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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회(서울)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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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05-12-28 18:09 조회4,12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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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이 산중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여러분, 고생은 하셨지만 복은 많은 분들이라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 이 좋은 계절에 이런 명산을 찾은 것도 복된 일이고, 더 좋은 것은 불교 신도가 됐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예사로운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책을 보고, 수선회 이름처럼 수행도 많이 하셔서 아시겠지만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무상(無上) 위없는, 심심(甚深) 깊고 깊은, 아주 미묘한 법이 불법입니다. 이런 불법을 만났다는 것만 해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류가 태어난 이후로 가장 심각하고 가장 위대한 법이 바로 불법이다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서양에서 발행되는 어떤 종교 잡지를 보니까 미국의 젊은 기독교 신도회 한 50%가 성경을 불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65%가 예수님의 재림을 불신하고 있고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기독교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관혼상제를 보통 유교식으로 많이 하잖아요. 그런 관혼상제 같은 그런 것은 주로 기독교식으로 하지만 종교로서 믿는 분들은 상당수가 줄어들었답니다. 얼마 전에 한 한 달쯤 됐을까 조선일보를 읽었었는데 독일에서는 사제들의 회합이 갑자기 있었는데, 왜냐하면 지난 상반기 동안 신도가 약 30만 가량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왜 줄었느냐? 거, 비상이 걸렸다는 겁니다. 그 결론이 뭐냐. '시대적인 흐름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합니다. 즉 기독교 시대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결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들에게 호응 받고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답니다.


영국의 예로, 한때 국교였다는 할 수 있는 성공회 신도보다도 우리 불교 신도가 많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서양에서도 불교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답니다. 왜 그러냐? 서양사람들 체질에 맞는다 그래요. 불교는 과학적이랄 수도 있고 철학적이랄 수도 있습니다. 수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서양의 종교학자는 불교가 종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불교는 종교이면서도 과학이고 과학적이면서도 수학적이고 수학이면서도 철학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를, 인류를 미래지향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종교는 반드시 불교가 되어야 지구의 장래가, 인류의 장래가 밝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이 좋은 법이라면 법, 진리라면 진리, 종교라면 종교를 믿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럽고 복이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왜냐. 여기도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이기 때문에, 더구나 수선회라 이름이 좋습니다. 선(禪)은 부처님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선이래요. 부처님에게 가는 길이란 자기 완성의 길, 자기 개발의 길, 즉 요새 자기를 개발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불교에서 파생이 된 그런 방법들이 많아요.


여러분들이 대부분 화두선(話頭禪) 하지요? 화두선에 비하면, 화두선이 한 대학생쯤 되면 유치원이나 초등학생쯤 되는 그런 수행법이 많아요. 그 화두선도 나름대로 익히시고 훗날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아주 어리게 느껴지는 그런 경우를 아마 느끼실 겁니다. 느끼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선을 한다는 것은 더 더구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4개월쯤 전에 어떤 스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래 저는 늦게 소식을 알고, 산중이라 한 사흘만에 당도했더니 아직도 입관을 안 했습니다. 안하고 저 오기를 기다린 거예요. 그래 시체를 보니까 돌아가신 분이 빙긋이 웃고 있어요. 돌아가신 분이 웃고 있어요. 보통 돌아갔을 때는 마지막으로 땀이 납니다. 그땐 참 최고의 발악을 하다가 땀을 흘리거든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이그러지고 혀를 깨물고 온갖 몸부림을 치는데 그 모습은 처참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빙긋이 웃고 있는 겁니다. 시체 같지 않아요. 그래 한참 들여다봤죠. 그 몸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어요. 일부 색깔이 조금 변하긴 변해도 아주 포동포동한 것 같아요. 연세가 상당히 높은데도. 아 정진한 힘이, 수행한 힘이 이렇게 크구나하는 것이 느껴진 그런 스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참선하신 분입니다. 오래 동안 참 나름대로 애쓰신 분입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고 토굴에서 토굴로 생활하신 분인데 어쨌든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애쓰시다 가신 분입니다.


사람이 큰 일이라고 하면 생사(生死)가 가장 큰 일입니다. 결혼도하고, 아기도 낳고, 살림도 하고, 사업가로서 아니면 여러 가지 직업상 성공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런 성공도 큰 일이겠지만 자신에게 가장 큰 일은 출생과 사망일 겁니다. 그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가장 첩경이 선(禪)입니다.


천주교 같은 곳에서 선 비슷한 걸 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불교가 대학원생이라면 국민학교 수준도 안돼요. 그런가 하면 기독교 같은 곳에서도 기도를 많이 하는데 기독교적인 기도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로 말하면 수원 가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는 잘만 하면, 보통 해도 대전은 갈 거예요, 잘하면 대구, 부산 갑니다. 참선은 비행기 타고 바로 가요. 가장 빠르고 어떻게 보면 쉬울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선이고, 선으로 인생의 보람과 긍지를 못 느끼면 사실은 살아도 헛살아요. 진정한 행복을 못 느껴요.


흔히 행복이란 말을 많이 쓰잖아요? 돈을 번다든가, 애기를 갖는다든가, 남편과의 사이가 좋다든가, 살림하다 보면 이런 저런 행복스런 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행복이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거. 예를 들어서 어제 저녁에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했다고 하면 마이크로 잡고 엉덩이춤을 추면서 노래할 때는 아주 기분이 좋죠.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쓰러져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속이 쓰리고 몸이 찌푸둥하고 괴롭습니다. 그게 그래요. 저녁에 그렇게 신나게 잘 놀았다가도 아침에 일어나면 그렇게 괴로워요.


그렇게 세속의 보통의 행복은, 낙(樂)은 반드시 뒤에 고(苦)가 따라요. 진리에서 느끼는 그 낙, 재미 그 최상급이 바로 극락인데 거기에서 느끼는 재미, 기분은 절대 고가 따르지 않아요. 한번 느끼면 두고두고 잊지를 못해요. 그래 극락은 여러분은 마음속에 있어요. 분명히 정진 속에 있습니다. 화두 속에 있어요. 그 극락을 참으로 맛보면 여러분들을 절에 오지 말라 아무리 밀어 내도 안 올 수가 없어요. 왜냐, 그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묘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글쎄, 옛날의 어떤 스님은 깨치고 나서 사흘을 춤췄다고 합니다.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 같지요. 그래 미쳤다고 하니까 '자네는 모를 걸세' 하면서 춤을 추더라는 겁니다. 그런 진정한 낙(樂), 진정한 행복은 진리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도(道)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도(道)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바로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禪)중에서도 가장 최상승(最上承)의 선이 뭐냐? 바로 화두선(話頭禪)입니다. 가장 선진화된 선이 바로 화두선이예요. 그런데 화두선이 처음에는 조금 어려워요. 그러나 득력(得力)을 하면, 궤도에 오르면, 탄탄대로에 차가 바로 질주하듯이 참 순탄하게 의외로 쉽게 되는 것이 바로 화두선입니다.


요즘 선하는 사람들이 이런 선(禪), 저런 선(禪) 많은 선을 하는데 심지어는 비파사나(Vipasyana)도 하시는 분이 많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비파사나를 지도할 수 있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어요. 선 수행은 아무나 지도 못해요. 지도할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을 책임질 정도가 되어야 돼요.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생동안 그야말로 안내할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면 책임을 못 져요.


비파사나가 유행되기는 최근의 일입니다. (남방에) 가서 몇 년간 수행한 분도 별로 없을 거예요. 몇 년간 수행해서 남의 팔자를 고쳐준다? 천만에요. 절대 고칠 수 없어요. 선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팔자를 고친다는 겁니다. 흔히 팔자 고친다는 말을 하는데 참선을 해서 참으로 고치는 게 아니면 팔자는 못 고쳐요. 그 사람의 업에 따라서 시나리오, 각본이 짜여져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몇 살에 결혼하고, 몇 살에 아이를 낳고, 다 사실은 각본이 짜이듯이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각본을 완전히 헤쳐서 새로 짤 수 있는 것은 불교적이 수행뿐입니다. 제 팔자까지도 고칠 수 있는 것이 불교적이 수행입니다.


그 수행법 중에서 최상법이 화두선입니다. 여러분 책 많이 보셨죠? 중국 어록(語錄)들 보면 대단한 스님들이 많아요.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했어요. 육신통을 마음대로 부린 그런 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 것은 참선을 지극히 제대로 했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자재하기도하고 생사까지도 해탈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하면 애쓰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선(禪)입니다. 선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또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선입니다. 쉽게 되는 분은 '여반장(如反掌)'이라고 해요. '손바닥 뒤집는 것 같다'고. 그런가 하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라는 것입니다. 세수하다가 보면 코가 당연히 손에 닿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도 쉬운 것이 바로 선이라는 거래요.


그러면 화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할 수 있느냐. 사실 왕도(王道)는 없어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가만히 있자. 여기에 화두를 다들 하지요? 주로 무슨 화두를 하십니까? '시심마?' 예, 또요? 예, 보통 '이뭐꼬' 많이 하지요? 우선은 하는 방법이 확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법문을 많이 들으실 겁니다. 신문에도 보니까 어떤 스님을 모시고, 전국에 큰스님을 여러분 앞에 다 선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하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갖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세나 사상이 확립이 되어야 해요. 그 자세가 뭐냐? 부처님으로 가는 부처님과 닮은 자세를. 그래서 경전을 읽되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자상하게 보세요. 자상하게 보셔서 부처님을 닮으려고 무한히 애를 쓰세요, 부처님을 닮으려고.


선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 한 방법입니다. 완성은 내면만이 완성이 아닙니다. 내면도 완성해야 되지만 외형적으로도 완성이 되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아주 거룩하고 훌륭해요. 그 모습을 자상하게 닮으세요. 그런가 하면 내면적으로는 하나 하나 좀 갖추어 나가세요. 그 갖추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인데, 근데 여러분은 법문을 너무 많이 들을 것입니다. 책을 또 많이 보시고요. 법문 많이 듣는 거 참 좋은 일일수도 있지요. 그런데 참선하는 분한테는 법문이 그렇게 많이 필요치 않아요. 참선은 기본 방법만 알면 가급적이면 법문을 듣는다던가, 사실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굳이 알 필요성이 없는 것이 화두 참구(參究)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뭐 물론 이해하고 지식도 있어야 돼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증득(證得)하는 겁니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빠삭해도 체험만 못해요. 체험을 해야 불교가 뭐다, 선이 뭐다, 참으로 부처님의 진수가 뭐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통 요새 사람들 책자가 많이 나오니까 책을 많이 읽는데 어느 정도 지식도 축적이 되어야 합니다. 즉 선이 뭔지 기본적인 것은 좀 갖추어야 돼요. 갖추고 난 연후에는 많이 갖출 필요 없어요. 많이 갖추지 마시고 시간만 있으시면 됩니다. 가급적이면 법문 같은 건 조금 멀리하시고, 어쨌든 참구 자체를 많이 하세요. 즉 많이 앉아요. 화두를 많이 들어요. 책을 아무리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달달 외워도 결국은 부처님 말씀이고 조사 말씀이래요. 말씀 가지고 그 깊은 그런 내용을 알 수 있느냐? 절대 몰라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좀 많이 앉으시라. 그리고 많이 화두를 드시라. 이 화두 안 들고는 선의 깊은 맛을 알 수 없거니와 절대 깨칠 수가 없어요. 아주 대근(大根)은 뭐 바로 느낄 수도 있는 분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분은 극히 드물어요. 어쨌든 가급적이면 많이 앉아야 돼요. 화두를 좀 지독하게 드세요.


그래서 화두 하는 사람은 조금 무식한 것이 좋다는 겁니다. 왜냐? 많이 아는 분들은 잘 요것 조것 잘 따지고 가려요. 그것으로 또 만족하고. 심지어 요새 나오는 책자들 중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쓴 책자 중에서 화두를 풀이해놓은 분들이 있어요. 화두를 풀이하는 것은 완전히 그 사람을 망치는 거래요. 화두를 풀이해 가지고 화두를 이해하는 게 아니래요. 화두는 바로 느끼는 거래요. 서울에 남대문이 있으면 남대문은 어디에 있으며, 모양은 어떻고, 남대문에 대해서 자상하게 해석을 해 놓은 해설서를 읽는 게 아니래요. 남대문을 바로 보는 거래요. 아무리 좋은 해설서를 읽는다고 해도, 요즘 같으면 뭐 텔레비전이 있어서 안 가봐도 알겠지만, 옛날 같을 땐 남대문을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남대문을 척 가서 보면 '아!' 하고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식 무식이 필요치가 않아요. 아무리 무식해도 보면 '아, 좋구나, 아 참 높구나!' 대번에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남대문을 보듯이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이 화두입니다. 그러려면 본인이 부단히 참구를 해야 됩니다. 화두를 들어 나가야 됩니다.


그래 요새 흔히 지식이 폭발하는 그런 시대라, 지식으로 자기만족을 취하는 분들이 있는데, 화두하시는 분은 어쨌든 지식을 좀 멀리 해야 됩니다. 알음알이도 좀 멀리 해야 됩니다. 멀리 할수록 화두는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참으로 실참실구(實參實究)해서 바로 느낄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애를 쓰십시요. 시내 분들 중에서 특히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이 있는데, 책은 좋으면서도 화두하는 분한테는 사실 별로 좋지 않아요. 가급적이면 책을 멀리 해야 돼요.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한다 합니다. 문자를 세우지 말자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기 [박카스]가 있다고 합시다. 경전은 뭐냐? 경전은 [박카스]에 대한 자상한 해설서가 경전이 돼요. 그 해설서를 아무리 봐도 [박카스]맛은 모릅니다. 그냥 마셔봐야 돼요. 마셔보면 '아, 이것이로구나!' 바로 느낄 수 있어요. 그 해설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운다고 해서 갈증이 해소되고 기분이 나느냐? 아무리 외워도 외울수록 갈증은 더해요. 그것이 지식이고 그것이 책이래요. 그것하고 상반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 하는 분들은, 옛날 스님들은 아예 어린 스님한테 가르치질 않았어요. 일자무식(一字無識)인 상태에서 바로 화두를 주었는 거라. 왜냐? 많이 알면 망상을 많이 피운다고요.


망상 많이 떠오르잖아요. 앉으면 왜 그렇게 망상이 떠오르는지. 이런 망상 저런 망상 별 망상이 다 떠올라와요. 아는 분일수록 망상을 더 많이 피워요. 우리 스님들 중에서 정규 대학을 졸업하시고 들어오신 분들도 많거든요. 한때는 어떤 스님은 대학출신을 안 받았어요. 왜냐? 망상 많이 피운다고. 참선 안 된다고. 그 유명한 효봉스님이 그러십디다. "내가 대학만 안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무척 후회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분이 참 애쓰신 분이거든요. 절구통 수좌라고요. 앉으면 한 6시간 이상은 계속해서 앉았답니다. 꼼짝 않는 거지요.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하셨지만 애쓰고 지독하게 노력한 만큼 그렇게 쉽게 깨치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왜냐, 너무 많이 배웠다는 거래요. 좀 늦게 출가 하셨고요. 당신 말씀으로 그럽디다.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 잘 아시겠지만 "이뭐꼬?"할 때, 그냥 "이뭐꼬, 이뭐꼬, 이뭐꼬." 하지 마세요. 화두의 생명은 의심이래요. 의심을 일으켜야 되요. "이- 뭐꼬?" '이뭐꼬'란 '이것이 무얼까?'라는 준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란 뭐냐? 바로 화두(話頭)라. 화(話)란 말씀 화자, 두(頭)자는 머리 두자입니다. 말씀 이전에, '이-' 이전을 말해요. "이뭐꼬?" '이' 하기 이전을 화두라고 해요. 아시겠어요? 그래 '이-'할 때는 '이'를 좀 빼요. 길게 좀 빼요. '이-' 하면서 '이'하는 그놈을 의식을 해요. 고놈이 뭐냔 말이래요. 그냥 "이뭐꼬, 이뭐꼬?" 하지 마시고요. 그걸 하되 아주 지극하게 해요.


그런데, 화두 이 자체를 제대로 들어야됩니다. 예를 들어서 "무(無)"자 같으면 "어째서 [무]라고 했느냐?" 무(無)자니까, 없다는 뜻이니까, 없다라고 번역해 가지고, 해석해서 그래 드는 분도 있습니다. 해석을 하지 마십시오. 그냥 "무(無)" 그대로 들어요. 그것은, [무]에는 없다라는 말을 붙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무엇이 있어요. [무] 그대로 들어요.


그 유명한 조주 스님이 80까지 행각(行脚)을 했답니다. 걸망을 지고 이 절 저 절 다니다가 81살에 [조주관음원]이라고 그곳에서 정착을 했습니다.


92살 땐데, 하루는 추운 겨울인데, 따뜻한 양지쪽에 앉아 계시니까, 그때 그 절에 조그마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웠던가 봐요. 노스님이 양지쪽에 앉아 계시니까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앞에서 막 재롱을 피우는 거예요. 노스님이 와 계시니까 젊은 수좌가 와서 문득 묻습니다. "저 개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습니까?" 묻는 거예요. 아,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다 했어요. 일체중생이,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성품입니다. 일체중생이란,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큰 동물에서부터 저 땅속에 있는 지렁이 같은 미물까지 다 포함해서 일체중생이라고 합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생(皆有佛性)이라 했는데 개라면 고등동물 중에 고등동물이잖아요? 가장 그 참 머리가 많이 터진 놈이 바로 개인데, 개가 불성이 있느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래요. 그런데 조주 스님께서는 무슨 뜻인지 "무(無)라!" 했거든요. 화두를 참구할 때는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읍니까?" "무(無)라, 어째서 무라했을까, 어째서 무라했을까?" 처음에는 의심이 좀 납니다. 한 두서너 번을 하고 나면 의심이 안 날거예요. 그러면 또 처음부터 계속 하는 겁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라,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한 세 번쯤하고 나면 또 의심이 좀 적게 나요. 그러면 처음부터 또 반복을 하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아주 지극하게.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우침이 커요, 의심이 크면 클수록. 어쨌든 그 의심덩어리를 아주 크게 하세요. 의심덩어리가 몸 전체에 꽉 찰 정도로 이 온 우주가 나와 한 덩어리가 될 정도로 그렇게 되어야 크게 깨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두는 우선 드는 것이 중요하고요. 들 때 제대로 들어야 됩니다. 아까 "이뭐꼬?"같은. 그러면 또 "무(無)자"같은 그런 화두를 들 때 제대로 들으세요. 들되, 첫째는 화두에 대해서 꼭 믿음이 있어야 되요.


화두를 완전이 믿어야 됩니다. 부처님도 믿고 불법도 믿고 화두 자체도 100% 믿어야 돼요. 이 화두를 조금이라도 의심을 한다든가, 믿음이 약하면 깨우치질 못해요. 화두가 참으로 들리지를 못합니다. 필름 현상하는데 빛이 조금만 들어가면 사진이 잘 안나오잖아요? 그것처럼 화두도 그래요. 화두를 완전히 믿어야 되요. 100% 믿어야 되요. 그 믿음은 비유를 하면, 큰 63빌딩 같은 빌딩을 짓는데 기초작업과 같아요. 그래서 [화엄경]에도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다' 했습니다. 모든 공덕은 믿음에서 출발해요. '불법의 대해를 건너려면 믿음이 참으로 견고해야 된다' 그런 말씀도 있고요.


화두하는 분은 어느 정도 믿어야 되느냐? 가사, 해를 차게 하고 - 해를 어떻게 차게 할 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하지. - 해를 차게 하고 달을 따뜻하게 한다 하더라도 믿으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철저히 믿어야 돼요. 화두는 완전하게 믿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여러분은 벌써 화두한지 오래 됐겠지만, 혹 주변에 화두할 뜻이 있는 분이 있거든 선지식한테 화두를 간택을 하세요. 스스로 임의로 책을 본다든가 주변의 이야기만 듣고, 어떤 법문을 듣고 화두를 간택하지 말고 어떤 큰스님한테 화두를 반드시 간택하라고 해요.


화두는 그 분한테 적당한 화두여야 돼요. 그래야 믿음이 가고, 그래야 참으로 간절한 마음이 생겨요. 어쨌든 철저하게 믿어야 되요. 믿지 못하면 화두하곤 거리가 멀어요. 그런 분은 화두를 해도 망상만 떠오른다든가, 화두가 참으로 힘을 얻기는 어려워요. 아주 지극하게 믿어야 돼요. 완전히, 100%, 콩을 팥이라 해도 믿어야 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런 굳건한 믿음만 있으면, 즉 바탕만 그렇게 튼튼하면 화두하는 것은 의외로 쉬워요.


그렇게 철저히 믿고. 둘째는 화두를 간절하게 드세요, 간절하게. 그냥 예사롭게 들지 말아요. 한 번 한 번을 아주 지극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래서 화두하는 분들은 항시 이마에 간절 절(切)자를 붙이고 다니라 합니다. 아주 간절하게 하세요.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하게 하라는 겁니다.


어떤 스님이, 어떤 낭떠러지에서, 길 가다가 아주 간절하게 화두를 들었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냥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참 내려가더니 내려가는 걸 조금 느꼈다는 겁니다. 떨어지는데 별로 아프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 깜깜한 밤인데 가만히 보니 상당히 높은 언덕이래요.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한 15미터 가량 되는 언덕에 떨어졌는데 조금도 상처가 없더라는 겁니다. 즉, 참으로 그렇게 간절면 선신(善神)이 옹호한다 합니다. 즉, 그럴 정도로 간절하게 들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하는 사람이 간절하면 바로 득력을 해요. 바로 힘을 얻어요. 아주 간절하게 들으세요. 그런가 하면 성심 성의껏 들으세요.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들듯이 아주 지극하게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요. 그냥 예사롭게 들지 말세요. 한 번을 들더라도 최선을 다하듯이 들으세요. 그래야만 참으로 화두가 돼요. 보통은 그냥 형식적으로 흉내를 내듯이, 남들이 하니까, 좋다고 하니까 보통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화두 공부는 사실은 잘 안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극하게 간절하게 하면서 성심 성의껏, 어떤 화가나 조각가가 작품 하나 하나 만들듯 그 작품 만들듯이 화두를 만들어 나가세요. 그러면 이내 의외로 쉽게 되요.


그런가 하면 화두하는 분은 좀 끈질겨야 해요. 좀 고집스러워야 해요. 끊임없이 해야 돼요.


텔레비전 보니까 어떤 권투하는데 어떤 분은 이런 분이 있데요. 링 위에 올라가서 종이 울리자마자 그냥 계속 파고드는 그런 선수가 있어요. 그런 선수는 처음에는 상대가 실력이 좀 월등해서 잘 요리조리 피하고 게임을 잘 운영하다가 그런 선수한테는, 계속 파고드는 선수한테는 결국은 지고 말데요. 그런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아주 지독한 분이 있어요. 아무리 맞아도 계속 들어가는 겁니다. 심지어 그로기 상태가 되면 쓰러질듯 하다가는 또 일어나서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그런 선수한테는 상대선수가 질려버린다는 거예요. 결국은 그런 선수가 이기게 되는데, 화두하는 분은 그런 지독한 아주 고집스러운 권투선수 비슷하게 해야 합니다. 안되면 또 하고, 안되면 또 하고. 즉 한 번해서 안되면 열 번하는 거지요. 열 번해서 안되면 백 번 도전하는 겁니다. 백 번 도전해서 안되면 천 번, 만 번 하는 겁니다. 될 때까지 계속 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처사님들이나 보살님들한테는 그게 좀 어려울 거래요. 그래서 그 양사언의 시(詩) 있죠? 태산이 높다하되 태산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건만. 오르고, 올라가다가 안되면 또 올라가고, 안되면 또 도전하고, 안되면 또 시도하는 거래요. 끈질기게 아주 고집스럽게 한마디로 지독해야 돼요. 독종이어야 돼요. 그런 분은 의외로 쉽게 되요. 물렁하게 정신상태도 흐리고 하는 자세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평생 해도 사실은 제대로 되기 어려워요. 그러나 제정신 바짝 차리고, 그런 좀 지독한 생각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면 아주 의외로 쉬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끈질기게 아주 고집스럽게 도전해야 돼요. 도전할 때는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공부하실 때는 집에서 나름대로 보통 하시기도 해야겠지만, 간혹 이렇게 일요일날이나 또 집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좀 많이 가지세요. 그럴 때는 아주 몰록 하는 거라. 그럴 때는 참 고집 좀 피워요. 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연 생각도 말고 오직 화두에 몰록 빠지는 겁니다. 그러다가 집에 가서 또 열심히 좀 하시고요. 어쨌든 좀 지혜롭게 하셔야 될 거예요. 지혜롭게 하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상당히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여기 젊은 스님들 중에서, 김천에 수도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그 뒤에 [정각]이라는 토굴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섯 분이 삼 년 간 나오지 않고 용맹정진한답니다. 삼 년 간 참 대단한 일이죠. 그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백제 마지막 장군 계백 장군 있죠?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 마지막 신라하고 일전을 하려고 나갈 때 자기 가족을 다 손수 죽이고 나갑니다. 그 자기 가족을 죽일 때 심정은 어땠겠어요? 오직 승리뿐일 겁니다. 그래서 나가서 최후의 일전을 하고는 그렇게 거룩하게 가시는데. 화두하시는 분은 그 비슷한 비장한 심정으로 할 때는 그냥 예사로운 그런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그 뭐 예사롭게 해도 좀 마음도 편해지고 건강도 좀 좋아질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범부의 경계를 넘기가 어려워요. 할 때는 좀 되게(강하게) 해야 돼. 좀 화끈하게 해야 돼요. 좀 지독하게 철저히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되기 어려워요. 특히 여러분들은 할 때는 아주 되게 하세요. 그래야만 항시 스님들처럼 그렇게 못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상당한 이득이 있고 의외로 쉽게 체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좀 끈질기게 해야 되고요.


그리고 또 대분심(大忿心)을 좀 가지세요. 큰 분심을요. 화두하다가 보면 별 망상이 다 떠오르잖아요? 그 망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왜 그렇게 망상이 떠오르는지. 다른 분한테 물어보면 다른 분도 좀 비슷하다고 하긴 하지요. 어쨌든 망상이 많이 떠오릅니다. 망상만 떠오르느냐. 화두가 안되거든. 몸은 아프지, 망상은 떠오르지, 졸음은 오지. 어떨 땐 참, 스스로가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그릇이 작은가!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가! 아,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깨쳤는지.' 별별 생각이 다 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큰 분심(忿心)을 좀 내세요, 분한 마음. 화두는 누구나 되게 되어 있어요. 왜냐? 여러분도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 견성(見性)하고 나서 납월 팔일날 저 동쪽 하늘에서 유난히 반짝거리는, 요즘으로 말하면 금성일겁니다. 큰 별을 보고는 깨쳤는데요. 깨친 순간 하신 말씀이 '아! 희한하구나.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었네.'했어요.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도 갖추고 덕성도 갖췄다는 겁니다. 즉 본래 부처라는 것이지요. 본래 누구나 다 부처였다. 즉 바탕 자체는 부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랜 삶을 살면서 못나고 어리석은 짓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단지 업장이 두터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그것을 항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감을 가지세요.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하면 돼요. 단지 안 할 따름이지. 장부만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바로 장부라. 하면 누구나 되게 되어 있어요. 하는 방법이 좀 잘못되고 애쓰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어째든 지극하게 하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그 분이 요즘 세속에서 좋다는 서울대학을 나온 분인데, 대학 다니다가 조계사에서 어떤 법문을 들었답니다. 법문을 듣고는 불교 서적을 보니까 아, 거 좋더라내요. 그 당장 그분도 욕심도 많고 명예심도 강하신 분이어요. 법관보다는 부처님 되는 것이 훨씬 낫겠더라내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는 2학년 때까지라던가 사법시험 준비를 하다가 3학년 때부터는 철학에, 종교에 빠졌답니다. 그러다가 4학년 졸업하자마자 바로 스님이 되었지요.


스님 되기 직전에 한 철만 하면 될 것 같더랍니다. 한 철만. 한 철 해가지고 안되면 이제 또 사법시험 준비한다는 생각을 하고요 들어왔던 겁니다. 들어와서 해인사에 왔는데 선방에 바로 들어오려고 하는 거래요. 행자생활도 안 하고 수계도 안 했는데 선방에 되나요? 그래서 아주 젊은 스님이, 그 스님도 사람을 볼 줄 알았던가 봐요, 기를 꺾어 줄려고 대판 욕을 해 버렸던 겁니다. 아, 그래 그 스님이 기분이 되게 안 좋은 거였습니다. 그래 자존심에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수는 없고, 저 어디 가서 행자 생활을 했는데, 마침 거기 큰스님도 사람을 볼 줄 아는 분이라 - 고집도 세고 너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그런가하면 아는 체를 많이 하고요. 머리는 참 좋은 사람이라서 일을 실컷 시켰답니다. 한 3개월 실컷 시켰더니 못하겠다고 내려가겠다고 하더랍니다. '갈려면 아무 데 가거라.' 하면서 아는 스님한테 보냈던 겁니다. 그 스님한테 보내면서 이러이러한 그런 학생이니까 좀 골탕을 실컷 먹이라고 전화로 미리 연락을 해 놓았답니다. 그래 오자마자 아주 어린애 취급을 했버렸던 겁니다. 그 스님이. 그러면서 저 후원에 넣어 가지고는 쌀이나 씻으라고 하고, 채소 준비나 하라고 했던 겁니다. 아 몇 일간 하니까 죽겠더라내요. 그렇거나 말거나 어쨌든 여기 와서 내가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그냥 참고 견딘 거예요. 그래 그 스님도 처음에는 과하게 아주 천하게 다루다가 서서히 이끌어주는 거였어요. 그런데도 한철만 하면 되겠더라는 거예요.


그래, 수계를 해서 선방에 왔는데 한 철 내내 망상만 피운 거예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옆에 같이 앉았던 어떤 젊은 스님인데 그 분은 국민학교 나왔지, 뭐 말 같은 것 하는 것은 참 못하는 분이라, 그런데 행은 밝아요. 공부하는 것 보면 그 스님은 국민학교 졸업하신 분은 대학원생 비슷하게 참 잘하고, 비유를 하면, 자기는 유치원생밖에 안 되는 거라. 거기에서 인제 발심을 하는 거예요. 아주 좀 지극하게 했던 겁니다.


한 철만, 석 달만 하면 될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3년을 해도 안 되는 거라. 그러니 5년 간 하고는 내려가겠다고 했던 거라, 자기 스님한테. 스님이 오라고 하더니 막 대판 욕을 하듯이 법문을 해서 공부를 좀 시켰답니다. 그 뒤에 나름대로 애써도 자기 딴에는 좀 한다고 했는데도 잘 안되더란 겁니다.


하루는 하도 괴로워서, 몸은 아프지 참 졸음은 오지, 세속의 친구들은 어디 무슨 판사 생활을 하느니, 뭘 하느니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아 자기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 보통 괴로운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죽을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 그 날 어떤 약방에 가서 키니넨가 그걸 사다가, 한 30알을 샀답니다. 그 토굴에 와서 그날 저녁에는 밥을 실컷 먹었답니다. 먹고는 실컷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키니네를 막 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도반(道伴)이 오더랍니다, 잘 아는 친구분이. 와가지곤 보니까 아 거 약이 있거든요. 그 분이 눈치를 차린 겁니다. 그냥 그 스님을 발로 막 차버렸습니다. 너 같은 놈이 아무개 대학 다닌 사람이냐고 하면서 막 욕을 하면서 나가자고 멱살을 쥐고 나갔다는 거래요. 마침 큰 상당히 큰 언덕이 있는데 그냥 밀었던 거라. 저만큼 떨어졌는데 팔 다리는 이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겁니다. 떨어지면서 나름대로 느끼고, 땅에 완전히 떨어져서 '아! 저 스님이 날 참으로 위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내요. 그때부터 공부를 참으로 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불과 한 5일정도 하니까 거의 자기 만족의 단계까지 오더랍니다. 이 발심(發心)이 문제예요.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예요.


그런가 하면 비슷한 얘기입니다만, 유명한 암도 스님이라고 있었어요, 옛날에. 그 암도 스님이, 그 스님도 참 하다가 하다가 안되니까 하루는 저 중국에 가면 주강이라는 강이 있답니다. 주강에 막 빠지려고 하는데 보트를 타고 막 가다가 막 빠지려고 하는데 노 젖는 사공이 - 사공이 선지식이라, 아 보니까 막 빠지려고 하거든요 - 뒤로 확 잡아 제치면서 "수좌가, 공부하다가 그런 마음을 내는 못난 수좌 같은 그런 수좌는 죽으려면 차라리 저 산 속에 가서 죽을 것이지 왜 여기에 와서 나 사공 노릇 하는데 말썽 일어나게 여기서 죽으려고 하느냐?"고 가라고 막 호통을 쳤던 겁니다. 가기 싫거든 여기서 참으로 해봐라. 그러면서 간곡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되게 쪼아버렸던 거예요. 그랬더니 바로 되더라는 겁니다. 불과 3시간만에 깨친 거예요. 30년 가량 하다가 그렇게 안되던 공부인데 불과 3시간만에 깨친 것이지요. 아까 그 스님은 5일만에 나름대로 그 대단한 경지까지 올라가고요. 이 공부는 발심이 문제예요. 발심. 참으로 하고 싶어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공부 안 된다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분은 우선 내가 과연 이 공부를 내가 정말 하고 싶은지 한번 반문해보세요. 자기를 하나 하나 점검해봐요. 이 공부는 참으로 하고 싶은 분한테는 의외로 바로 들어갑니다. 그런가 하면 자, 발심도 안되고, 하려는 의욕도 없고, 그런가 하면 근기도 약하고, 그런 분들은 미적지근한 그런 공부를 하는 분들은 백 날이 가고, 천 일이 가고, 만 일이 가도 별수 없어요. 물론 나름대로 하는 것만큼 이득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친다든가 참으로 큰소리치기는 좀 어려워요.


이 공부는 자기를 완성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화두 자체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좀 잘 알아서 내 장점이 뭐고 단점이 뭔지, 장점은 더 보완하고 더 좋게 해야되겠지만, 단점이나 못난 점이나 부족한 점이나 어리석은 점이 있거든 하나하나 고쳐나가세요.


화두가 된다는 것은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내 자신의 여러 가지가 그만큼 하나하나 갖추어져야 돼요. 그래야 드디어 화두라는 꽃이 피어요. 흔히 그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고 별 짓을 다하고 도둑질을 해요. 화두만 되면 된다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없잖아 있어요. 도둑질이나 하는 분이 어찌 부처님이 되겠어요. 화두가 된다는 것은 부처가 가깝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예사롭게 생각지 마세요. 고쳐나가고 좋게나가고, 그래서 자기를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갖추어나가요. 즉 완성되게 해요.


화두는 자기를 완성하는 한 방법입니다. 길입니다. 행동을 개차반인데 화두가 되고, 말하는 것 보면 어린애만도 못한데 견성하겠어요? 절대 못합니다. 특히 그 율장에 나오는 그런 부처님 모습을, 그런 그 말씀들을 즉, 오계면 오계 십계면 십계 사십팔계면 사십팔계 다 그대로 지킬 순 없지만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세요.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부단히 몸부림을 좀 치시고요. 그래야 화두라는 꽃이 드디어 피어요. 즉 그만큼 자기가 완성이 됩니다.


어쨌든 화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적으로 수승하다는 거예요. 즉 부처님이 가깝다는 겁니다. 가까워지려면 안팎으로 제대로 갖추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 아무리, 예를 들어서, 집에 아이들한테도 욕하지 마세요. 내 아들이니까 내 몸에서 난 놈이니까 마음대로 욕도 하고 이놈 저놈도 하는데 그 아들도 부처님처럼 생각해요. 매일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돈도 안 벌어오는 그런 남편이라도 부처님처럼 생각할 정도로요. 처사님들이 좀 잘 살면 그 집의 보살님들이 좀 부실하고 살림을 좀 잘못하고 문제가 있는 분들이라도 남편이 잘 살면 자연적으로 남편을 따르게 되고, 보살님이 잘 살면 남편도 자연적으로 보살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조그마한 향을 하나 피우고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의 아파트에서요. 향을 피우고 있는데, 그 향냄새가 보잘것없는 그런 가는 향이라도 계속 향을 피우면 그 냄새가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그런 향이지만 차츰차츰 한 방을 채우더니 다른 방까지 온 아파트가 향냄새로 가득하게 될 거예요. 아주 보잘것없는 향이지만 오랫동안 피우면 자연적으로 온 아파트 전체가 향냄새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파트에 사는 분은 누구나 향냄새를 맡기 싫어도 자연적으로 향이 온 몸에 물씬하게 배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그런 그 향내로 물씬하게 베인 그런 옷을 입고 나가면 친구들이 보면 '아이고 너 향냄새 좋다!' 향냄새 싫어할 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좋아하고 칭찬을 할 겁니다.


그렇듯이 향을 피우듯이 한 분이 거룩하게 살고, 훌륭하게 살고, 좋은 모습으로 살면 그 좋은 모습이, 그 훌륭한 모습이 온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어 자연적으로 식구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술만 마시고 큰소리만 치는 그런 남편도 아내가 곱게 사시면 아내를 감히 어쩔 수 없을 거예요. 한때는 마음대로 '야, 자'하고 큰소리 땅땅 치다가도 말이 안나올 겁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술도 좀 안마시게 되고 차츰 차츰 아내를 안 닮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들도 예를 들어서 공부도 잘 안하고 말썽만 피우던 그런 아들도 어머니가 곱게 자라고 곱게 사시고 모범적으로 훌륭하게 좋은 모습을 보이며 살면, 아이한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런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 아이가 말썽 부리라 해도 안 부릴 겁니다. 나쁜 아이, 문제 아이가 되라고 해도 안 될 겁니다. 결국은 한 사람으로 인해서 남편이 좋아지고 아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고 그 외에 온 식구가 향냄새가 가득하듯이 좋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좀 안정된 생활에 화두를 들면 의외로 쉽고 빨라요. 어쨌든 생활에 바로 직결이 될 수 있는 그런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불교인이 된 것이, 신도가 된 것이 참 보람있고 참으로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신이 되도록 책만 보고 이론적으로 알 것만 아니라 반드시 실제로 행동을 하세요. 음식 만드는 데도 그렇고, 빨래하는 데도 그렇고, 남편들 같으면 직장 생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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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님의 댓글

김종진 작성일

간사합니다.큰스님~