탕, 나의 주인공 즉 참나를 보는 것을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마음을 깨친다고 하는데,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알게되니 깨친다고 합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듯이, 마음이 어두워서 분간을 못하다가 갑자기 환해져서 자기의 주인공을 발견하니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참나는 모양이나 색깔이 없으니 말로 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서산(西山) 대사께서는,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한 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인공, 참나를 부득이 한 물건이라고 하였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아요. 그것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생(生)하는 것도 아니고, 멸(滅)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사 없는 도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양을 그릴 수도 없고, 그러니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쉬면 곧 깨닫는다


선이 좋다 좋다 하는데, 왜 좋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의 주인공을 찾아서 참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바로 아는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자기를 완성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속인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중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아무리 중한 것이라도 나의 목숨과 바꾸라고 하면 펄쩍 뛰고 원수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것이 나입니다. 그 참나를 찾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도 본래는 부처라고 하였는데, 즉 본 바탕은, 근본당처는 부처님과 같다고 하였는데 왜 부처님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번뇌와 망상 때문입니다. 살아가노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잡다한 생각을 일으키고, 갖가지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괴롭고 불안하여 마음이 흐려있고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참나를 볼 수 없고, 본래면목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잔뜩 흐린 먹구름 때문에 해를 볼 수 없듯이, 캄캄한 밤에 해를 볼 수 없듯이, 마음이 흐리고 어둡기 때문에 자기의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태풍이 심하게 불면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어나서 바닷물이 흐려져서 바닷속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다 태풍이 지나가고 바다가 잔잔해지면 바닷물이 명경알처럼 맑아지면 수십 미터 아래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도 물결이 치듯 온갖 망상이 들끓어서 불안하고 어지럽고 괴로우면 마음이 흐려지고 어두워져서 본래면목은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체의 번뇌망상과 근심걱정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져서 나의 근본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참선자는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하였습니다. 쉬라는 것은 번뇌망상을 쉬고, 쉬고, 또 쉬고, 그것도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쉬면 곧 깨닫는다."고 하였습니다. 쉬고 쉬어서 망상과 집착이 사라지면 자기 참모습이 저절로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쉴 수 없으니 부득이 화두라는 방편을 써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기의 본성을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 간화선입니다.


간화선(看話禪)의 위치


선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면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있습니다.


묵조선은 일체의 사량(思量)과 분별을 끊고, 고요하게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닦는 것을 묵조선이라 합니다. 간화선 이전에는 주로 묵조선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조동종(曹洞宗)의 수행방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화선은 볼 간(看)자, 화두의 화(話)자, 화두를 보는 선입니다. 화두를 본다는 것은,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것입니다. 화두 참구법은 지금까지 인간이 개발한 가장 확실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話頭)란 참선자가 참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조사 스님이 말씀하신 법문이나, 종사(宗師) 스님이 깨달으신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가르치던 행위의 종요(宗要)를 모아 참선자에게 규범이나 과제로 준 것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옛 사람이 만든 규범, 즉 법칙이라 해서 고칙(古則)이라 하고, 공부(公府), 즉 관공서의 안독(案犢), 법령과 같이 준엄한 것이라 해서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화두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학인 스님이 유명한 조주(趙州) 스님께 물었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란 달마(達摩) 대사입니다. 달마 대사가 서쪽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뜰 앞에 잣나무니라."


했습니다. 뜰 앞에 잣나무가 한 그루 있었던가 봅니다. 그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뜰 앞의 잣나무"라 하신 것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니라."하신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대답입니다.


옛날에 동산 수초(洞山守初)라는 큰 스님께 한 어린 스님이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하니, 그 때가 여름이라 삼을 만지고 계시다가, 그 삼을 보이면서 "삼 서근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답을 공부의 과제로 준 것이 화두입니다.


이런 깊은 법문은 일반적인 사리에 따르고 논리에 맞는 대화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고나 논리를 거부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이치나 생각으로는 알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으며, 어떤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지식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사 스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며, 삼세(三世) 여러 부처님들의 지견(知見)이 드러나고,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의 안목(眼目)이 나타난 법문 중의 법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범상한 생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하고 대단한 법문을 문제로 주어, 깨치게 하여, 자기의 주인공을 찾아 스스로 부처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화두는 뗏목이나 보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 큰 강이 흐른다고 합시다. 강의 폭도 넓고, 물도 깊고, 물살이 센 강이라 수영을 특별히 잘 하는 사람도 겨우 건널 수 있는 강입니다. 그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는데 수영해서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보트나 뗏목과 같은 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댓글목록

김종진님의 댓글

김종진 작성일

큰스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